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호 영화비평: <4등>(2015)] 경쟁구조에 갇힌 이들에게 던지는 작은 물음표

ⓒ movi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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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우 감독의 <4등>(2015)은 1998년 박세리 선수가 LPGA에서 우승한 소식을 전하는 흑백의 뉴스 장면으로 시작한다. 거기서 박세리 선수는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쥔 수많은 선수 중의 한 명이 아니라 IMF 시대를 관통하는 국민에게 희망을 전한 스포츠 영웅으로 호명된다. <4등>은 그런 박세리 선수의 모습 위에 전도유망한 국가대표 수영선수인 어린 광수(정가람)를 포개놓는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있던 그는 연습 때마다 한국 신기록을 갈아 치우더니 급기야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 아시아 신기록으로 우승까지 하게 된다. 이제 광수에게 남은 것은 아시안 게임에서 우승해 박세리 선수처럼 유명한 스포츠 스타가 되는 길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실력을 과신한 채 고향에서 선배들과 노름을 하느라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 소집에 무단으로 불응하게 된다. 뒤늦게 태릉선수촌으로 향한 광수를 맞이한 것은 “이게 다 너를 위한 거다. 너 나중에 나에게 감사할 날이 올 거다”라는 말과 함께 시작된 감독의 매질이었다. 가혹한 구타를 견디지 못한 광수는 홧김에 수영을 그만두게 되고 영화는 그로부터 16년 후의 시간으로 관객을 데려간다.

어른들의 욕망에 방치된 아이들의 인권

<4등>은 동네 생활체육 수영코치가 된 광수(박해준)가 대회에 출전하면 4등만 하는 초등부 수영선수 준호(유재상)를 전담하는 이야기를 중심축으로 삼고 있다. 광수는 처음부터 준호를 열심히 가르치지 않는다. 그는 준호를 엄마의 잔소리가 싫어서 억지로 수영장에 나온 아이쯤으로 치부해 버리고 훈련 대신 PC방에서 시간을 보낸다. 훈련은 하지 않고 놀기만 하는 광수를 이상하게 생각한 준호는 그에게 “옛날에 천재 선수였다는데 지어낸 말 아니에요?”라고 말하며 자신이 수영하는 것을 봐달라고 조르기 시작한다. 자신을 깎아내리는 준호 말에 발끈한 광수는 준호를 아무도 없는 수영장으로 끌고 가더니 수영을 해보라고 한다. 준호는 잔뜩 주눅이 든 채로 수영을 시작하고 광수는 그런 그의 모습에 조금씩 집중하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준호가 수영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히는 장면인데, 여기서 영화는 수영하는 준호의 모습을 어두운 조명으로 보여주다가 고속촬영으로 전환하는 동시에 서서히 밝아지는 조명과 감미로운 음악으로 꾸미기 시작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아무도 없는 수영장이라는 공간이다. 준호의 재능이 빛나는 순간은 경쟁을 위한 수영이 아니라 자신에게 몰입한 수영을 하고 있을 때라고 영화는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광수는 준호가 아무도 없던 곳에서 수영을 했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재능을 어느 정도 알아본 광수는 메달 가능성이 있다며 기록향상을 위해 준호를 거의 혹사에 가까운 훈련에 몰아넣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자신이 알려준 방법대로 수영을 하지 않는다며 그를 때리기 시작한다. 준호를 폭력으로 다스리던 광수는 훈련이 끝나고 나면 그에게 먹을 것을 사주거나 뭉친 근육을 풀어주면서 자신의 폭력에 대해 “네가 미워서 때리는 것이 아니다. 집중 안 하고 시키는 대로 안 해서 답답해서 때리는 거다”라며 변호한다. 광수가 준호에게 하는 말은 영화가 초반에 보여주었던 코치의 말과 정확하게 중첩된다. 구타가 싫어서 수영을 그만두었던 광수가 매질을 준호, 그것도 초등학생에게 반복하게 된 것이다. 광수는 왜 자신이 싫어했던 행위를 반복하고 있는 걸까? 그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자. “수영하기 싫지? 도망가고 싶고. 그때 잡아주고 때려주는 선생이 진짜다. 내가 겪어보니 그렇더라.” 그는 선수가 어긋난 길을 가거나 재능을 깨닫지 못하면 때려서라도 바로 잡아주고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이 스승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4등>이 그리는 광수의 폭력적인 훈육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교육의 어두운 모습을 반영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교육이나 훈련의 문제가 아닌 광수의 과거에 찍힌 영화의 방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위에 언급한 광수의 말은 자신이 몰락한 이유를 도박에 빠졌던 자신의 모습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부재했기 때문이라고 탓하는 것이며, 그의 매질은 스승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준호에게 투사한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준호의 곁에는 광수말고도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는 또 다른 어른이 있었다. 그는 바로 준호의 엄마 정애(이항나)다. 정애는 준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는 엄마이다. 준호가 출전하는 대회를 전부 따라다니면서 뒷바라지하고, 교회와 절을 번갈아가면서 기도까지 하는 정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엄마의 정성과는 달리 준호는 출전하는 대회마다 4등만 하게 되고, 메달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준호가 답답한 정애는 주위에 수소문하여 메달을 확실히 따게 해준다고 소문이 난 광수를 준호의 개인 코치로 고용한 것이다. 정애는 훈련과 교육에 대한 부모의 개입을 차단하는 그의 고압적인 태도에 위압감이 들지만 메달만 따게 해 준다면 무엇이든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 생각은 시퍼렇게 멍든 자기 아들의 몸을 본 순간의 정애를 침묵하게 만들어 버린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영화가 코치와 부모의 삐뚤어진 애정과 욕심 혹은 그들의 자화상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정애와 준호가 광수를 처음 만나는 장면을 살펴보자. 광수는 준호에게 수영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묻자 준호는 “놀려고 시작했다”고 대답한다. 그것을 듣고 무안해진 정애는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어 “어렸을 때부터 좋아해서”라며 준호의 대답을 정정한다. 광수는 균형감각을 보기 위해 준호에게 실내를 한 바퀴 돌아보라고 지시한 다음 준호의 메달 가능성에 대해 정애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이 순간을 두 사람의 주위를 돌고 있는 준호의 시점 쇼트로 보여준다. 이것은 어른들이 자신의 운명과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을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준호를 형상화한 장면으로,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작한 이 영화의 문제의식이 울리는 순간이다. 다시 말해 <4등>은 교육을 이유로 행해지는 폭력을 고발하는 영화라기보다 어른들의 욕망 아래에 방치되는 아이의 인권에 관심을 기울이는 영화이다.

레인 없는 수영장

<4등>은 여기서 더 나아가 현실적인 한계와 방법론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진다. 준호는 광수가 그랬던 것처럼 코치의 매질이 싫어서 수영을 그만두게 된다. 하지만 준호는 역설적으로 수영을 그만둔 그 순간부터 수영에 대한 갈증이 심해지기 시작하고 급기야 밤중에 몰래 수영장에 숨어 들어가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영화는 그런 준호의 모습을 부감과 명암을 강조한 조명으로 아름답게 처리한다. 이때 수영장은 수영 레인(lane)을 잠시 치워둔 상태이다. 항상 레인 위에서 앞으로만 가야 하는, 즉 경쟁과 엄마를 위한 수영만 했던 준호는 처음으로 레인이 없는 수영장을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물속에 비친 빛을 손으로 잡아보기 시작한다. 놀고 싶어서 수영을 시작했다던 말과 “물속에서 햇살을 보면 우주의 기운을 받는 것 같다”던 그의 말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수영은 이미 준호의 몸에 지울 수 없는 각인을 남긴 상태이며 준호는 수영이 하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에 따라 코치와 엄마 없이 홀로 수영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거짓말처럼 1등을 하게 된다.

1등을 하게 된다는 서사의 결말은 관객의 카타르시스를 채워주는 단순한 기능이 아닌 다른 무엇을 가지고 있는 장치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순위를 확인하고 대기실로 향하는 준호의 시점 쇼트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서 카메라는 빗자루와 거울을 차례로 보여준다. 준호는 잠시 서서 빗자루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 1등한 이유는 무엇일까? 매질을 동반한 코치의 스파르타식의 훈련 때문일까, 아니면 경쟁을 잊고 수영에만 몰입했던 그 이상적인 순간 때문일까. 준호는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 준호를 바라보는 관객도 정확한 결론을 내리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준호는 폭력의 구조를 답습했던 광수의 길을 가지 않을 것이다. 광수와는 달리 경쟁과 어른을 위한 수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변화의 시작은 바로 이 작은 깨달음에서 기인한다고 <4등>은 나지막이 말하고 있다.

백 태 현 / 인하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강사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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