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호 인문학술: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주디스 버틀러의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계보학

 

 

 

주디스 버틀러의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계보학

『젠더는 패러디다』가 재구성한 『젠더 트러블』의 쟁점과 그 현대적 의미

주디스 버틀러는 미국을 대표하는 여성주의 철학자다. 푸코, 들뢰즈 등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이른바‘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의 대표 주자이기도 하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을 통해 주요 사상가들의 논의를 비판함으로써 섹슈얼리티-섹스-젠더 모두, 권력과 사회의 구성물이라는 사유를 드러낸다. 『젠더 트러블』을 번역하고, 『젠더 트러블』에 대한 해설서 『젠더는 패러디다』를 지은 조현준 교수를 통해 『젠더 트러블』의 쟁점과 그 현대적 의미를 짚어 보고자 한다.

 

왜 트러블인가?

 

가장 번화하다는 서울 강남 한복판 거리에서 한 여성이 죽었다. 이유 없이 연고도 없는 남성에게 살해당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여자가 돌아오지 않자 화장실로 찾아간 남자 친구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여자의 시신 앞에 오열했다. 가해자는 여자들이 자신을 무시해서 죽이고 싶었다고 했다. 여성의 임금은 아직도 남성의 60%대 수준에 불과한데 강력범죄 대상의 87.2%(2014년 기준)가 여자다. 여자라는 이유로, 자신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생겨나는 폭력과 살해는 여성에게 어떤 공포를 야기하는가?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꼴페미’, ‘된장녀’, ‘김치녀’,‘ 김여사’,‘ 맘충’은 어떤 혐오를 반영하는가?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1990)은 가족 중심 이성애 사회에서 소외된 퀴어와 소수자의 입장에서 페미니즘을 재고할 것을 요청한다. 이 책이 딱히 여성 혐오와 연결된 것은 아니지만 성적 소수자들이 삶 속에서 겪는 공포에 주목한 후속작 『젠더 허물기Undoing Gender』(2004)나 다큐 <성찰하는 삶Examined Life>(2008)과 연결해 생각해 본다면, 규범과 다르게 행동한다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했던 트랜스젠더 티나 브랜든, 매슈 셰퍼드, 그웬 아라우조가 느꼈을 공포는 지금 한국 여성들이 느끼는 공포, 사회에 만연한 혐오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젠더 트러블』은 『젠더 허물기』보다 십여 년 전에 쓰였고 출간된 지 올해로 26년째지만 여전히 그 이론적 깊이와 무게를 유지하면서 현재의 여성 혐오나 동성애 혐오를 타파할 이론적 근거가 될 수 있다. 버틀러는 남성/여성의 지배/피지배, 동일자/타자 구도뿐 아니라 여성/드랙(여장 남성), 원본/모방본의 이분법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경멸과 수치, 혐오와 공포라는 지금의 한국 상황을 극복할 방법론으로 버틀러의 논의를 재의미화해 볼 수 있다. 자기동일적 의미화의 실패, 이분법적 구조의 불가능성, 그리고 인과론을 전도하는 방식으로 젠더의 계보학을 시작할 수 있다.

 

『젠더 트러블』이 일으킨 트러블

 

『젠더 트러블』은 기존 젠더에 트러블을 일으키고 당연하게 여겨졌던 젠더의 의미에 균열을 낸다. 페미니즘이 백인 이성애 중심주의적 가족구조에 중심을 두고 있다면 『젠더 트러블』은 역사, 지역, 성적 경향의 맥락에서 구성되는 젠더의 복합적 다양성을 말할 뿐만 아니라 섹스나 섹슈얼리티조차 이미 언제나 젠더였다고 주장한다. 젠더가 명사가 아닌 동사이고 ‘자유롭게 떠도는 인공물(free-floating artifice)’이며 이는 젠더뿐 아니라 섹스나 섹슈얼리티에도 해당된다는 주장이다.

젠더가 자유롭게 떠도는 인공물이고 언제나 생성되는 과정 중의 구성물이라면 그것은 당연하거나 근원적인 것일 수 없다. 누군가를 여성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생물학적 신체를 지칭한다기보다는 당대의 여성성으로 규범화된 이상적 특질을 구현한다는 의미이며, 그런 여성적 특질은 ‘담론적으로 성립된 정체성의 인종적, 계급적, 민족적, 성적, 지역적 양상들’과 부단히 마주하면서 문화와 정치의 접점에서 구성되기 때문이다. 젠더란 지속적으로 변화하면서 맥락화되는 현상으로서 어떤 본질적인 존재가 아니라‘문화적이고 역사적인 특수한 일련 관계를 둘러싼 상호 수렴의 지점’이다. 버틀러는 이를“본질의 외관, 자연스러운 듯한 존재를 생산하기 위해 오랫동안 응결되어 온 매우 단단한 규제의 틀 안에서 반복된 몸의 양식이자 반복된 일단의 행위”라고 말한다.

‘반복된 몸의 양식이자 반복된 일단의 행위’는 당대의 남성적이고 여성적인 몸에 대한 규범을 형성해 반복 수행하는 가운데 형성되는 의미가 된다. 예컨대 지금의 남성다운 남성이 ‘꽃미남’보다는 ‘짐승남’이라면, 곱상하고 미소년 같은 이미지보다는 남성적이고 근육질 몸매의 터프가이가 남성성으로 의미화되는 문화적 상황 속에 있다는 의미다. 만일 여성다운 여성이 ‘뇌섹녀’보다는‘베이글녀’라면, 지적인 여성보다는 베이비 페이스에 글래머 몸매를 가진 여성을 여성성의 대표로 받아들이는 사회적 맥락 속에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런 상황과 맥락이라면 남자가 남자답고자 할 때 단백질 식이요법과 근육 운동을 할 것이고, 여자는 여자답고자 할 때 요가와 스킨케어 혹은 메이크업을 병행할 것이다. 다른 이상이 남성적이고 여성적인 몸으로 제시된다면 이런 몸의 양식이나 반복된 행위는 그 이상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다.

섹스나 섹슈얼리티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XX나 XY의 성 염색체를 타고 나고 그 염색체나 해부학적 성기 구조가 남녀의 생물학적 이분법을 가능하게 한다고 흔히 생각하지만 이런 이분법에 맞지 않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면 과연 그 과학적 객관성이 성립되는가를 의문시할 수 있다. 버틀러가 생물학적 성차의 과학적 객관성을 의심하기 위해 드는 예시가 몇 가지 있다. 『젠더 트러블』에는 19세기의 양성인간 에르퀼린 바르뱅의 비극적 삶과 20세기의 MIT의 페이지 박사가 불임환자를 대상으로 연구한 성 염색체 이상자에 관한 결과 보고서를 예시로 들고 있다. 바르뱅은 여성으로 태어났으나 이차 성징기에 후천적으로 남성성이 발전했고, 이후 공청회와 의료검진을 통해 남성으로 판별된 뒤 연인과 직장을 동시에 잃고 떠돌다가 자살했다. 페이지 박사는 자신의 연구 대상의 10%가 XX나 XY에 맞지 않는 성 염색체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연구 결과로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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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 ⓒ versobooks.com

 

『젠더 허물기』에는 21세기 인터섹스 사례가 소개된다. 남자 아이로 태어난 데이비드는 월령 8개월이 되었을 때 포경수술 집도의의 실수로 거세되다시피 했고, 이후 정상적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지를 우려한 데이비드의 부모님이 사회문화적 전환론자 존 머니 박사를 만나면서 데이비드를 여성으로 키웠다. 머니 박사의 지도하에 데이비드는 고환마저 제거하고 예비 질수술을 받았으며 여성 호르몬을 투여 받으며 브렌다로 자랐다. 그러나 자신의 성 정체성에 만족하지 못하다가 해부학적 결정론자 밀튼 다이아몬드 박사를 만나 14~5세 무렵에는 유방을 절제하고 예비 음경을 달았다. 문제는 두 박사가 각각 주장한 성의 성형성이나 자연성은 모두 외부의 학문적 관점에서강제적으로 부과되고 인위적으로 유도된 것일 뿐, 데이비드/브렌다 자신의 욕망이나 심리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섹슈얼리티의 문제는 더 복잡하다. 우리는 이성애를 보편적 욕망이라고 규범화하지만 그 규범에 딱 들어맞지 않는 욕망들도 많다. 비규범적인 욕망을 간단히 동성애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드랙이 남성에게 매혹되는 것은 동성애라고 보기 어려우며, 영화 <소년은 울지 않는다>(1999)에서 브랜든이 라라에게 느끼는 매혹은 남장 여성의 이성애적 욕망인지 판타지적동성애적 욕망인지 분명하게 구분할 수가 없다. 펨이 부치에게 자신의 남자 친구가 좀 더 여성스러웠으면 좋겠다고 말할때 섹슈얼리티는 젠더와 경계를 공유하며, MTF(male to female)가 성전환 이후 남성을 사랑하다가 여성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 여성이 알고 보니 트랜스 젠더라면 섹슈얼리티는 더 복잡해진다.

이처럼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단순히 해부학적 사실, 문화적 동일시, 근원적 욕망으로 구분하여 명확히 정의하기 어려울 만큼 복합적으로 교직되며, 그 의미는 당대의 지배적 담론이 만든 인식 가능성과 인정 가능성에 토대하고 있다. 그래서 섹스와 젠더와 섹슈얼리티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형성 중의 구성물이다. 결정된 내적 본질이나 완결된 고유한 속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섹스는 이미 젠더이며, 섹슈얼리티도 다르지 않다.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 각각은 자기 동일적 의미화에 실패하고, 이 때문에 남성/여성, 남성성/여성성, 이성애/동성애의 이분법적 구조도 불가능해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인간의 근본적 전제로 제기되어 온 근원적 욕망, 근친애는 더 이상 근친애 금기의 법을 생산시킨 근본적 욕망이 아니다. 욕망이 복잡한 의미망 속의 복합적 산물이 되면서 근원적 욕망을 이성애적 욕망이라고 단정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근원적 욕망에서 그것을 금지하는 법이 나온 것이 아니라, 이성애적 욕망을 근원적인 욕망으로 만든 것이야말로 정신분석학이라는 법이 된다. 욕망이 법을 만든 것이 아니라 법이 욕망을 만든 것이다. 여기가 바로 욕망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탐색하는 계보학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다섯 가지 쟁점

 

『젠더는 패러디다』(2014)는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중 5가지 쟁점을 전경화해『젠더 트러블』이 가진 문제의식과 논쟁 지점을 명료하게 드러내려 한다. 『젠더는 패러디다』가 『젠더 트러블』에서 부각시킨 쟁점은 보부아르의 이원론과 이리가레의 일원론에 대한 도전, 라캉의 상징계 논의 비판, 프로이트의 근친애 욕망 금지에 전제된 이성애적 욕망 비판, 크리스테바의 모성성 비판, 마지막으로 푸코의 동성애적 쾌락의 이상화와 위티그의 레즈비언 이상화 비판으로 모아진다.

첫 번째는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일원론과 뤼스 이리가레의 이원론에 대한 비판이다. 보부아르나 이리가레는 여성의 주체적 위치를 회복하고 남근로고스중심주의를 폭로했다는 점에서 선구적 페미니즘적 통찰을 보여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보부아르는 주체적 위치를 남성과, 타자적 위치를 여성과 동일시함으로써 기존의 이분법적 질서를 답습하고 있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는 그의 선언문도 태어나는 여성과 만들어지는 여성을 이분화해 태어나는 여성은 열등하지만 만들어지는 여성은 우월하다는 이분법을 유지하고 있다. 만들어지는 여성이 타자에서 주체로, 즉자에서 대자로, 구속에서 자유로의 변화를 의미한다면, 여전히 남성적인 것이 우월한 것이고 여성은 학습과 교육을 통해 남성적인 것에 도달하려 노력하는 것이 되면서 기존의 남녀 이분법은 오히려 공고해진다.

이리가레의 설명을 따르면 남근로고스 의미화 경제 속에서 의미는 오직 남성적인 것뿐이며 여성은 부재나 공백으로만 존재한다. 여성은 재현불가능성이라는 담론 속의 패러독스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남성중심성이라는 일원적 의미화 체계 안에서 여성이 구성하는 것은 규제 불가능성이나 지칭 불가능성일 뿐이라면 여성은‘하나가 아닌 성’으로 그런 남성적 의미 질서를 벗어나는 성이 된다. 남녀의 불균형적 변증법 자체가 남성 의미화 경제의 자기 독백적 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결핍이나 타자가 아니라 그런 재현 요건을 비껴가는 여성은 주체의 표식이 될 수 없다. 버틀러는 젠더가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특수한 일련의 관계를 둘러싼 상호 수렴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성적인 성이 언어의 부재지점이 되면 남성적 담론의 근원적 환영으로 남성중심주의를 반복하거나 여성적 섹슈얼리티라는 대안을 초문화적 이상으로 생산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두 번째는 라캉의 상징계 논의 비판이다. 라캉은 상징적 위치로서의 남성과 여성을 논의하면서 남성은 ‘남근 갖기(having the phallus)’ 여성은 ‘남근 되기(being the phallus)’의 위치를 갖는다고 성 도식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런데 버틀러는 남근이 없는 여성이 남근을 가진 척 위장하여 상징적인 여성의 위치를 갖는다면 그것은 뭔가 다른 것, 즉 라캉의 남근 중심적 상징계를‘위한 되기(being for)’이며 일종의 코미디라고 반박한다. 심지어 상징계를 신격화하려는 신학적 충동인 동시에 노예의 도덕이라고 비판한다.

세 번째는 프로이트의 근친애 욕망 금지에 전제된 이성애적 욕망을 비판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우울증은 사랑했으나 애도를 통해 완전히 떠나보내지 못한 대상을 내 안에 합체하는방식이다. 따라서 대상애가 자아 정체성을 구성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주목받을 만하다. 그러나 애도하지 못해 합체한 대상이 이성 부모에 대한 근친애적 애착만이 아니라 동성부모에대한 동성애적 애착이라는 점이 간과되고 있다. 프로이트가 근원적인 양성애적 기질을 논의했음에도 불구하고 근친애 욕망이라는 이성애를 모두의 기본 욕망으로 삼고 있다는 비판이다. 여아가 아버지에 대한 근친애적 욕망 이전에 갖고 있던 어머니에 대한 동성애적 욕망은 원천적으로 봉쇄되거나 애초에 배제되어 억압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네 번째 쟁점은 크리스테바의 모성성, 기호계와 코라에 대한 비판이다. 크레스테바는 라캉의 부권적 상징계를 재해석해 상징계나 상상계 이전 어머니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기호계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적 시각을 투영한 기호학자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버틀러는 크리스테바의 기호계나 코라의 이상성이 정치적 전복력을 가지지 못하며, 패배할 운명에 놓인자가당착적 이론이라고 비판한다. 아버지의 법에 복종하지 않는 잉여물로서의 코라나 모성적 대상은 리비도의 다성악으로 상징 언어에 균열을 낸다고 하지만, 알 수 없는 기호계가 의미화조차 되지 않고 혁명성을 갖기는 어렵기 때문에 해방 담론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버틀러에 따르면 시적 언어의 혁명성이나 전복의 근원으로 간주되는 기호계는 아이를 임신 중의 모체가 느끼는 맥동이나 리듬으로만 표현되며 언어적으로 알 수 없고 설명도 불가능하다. 기호계는 레즈비언의 동성애적 욕망과 연관되면서 정신병에 접경하는 것으로 설명되는데, 여성이 출산이라는 경험을 통해 모녀간의 유대를 만든다면 레즈비언은 동성애적-모성적 국면에 닿을 수 없으며 섹슈얼리티로 인정되지도 않는다. 게다가 출산과 동성애가 상징계의 관점에서 유지될 수 있는 유일한 시적 언어이자 기호계의 형식이라면 동성애적 욕망의 카섹시스는 정신병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경험적 출산행위나 임신 중의 모체를 이상화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마지막 쟁점은 푸코의 동성애적 쾌락의 이상화와 위티그의 즈비언 이상화 비판에 해당한다. 푸코는 섹슈얼리티가 권력적 담론의 구성물이라는 점을 간파한 계보학의 선구자중 하나지만, 버틀러가 보기에 그는 성의 역사 1: 앎의 의지』에서와 달리 『에르퀼린 바르뱅의 일기』에서 에르퀼린의 섹슈얼리티를 낭만화하고 있다. 에르퀼린의 섹슈얼리티를 구성하는 동시에 비난하는 구체적 권력관계를 보지 못한 채 ‘비-정체성의 행복한 중간지대’나 ‘고양이도 없이 빙글대는 웃음만 떠도는 세계’로 이상화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여성의 몸으로 태어나 남성적 성애를 경험한 에르퀼린의 사례를 쾌락의 증식, 초월적 쾌락의 세계라는 일종의 해방 담론으로 제시했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판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위티그 역시 이성애 중심사회를 비판하면서 레즈비언 정치학의 가능성을 주장한 선구자 이론가 중의 하나지만 버틀러는 ‘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다’라는 위티그의 주장이 레즈비언을 특화된 대안적이고 이상적인 존재로 세울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한다. 몸의 고정적 의미를 해체하고 기존의 여성 범주를 전복하면서 그 정치적 용례의 폭력성을 폭로하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지만 이런 작업이 레즈비언이라는 특정 존재를 이상화하게 되면 또 다른 억압적 이분법으로 환원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위티그의 말대로 레즈비언이 남성과 여성의 범주를 넘어서는 유일한 개념이라면 레즈비언은 기존의 성의 범주를 넘어서는 대안적 개념으로 제시될 우려가 있다. 성이 언제나 여성이라서 존재하는 성은 여성뿐이라는 주장도 젠더만큼이나 섹스도 성적으로 구성되며 남녀는 정치적 범주일 뿐 자연스러운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과 충돌을 일으킨다. 따라서 버틀러는 위티그 식의 해체와 전복은 존재론적으로 곤란한 위상을 가진다고 비판한다.

 

차별이나 혐오 없는 차이의 수용

 

『젠더는 패러디다』는 이처럼 다섯 가지 쟁점을 중심으로 『젠더 트러블』을 재구성하면서 기존 철학자들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논쟁적으로 접목해 버틀러만의 젠더 이론을 창출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러나 『젠더 트러블』이 현란하고 화려한 논리적 전개 이면에 기본적으로 계속 갖고 있는 생각은 자기동일성의 폭력을 폭로하고 차별 없는 차이의 수용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라고 생각된다.

 지금 우리는 지나친 개인 간의 경쟁이 야기한 폭력의 시대를 살고 있다. 후기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가 불러온 무한 경쟁에서 오는 심리적 피로와 압박감은 자신보다 약자에 대한 분노와 폭력에서 손쉽게 출로를 찾으며, 그 출구를 정당화하는 것이 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이다. 여성 혐오는 여성 차별의 폭력적인 다른 이름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차별이나 혐오 없이 차이를 수용할 것인가? 자기 동일성의 내파를 통한 위계적 이분법의 타파, 그리고 규범화된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당연함과 자연스러움이야말로 제도 담론과 규율권력의 반복 수행 결과라는 계보학적 탐색이 그 출발점이 아닐까? 『 젠더 트러블』은 차이의 윤리적 수용으로 나아가는 첫 단추일 수 있다.

 조 현 준 /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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