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호 인문학술: 노마디즘과 폭력성] 노마디즘, 선악을 넘어서

노마드(nomad)란 ‘유목민’, ‘유랑자’를 뜻하는 용어로, 현대철학의 개념으로 자리 잡은 용어다. 이는 기존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불모지를 옮겨 다니며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일체의 방식을 의미하며, 철학적 개념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의 문화·심리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이에 본보에서는 기존의 여러 가치관이 대립을 이루고 새로운 가치관이 창출되는 현대사회에서 노마디즘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노마디즘에 대한 이론적이면서도 실천적인 논의는 국내에서는 1990년대 말부터 왕성하였는데 그 이후 급격히 줄어들었다. 물론 단순히 줄어들었거나 그냥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어떤 점에서는 그 논의의 결과나 성과가 상당한 정도로 보통 사람들의 어휘나 대화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상업광고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난 노마드의 이미지가 그 한 예일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그렇지 않은 면도 크다. 전반적으로 한국 지식인 계층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주제와 문제를 다루는 공간, 그리고 사회적 문제를 생산적으로 다루는 그들의 실력도 쪼그라들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물론 모든 사회적 문제에 대해 개입하고 그것들에 대해 사람들의 의견과 주장을 대변하는 ‘일반적 지식인’의 축소 또는 심지어 소멸은 역사적으로 이해할 만하거나 불가피한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 점을 고려하더라도 지식인 계층이 사라지고 그들 대신에 사회관계망에서 우글거리는 집단들이 점점 득세하게 된 과정은 매우 특이한 변화였다. 그 변화가 너무나 포괄적이고압도적이어서 이제 사람들은 그 변화를 거의 당연하게 느낄 정도이다. 어쨌든 우글거리는 그들 무리나 패거리에 의해 커뮤니케이션이 크게 흔들리고 출렁거린다는 것은 일상이 되었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출렁거린다.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만드는 사건들에 대한 사람들의 불길도 한순간에 폭발적으로 퍼져나간다. 공적인 국가조직을 우습게 만든 대통령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는 한편으로 국가라는 조직의 공공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애초에 그 조직이 쉽게 품을 수 없는 다중(多衆)의 부글거리는 감정이 표출된 것이기도 하다. 이 우글거리고 부글거리는 무리들은 누구인가? 국가라는 조직 안에서 떠도는 노마드들인가? 아니면 국가를 가로질러 떠도는 유목민들인가?

이론적 문제들

우선 이론적인 차원에서 출발해보자. 들뢰즈와 가타리는 특히『천 개의 고원』에서 노마드 문제를 철학적으로 분석했을 뿐 아니라 사회적-정치적인 이슈로 만들었다. 그들에게 노마드/노마디즘은 단순히 철학적인 문제도 아니었고 또 단순히 도덕적인 문제도 아니었다. 단순히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은, 그 주제가 현실의 ‘더러운’문제들로부터 분리된 철학적인 층위에만 있지는 않다는 말이다. 또 도덕적인 문제도 아니었다는 것은, 비록 그들에게 노마드/노마디즘이 국가장치에 안주하거나 사로잡히지 않는 특이하고 중요한 움직임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착하고 바른 일만 하는 움직임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유목민(노마드)이 어떻게 착하고 바른 일만 하겠는가? 십자군의 예를 보아도, 노마드가 어떤 착한 이상만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종교적으로는 중세에 기독교가 지배적이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기독교도들이 ‘착한’ 신앙에 따라서만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또 칭기즈 칸의 노마드들도 그 당시 새롭고 빠른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했으며 국가장치를 확장했고 그 효과는 놀랄 만했다. 다만 노마드로서 그들의 행동방식은 국가장치를 유지하는 데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노마드가 꼭 이주민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이동하는 일이 노마드의 특징은 아닌 것이다. SNS에서 감정과 말을 굴리는 무리들도 몸을 이동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제자리에서 가상공간을 돌아다닐 수 있지 않은가? 들뢰즈와 가타리가 단순한 외적 이동이 아니라 내적 강도(Intensit´e)를 노마드의‘내면적’특징으로 삼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제자리에서 빙빙 도는 사람들,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기어가기만 하는 사람들도 강력한 노마드가 될 수 있다. 멀리 뛰고 빠르게 내달리기 전에 동물들이 몸을 웅크리고 척추를 구부리듯이, 몸을 오므리는 모든 동작은 강렬함을 내포한다.

그 내면적 특징과 함께 노마드의 실존과 정서를 규정하는 것은 ‘전쟁기계’의 무기이다. ‘전쟁기계(machine de guerre)’라는 심상치 않은 표현은 노마드라는 표현이 작동하는 바로 그 순간, 같이 작동한다. 그것 없이는 노마디즘은 어쩌면 기껏해야 “하나의 추상이자 이념”일 것이다. 물론 ‘전쟁기계’라는 개념은 현실의 더러움과 잔인함, 그리고 현실의 폭력성을 지시하고 서술한다. “하루하루 사는 게 전쟁이야” 또는 “무역전쟁”이라는 말들에서 드러나듯이, ‘전쟁’은 한편으로 일종의 은유이면서도 동시에 실재를 지시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천 개의 고원』에서 대부분의 논의를 개념들의 대립을 통해 전개시키는 경향이 있다.‘ 전쟁기계’와 대립적 관계 속에 있는 개념은 ‘국가장치’이다. ‘ 전쟁기계’는 다름 아니라 ‘국가장치’의 고정성과 관료기구들을 넘어가는 어떤 것이다. 그렇다고 ‘전쟁기계’가 오로지 전쟁만을 수행하는 기계는 아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전쟁을 목표로 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탈주선’을 목표로 삼는다. ‘탈주?’ 무엇으로부터의 ‘탈주?’ 여기서 다시 내부와 외부의 대립개념이 등장한다.

“전쟁기계가 국가 장치 외부에 존재한다는 주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전쟁기계를 순수한 외부성의 형식으로 고찰해야 하는 것이다.”

‘순수한 외부성’이라는 개념 또는 이념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 대립이설정되고 극단으로 치닫는 순간, 개념들의 단순한 대립성은 다시 흔들린다. 단순한 대립과 분리는 없다. 오히려 그들 사이에 섞임과 교차가 끊임없이 일어난다. 국가장치 바깥으로 탈주하는 전쟁기계조차도 단순히 국가장치 바깥으로 도주하는 대신에, 곳곳에서 국가장치와 교차하고 얽힌다.

“하지만 전쟁기계의 외부적 역량은 어떤 상황에서는 국가 장치의 두 극 중 어느 한 쪽과 혼합되기 때문에, 문제가 한 층 더 복잡해진다. 즉 전쟁기계는 어떤 때는 국가의 마법적 폭력과, 다른 때는 국가의 군사제도와 혼합되는 것이다.”

이처럼 노마드는 전쟁기계를 수반하고, 전쟁기계는 국가장치와 교차하면서 그 바깥으로 탈주하지만 다시 국가장치와 섞이는 지점들을 피할 수 없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와 펠릭스 가타리(Pierre-F´elix Guattari, 1930~1992) ⓒ epicurus.kr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와 펠릭스 가타리(Pierre-F´elix Guattari, 1930~1992) ⓒ epicurus.kr

‘착하기만 한’, 오로지 해방시키는 노마디즘이 있는가?

그런데 노마디즘을 철학적으로 또는 이념적으로 칭송하는 사람들은 이 얽힘을 쉽게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유목민(nomad)’·이주민·정착민을 개념적으로 엄격하게 구별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마치 노마디즘
이 자본의 흐름을 비롯한 현실의 어떤 더러운 문제와 직접 관련이 없다는 말을 반복한다. 한 예로, 이진경은 위의 개념적 구별을 강조하면서‘노마디즘’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숙성한 사상이고 나쁜 자본과 전혀 상관이 없으며 따라서 노마디즘이
침략적 성격을 띠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마음 편하게 말한다. 그는 또 노마드뿐 아니라 ‘매끈한 공간’과 ‘외부성’이 그 자체로 순수하게 혁명적 개념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런 관점은 노마디즘과 전쟁기계와의 끈끈한 관계를 부인하
는 일이다. 다시 들뢰즈와 가타리의 말을 들어보자.

“이처럼 새로운 노마디즘은 세계적 규모의 전쟁기계를 수반하는데, 그 조직은 국가장치를 넘어서며, 다국적이고 에너지적인 군산복합체 속으로 흘러간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즉 매끈한 공간과 외부성의 형식은 결코 그 자체로 불가항력적인 혁명적 사명을 띠고 있는 것은 아니며 거꾸로 어떠한 상호 작용의 장에 흡수되는가에 따라, 그리고 어떠한 구체적인 조건하에서 실행되고 성립되는가에 따라 극히 다양한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그러므로 ‘노마디즘’은 현실 속의 나쁜 노마디즘과는 아무 관계도 책임도 없으며 나쁜 자본주의 국가의 외부에만 존재한다는 말은, ‘너무나 착한’ 철학이며 ‘착한’ 시늉하는 노마디즘일 뿐이다. 실제로 ‘전쟁기계’는 산업과 시장의 흐름, 그리로 문화적 교류 속에서 작동하며 그것들을 가로지른다.

“그러나 전쟁기계의 외부성의 형식은 오직 스스로 변신할 때만 존재할 수 있다. 즉 산업의 혁신이나 기술의 발명, 상업적 유통망 또는 종교적 창조 등 국가로서는 이차적으로밖에 전유할 수 없는 흐름이나 경향들 속에 존재한다.”

노마디즘을 철학적 담론으로만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마치 ‘전쟁기계’가 부차적이고 적절하지도 않은 표현인 것처럼 말하는데, ‘노마디즘’이 부드러운 ‘인문학’의 모습으로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전쟁기계’의 까칠까칠함이 은폐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노마디즘이 상이한 여러 차원에서, 심지어 대립적인 형태의 상징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형태는 이미 위에서 드러나듯이 일종의 이상주의적 ‘코뮨주의’속에 집어넣어진 노마디즘이다. 이진경은 현실적 폭력의 수많은 흐름에서 훌쩍 벗어난 우정과 사랑의 공동체의 모습으로 노마디즘을 이해한다. 노마디즘이 낭만적으로 상징화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거꾸로 노마디즘은 세계화를 수반하는 침략주의의 형태로 상징화된다. 다국적 기업을 비롯한 산업적이며 상업적 흐름들이 모두 현대적 노마디즘의 모습으로 이해되면서, 그것의 약탈성이 부각된다. 자급자족하는 농업에 기반한 생태주의적 삶을 꿈꾸는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한 예로 생태주의적 농민철학자 천규석은 “유목주의가 국가주의보다 더 파국적인 시장제국주의를 부추기고 조장하는 또 하나의 침략과 파괴주의”라고 고발하고 나섰다. 이 두 가지 형태의 상징, 곧 공동체적 상징화와 침략주의적 상징화는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지만, 실제로는 일종의 짝패이다. 그 둘은 다만 노마디즘의 한쪽 면을 과도하게 과장한다. 한쪽에서 노마디즘은 극단적으로 해방시키는 힘으로, 다른 쪽에서는 극단적으로 억압하는 힘으로 과장된다. 그런 이해방식은 노마디즘을 이상화하거나 또는 자신을 이상화하면서 그것을 저주하는 방식이다. 억압과 해방의 단순한 이분법에 사로잡히지 말자. 리얼리티는 그 둘 가운데 어느 하나의 선택을 통해 결정되지 않는다. 리얼리티는 물론 폭력성을 띤다. 그러나 리얼리티 또는 노마드가 가지는 폭력성은 무조건 그 자체로 선이거나 악이 아니다. 어떻게 작동하느냐, 어떻게 사용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국가 바깥으로 움직이는 외부성이란 무엇인가?

노마디즘이 국가장치에 대한 외부성으로 작동하거나 그것을 가로지르는 어떤 움직임인 것은 맞다. 다만 그것이 순수하게 해방시키는 힘으로 여겨지거나 또는 침략주의의 상징으로 상징화될 때, 국가장치뿐 아니라 노마디즘도 다소 극단적으로
단순화된다. 이미 위에서 인용했듯이, 들뢰즈와 가타리는 노마드와 전쟁기계가 끊임없이 국가장치와 겹치고 교차하면서도 그로부터 탈주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노마디즘을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움직임으로 만드는 점일 것이다. 더 나아가서, 바람직하거나 실제적인 삶의 모델을 국가제도 내부에서만 찾지 않는 다양한 시도들이 노마디즘이라는 상상 또는 상징에 걸리거나 거기 매달리는 원인일 것이다.

따라서 노마디즘은 우애의 공동체나 침략적 집단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시장의 확대나 기술의 발전, 또는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꿈들의 다양한 형태도 이들 시도와 연결된다. 그뿐 아니라, 공간적으로는 국가의 영토 내부에서 움직이더라도 더이상 단순히 국가의 이념이나 도그마에 따르지 않는 여러 무리나 패거리들의 움직임도 여기에 속한다.

“외부는 동시에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난다. 먼저 특정 시점에 통합태(=전세계)로 가지를 뻗어나갈 수 있으며 국가에 대해 상당한 자율성을 보유하고 있는 거대한 세계적 기계(가령‘다국적 기업’유형의 산업 조직 또는 산업 콤비나트 또는 기독교나 이슬람, 그리고 다른 몇몇 예언자운동이나 메시아 사상과 같은 종교단체),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패거리, 주변부 집단, 소수자 집단이 가진 국지적 메커니즘도 있는데, 이들은 계속 국가권력에 맞서 절편적 사회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절편적 사회들은 중앙집중적 국가의 주권이나 법이라는 이념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회의 형태이다. 근대적 국가형태가 등장하기 이전의 사회형태라는 점에서 그것은 역사적으로는 고대사회의 형태로 분류될 수 있지만, 그것이 현재에도
여러 층위에서 작동할 뿐 아니라 점점 활발하게 또는 분열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은 아니러니 또는 역설일 것이다.

복지를 비롯하여 국가제도나 국가장치가 떠맡는 일의 범위는 확대되는데, 거꾸로 그것들로부터 벗어나서 활동하는 “패거리, 주변부 집단, 소수자 집단”이 다양해지고 강력해지는 것은 그러므로 단순히 우연이거나 우발성이 아니다. 언뜻 보면,
그 둘은 서로 모순되거나 양립하지 못할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 둘은 얼마든지 공존한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국가장치가 외형적으로 커지거나 확대되는 와중에, 노마디즘도 새롭게 번성하고 퍼진다. 제도와 장치의 숫자나 가지치기의 형태로 보
면 국가장치가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단일한 형태나 조직으로 관리하거나 통제하는 국가의 힘이나 실력은 줄어들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 1위였다는 한국 조선업이 어느 사이에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는데도, 그 일이 벌어지는 동안 바보처럼 멀뚱거리고 서 있는 덩치 큰 정부의 모습을 보라. 물론 정부를 무력하게 만드는 무리들이 국가 내부에 다양하게 있는 것이다.

강렬한 폭력성의 형태들

이 점은 국가를 넘어 세계화된 세계 또는‘제국’에도 적용된다. 20세기 후반 들어서 국가의 경계조차도 쉽게 넘어가는 정말 세계화된 세계, 또는 제국주의보다도 확장된 ‘제국’이 등장했다. 시장의 흐름은 점점 빨라지고 시장적 효과는 더 미세한 영역에까지 침투한다. 국산 삼겹살 가격이 너무 오르니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수입된 것들이 비싼 고기를 잡지 못하는 사람들의 손에 잡힌다. 사회가 대출을 권장하니 일본 자본조차 국내에서 론의 노래를 지겨울 정도로 부른다. 국가의 조직이나 제도는 늘어나고 커지지만, 실제로 국가는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그 와중에서 다른 한편으로 “패거리, 주변부 집단, 소수자 집단”의 활동이 다양해지고 활발해진다. 극우로 지칭되는 ‘일베’ 패거리조차도 단순히 국가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점에서 그들을 단순히 극우의 한 형태로만 이해하는 일은 너무 단순한 일이다. 보수와 진보의 진영 나누기는 여기서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단순히 정치적 올바름의 관점에서 비난하고 비판한다면 트럼프의 승리
조차도 제대로 파악되지 못할 것이다. 저소득층 백인들이란 무리들도 나름대로 기존의 야당 시스템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것이며, 이 와중에서 힐러리 클린턴을 비롯한 기득권 정치도 희망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힘을 얻는 것이다. 근대적 보편성의 규칙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무리들이 우글거리고 부글거리는 것이다. 이들 무리들은 그 자체로는 바람직스럽지않은 형태들로 보일 수 있지만, 그들도 실재의 형태들이다. 그들을 존재하게 만드는 것은 실재 속에서 소멸되지 않고 해결되지도 않는 강렬한 폭력성이다. 여기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강렬한 폭력성을 타는 무리들은 크게 두 방향에서 관찰된다. 우선 거시적 차원에서 보자. 노마디즘을 일종의 문명화과정의 관점에서 관찰한 자크 아탈리는 앞으로의 사회가 “하부-노마드(infra-nomade), 정착민, 상부-노마드(hypernomade)”들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하부-노마드들이 숫자 또는 거대집단의 관점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상부-노마드들이 주도적이거나 지배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럴 가능성이 크다. 끊임없이 노마디즘의 경향을 보이는 영역이 시장과 종교, 그리고 민주주의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면서 아탈리는 노마디즘으로서의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대해 상당히 희망적인 방식으로 꿈을 꾼다. 그러나 시장과 종교가 얼마든지 약탈적이거나 근본주의적 노마드로 활발하게 움직이는 상황에서, 민주주의가 좋고 착한 방식으로만 진행되리라고 믿기는 어렵다. 시장이든 종교든 민주주의든 앞으로는 훨씬 더 강렬한 폭력성의물결을 탈 것이다. 그것은 긍정적인 저항의 힘으로 작동할 수 있지만 거꾸로 부정적인 난동의 에너지로 표출될 수도 있다. 다음으로 미시적 차원에서 개별화된 형태로 나타나는 강렬한 힘이 있다. ‘혼밥’ 하고 ‘혼술’하고 혼자 여행가는 모나드들이다. 이 점에서 보면, 사회관계망이 제일 잘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이들 개별화 노마디즘을 유발하고 권하는 일일 듯하다. 물론 이들이 언제나 혼자 떠돌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필요하면 이들은 무리끼리 뉴스와 정보를 공유한다. 구름처럼 떠도는 기억장치 또는 가상공간도 이들의 노마디즘을 돕고 확산시킬 것이다. 개인의 뇌로부터 분리된 기억장치 또는 그것과 연결된 장치로서의 인터넷도 새로운 강렬한 힘들을 생산한다.

 김진석 / 인하대학교 철학과 교수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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