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호 문화비평: 문화전쟁] 문화전쟁의 시대?

ⓒ www.donaldjtrum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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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은 전 세계인을 깜짝 놀라게 했다. 거침없는 언행과 대중주의적 수사로 유권자들을 현혹하는 난세의 기인 정도로 평가받는 인물이 아니던가. 그가 공화당의 보수주의자들에게 얼마간의 인기를 끌지언정, 미국의 대통령직에 오를 수 있으리라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더욱이 선거 막판 트럼프는 인종차별적 발언에 더해 성추행 논란에 휘말리기까지 했다. 그러니 지난 대선에서 흑인 대통령 오바마를 당선시켰던 미국인들이 어째서 이번엔 함량미달의 극우 정치인을 선택했는지 많은 이들이 혼란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아가 트럼프의 미국이 예고하는 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혐오의 정치에 대해 벌써부터 공포감을 표출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트럼프의 당선 요인을 두고 많은 논평자들이 그가 내세운 미국우선주의와 이민자 배제정책이 경제적 곤궁에 빠진 백인 노동자계급을 효과적으로 공략했다는 진단을 내놓고 있다. 소위‘러스트 벨트’라 불리는 미국 북부지역의 전통적인 산업도시에서 선전한 것이 그러한 진단을 뒷받침한다. 한때 영화를 누렸던 해당 주들은 탈산업화에 따라 일자리 감소와 오랜 경기침체에 빠져들었고, 트럼프의 경기부양책과 이주노동자 배제정책이 실의에 빠진 노동자계급을 포섭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무게가 실리고 있는 분석은 트럼프의 당선이 지난 수십 년간 진행된 보수우파들의 ‘문화전쟁’의 귀결이라는 평가일 것이다. 미국의 보수우파들은 개신교 근본주의자들과 손을 맞잡고 민주당 자유주의자들의 엘리트주의를 비난하면서, ‘잊힌 보통사람들’의 문화적 가치와 삶의 방식을 존중해야 한다고 일갈해왔다. 보수우파들은 ‘총기, 동성애, 낙태’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정치적 올바름’을 내세우는 자유주의자들의 위선과 엘리트주의에 대한 반감을 효과적으로 조직했다.

이처럼 미국을 위시해 유럽 각국에서 극우 포퓰리즘이 흥기하는 것을 두고 ‘문제는 경제가 아닌 문화다’라는 진단이 힘을 얻고 있다. 서구 각국에서 계급투표 경향이 거의 사라지고, 동성결혼이나 낙태와 같은 사회적 이슈에 대한 의견에 따라 지지 정당을 선택하는 경향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최근 한국의 정치지형에서도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태도나 환경과 생태문제에 대한 인식 등 문화적 가치들이 주요한 갈등의 지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바야흐로 계급투쟁을 대신한 문화전쟁의 시대가 열린 것일까?

문화전쟁, 세계화의 부메랑

서구에서 계급투표 성향이 약화되고 문화전쟁이 격화된 주요한 원인 중 하나로 꼽히는것이 좌·우파 경제정책의 중도화 경향이다. 20세기 중후반까지만 하더라도 좌파는 높은 수준의 복지와 기업규제를, 우파는 작은 정부와 시장친화적인 경제정책을 대변했다. 그에 따라 노동자계급이 좌파 정당을, 중상류층이 우파 정당을 선택하는 구도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들어 좌파 정당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받아들이고, 우파 정당이 재정투자와 복지확대를 공약으로 내거는 등 경제정책의 수렴 현상이 등장했다. 그리하여 좌우 간의 주요한 정책적 차이는 이제 경제가 아닌 문화 부문에서 발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단은 오늘날 극우파의 득세가 ‘세계화’에 대한 입장차를 두고 전개된다는 점에서 다소 피상적이다. 이는 트럼프의 캠페인을 상징한 것이 보호무역으로 대변되는 반-세계화 정책이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트럼프는 미국 경제침체의 요인으로 자유무역과 세계화를 꼽으면서, “공장을 빼앗아가는 자유무역”과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이민자”에 대한 증오를 부추겼다. 세계화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조화로운 번영을 이끌기보다 중상류층의 소득증대와 일자리 축소만을 야기한다는 인식이 노동자계급의 불안감을 자극하면서, 자국민을 보호하고 이민자를 배제하는 정책에 대한 선호가 높아졌다. 즉, 오늘날 경제정책의 쟁점은 국가와 시장의 관계가 아니라, 폐쇄냐 개방이냐를 둘러싸고 재조정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 난민 문제로 큰 사회적 혼란을 겪고 있는 유럽에서도 유사한 패턴으로 전개되고 있다.

1970년대 이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는 자본이동의 자유와 규제받지 않는 기업 활동을 장려하면서, 선진국의 탈산업화와 후발 국가에 대한 금융적 착취를 가속화했다. 고도의 이동성과 자율성을 획득한 자본은 값싼 인력을 찾아 공장을 후발 국가로 이전하거나, 포트폴리오 투자와 같은 금융거래를 통해 생산을 우회한 채 높은 수익을 올렸다. 자본과 기업권력의 강화는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노동시장의 경쟁을 격화시켰으나, 이를 완화시킬 국가개입은 축소되고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저항 또한 수세에 몰렸다. 경제침체와 불안정한 국내 정치상황에 직면한 제3세계의 노동자계급은 일자리를 찾아 대거 선진국으로 향했다. 이들은 선진국의 제조업과 서비스업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선진국 경제를 뒷받침했으나, 선진국 노동자계급 입장에선 자신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낯선 이방인일 뿐이었다. 극우 포퓰리스트들은 현실적인 위협으로 다가온 이민자와 난민들을 모든 사회적 혼란과 불안정성의 원인으로 지목하면서 유권자들의 마음을 빼앗는 전략을 취했고, 결국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다.

자유주의의 위기

보수우파의 전략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인한 경제적 모순과 계급갈등의 격화를 ‘우리’와 ‘그들’ 사이의 대립으로 치환하는 것이었다. 경제위기와 삶의 불안정성이 높아지면서 이민자들은 문화적 다양성과 경험적 지평을 넓혀주는 이웃이 아니라, 일자리를 위협하고 고유한 종족적 정체성을 위협하는 불길한 이방인으로 규정되었다. 구조적인 모순에서 기인한 고통과 불행의 원인을 당장 눈앞의 구체적인 타자에게 전가하는 경향이 짙어지면서, 여성과 소수자 등 ‘내부의 이방인’에 대한 혐오의 정서도 널리 확산되었다. 이는 신자유주의적 ‘경쟁’의 원리가 기업 활동은 물론 교육과 공공영역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사회적 관계를 지배하면서 가속화된 현상이기도 하다. ‘사회문제에 대한 개인적 해결’을 모토로 한 자기책임의 윤리와 개인주의가 확산되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평가적이고 공격적인 태도가 만연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단순히 문화전쟁이 계급투쟁을 대체했다기보다, 당대의 경제적 모순과 계급갈등이 문화전쟁의 양상으로 굴절되어 표출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여성과 소수자, 이민자에 대한 배제와 혐오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극우 포퓰리즘의 득세는 자유주의적 가치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20세기 후반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좌파운동이 쇠퇴하면서 ‘정치적 올바름’과 정체성 정치에 몰두했던 자유주의 정치의 역사적 대가이기도 하다. 사회주의의 전망으로부터 멀어진 자유주의 정치는 개성과 정체성의 표현, 젠더와 인종감수성, 환경과 생태 등의 사회문제에 천착했다. 이러한 흐름은 정치의 주체와 대상을 넓히고 다양한 사회적 의제를 공론화하는 데 기여했으나, 한편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문화적 비판으로 대체하는 부정적 효과를 낳기도 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극우 근본주의의 확산이나 생태적 재앙으로 인한 문명의 종말을 더욱 우려하는 전도된 역사인식은 이러한 맥락에서 기인한다. 즉,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를 영원불변한 자연적 질서로 격상시켰고, 그에 따라 자본주의의 위기가 문명의 위기와 등치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자유주의 정치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보다 ‘정치적 올바름’과 같은 문화적 실천에 착목하면서 정치를 개인화·도덕화 하는 경향을 띤다. 예컨대 자유주의자들은 보수우파와 그들을 지지하는 노동자계급을 인종주의자, 성차별주의자라 규정하면서, 그들의 몰(沒)취향과 무딘 감수성을 비난한다. 이는 이데올로기를 사회구조가 아닌 개인의 내면으로 환원하는 동시에 ‘우리’와 ‘그들’이라는 허구적 대립을 영속화한다. 이런 점에서 문화전쟁은 보수우파와 자유주의자들의 공동의 생산물이며, 그 과정에서 배제되는 것은 급진적인 사회주의(혹은 공산주의)의 전망이다. 트럼프와 힐러리가 공동의 적으로서 샌더스를 미리 내친 것은 이러한 정치지형을 구체적으로 예증한 사례가 아닐까. 따라서 ‘우리’와 ‘그들’사이의 영원히 화해될 수 없는 허구적 대립을 넘어서기 위해, 자본-국가 권력과 착취당하는 민중의 대립을 선명히 할 급진적 전망과 운동의 건설이 요원하다.

최 철 웅 / 계간《문화/과학》편집위원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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