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호 영화비평: <컨택트 Arrival>(2016)] 경계를 허물고 나아가는 것에 대하여

이전의 작품들을 통해 증명되었듯이, 드니 빌뇌브는 서사 정보를 조절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감독이다. <그을린 사랑 Incendies>(2010)이 제한된 서사 정보를 하나씩 공개하는 것으로 전체 그림을 완성하는 일종의 퍼즐과도 같은 영화였으며, <프리즈너스 Prisoners>(2013)는 하나의 사건을 추적하는 두 인물에게 각기 다른 정보를 제공해 사건에서 계속 미끄러지는 주인공들을 보여주었던 작품이었다. <컨택트 Arrival>(2016)는 관객에게 전달되는 서사적 정보를 조절하는 감독의 능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동시에 정확히 구성된 편집의 능력까지 더해진 작품이다. 요컨대 드니 빌뇌브는 배우와 가까운 거리에 카메라를 설치하여 캐릭터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이나 미장센을 활용하는 방법보다 플롯의 구성력을 더 신뢰하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가 주로 롱쇼트를 사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숨어 있다. 관객에게 서사 정보를 전달하거나 숨기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이전까지 보여주었던 것과는 달리 특별한 무언가가 숨어 있다. 얼핏 보아서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난해해 보이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에게 줄곧 실체를 드러냈던 이 영화의 특별함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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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과 형식의 전략

 

어느 날 갑자기 외계의 비행체가 지구에 불시착하게 된다. 외계인이 지구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미국 정부는 언어학자인 루이스(에이미 아담스)와 물리학자 이안(제레미 레너)에게 도움을 청한다. 루이스에게는 군인들이 녹음한 외계인의 언어가, 이안에게는 현장에서 수집된 정보가 단서로 주어진다. 제한된 정보를 통해 외계인의 목적을 파악해야 하는 인물들의 처지는 이 영화를 바라보고 있는 관객들의 처지와 닮아 있다. 이것은 SF장르적 기대감을 무참히 무너지게 만드는 지점이며 서사를 지배하고자 하는 관객의 욕망을 배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신 영화는 관객들의 눈앞에 루이스의 기억을 반복적으로 호출한다. 이것은 영화의 오프닝이라 부를 수 있는 일련의 몽타주 시퀀스를 통해 제공된 것인데, 루이스와 딸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오프닝에서 제공된 서사 정보는‘루이스는 딸을 잃었다’라는 것인데, 이것은 갓 태 어난 딸을 행복하게 바라보는 루이스의 얼굴로 시작해 병으로 딸을 잃고 쓸쓸하게 걸어가는 뒷모습을 포착한 장면으로 끝이 난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요한 장치가 숨어 있다. 딸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시간적 순서와 그것을 설명하는 루이스의 독백이다. 이 장면의 순서는 선형적 시간의 순서를 따르고 있어서 관객들에게 하나의 강력한 설정을 성립하게 만든다. 요컨대 우리는 루이스가 딸을 잃고 슬퍼하는 것을 본 다음 외계의 비행체가 불시착한 사건을 보게 된 것이므로 딸을 잃은 어머니이자 언어학자가 조사하는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그것을 보완하듯이 영화는 비행체를 조사하는 장면 중간중간마다 몽타주 시퀀스를 통해 설정한 것들을 반복적으로 끼워 넣는다. 따라서 관객들은 초반에 설정한 것을 자연스럽게 활용할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해 영화 속에서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루이스와 딸의 장면들은 이미 등장한 것이기 때문에 즉, 순차적 편집에 의해 구성된 과거의 것이기 때문에 관객은 그것을 루이스의 트라우마라고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지점은 암호와도 같은 외계인의 언어를 풀어가는 루이스의 여정과도 동기화되기 때문에 트라우마의 반복이라는 관객의 가설은 한층 더 힘을 받는다.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 비행체 안에서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외계인과 만나게 되는데, 루이스는 이들에게 영어를 소개하면서 소통을 시도한다. ‘HUMAN’이라는 단어를 시작으로 의미와 문장 등을 알려주게 되고 이에 대답하듯 외계인은 하얀 안개 위에 먹물을 뿌려놓은 것처럼 검은색 원형 글자를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의 문자는 원형으로 되어 있는데다가 인간의 것처럼 단어로 구성된 문장이 아닌 원형 그 자체가 결합된 형태이기 때문에 루이스는 해독하는 데 번번이 벽에 부딪치고 만다. 그때마다 영화는 루이스의 딸을 편집으로 소환한다. 이때 소환된 루이스의 모습은 딸과 불편한 관계이거나 딸의 죽음을 슬퍼하는 모습들이다. 이 편집의 관습은 하나의 세트가 되어 영화 속에서 반복되기 때문에 가설은 계속적인 힘을 받게 된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는 지금까지 설정한 자신의 가설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리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언급한 것들이 영화의 편집과 서사의 흐름에 의해 쓰인 것이었다면, 다른 해석은 영화의 미장센과 숨겨놓았던 서사 정보에 의존하고 있다. 숨겨놓았던 서사라기보다 펼쳐놓았지만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루이스의 독백이다. 영화 초반에 등장한 “한사람의 인생을 정의하는 날들은 따로 있다”라는 말은 영화의 후반부와 조응하는 말이며, 루이스가 딸에게 언급하는 ‘회문(palindrome)’은 이 영화의 서사 구조를 지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컨택트>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내내 전시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컨택트>는 외계인의 침공으로부터 지구를 구한다는 SF의 흔한 장르적 관습을 따르는 영화가 아니라 영화가 말하는 사피어-워프 가설, 즉 사람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과 행동은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체계와 관련 있다는 것을 말하는 작품이다. 다시 말해 SF라는 장르적 외피를 둘러쓴 언어인류학에 관한 영화이다. 물론 <컨택트>가 말하는 사고의 전환은 외계인의 언어이다. 이것은 루이스의 직업이 언어학자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인류의 언어는 선형 구조를 취하고 있는데 루이스가 조사하는 외계인의 언어는 원형 구조를 취하고 있다. 루이스는 그들의 언어 체계를 이해하게 되면서 원인과 결과가 다른 선형적인 세계관 대신 외계인들의 사고방식을 따르게 된다. 그들의 세계관은 하나의 전체 과정으로 사건을 한 번에 인식하는 것이며 이것은 그들의 원형적인 언어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영화에서 루이스가 처음으로 딸의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이 외계인의 문자를 습득한 직후라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외계인의 문자를 분석하는 루이스의 모습과 물가에서 딸이 노는 장면이 교차되어 등장하는 이 시퀀스는 앞서 이야기한 편집 관습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며 몽타주 시퀀스가 먼저 제시되었기 때문에 회상 장면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순간은 루이스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미래의 순간에 불과하다. 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외계인과의 접촉순간을 기준으로 삼으면 몽타주 시퀀스를 비롯해 삽입되는 딸의 이미지는 미래의 것이다. 많은 이들이 말한 <컨택트>의 반전이 바로 이것이다. 과거의 것이라고 보였던 것들이 사실은 미래의 순간들인 것이다. 선형적 서사구조가 아닌 원형적 서사구조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반전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컨택트>는 이 구조를 영화 내내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외계인들의 비행체 내부 구조이다. 루이스와 이안은 외계인과 소통하기 위해 비행체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 공간은 중력도 작용하지 않으며 전후좌우도 뒤집혀 있다. 이 미장센은 <컨택트>의 서사 구조를 시각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작이 끝이 될 수 있으며 끝이 시작일 수 있는, 시작과 끝의 구분이 없는 것처럼 위와 아래의 구분이 없는 그런 구조 말이다. 언뜻 보면 플래시백을 가장한 플래시 포워드의 트릭 같지만 미장센과 루이스의 독백으로 대표되는 사운드 장치로 자신의 모습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컨택트>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정된 불행한 날들을 향한 의지

 

그렇다면 <컨택트>는 이런 형식 구조 안에 무엇을 담고 싶었던 걸까? 자신의 미래를 먼저 알게 된 루이스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일까? 헵타포드라 불리던 외계인들이 루이스에게 건넸던 의미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었을까? 루이스가 겪어야하는 딸의 죽음이라는 미래의 사건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몽타주 시퀀스를 떠올린다면 루이스의 결의와 미래의 수용이 새롭게 다가온다. <컨택트>의 원형 구조 서사는 불행한 미래를 품고 나아가겠다는 루이스의 결연을 보여주고 있다. 정해져 있는 결말을 향해 묵묵히 걸어 나가는 자세는 영화가 언급했던 논-제로섬 게임과도 닮아 있다. 한쪽의 이익과 다른 쪽의 손실의 합이 0이 되지 않는, 그래서 경쟁을 벌였던 양쪽 모두 행복하게 끝나는 이 게임은 행복과 불행 모두를 끌어안겠다는 루이스의 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백 태 현 / 인하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강사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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