[220호 사설] 민주주의의 지난함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의무교육을 받을 시절에는 학급 임원들을 뽑는 선거 기간이 매우 짧았다. 학기 초에 반장, 부반장, 부장들을 선출한다며 후보가 된 아이들은 “내가 반장이 되면~을 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우며 5분도 채 안 되는 선거 유세를 했다. 서너 명의 반장 후보들의“뽑아 주면 열심히 하겠다”는 똑같은 말을 들으며 나는 누구를 뽑을까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득표수가 제일 많은 아이가 반장이 되고 그 다음에 많은 아이가 부반장이 되고, 부장들은 선생님이 정해주었다. 후보 등록, 선거 유세, 선거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이뤄졌다. 학급 반장을 선출하는 일은 그래서 형식적이었고, 번거로웠으며, 의미가 없었다.

우연히 민주주의에 대해 재고할 기회가 생겼다. 2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사업계획안, 예산안, 운영규칙을 가결하는데 5시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거의 모든 안건에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고, 이를 다수결로 결정하는 데 그만큼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부결된 안건은 다음 회의로 이월됐다. 고작  7페이지짜리 계획안을 통과시키는 것이 이렇게도 지난(持難)한 일인지. 사실 내 속마음은 이랬다. 제발 좀 그만들 하시라. 그게 뭘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고 개개인의 의견을 듣고, 모두 반영하려고 노력하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의결하려고 하시냐. 이제 그만 대충 끝내시자. 5시간의 논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민주적이라는 것은 ‘일을 얼른 처리하지 아니하고 질질 끌며 미루기만 하다’라는 뜻의‘지난하다’라는 단어와 참으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언제 민주주의를 배웠던가. 상명하복의 질서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동하는 대한민국에서 나는 언제 민주주의를 배웠는가 자문해 보았다. 내게 주어진 권력을 스스로 행사해 본 적이 언제던가? 선생님 말씀 잘 듣는 착한 어린이, 시키는 일 잘하는 후배, 불평하지 않는 직원이었던 나는 그것이 올바르게 사는 일이라고 믿었었다. 요즘에야 비로소 조금씩 민주주의를 배워가고있다. 지위와 상관없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모든 것을 공개하여 같이 의견을 나누고, 같이 해결책을 논의하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누군가 명령하고 나는 복종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을 가진 각 개인의 의견을 종합하고, 각 개인이 납득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아내는 과정은 그래서 지난(至難)하다.

나뿐만 아니라 대다수가 이제야 민주주의를 배워가고 있을 것이다. 이 지난한 시간을 견디고 나면 대한민국에도 진정한 민주주의가 찾아오기를 기대해 본다.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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