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호 테마서평: 파스칼 키냐르의 시간] 시간의 섬광, 시간의 황홀경

『심연들』(파스칼 키냐르 저·류재화 역, 문학과지성사, 2010)
『옛날에 대하여』(파스칼 키냐르 저·송의경 역, 문학과지성사, 2010)
『떠도는 그림자들』(파스칼 키냐르 저·송의경 역, 문학과지성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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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에 고통스럽게 쫓길 때마다 주문처럼 외웠던 말, 나에게는 신비한 약효, “페스티나 렌테(Festina lente)”. 이 말을 그대로 풀이하면 “빨리 천천히”이다. 이 역설적인 비문(非文)은 나에게 일종의 비문(秘文)이 되었다. 파스칼 키냐르의 전언에 따르면, 페스티나 렌테는 고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허리춤에 늘 지니고 다니던 사냥칼에 쓰인 문구이다. 빨리 하되 천천히. 이 말을 ‘빨리 한 후에 천천히, 천천히 한 후에 빨리’라는 시간의 순차성에 따른 인과적 연차 행위로 이해하기보다, 거의 측정 불가능한 극미한 최소 시간 단위 속에 벌어지는 전이, 이동으로 이해할 때 그 의미는 더욱 감미롭고 알싸하다. 다시 말해, 그것은 ‘거의 동시에’이다. 같은 길이로, 같은 크기로 발을 동동 구르듯 반복하는 행위 속에서도 기묘하게 생겨나는 차이의 용솟음. 몸을 후르르 떨 듯, 용출하는 즙(汁). 반복 운동 속의 기이한 이득. 나는 이말을 “오로지 현재 진행형으로만 완수되는 황홀한 전율”이라고 바꾸어 이해하기도 한다. 앞으로 할 것은 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이미 한 것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하고-있으면서”만 생성되는 이득. 시간은 언표(言表)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시간 자체의 물성으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Festival Ritournellesdu 6 au 8 nov 201415 edition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 1948~ ) ⓒ 사진자료 제공: 류재화

 

시간, 황홀한 마들렌 조각

추상적 개념론자가 아니라 감각적 유물론자인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 1948~ )는 시간 역시나 자연의 물성으로 이해한다. 키냐르에게 시간은 “탈-공시태(脫共時態, Désynchronie)”이다. 공시태라는 잔존과 지연의 진액 상태로 있다가, 부지불식간에, 서서히 파열과 분리를 준비하는 이완이 전제된 긴장 상태. 쾌락주의자로 통하는 고대 그리스의 에피쿠로스는 스승인 데모크리토스의 기계론적 원자론을 더욱 발전시켜 “공허 속에서 떨어지는 원자들” 개념에 천착한 바 있다. 최소의 시간 차 속에서 떨어지며 빗겨 나가는 ‘가로지름’ 형태를 뜻하는 클리나멘(Clinamen)은 에피쿠로스의 방법적 테제이다. 에피쿠로스는 시간을 원자의 자의적 운동 형태로 상상한다. 포착되지 않고 부유하는 시간을 미세하고 감미로운 날렵한 파편으로 상상함으로써 시간을 흡취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론을 우리에게 제시한 것이다. “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한”어린 마르셀 프루스트의“입천장에 닿은 마들렌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 “ 이유를 알 수 없는”마르셀의 지복의 감미로움은 바로 에피쿠로스가 말한 쾌락, 돌연한 시간 조각이 주는 황홀경이다.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 같은 유물론자들을 탐독한 파스칼 키냐르는 고대인(古代人)처럼 시간을 감지한다. “아연실색케 하는” ‘탈-공시화’라는 키냐르의 표현은 자기 보존 형태를 유지하다(공시성), 더는 못 참고, 최적의 결정적 순간에 파열하며 지르는 외마디 단말마(탈-공시적 순간)로 비유될 수 있다. 시간은 섬광처럼 부서지고 발열한다. On & Off. 키냐르가 주목하는 것은 On과 Off의 이항 가운데 어느 한 편이 아니라 On과 Off 사이, 죽음처럼 황홀한 간극이다. 시계가 똑-딱 울린다. 그렇다, 똑과 딱 사이다. 그 빈 마디, 하얀 부재, 침울한 듯 아찔한 공허의 절벽. 키냐르의 시간은 들숨과 날숨 사이에 있다.

『떠도는 그림자들』,『 옛날에 대하여』,『 심연들』은 파스칼 키냐르가 “열 권이 될지, 스무 권이 될지 모르지만 이 ‘마지막 왕국’속에서 나는 죽어가게 될 것”이라고 소명을 밝힌 그의 생애 “마지막 장부”이다. 키냐르는 태생 동물인 인간의 첫 번째 왕국이 탄생 이전 모태의 물속이었다면, 두 번째 왕국이자 마지막 왕국은 우리가 사는 이 대기권의 삶, 생로병사를 감내하며 시간에 포식되어야 하는 부득이한 이 불가능의 처(處)이다. 키냐르에게 시간은 그의 책이며, 그의 ‘하늘 사원’[時]이며, 그의 궁극의 기도서이다.

옛날, 사라진 낙원의 복귀

Jadis. 결코 쉽게 번역되지 않는 기묘한 프랑스어 단어‘자디스(Jadis)’는 키냐르가 몹시 좋아하는 단어이다. ‘자디스’는 흘러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옛날’이 아니라, 현존재의 현 순간으로부터 가장 멀리 퇴각해 있다가 느닷없이 귀환한 ‘옛날’이다. 파스칼 키냐르가 즐겨 쓰는 시제인 단순과거는 퇴행한 과거이면서 불쑥 현재에 다시 출몰한 과거이다. 현재보다 더 현재적인, 생기가 넘치는 과거. 사라진 낙원의 복귀.
옛날 프랑스인들은 죽음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않기 위해 “Il n’est plus”(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노라)라는 말 대신에 “Il fuit”(존재했었노라)라고 말하였다. ‘Fuit’는 라틴어‘sum’(-이다/존재하다)에 더 완벽을 기하는 보완 형태로, 프랑스어 ‘Etre’(-이다/존재하다)의 단순과거 ‘fut’를 연상케 하면서 동시에 ‘달아나다’라는 뜻의 동사 ‘Fuir’를 연상케 한다.

키냐르는 과거-현재-미래로 구분되는 3분법 시제를 의문시한다. 시간은 정말 과거, 현재, 미래인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고백론』에서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인가”를 절실하게 묻는다. 과거가 기억의 영역이라면, 현재는 정신의 영역 혹은 눈으로 직접 보는 시각과 이미지의 영역이며, 미래는 대기와 기대, 희망의 영역이다.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그러나 시간은 ‘-이다’와 ‘-아니다’라는 긍정과 부정 명제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 수수께끼 같은 시간 개념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현재-미래’가 아닌 “세 개의 현재”를 제시한다. 과거 속의 현재, 현재 속의 현재, 미래 속의 현재가 그것이다. 시간은 정한 거처 없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이동이며, 이주이며, 전이이다. 시제는 시간을 인지하기 위한 도구, 체와 같은 선별 도구일 뿐이다. 삶이, 생(生)이 언어로 다 환원되지 않듯이, 시간은 시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시간의 조형성: 반과거, 복합과거, 단순과거

프랑스어 특유의 다단한 시제들은 조형할 수 없는 시간을 조형하기 위한 다양한 도구들이다. 키냐르는 프랑스어의 문법적 시제를 생리적이고, 감각적인 물질작용으로 환기하며 시간의 본성을 계시한다.
“거트루드 스타인이 물었다. “왜 반과거로 글을 쓰면 행위가 더 완벽한 현재로 느껴지는가?”
그 이유는 반과거가 시간을 바꾸기 때문이다.
(…)
Il était…Il allait…Il aimait…il voulait…점선 부분을 채워 넣기만 하면 된다. 과거의 용법이 소설 자체이기 때문이다. ait와 lait(우유라는 뜻이기도 함)에 내재된 운은 사라진 것이 귀환하는 바로 그 순간의 마술적 운(韻)이다. 모든 동사에 붙은 동일한 접미사가 동사들을 음(音) 안에 집결시킨다.
빵집에 들어가더니entrait 1백 그램의 효모를 주문해서demandait 서너 번 접은 부드러운 기름종이에 그것을 다져넣었다tassait.
문장 내에서 접미사가 붙은 동사들의 inflatio(팽창).
젖가슴이 부풀 듯이 팽창하는 동사들.
부풀어서 곤두서는 성기처럼 커지는 동사들.
“-ait”가 소리쳐 부르는 것은 다른 시간이다.
따스한 시간.”

-파스칼 키냐르,『 옛날에 대하여』, 제45장 중에서

프랑스어 특유의 시제 변화는 귀에 들리는 어미변화의 음성적 효과로도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반과거 시제의 다소 길게 늘여 빼는 듯한 음이 우리를 양육하는 따듯한 모유를, 혹은 우주의 영액을 생각나게 했는지 파스칼 키냐르는 반과거를 ‘팽창’의 이미지로 환기한다. 반과거 시제가 죽은 것을 환영으로 만들며 잔존하게 하는 일종의 스펙트럼이라면, 존재와 행위의 완료를 의미하는 복합과거 시제는 숲길이 마침내 끝난 절벽이다. 생의 가능성이 멈춘 극단, 마침표다. 키냐르는 “복합과거는 살해자다”, “노골적이고, 가혹한, 표백하고 건조하는 양태다”(『옛날에 대하여』, 345쪽)라고 말한다.

키냐르가 자신이 선호하는 시제는 단순과거임을 그토록 집요하게 경이로운 메타포로 환유하는 것은 왜일까? 생의 완료도, 지속도 아닌, 솟구치는 힘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권태로운 반복 속에 차이라는 미세한 부각으로 불쑥 드러나는 생의 현현이기 때문이다. 단순과거는 음과 양의 기운이 찰나적으로 교체하는 파도 마루의 정점처럼 사라짐으로써만 다시 살아나는 원기 가득한 생사의 협곡이다. 키냐르가‘옛날’을 목 놓아 부르는 것은 태고라는 시간의 원천에 어떠한 매개체 없이 곧바로 닿고 싶어서이다. 키냐르는 철저한 근본주의자, 감각적 유물론자, 아니 도가적 경물중생자이다.

류 재 화 / 번역가, 고려대학교 불문학과 강사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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