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호 테마서평: 한여름 밤의 스티븐 킹] 스티븐 킹과 은유로서의 호러

『캐리』(스티븐 킹 저·한기찬 역, 황금가지, 2003)
『샤이닝』상, 하 (스티븐 킹 저·이나경 역, 황금가지, 2003)
『스탠 바이 미(사계)』(스티븐 킹 저·임영선 역, 영언문화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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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내부의 얼룩

나는 인간의 내부에는 누구나 얼룩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얼룩은 크고 어떤 얼룩은 작다. 어떤 얼룩은 발목 정도 차오르는 얕은 곳에 있고 어떤 얼룩은 마리아나 해구처럼 영혼의 심해에 침잠해 있다. 어떤 얼룩은 성능 좋은 세정제로 닦일 수 있지만 어떤 얼룩은 지워지기는커녕 건드릴수록 더 심하게 영혼을 더럽히는 것도 있다. 광기와 악의, 혐오와 타자화는 이러한 얼룩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다. 인간이 자기 내부에 있는 얼룩에 개성적인 이름을 붙여주기 시작한 것은 근세기 이후의 일이다. 이를테면 프리드리히 니체나 지그문트 프로이트 같은 이가 얼룩을 재발견하고 라벨을 붙이기 시작했다. 이제야 비로소 인간의 얼룩은 고유한 이름을 부여받고 재분류되고 있다. 이를 얼룩의 지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얼룩에 대해 주목하고 그것에 내러티브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표정을 그려낸 작가들도 있다. 에드거 앨런 포나 H.P.러브크래프트같은 선구자가 그렇다. 그리고 그들의 훌륭한 후계자들이 있다. 이를테면 우리 시대의 스티븐 킹. 자아의 내부에 맺혀 있던 얼룩들을 형상화하여 이름을 붙이는 것으로 치자면 메인 주 태생의 이 미국 작가처럼 능수능란한 이가 없다.그의 호러 작품을 보면 그가 인간들의 지층에 위치한 갖가지 어둠들에 어떻게 인격을 부여하고 심오한 괴물로 불러내는지가 매우 설득력 있게 서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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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Stephen Edwin King, 1947~) ⓒ cinearchive.org

은유로서의 호러

스티븐 킹은 1947년 미국 메인 주의 포틀랜드에서 태어났다. 그가 불과 두 살 되던 해의 어느날 저녁, 담배를 사러 간다던 아버지는 홀연히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것을 시작으로 삶의 궁핍과 불가사의가 그의 유년기를 장식한다. 그런 어린 스티븐 킹에게 유일하게 좋은 것은 다락방의 상자였다. SF 및 호러소설로 가득 찬 책상자. 어린 소년은 낡은 페이퍼백을 읽고 또 읽으며 자신을 덮친 삶의 얼룩에 대해 자기만의 감수성을 쌓아간다. 스티븐 킹의 자전적인 에세이이자 글쓰기 철학을 담
은『유혹하는 글쓰기』에는 작가로서의 정체성과 관련된 꽤 중요한 체험이 기록되어 있다.

대여섯 살 때 스티븐 킹은 어머니에게 사람이 죽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본다. 어머니는 한 선원이 호텔에서 자살한 사건을 들려준다. “아주 박살이 나 버렸지.” 어머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것은 녹색이었다. 난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단다.”어머니의 이 말에 스티븐 킹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도 그래요, 어머니.”여기서 생기는 의문. 왜 스티븐 킹의 어머니는 녹색을 본 것일까? 그녀가 본 녹색은, 사실 착시가 아니었을까? 혹은 녹색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 대한 은유이지는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호러를 일종의 은유라는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이를테면 가라타니 고진은 그의 명석한 에세이「유머로서의 유물론」에서 유머란 “동시에 자기이며 타자일 수 있는힘”이라고 적은 바 있다. 만약 유머라는 현상이 존재의 타자화에 대한 일종의 은유라고 가정한다면, 비슷한 맥락에서 호러 역시 인간의 얼룩이 외면화된 것에 대한 은유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경제학자 우석훈은『생태요괴전』이란 유머러스한 저서에서 뱀파이어(드라큘라)를 자본가와 대기업, 그리고 좀비를 소비자에 비유했다. 이는 호러물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사회학적인 상상력이 담긴 은유로 해석하는 것이다. 즉, 스티븐 킹의 어머니가 본 녹색 일종의 은유라는 것이다.

호러로서의 한국 사회

호러물에 담긴 내러티브를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은유로 가정하는 것은 인간의 합리적 이해에도 들어맞는다. 이를테면 스티븐 킹의 주목할 만한 데뷔작『캐리』에 대해 살펴보자. 1974년 출간되어 스티븐 킹을 전업작가로 만들어준『캐리』는 사춘기 소녀가 맞닥뜨리는 공포를 다루고 있다. 종교적 광신주의자인 어머니에게서 지극히 폐쇄적인 가치관을 주입받아온 캐리는 이로 인해 또래의 문화와 성에 무지하게 되고 학교 내에서 철저하게 따돌림을 받는다. 친구들의 짓궂은 조롱 속에 학교 샤워실에서 초경을 한 그녀는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오는 피를 이해할 수 없다. 그녀는 이 피를 죄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피는 미국의 비현실적인 청교도주의와 그 대척점에 서 있는 물질주의적 세계관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모순에 대한 은유로 해석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시대에는 코시안, 외노자 등 또 다른‘캐리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밤의 거리를 부유하고 있는 것이다.

『캐리』의 성공에 힘입어 발표한『살렘스 롯』과『샤이닝』에서 스티븐 킹은 각각 현대 미국사회에서 기세를 올리는 뱀파이어와 엽기살인마를 주인공으로 선택했다. 특히『샤이닝』은 스티븐 킹 최초의 베스트셀러로 기록되는데 고립되고 단절된 환경이 어떻게 한 인간을 광기로 이끄는가를 실감나게 잘 보여주는 역작이다. 이 소설에는 평범한 가장이었다가 호텔의 악령들에게 홀려 사악한 살인마가 되는 잭 토런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잭은 결국 광기에 사로잡혀 자신의 아내와 아들까지 죽이려고 드는데, 가장 근원적인 신뢰를 가져야 하는 가족의 붕괴는 현대 미국 사회의 고립과 단절에 따른 가치의 붕괴를 은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은유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유효하다. 이를테면 우리사회의 ‘일베’ 현상은 고립과 단절로 인해 자기만의 논리에 함몰되면 어떤 괴물이 탄생하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2006년 어떤 기자회견에서 호러의 제왕 스티븐 킹에게 정작 그 자신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 기자가 있었다. 이에 대해 스티븐 킹은 자신은 조지 W.부시가 제일 무섭다며, 사실 부시 개인보다는 그토록 강대한 군산복합체를 통제하는 힘이 그토록 유별난 신앙과 유치한 감성을 지닌 사람에게 부여됐다는 사실을 두려워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스티븐 킹의 이런 고백은 그의 호러가 충분히 사회학적 상상력에 근거한 은유로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기자회견에서 역시 스티븐 킹에게 가장 궁금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도 나왔다. “죽음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이라고 스티븐 킹은 대답했다. 사실 호러라는 은유를 통해 인간의 얼룩을 탐구한 스티븐 킹은 가장 주목할 만한 중편「시체」에서 죽음과 글쓰기에 대한 존재론적인 성찰을 수행한다(「시체」는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이어진 중편소설집『사계』의 가을 편에 해당한다).「시체」의 주인공 고디는 자신에게 철저하게 무관심한 아버지를 두고 있다. 부모의 무관심은 뛰어난 운동선수였으나 사고로 죽은 형과 관련이 있다. 고디는 죽은 형을 대신할 만한 가치가 없는 잉여존재였던 것이다. 즉, 열등감을 가지고 자포자기한 상태로 시체와 같은 삶을 살고 있었던 게 바로 어린 소년 고디였다.

그런 그에게 철로의 끝에 시체가 있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하여 고디와 그의 단짝 친구들은 시체를 찾아 나선다. 즉, 소문으로 들려온 시체는 곧 정체성을 찾지 못한 고디 자신에 대한 은유이다. 그리고 고디는 여행의 끝에 이르러 시체와 마주하고 드디어 존재론적인 각성을 통해 한 명의 인격체로 거듭난다. 그런데 여기서 존재론적인 각성의 수단은 예술, 즉 글쓰기로 묘사된다.

“소설을 쓰는 단 한 가지 이유는 과거를 이해하기 위해서이며 미래에 맞이할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지요. 그래서 소설의 시제는 거의가 과거형이죠. 아주 잘 팔리는 수백만 권의 책도 다 똑같죠. 유용한 예술의 두 가지 형태는 종교와 소설입니다.”

훗날 작가가 된 고디는 소설 속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물론 작가 고디는『미저리』나『듀마키』의 주인공 작가들처럼 스티븐 킹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호러라는 장르적 특징을 사회학적인 은유로 포섭하고 다시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성찰한 스티븐 킹은 얼룩의 지도 작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또 하고 있다. 수십조 원을 들여 멀쩡한 강을 파헤쳐 죽음의 강으로 만들거나, 국가의 최고 정보요원이 민간인 사찰 의혹에 휘말려 자살인지 타살인지 모르는 죽음을 맞이하거나, 세월호 사건을 계속 거론하는 것은 미래지향적이지 않으니 그만두자는 신문사설 같은 B급 호러가 판치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 스티븐 킹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이다.

조 현 / 소설가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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