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호 책지성: 아서 단토, 『예술의 종말 이후』] 예술의 종말, 현대미술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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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 「브릴로 박스(Brillo Boxes)」, 1969년 버전. ⓒ nortonsimon.org

‘모방의 시대’→‘이데올로기의 시대’→‘탈역사적시대’, 이렇게 예술의 역사를 요약할 수 있을까? 다원주의자로써 아서 단토(Arthur C. Danto, 1924~2013)는 위대한 예술은 매우 다양한 형식으로 언제나 가능하다고 믿었다. 미국 뉴욕의 미술평론가로서 그는 미술이론이 아니라 미술에 대한 (주로 뉴욕의) 직접적 체험으로서 자신의 비평을 형성한다. (이러한 사실은 미학과 미술비평 그리고 미술 실천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되는 칸트, 헤겔, 그리고 하이데거 등과는 경우가 매우 다르다. 그들은 실제 작품과 대면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고 더욱이 예술계와 직접적인 교류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의 철학적 체계와는 전혀 다른 비평적 판단을 하는 것이다. (반면에 예술철학은 일반적이어야 한다.) 그의 미술비평은 그가 이룩한 예술철학으로부터 권위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철학과 미술비평은 본질적으로 다른 계열이다. 미술비평은 평론가가 관람객이 보는 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작업하는 수사학의 형식이다. 현대 철학은 다르다. 실재하는 것으로서 세계를 묘사하는 심화된 (계보가 아니라) 계열을 다룬다. 이 점이 1980년대 이래 미술평론계의 대표적인 주자로 『영구 재고(Perpetual Inventory)』를 쓴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 1941~ )와의 차이이다. 그녀는 미술사학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있다.

미술계가 미술을 만든다!

1960~70년대에 철학자로서 명성을 날렸던 아서 단토는 화룡점정으로 1964년 획기적인 논문을 발표한다. 『예술계(TheArtworld)』라는 제목의 이 예술철학 논문은 앤디 워홀의 ‘조각’전시회에서 착안한 것이다. 그때 그는 예술 개념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함을 깨달았다. “팝 아티스트인 앤디 워홀은 슈퍼마켓의 상품 창고에 물건을 쌓아놓듯이 브릴로 카톤의 복제물들을 정연하게 높이 쌓아올려 전시해 놓고 있다. 우연히도 그것들은 나무로 되어 있으며, 마분지처럼 보이도록 페인트로 칠해져 있다. 왜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또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적어도 지각상의 기준에서 볼 때 워홀의 「브릴로 박스(Brillo Box)」와 너무나도 닮은 슈퍼마켓의 물건들이 단순한 사물들 혹은 단순한 인공물들이라면, 왜 워홀의 「브릴로 박스」는 예술작품인가? 비록 그 물건들이 인공물일지라도 그것과 워홀이 만든 것 간에는 차이점이 없었다. 플라톤은 자신이 침대와 침대를 그린 그림 간의 차이를 구별해낼 수 있었듯이, 워홀의 작품과 슈퍼마켓 상품들 간의 차이를 정확하게 구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워홀의 상자들은 상당히 훌륭한 목공품이다.” 이러한 논의는 1981년 『일상적인 것의 변용(The Transfiguration of the Commonplace)』에로 이어진다.

철학이 미술을 만든다!

그 책의 첫 장에서 단토는 우리에게 시각적으로 동일한 붉은 표면을 상상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는 「키르케고르의 기분」, 「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 민족」, 「 니르바나」, 「 붉은 사각형」, 「 무제」등의 제목이 붙은 그림들로 가상의 전시회를 꾸민다. 그에 따르면 이와 같은 시각적으로 무차별적인 붉은 표면은 각각 매우 다른 의미를 갖는다. 예술을 해석한다는 것은 눈으로 만나는 것 그 이상의 앎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예술작품과 단순한 물리적 대상을 대조한 후에 그는 해석, 재현 그리고 은유의 본질에 대하여 심화된 논의를 전개한다. “예술작품을 바로 그것으로써 구성하는 해석이 없이는 어떤 것도 예술작품이 될 수 없는 한, 예술작품의 지위와 예술작품을 예술작품으로 동일시하는 데 쓰이는 언어 사이에는 내적 연관성이 있다.”

20세기에 미술은 매우 새롭고 다양한 미술 형식을 펼쳐 보였다. 큐비즘, 초현실주의, 추상 표현주의, 대지 미술, 미니멀리즘, 비디오 아트까지. 그래서 많은 평론가들과 일부 미학자들은 예술은 본질을 갖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었다. 그들은 예술에 대한 정의는 관습에 의존하는가, 많은 새로운 예술 형식이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지 않는 이유 등을 묻는다. 우리 시대 디지털, 인터넷, 그리고 인공지능 등은 예술의 형식을 다시 물을 수 있다. 단토는 죽을 때까지 이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고 있지 않았다. 본질주의자로서 그는 예술이 비관습적인 본질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철학에 있어 본질주의자인 나는 예술은 영원히 동일한 것이라는—시간과 장소와 무관하게 어떤 것이 예술작품이 되는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 존재한다는—견해를 가지고 있다.”

1995년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에서 행한 제44회 멜론 강연에서 단토는 예술의 역사가 종말을 고했다는 헤겔의 주장을 다루었다. “예술의 종말은 예술의 참된 철학적 본성을 깨닫게 된다는 데 있다.” 1820년대 후반 강의에서 헤겔은 자의식에 충만한 예술이 철학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단토는 헤겔의 주장이 시기가 빨랐고 앤디 워홀의 예술이 바로 그 자의식을 성취했다고 주장한다. “예술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어야 하고 또 그 의미를 체현해야 한다.” 그러면서 그에게, “미술에 관한 철학적 문제가 미술사 내부로부터 해명되었으며, 역사가 종말에 도달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서양미술의 역사를 그는 『이태리 르네상스의 미술가 평전』을 쓴 바자리(Giorgio Vasari, 1511~1574)와 『예술과 문화』로 유명한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1994)로 나누어 설명한다.

미술의 역사주의와 본질주의

“미술을 재현적인 것으로 이해한 바자리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미술이 ‘시각적 외관의 정복’에 더 능숙해진다고 보았다.” 회화보다 동영상이 실재 묘사 능력이 낫기에 회화의 종말이 등장하고 이어서 “모더니즘은 그렇다면 회화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음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리고 모더니즘은 자신의 정체성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미술평론가 그린버그는 미술의 조건을 모색하면서 회화의 매체성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매체의 물질적 조건이라는 내러티브는 팝아트의 등장과 함께 종말을 고하게 된다. 미술의 종말에서 즉, 예술작품의 양태 혹은 형식에 대한 제한이 부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 속에서 서양미술의 역사에서 최후로 등장한 그린버그 내러티브는 종말에 이른 것이다. 이제 철학적 정체성을 향한 미술의 탐구는 종료되었다는 선언이 터져 나왔다. 이어서 그 종말의 결과로서 예술가들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그 무엇이든 할 수 있게 해방되었다. 옳고 그름 혹은 단일한 방향성은 이제 더 이상 존재치 않는다. 아니 방향들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단토가 “1980년대 중반 이래로 글을 써오면서 예술의 종말이라는 말로서 의미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미술이 죽었다거나 화가들이 그림그리기를 중단했다는 것이 아니라, 내러티브적으로 구성된 미술사가 종말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미술, 역시 현실과 이론 사이에서!

아서 단토는 미술평론가일 뿐만 아니라 철학자였다. 또한 데카르트처럼 이원론자이다. 데카르트는 물질과 정신이 있고 감각과 행위가 그것들을 이어준다고 믿었다. 단토는 재현들이 있고 그것들이 재현한 것, 즉 세계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 마음이 재현한 것들은 물질적 뇌의 상태이다. 그리고 철학은 세계와 그 재현들 사이의 연관에 관한 것이다. 과학과 역사는 사실을 기술하고 철학은 우리가 그 사실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그래서 예술은 이 체계에 너무 적합하다. 우리에게 지식과 함께 제공되는 마음의 상태처럼 예술작품은 세계 내에서 단순한 사물이면서 동시에 세계의 재현인 것이다. 앤디 워홀의 작품 「브릴로 박스」는 브릴로 상자와 같은 단순한 물리적 대상이면서 실제적으로는 그 이상의 어떤 것이다. 미술이론이 그것을 체현(體現)한 덕분에 「브릴로 박스」는 예술작품인 것이다. 단 토 에 따 르 면 모 든 철학적문제는 ‘식별불가능성(indiscernibility)’을 내포한다. 실제로는 다른데 시각적으로는 식별 불가능한 두 사물이 나타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구분할 철학적 이론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인식론만이 우리 마음의 재현들이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플라톤의 침대’처럼 워홀의 「브릴로 박스」와 브릴로 상자의 구분점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둘은 외관상으로는 동일한 것으로 보이기에 왜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가 예술작품인가는 미술이론만이 설명할 수 있다. 잡화점의 브릴로 상자는 단순한 사물이지만 미술관의 「브릴로 박스」는 미술이론 덕분에 미술작품인 것이다. 나를 포함한 철학자/미술평론가가 작품의 이유를 해명하는 데 골몰하는 이유이리라.

김 병 수 / 미술평론가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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