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호 문화비평: 반지성주의] 반지성주의와 타자 혐오

ⓒm.blog.naver.com/weareiris/220653323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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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게는 미국에서 부는 트럼프 열풍과 유럽 각국에서 극우정당들의 득세, 가깝게는 여성혐오와 지역혐오를 거리낌 없이 표출하는 ‘일베’ 유저들을 보며 ‘반(反)지성주의’의 폐해를 경고하는 목소리들이 거세다. 그뿐이랴. 하루가 멀다하고 반복되는 정치인들의 폭언과 망언,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천명하는 종교단체들, 21세기에 되살아난 ‘빨갱이’ 사냥과 극우 민족주의까지, 자유민주주의의 역사적 승리를 통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줄 알았던 광폭한 열정이 미디어를 타고 전 세계에 흘러넘치고 있다. 오늘날 시민들은 동료 구성원들에게서 응당 기대하는 책임감과 덕성을 발견하지 못해 좌절감에 휩싸여 있으며, 지식인들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새로이 부상한 대중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탐색하고 있다.

극우 근본주의, 배타적인 민족주의,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 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각각 상이한 맥락을 갖는 이데올로기이지만, 그 근저에 공통적으로 ‘반지성주의’적열정이 깔려 있다는 데에 많은 지식인들이 합의를 이루고 있다. 일본의 반지성주의를 성찰한『반지성주의를 말하다』에서 우치다 타츠루는 반지성주의가 단순한 무지상태가 아니라 ‘외골수의 지적 열정’이라고 지적한다. 즉, 반지성주의자는 지식이 결여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지식과 판단에 대한 확신으로 새로운 정보나 이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이다. 우치다는 일본의 사정에 견주어 말하지만, 우리가 한국사회에서 발견하는 양상도 꽤나 유사하다. 일베 회원들은 실제로 광주민주화운동이 북한 간첩들의 소행이며,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믿는다.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동성애가 유전적 질병이며, AIDS의 병인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굳이 새로운 정보나 사실들로 기존의 통념이나 편견을 수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무지에의 열정’이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의 요소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무지에의 열정에 헌신하게 되는가? 이에 대해 일본의 사회학자 시라이 사토시는 근대사회에서 대중민주주의의 진전에 따라 형식적 평등이라는 이상과 현실의 불평등 사이의 모순이 심화되고, 그 결과 능력이 탁월하거나 부유한 사람에 대한 원한 감정이 쌓이게 된다고 분석한다. 만인이 평등하다는 전제 위에 성립된 민주제 사회에서 현실에 존재하는 지성의 불평등이나 경제적 불평등은 부정(不正)으로서 인식된다. 그리하여 현실에 존재하는 차이를 부인하려는 정념이 발동하면, 대중들은 능력이 탁월한 자를 악당으로 몰아붙이게 된다. 그는 실제로 그런 능력이 없는데도 부당하게 특권을 얻었거나, 젠체하는 위선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유의 소위 ‘민주화의 역설’을 통해 반지성주의를 설명하는 관점은 일베에 대한 분석에도 쉽게 적용할 수 있다. 민주화의 실험이 불완전한 형식적 민주주의로 귀결되고 계급격차와 불평등이 심화되는 현실에 직면해 일련의 젊은 세대는 진보의 이상과 가치에 대해 냉소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자학적인 ‘루저’ 감성을 공유하면서 억눌린 분노를 여성이나 사회적 약자들에게 쏟아붓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누리지 못하는 특권과 행복을 여성과 기성세대가 부당하게 누리고 있다고 판단한다. 여성과 진보진영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성 밑에 깔려 있는 것이 ‘선비질’에 대한 반감으로 대변되는 ‘반지성주의’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제약하려 드는 일체의 시도에 대해 ‘선비질’, ‘진지충’이라는 비아냥으로 응수한다. 대신 ‘선비질’만 하지 않으면 일베 내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다시 말해 지성의 차이를 부인하는 것이야말로 모두가 ‘루저’로서 평등해지기 위해 필수적인 장치이다. 반지성주의가 평등주의의 어두운 이면이라는 명제는 이러한 상황을 적절하게 설명해준다.

이에 더해 신자유주의적 경쟁의 격화와 성과주의도 반지성주의의 주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지성은 성찰과 숙고를 요구하기 때문에 때로 판단과 결정을 내리기 전에 오랜 시간을 요구한다. 그러나 효율성 극대화를 추구하는 성과주의의 압력은 이런 기다림을 허용하지 않으며, 정신적 가치나 교양의 효용에 대해 즉각적인 수익성과 차가운 계산의 논리를 앞세운다. 이러한 사정은 멀리 갈 것도 없이 오늘날 인문교양을 취업률이라는 잣대로 재단하는 대학의 현실을 통해 여실히 증명된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지체하면 무능한 자로 낙인찍히거나 경쟁에서 낙오하는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장기간의 성찰과 사려 깊은 주의를 대신해 즉각적인 정보의 습득이나 통념에 근거한 판단에 몸을 내맡긴다. 물질적 성공이 무조건적으로 긍정되는 현실에서 성찰과 숙고는 비효율적이고 사치스런 행위이며, 굳이 감당할 필요 없는 내적 고민을 선사할 뿐이다.

 

정체성의 위기와 타자 배척

민주화의 역설이나 신자유주의적 성과주의는 반지성주의의 기저에 깔린 요소들이긴 하나, 반지성주의를 특징짓는 무지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을 설명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사람들이 단지 잘난 사람들에게 원한의 감정을 품거나 마음의 여유가 부족해 반지성주의에 이끌리는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런 연유라면 굳이 반지성주의가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공격성과 혐오로 표출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목도하듯 반지성주의적 열정은 타자에 대한 공격성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반지성주의는 어째서 타자 혐오를 수반하는 것일까? 이는 반지성주의자들이 가진 공격적인 성향이나 분노조절 장애의 문제라기보다, 정체성의 위기에 따른 자기보존의 나르시시즘적 욕구와 연관되는 듯 보인다.

반지성주의는 지식을 통한 계몽에 부정적이라는 점에서 반계몽주의에 다름 아니다. 반지성주의자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선언하며, 너의 의견으로 인해 내 판단이나 주장이 변할 일은 없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반계몽주의적 열정은 계몽의 약속이 깨진 것에 대한 냉소적 반응이라기보다 정체성의 변용을 겪고 싶지 않다는 욕망의 발현에 가까워 보인다. 계몽은 새로운 지식을 통해 내가 가진 통념과 편견을 조정하는 한편, 새로운 지식과 사상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아를 변용시키는 과정이다. 근대적인 주체화의 기획은 이러한 과정을 자아의 성숙이자 자유의 실천으로서 파악한다. 근대적 주체란 외부에서 주입되는 사상, 즉 이데올로기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자아 내부의 타자성을 인식하고 이를 상대화함으로써 자유의 계기를 확보하는 주체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과거의 ‘청년세대’란 계급투쟁이건 사회운동이건 ‘사상 투쟁’을 경유하여, 기성세대의 상징적 권위와 질서에 맞서 싸우는 주체성의 자리를 일컫는 표현이었다. 반면 오늘날의 반지성주의자들은 사상을 통해 이질적인 세계, 즉 내 자아를 뒤흔들 타자성이 침입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이러한 차이를 일으킨 요인들을 무수히 언급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미래에 대한 감각의 차이만을 거론하려 한다. 사회의 진보에 대한 믿음과 미래에 대해 열린 전망을 가진 주체는 장차 어떻게 나를 변화시킬 것인가에 관심을 둔다. 그러나 미래가 불투명하고 절망적인 소위 ‘내리막 시대’의 주체는 현재의 나를 유지하는 것에 골몰하게 된다. 즉, 미래에 대한 전망의 차이에 따라, 자아를 개선하려는 욕망과 자아를 보존하려는 욕망 사이의 간극이 존재한다. 자기보존의 욕구로 인해 반지성주의자들은 현재의 ‘순수한 나’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나, 현재의 내 모습에 대한 자기긍정감은 그리 높지 않다. 그렇기에 내 안에 타자성을 들이는 것, 즉 사상을 통해 기존의 자아를 상대화하고 변용시키는 것을 본능적으로 기피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상 또는 언어를 통해 인식하고 대면하는 것은 추상적인 타자성이다. 그러나 사상과의 조우를 회피하는 반지성주의자들은 오직 주변의 구체적인 타자들을 통해서만 타자성을 인식한다. 그리하여 그들에겐 국가나 자본, 가부장제와 같은 구조화된 질서가 아니라 눈앞의 여성, 성소수자, 이방인이야말로 공포와 이질감을 선사하는 타자성으로 인식된다. 반지성주의자들은 사상을 경유하지 않기에 오직 자신의 생생한 감정과 신체적 감각에 의존해 판단한다. 그들이 타자에 대해 극도로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자신의 통념이나 편견을 수정하려 들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요컨대 반지성주의자에게 타자란 나를 불편하게 하는 모든 이들이며, 내가 느끼는 불편함에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진리가 깃들어 있다. 반지성주의와 타자 혐오는 이런 식으로 맞물려 서로를 강화한다. 이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실패했다고 간주되는 계몽의 프로젝트를 재활성화 해야 할까, 아니면 개별 주체의 정념과 신체성에 기초한 새로운 교류관계를 구축해야 할까. 고민은 깊어가나, 여기서는 일단 문제의 언저리에 머무는 것에 만족하도록 하자. 속단이야말로 반지성주의의 지표이니.

최 철 웅 / 계간《문화/과학》편집위원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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