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호 특강취재: 열린연단,〈세계화, 다문화 시대의 윤리〉] 공존하는 법 생각하기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은 작년 3월 5일부터 ‘윤리와 인간의 삶’이라는 윤리강연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프로그램은 네이버문화재단이 지원하는 ‘문화의 안과 밖’ 강연기획 중 세 번째 강연 시리즈로, 7가지 소주제로 총 50회가 진행됐다. 본 강연은 그 마지막 순서이며 지난 3월 11일 안국동 안국빌딩에서 김우창 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세계화, 다문화 시대의 윤리’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진행했다.

크고 작은 테두리들

‘세계화’는 오늘날 너무도 익숙한 단어이다. 자원과 물질, 재료와 상품과 사람들의 이동으로 나타나는 세계화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 의해 더욱 가속화되어 소득 불평등 같은 여러 가지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인류 전체를 포괄하는 보편적 이념을 확산시킨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러한 아이러니 속에, 다 함께 공존해야 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삶의 조건이 된다. 이를 위해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이 생겨난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여러 다른 문화적 이해를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가 돼가는 세계에서 살 수 있는가이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각자의 서로 다른 문화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사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동시에 제기된다.

작년 11월 독일 베를린의 세계 문화의 집에서 세계문학상을 받은 제이디 스미스(Zadie Smith)는 영국의 다문화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자메이카 여성과 영국 남성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으로 북런던 지역에서 성장했다. 그곳은 파키스탄 출신의 회교도, 인도의 힌두계인, 라트비아에서 온 유태인, 영국인들이 함께 사는 곳이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도 다문화적 배경을 담고 있다. 그녀의 첫 소설『흰 이빨(White Teeth)』에는 북런던의 다문화적, 다인종적 인간들이 화목하게 살고 있는 모습이 잘 드러난다. 여기에 묘사되어 있는 것은 흑인, 파키스탄인과 백인이 서로 우정을 다지고 도와가며 사는 일상적 삶이다.

강연자는 스미스의 수상 연설을 소개한다. 연설의 주 내용은 다문화 사회에서의 삶에 대한 것이었다. 그녀는 북런던에서 자신의 삶은 ‘그저 삶’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다인종, 다문화 마을에서 살았지만, 그에 따라 역사와 정치가 끼어드는 삶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런 환경을 작품에 다룬 것도 다문화주의를 정치화 하려는 의도는 아니라 밝힌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 피부색, 계급, 성품 등을 개의치 않고 살았다. 아버지가 스미스의 어머니와 결혼한 것은 “이본느”라는 여자와 결혼한 것이지 흑인 여자와 결혼한 것이 아니었다. 스미스의 수상 연설에서 회상되는 삶에는 다문화를 허용하는 정치적 배경이 있다.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상대를 그 사람 자체로 볼 수 있는 태도가 깔려있다.

개인은 크고 작은 테두리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가장 큰 테두리는 세계이다. 그 다음의 중간 테두리 중 중요한 것은, 지금의 시점에서는 국가다. 그 다음으로는 개인 삶의 작은 테두리다. 본 강연에서 고려하는 것은 중간 테두리-국가와 작은 테두리-나와 타자이다. 세계화와 문화의 크고 작은 테두리에 대한 문제는 한 가지 답으로 해결할 수 없다. 비교적 큰 테두리의 문제는 정치적 해결을 요구한다. 제도로서 어떤 신앙 혹은 문화적 신념을 두고 싸우지 않도록 정치적 결정을 하는 것이다. 보다 작은 테두리의 이해는 복잡한 문화변증법을 필요로 한다. 이는 서로 부딪히면서 조화 혹은 타협을 통해 다양하면서도 하나의 테두리를 가진 것으로 조정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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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창 강연자가 다문화 시대의 윤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작은 테두리 속 부딪힘

문화의 변증법 안에서는 감정적 교환이 중요하다. 감정적 교환은 보다 일상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인간관계의 긴장을 완화하거나 유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성으로 정제되어 문화의 양식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형태로 정형화되고 문화적 관습이 된 인간의 상호관계 양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강연자는 우리나라 유교 의례(儀禮)가 가진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의례에는 상대방의 의례적인 위치를 인정하는 위계가 있다. 그러면서 상대방에게 존경을 표현하는 내용에는 감정이 들어있다.

한편 의례에 대해서는 겉으로만 번드레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부정적 인식도 있다. 그러나 강연자는 외면적으로 표현되는 예의 공연적(公演的), 수행적 특성에 주목한다. 내적인 윤리의식과 외면적 행동이 진정으로 일치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지만, 어쨌든 인간관계에서 상호작용은 무엇인가를 몸으로 또는 공식적인 말로 표현하며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공자에 따르면 사람들은 여러 가지 감정으로 인해 끊임없이 상호충돌하게 되어있는데, 그러한 감정들이 인간관계를 혼란스러운 것이 되게 한다. 강연자는 이러한 것들을 질서정연하고 세련된 형식에 가두어두려는 것이 의례라고 말한다. 유교의 윤리 규범은 예(禮)에 집약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 또는 작은 공동체에서 화합의 원리로서 예의 바른 행동은 중요하다. 보통의 일상에도 이러한 예의의 형식이 개입한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인사를 배우고 공손한 말씨로 감사를 표현하면서 보다 단정한 행동양식을 익힌다. 이를 통해 상대를 동등한 인격으로 대한다는 것이 외면적 행동에 표현된다. 그리고 이러한 외면적 표현도 결국엔 내면적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감정 교환양식의 발전은 인간 상호간의 갈등과 적대 감정을 완화하는 데 기여하여, 문화가 하나로 되고 여러 배경 사람들이 하나로 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행동양식은 포용적 인간을 만들어내면서도, 그 질서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차별의 지표가 된다. 그래서 문명화가 행동 양식의 명증화라고 한다면, 그것은 대체로 권력과 사회적 위계질서의 명증화를 병행한다. 강연자는 의례는 자연스러운 행동의 양식화에서 출발하지만, 한국의 경우 위계질서가 특히 강조된다고 말한다. 유교에서 수양을 통해 높은 사람이 되지 못하면 ‘저놈은 아무것도 모르는 놈’, ‘인간이 되지 못한 금수’라고 보는 편견이 그것이다.

함께하기 위한 큰 테두리

그렇기 때문에 문화가 꼭 좋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의심은 보다 많은 것을 포용할 수 있는 큰 틀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한 국경의 테두리를 전제로 두고 생각하면, 문화와 정치의 분리를 이야기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독일 이민자를 독일 사회가 어떻게 흡수할 것인가를 논하면서, 이민자들이 독일 국민이 되는 데는 정치적으로 민주주의 체제에 찬성하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하나의 문화를 이루어 같이 살자는 것이 문화적 통일이지만, 그것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어서 쉽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오랜 시간이 지나 이민자들의 영향으로 독일이 변화하는 것은 받아들여야한다고 말하면서도, 현시점에서는 문화적 논의보다는 다양함을 수용하는 정치체제를 분명히 하는 것이 우선이라 했다.

그렇다면 정치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이는 여러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체제 속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적합한 것이 민주주의 체제다. 민주주의 체제는 종교적·문화적 차이를 이유로 싸우는 것을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독재 체제는 하나의 문화만 배우고, 그것에 근거해서 이야기하고, 그것만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한 국가의 테두리에서 문화적 동화를 주장하는 것은 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일이 된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독일에 오는 이민자들이 해야 하는 서약 중 하나가 ‘나는 사회에 하나의 이론, 하나의 문화만 있는 것을 찬성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문화를 인정할 것을 약속받는 것이다. 물론 독일인도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정치적 체제에 찬성하면서 감정적·정신적 측면에서도 화합할 수 있는 근거가 있으려면 문화가 갖추어져야 한다. 그래서 큰 테두리의 접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낙관과 비관 사이

최근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과 발언들로 인해 다문화주의가 실패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쉽게 지울 수 없다. 게다가 민주주의 체제라는 국가의 큰 테두리가 크게 흔들렸던 우리의 요즘을 돌아보면, 우리는 다문화주의라는 주제를 떠올리기도 전에 지쳐버릴 수 있다. 다시 제이디 스미스의 수상 연설로 돌아와 그 제목을 보면 조금 힘이 날지 모른다. 연설의 제목은‘낙관주의와 비관에 관하여’다. 역사는 낙관과 비관의 중간에 있으면서 조금씩은, 누진적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의미다.

열린연단에서는 4월 1일부터‘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이라는 주제로 총 34회의 강연 프로그램이 새로 시작된다. 시대마다 새로운 도약을 가능케 한 과학자와 철학자 그리고 종교가와 문학가 34인을 선정하여 그들의 사유를 조명하고자 기획됐다. 강연은 주 1회 열리며 열린연단 홈페이지(openlectures.naver.com)를 통해 일정 확인과 사전 참석 신청이 가능하다.

고 희 영 | khyhy825@khu.ac.kr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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