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호 인문학술: 멜랑콜리] 중세의 멜랑콜리와 예술: 정현종 시인의「낮술」과 함께

멜랑콜리는 본래 ‘검은 담즙’을 많이 가진 우울 체질을 뜻한다.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현대의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멜랑콜리는 서양지성사에서 철학과 예술을 설명하는 중요 키워드 중 하나이다. 그러나 중세의 멜랑콜리는 ‘나태’,  ‘게으름’을 의미하는 ‘아케디아(acedia)’로 불리며 기독교 문화권 내에서 죄악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우리의 오늘날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게으름이 죄악으로 여겨지고 있지는 않은가. 이에 본보는 중세의 멜랑콜리가 가지는 진정한 의미를 살펴 보고, 현대인의 삶에 시사하는 바를 찾아보고자 한다.

아케디아

아케디아 누구나 할 것 없이 현대인들은 바쁘다. 바쁜 것은 더 이상 웃음거리가 아니라 최고의 자랑거리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에서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런데 마냥 바쁘기는 한데, 왜 바쁜지, 왜 그래야만 하는지는 모른다. 이것이 문제다. 이 무지와 맹목은 사후(事後) 결과가 아니라 원인에 가깝다. 너무 바빠 이유를 미처 생각해 볼 틈이 없기도 하겠지만, 대개 무식해야만 맘껏 바쁠 수 있다. 경주마의 다리에서 전속력을 뽑아내려고 말의 두 눈을 가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맹목을 강요당한 가련한 동물이 되지 않으려면, 바쁜 이유를 묻지 않 을 수 없다. ‘나는 왜 바쁠까?’ 이 물음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하는 실존적인 물음이자, 속도 경쟁에 목맨 시대의 절실한 화두이기도 하다. 허나 서둘러 대답해서는 안 된다.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조바심을 내서도 안 된다. 또다시 바빠지기 때문이다. 이 화두의 응답에는 여유가 필요하다. 낮술 한잔 마실 여유, 꼭 이만큼의 여유면 된다.

나는『멜랑콜리아: 서양문화의 근원적 파토스』(문학 동네, 2014)라는 책을 출간한 바 있다. 이 책은 서양문화 를 읽어내는 키워드로서 멜랑콜리를 다루고 있는데, 서양지성사 2,500년 동안 면면히 이어져 온 멜랑콜리 담론을 (비교적) 촘촘하게 담고 있다. 여기에서 멜랑콜리 담론이란 (의학 담론을 일부 포함하기도 하지만) ‘비범한 예술가, 철학자는 모두 멜랑콜리 기질을 가진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언명에서 출발하여, 온갖 부침을 겪으면서도 지금까지 생명력 있게 살아남은 인문학적 담론을 뜻한다. 지금 활발히 활동 중인 아감벤, 버틀러, 지젝 같은 철학자들도 모두 이 담론에 사상적 젖줄을 대고 있다. 그런데 암흑시대로 알려진 중세의 문화와 철학에 는 과문한 탓에, 그 책에서 중세의 멜랑콜리를 깊이 있게 다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최근 독일 중세철학자, 요셉 피퍼(Josef Pieper)의『여가와 경신Muße und Kult』(김진태 옮김, 가톨릭대학출판부, 2011)을 읽고 배운 바가 컸다.

서양지성사에서 멜랑콜리(본래 ‘검은 담즙’을 많이 가진 우울 체질을 뜻함)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언명 덕분에 대체적으로 찬미된 편이지만, 두 번의 큰 위기를 겪는다. 한 번은 중세이고, 다른 한 번은 계몽주의 시기다. 전자는 종교적인 이유에서, 후자는 합리적인 이유에서 멜랑콜리를 배척했다. 중세의 멜랑콜리는 ‘아케디아(acedia)’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이 용어는 통상 나태, 게으름으로 번역된다. 중세인들은 깊은 우울에 빠진 사람들을 신에 대한 경배에 게으른 자, 혹은 ‘한 낮의 악령’(Noonday Demon)에 시달리는 자로 보았다. 아케디아는 기독교 문화권 내에서 일곱 가지 대죄(음욕, 교만, 분노, 질투, 식탐, 인색, 나태)에 속할 만큼 큰 죄로 여겨졌고, 아케디아의 주된 먹잇감은 은둔하며 금욕생활을 하던 수도사들이었다. 용맹정진은커녕 벌건 대낮에도 초점 잃은 눈으로 턱을 괴고 앉은 게으름뱅이 수도사들〔그림 참조〕. 그런데 피퍼에 따르면, 그 시대 게으름의 반대말은 노동이 아니라, ‘여가’다. 진짜 게으름뱅이는 노동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여가도 없이 바삐 지내는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중세를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는 현대인들이 놓치기 쉬운 아케디아의 핵심 의미소다. 그리고 이 점이야말로 현대의 암흑과 콘트라스트를 이루는 중세의 빛이다.

▲헤이르트헨 토트 신트 얀스(Geertgen tot Sint Jans), <인적 없는 곳의 세례자 요하네스(John the Baptist in the Wilderness)>, 1485~90년경, 42 × 28 cm, 베를린 국립박물관. 중세 기독교 문화에서 멜랑콜리는 ‘아케디아’로 불렸다. 이 말은 어원적으로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 상태’, 즉 무의미와 권태, 무감각과 나태에 깊이 빠진 상태를 말한다. 특히 금욕생활을 하던 수도자들을 괴롭혔던 질병으로 통했다.

사랑의 게으름, 바쁜 게으름

중세의 여가는 먼저 기독교적인 개념으로 새겨야 한다. 중세에 여가란 신을 경배하는 시간을 가리킨다. 현대인에게 여가란 통상적으로 노동하지 않고 쉬는 시간, 노동을 위해 재충전하는 시간으로 이해되는 반면, 중세인에게는 이런 무-노동 의 (노동을 부정하지만 결국 노동에 귀속되는) 시간이 아니라, 신에게 다가간 시간, 곧 자기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현대인의 여가가 노동에 종속된 시간이라면, 중세인의 여가는 자기의 근원에 종속된 시간이다. 전자가 생의 ‘필 요’에 매인 시간이라면, 후자는 생의 ‘의미’를 찾는 시간이다. 요컨대 중세인의 여가란 본래의 자기를 찾는 과정에서 자기의 존재근거인 신에게로 향하는 시간이다. 피퍼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기로 하자.

“나태에 대한 형이상학적-신학적 개념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고유한 존재에 궁극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것, 인간이 온갖 역동적 활동을 하면서도 그 이면에서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 중세의 표현대로, 인간이 자기 자신 안에 살고 있는 신적인 선 과 대면할 때 슬픔에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한다. … 아케디아의 반대 개념을 이루는 것은 평일에 직업 활동을 하는 노동 정신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세계 전체를, 신을 기쁜 마음으로 긍정하고 수락하는 것, 말하자면 사랑이다.”

-『여가와 경신Muße und Kult』, 64~66쪽

죽도록 일하고 부지런히 무언가를 하였건만, 남는 것은 진한 공허 내지 슬픔뿐인 경우가 있다. 아니 우리네 삶에서 그런 경우가 허다하다. 피퍼에 따르면, 그것은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과 작위에서 자기가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이 소외는 자기를 둘러싼 세계, 자기의 궁극적 고향인 신에게까지 확장된다. 바쁘게 처리한 모든 일들이 자기를 긍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와 세계와 신을 모독하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에, 중세인들은 아케디아를 대죄의 항목에 집어넣었던 것이다.

이런 중세적 생각에는 종교적인 색깔을 지워도 의미 심장하게 남는 것이 있다. 노동을 게을리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쁜 것은 사랑에 소홀한 것이다. 노동의 의미는 궁극적으로 사랑에서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랑에 게으른 자, 지금 시대에도 대역죄인임에 분명하다. 자신이든 타인이든, 그이를 생각하고 사랑할 만한 여유가 없다면, 그것은 삶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신호다. 사랑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다면, 그래서 바쁘다는 핑계를 입에 달고 다닐 정도라면, 그건 삶이 위태롭다는 증후다. 결국 아케디아는 ‘사랑의 게으름’이다. (정작 중요한) 사랑을 외면한 마음은 (막상 외면하려니) 불안하기만 하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면, 영혼은 바시랑거린다. 바시랑대는 영혼의 일상은 바쁜 행태로 나타난다. 삶의 빠른 속도에 몸을 실어서 불안을 잊는다. 이런 까닭에 아케디아는 ‘바쁜 게으름’의 모습으로 현상한다. 그렇다면 일에 미쳐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그것을 신봉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현대인들은 아케디아라는 대죄 혹은 고약한 질병에 빠져 든 셈이다. 바쁜 삶이 능동적이고 활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세련된 환상 때문에, 아케디아는 암처럼 빠르고 비밀스럽게 사회 전반으로 전이된다. 중세의 지혜를 상속받지 못 한 현대인은 이 표리부동한 게으름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 에 없다.

「낮술」마시는 시간

학술 이론 소개는 여기까지만 하자. 중세의 아케디아를 소개한답시고, 토마스 아퀴나스의『신학대전』등을 뒤적이며 번잡한 개념들이나 난해한 이론들의 빠른 나열을 통해서 ‘생각의 게으름’을 감추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이미 그런 학술적 아케디아에 충분히 기만당해왔다. 이 시대 학자들도 예외없이 중증 아케디아에 걸린 사람들이다. 요즘 학자들은 (지나치게 전문화·세분화된) 보잘 것 없는 연구 주제에 매여 숱한 밤을 하얗게 새우며 정신없이 지내고 있다. 진리가 아니라 연구 업적 경쟁에 코피를 쏟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론 개념을 처음 정초했던 아리스토텔레스마저『형이상학』(982b 22이하) 에서 “편하고 여유 있는” 상태가 이론 작업의 필수 조건이라 고 꼽았다. 유용성에조차 얽매이지 않는, 여유 있는 자유 시간이 창의적인 이론 작업의 필수 조건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 기준에서 보자면, 요즘 학자들은 이론 작업을 하는 게 아니라 실은 단순 노동을 반복하는 셈이다. 그것을 숨기려고, 한결 더 난해하고 근엄한 표정을 짓기에 바쁘다. 학자의 일상적 삶도 맹목적으로 바쁘기는 매한가지다. 느리고 긴 호흡의 시 한편을 읽어보자. 정현종 시인의 초기 작품,  「낮술」이다. 이 글의 문맥상, 낮술은 우선 여유 있는 시간을 뜻한다. 실제로 낮술을 마시지는 않더라도, 한낮에 시 한 편의 여유를 즐길 수는 있다. 게다가 시 제목까지 낮술이니까, 현대인의 아케디아를 성찰하기에 적격이다. (참고로, 시인의 「시간의 게으름」이란 작품은 이 글의 내용과 일맥상통하다) 시를 포함하여 예술은 술과 유사하다. 예술은 감상자를 도취시켜 다른 세계로 이전시키는 매체이다. 작품이 술이라면, 감상은 ‘마시는 행위’다. 잠시「낮술」을 음미해보자. 혹시 아는가, 이런 음주가 덤으로 창의적인 이론 생산의 배양액이 되 어줄지. 아니어도 전혀 상관없지만, 무턱대고 성급하게 아니 라고 단정 짓지는 말자.

“하루여, 그대 시간의 작은 그릇이/아무리 일들로 가득 차 덜그럭거린다 해도/신성한 시간이여, 그대는 가혹하다/우리는 그대의 빈 그릇을/무엇으로든지 채워야 하느니./우리가 죽음으로 그대를 배부르게 할 때까지/죽음이 혹은 그대를 더 배고프게 할 때까지/신성한 시간이여/간지럽고 육중한 그대의 손길./나는 오늘 낮의 고비를 넘어가다가/낮술 마신 그 이쁜 녀석을 보았다/거울인 내 얼굴에 비친 그대 시간의 얼굴/시간이여,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그대,/낮의 꼭대기에 있는 태양처럼/비로소 낮의 꼭대기에 올라가 붉고 뜨겁게/취해서 나부끼는 그대의 얼굴은/오오 내 가슴을 미어지게 했고/내 골 수의 모든 마디들을 시큰하게 했다/낮술로 붉어진/아, 새로 칠한 뺑끼처럼 빛나는 얼굴,/밤에는 깊은 꿈을 꾸 고/낮에는 빨리 취하는 낮술을 마시리라/그대,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시간이여.”

-「낮술」전문

시가 조금 어렵고, 잘 안 읽히는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삶에 여유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감상은 기본적 으로 도취다. 감동은 도취된 울렁거림이다. 작품 감상이 어렵다는 것은 결국 도취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뜻이다. 마음 깊숙이 시가 들어올 수 있으려면, 독자의 마음에 넉넉히 빈 공간 이 필요하다. 그런데 한가한 시간을 가져야만 마음이 비워진다. 시가 읽히지 않는다면, 바쁜 게으름에 중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중독도 헤어나기 무척 어렵다. 바쁘게 돌아가는 무거운 삶의 터빈을 억지로라도 들어내야 한다. 그런데 방법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 이열치열(以熱治熱)처럼 바쁜 게으름을 또 다른 게으름으로 다스리는 방법이다. 읽히지도 않 는 시 한편을 붙들고서, 느긋하고 게으르게 시간을 보내는 방 법이다.

시간의 얼굴

시간의 얼굴 이 시는 “하루여”라는 말로 시작한다. 일상의 하루다. 다람 쥐 쳇바퀴 돌아가듯 굴러가는 일상의 하루다. 일상의 하루는 볼품없다. 잡동사니 같은 일들로 빼곡히 차 있다. 하루라는 작 은 그릇에는 이리저리 치이는 일들과 하고픈 일, 해야만 하는 일들로 덜그럭거린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아마도 죽기 전까지, 그런 하루들이 계속될 것이다. 시간은 그 잡다한 일상사를 먹어치운다. 소소한 일들로 배를 채운다. 그럼에도 항상 배가 고프다. 일상의 삶을 집어삼키는 시간은 가혹하다. 그런 데 시인은 그 일상의 하루를 “신성한 시간”이라고 부른다. 이 유는 아직 불분명하다. 막무가내로 자식들을 삼켰던 시간의 신, 크로노스를 연상했기 때문일까?

시인은 하루의 신성한 시간을 “간지럽고 육중한 그대의 손 길”이라 말한다. 시간은 간지럽다. 아이를 간질이면 아이는 발 작적으로 웃다가 이내 울음을 터트린다. 시간은 일상의 삶을 간지럽게 한다. 장난치듯 삶을 간질인다. 어떤 때는 웃게도 하고 다른 때는 울게도 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시간을 어린 아이라고 말했다. 천진한 아이의 이유 없는 장난 같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시간이 가볍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시간은 육중하다. 과거, 현재, 미래로 직조된 시간의 그물망에서 과거와 미래는 무한히 펼쳐진 데에다, 그만큼 현재의 깊이도 무한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방문객을 환대해야 한다고 말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그는/그 의 과거와/현재와/그리고/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 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방문객」중

시간은 아이의 장난처럼 가볍기도, 무한을 적재한 수레처럼 육중하기도 하다. 우리는 이런 일상의 시간을 살고 있다. 그런데 일상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는 일이 발생했다. 시적 화자가 낮술을 마신 것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낮술은 감히 범해서는 안 되는 금기 사항이다. 그 금기는 이 시대의 무조건적인 정언명령이다. 부지런히 노동하고 공부해야 할 대낮부터 술을 먹는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시적 화자는 낮술을 마셨다. (낮술 마신 누군가를 만났던 사건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화자가 직접 마셨다고 해석하자) 낮술을 마신 이유는 분명치 않다. 실직을 해서든 사회·정치적인 배제나 소외 때문이든, 아무래도 좋다. 어떤 이유에서든 낮술을 통해 ‘신성한’ 일상의 규칙을 깼다는 점이 중요하다. 한두 잔도 아니고, 거나하게 마셨나보다. 얼굴빛은 붉어지고 취기가 온몸을 흐른다. 그때 시적 화자는 (공교롭게도) 거 울을 들여다본다. 거울 속에 비친 술 취한 자기 모습을 본다. 동시에 자기 모습에 비친 시간의 모습까지 보게 된다. “거울인 내 얼굴에 비친 그대 시간의 얼굴”을 본 것이다. 이유도 모른 채 바삐 살아온 시간을 직시한 것이다. 아마 술기운이 아니었 으면, 그것도 한낮의 금기 위반이 아니었으면,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지나쳤을 것이다. 외면했을 것이다. 자신의 얼굴이 시간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시인은 낮술을 마시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비춰본다. 그 속에서 시간을 직시한다. 일상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 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이렇게 외친다. “그대,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시간이여.” 취하지 않은 시간은 정체된 시간이다. 이미 보았듯이, 취하지 않은 시간은 바쁜 일상의 시간이다. 바쁜 시간을 보냈다면, 시간이 단지 빨리 흘러간 게 아닐까? 하지만 일상의 수레바퀴 안에서는 아무리 뛰어도 제자리다. 여울목의 맴돌이처럼, 바삐 돌아도 언제나 그 자리다. 시간이 막혀 있기 때문이다. 자기를 둘러싼 상황도 자기 자신도 전혀 변하지 않는 시간이 바로 꽉 막힌 시간이다. 뭔가 (특히 자기가) 바뀌지 않으면, 시간은 멈춘다. 술기운이라도 빌려 자신을 바꿔야만, 시간은 흐른다.

물이 그렇듯, 시간도 흘러야 썩지 않는다. 트라우마는 내 삶 의 발목을 잡는 과거다. 흘러가지 않는 시간이다. 증오가 힘든 까닭은 그 대상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간이 멈출 때 생은 부패한다. 일상이 건강하려면, 분주하기만 한 일상을 떠나야 한다. 잠시나마 일상의 시간 고리를 끊어야 한다. 그런 까닭에 시인은 “밤에는 깊은 꿈을 꾸고/낮에는 빨리 취하는 낮술을 마시리라”고 노래한다. 꿈과 술은 일상의 엑소더스다. 그것들을 통해 여유로운 시간이 펼쳐진다. 술과 꿈으로 시간이 물들면, 일상의 시간은 “새로 칠한 뺑끼처럼 빛나는 얼굴”로 변용된다. 이것이야말로 ‘신성한’ 시간의 얼굴이다. “낮술 마신 그 이쁜” 얼굴이다.

예술가와 도취

낮술 먹는 시간을 통해서 일상의 바깥에서 일상을 들여다보는 일이 발생한다. 그때 잠시 시간의 얼굴, 즉 바쁜 게으름에 잃어버린 자기의 초상을 볼 수 있다. 이런 자기응시를 통해서 자기를 변신시킬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다. 자기가 변할 때, 비로소 시간은 다시 꿈틀대며 흘러간다. 생동(生動) 하는 이 시간은 시와 예술이 시작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정현 종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술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이지만, 취하는 일에 관한 얘기를 예술 창조의 공간에서 말하자면, 모든 창조적 정열은 취하는 데서 나온다. … 시(예술)의 자리에서 말하자면 시인은 각성에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날아라 버스야』중

여기에서 도취란 인사불성 상태가 아니라, ‘각성에의 도취’다. 이 도취는 평소에는 상상과 기억이 불가능했던 것들에 접근을 허락하면서 미감(美感:¨asthetisch)을 일깨운다. 미감에 홀리면, 존재의 풍요로움에 예민하게 감응하지 않고서는 못 배긴다. 무딘 일상에서 이런 감응을 기대하기 어렵다. 풍류와 진담이 허락되는 취중에서나 가능하다. 요컨대 예술가란 도취로써 바쁜 게으름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의 안팎 상황과 사물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바쁜 게으름에서 벗어났다 하더라도, 예술가는 여전히 게을러 보인다. 낮술이나 마시는 한량처럼, ‘한낮의 유령’에 시달리는 수도사처럼. 아리스토텔레스가 멜랑콜리커(비범한 예술가의 필요조건)를 포도주에 취한 자로 빗대어 설명한 것도 단순한 우연의 일치는 아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예술가를 상징 하는 목록에서 이솝 우화의 베짱이를 빠트릴 수는 없다.

김동규 / 연세대학교 강사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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