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호 영화비평: <곡성 哭聲>(2016)] 미끼, 그 의도된 뻔뻔스러움

*다량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곡성 哭聲>이 개봉한 지 20여 일이 지났지만 이 영화에 대한 인터넷상의 논쟁(?)은 식을 줄 모른다. 대체로 기자나 평론가들은 걸작이 나왔다고 극찬하는 쪽이다. 아니 적어도 시종일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몰입하게 만드는 극적 흡인력에 찬사를 보낸다. 여기에 나도 동의한다. 적어도 긴장감 있는 리듬으로 서사를 전개시키는 나홍진 감독의 재능은 칭찬해 줘 마땅하다. 관객들의 반응은 명확하게 호불호가 나뉜다. 어떤 이들은 풀리지 않는 퍼즐을 맞추는 데 열광하고, 어떤 이들은 서사의 허점을 비난한다. 사실, 기자, 평론가들도 역작이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찜찜한 구석을 무시하지 못한다. 나는 그런 찜찜한 구석을 일거에 날려버릴 어떤 명쾌한 해석을 할 생각도, 의도도, 능력도 없다. 애초부터 그런 건 존재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글은 <곡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아니라(이미 네티즌들의 경천동지할 해석들은 인터넷상에 차고 넘친다) <곡성>이 눙치고 지나간 것들을 영화장르의 규칙에 입각해 찬찬히 되짚어보면서, <곡성>같은 영화를 낳은 미디어 환경에 대해 짧게 덧붙일 것이다.

ⓒgoksung.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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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의 규칙과 영화언어의 일탈

<곡성>은 ‘외지인’이라 불리는 일본인이 낚시에 미끼(떡밥)를 끼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많은 이들이 거론했듯이, 이것은 이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거대한 미끼로 채워질 거라는 걸 암시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의 공식 포스터에서 유일한 카피는 “절대 현혹되지 마라”다. 이는 영화의 주인공 종구(곽도원)에게 보내는 메시지이자, 관객들에게 정신 차리고 이 영화를 따라오라는 감독의 큐 사인이기도 하다.

영화는 마치 <살인의 추억>(2003)처럼 시골에서 벌어지는 연쇄 살인사건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살인의 추억>과는 달리 개인(여성)에게 가해지는 강력범죄가 아니라 일종의 집단학살이다. 살인과 방화, 학살당한 사람과 겨우 살아난 사람들의 몸에 난 의문의 두드러기, 피해자들이 짐승처럼 난폭한 행동을 보임으로써 관객의 의문은 증폭된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은 야생 독버섯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영화의 중반부에는 야생 독버섯이 일으킨 가공할 사고에 대해 전하는 TV뉴스가 뒤따른다. 전통적인 미스터리 영화라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의문의 사건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왜 사람들의 몸에는 두드러기가 나고 눈을 까뒤집으면서 짐승같이 난폭한 행동을 일삼는가? 영화는 여기에 대한 해답을 주는 대신 다른 장르로 이동한다.

여기서 다른 장르란 공포영화의 하위장르인 오컬트(occult)다. <엑소시스트 The Exorcist>(1973), <오멘 The Omen>(1976) 등의 영화로 대변되는 오컬트는 한국의 공포영화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장르는 서양의 기독교가 갖고 있는 명징한 선과 악의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으며, 유일신(여호와)을 부정하는 적그리스도를 다룬다. 이런 맥락은 한국적인 차원에서 샤머니즘과 주술로 변이된다. 종구의 딸 효진(김환희)이 악몽에 시달리다 귀신이 들리고 이를 퇴치하기 위해 무속인 일광(황정민)을 불러온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 효진이 걸린 병(?)은 앞선 피해자들과 같은 것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피해자들이 외지인과의 접촉 혹은 상해에 의해 그렇게 된 것처럼 효진 역시 그러한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서사가 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는 장르적 차이가 있다. 앞선 피해자들은 물리면 감염되고 또 다른 이들을 물어 감염시키는, 공포영화의 또 하나의 하위장르인 좀비(zombie)에 가깝다. 그에 비해 효진은 오컬트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귀신들린 아이인 것이다. 이 아이가 남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은 맞지만 짐승처럼 난폭해지거나 눈을 까뒤집으며 남을 물지는 않는다.

<곡성>은 이렇게 여러 장르에서 수많은 규칙과 관습을 이리저리 섞어놓는다. 물론, 그것은 탓할 일이 아니다. 장르란 그 자체로 혼합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광과 외지인이 주술을 겨루는 것을 교차 편집한 장면에서 죽었던 박춘배가 갑자기 살아나는 것은 오컬트가 아닌 좀비영화를 연상시키지만 이 정도는 그냥 애교로 봐주자. 문제는 이 영화가 영화언어의 일탈을 장르의 규칙(과일탈)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앞선 문장에서 “일광과 외지인이 주술을 겨루는 것”이라고 썼지만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왜냐하면 둘이 한패일 수도 있다는 것이 영화의 결말에 가서 밝혀지기 때문이다. 눈 밝은 네티즌들은 일광이 처음 등장할 때 일본처럼 왼쪽 차선으로 차를 몬 것, 그가 외지인이 입는 훈도시를 입고 있었던 것, 그리고 결정적으로 외지인이 살인한 자들의 사진을 모은 것처럼 그 역시 사진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이를 추측한다. 그러나 이렇게 결론짓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가 설명돼야 한다. 우선, 일광이 소위 살(煞)을 날리는 굿을 할 때, 이에 질세라 외지인도 일본식 제의(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태국식 제의에서 가져온)를 한다. 일광은 효진에 들씌운 살을 날리는 거겠지만 이 장면은 일광의 주술, 그에 고통스러워하는 효진의 모습, 그리고 자신의 거소에서 제의를 하는 외지인의 모습으로 교차 편집된다. 즉, 이것은 명백하게 효진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주술의 대결인 것이다. 심지어, 외지인은 일광의 주술에 걸려든 것처럼 고통스러워한다. 종구가 고통스런 효진을 보다 못해 주술을 멈추게 하자 거의 죽은 줄 알았던 외지인은 깨어난다. 그 이후 장면에서 종구와 친구들이 외지인에게 린치를 가할 때 그의 모습은 그저 약한 늙은이나 다름없어 동정심마저 자아낸다. 이 장면들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만약 둘이 한 패라면 이 장면들은 관객의 눈을 속인 것이다.

둘째, 일광은 무명(천우희)을 보고 그 기에 눌려 피를 쏟는다. 그러면서 종구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살을 잘못 날렸다고, 즉 마을 사람들과 효진을 그렇게 만든 것은 외지인이 아니라 무명이라고 말한다. 이 장면은 진심으로 자신의 실수를 자각한 것처럼 제시되는데, 둘이 한 패인 것이 맞다면 이 역시 논리에 어긋난다. 영화의 편집은 무명을 보고 자신의 실수(하지만 둘이 한패라면 실수란 건 있을 수 없다!)를 깨달은 일광이 이를 종구에게 알리는 것 이외에 다른 해석의 여지를 관객에게 주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주술이 외지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효진을 향한 것이라 해도 3중의 교차 편집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인드 – 게임 영화?

영화학자 토마스 엘새서(Thomas Elsaesser)는 복잡한 플롯과 각종 트릭에 관객들이 잘못 이끌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즐기는 영화들을 ‘마인드-게임 영화(mindgame film)’라고 불렀다. 퍼즐을 펼쳐놓으면서 관객들을 현혹하고 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그들과 게임을 벌이는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 환경이 낳은 이 영화들에서 관객들은 갖가지 해석을 덧붙이며 서사의 빈틈을 채운다. 영화 자체가 갖고 있는 개연성을 따지기보다는 새로운 해석을 통해 빈틈을 채우는 것이다. 때로 이런 영화들은 거짓말하는 내레이터가 등장하거나 허위의 시점 쇼트 같은 것을 제시하기도 한다. 사실, 이런 건 흔하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 기억의 주체가 아닌 사람에게 과거를 회상하는 플래시백의 역할을 부여하는 것은 다반사다. 그러나, <곡성>의 빈틈은 이런 차원의 것이 아니다. 이 영화는 자신의 영화언어가 갖고 있는 내적 결함을 관객들의 새로운 해석으로 채우고자 한다. 그리고 마케팅의 필수적인 일부로서 감독이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러면 관객들은 그 실마리를 토대로 또 새로운 해석을 낳는다. 이렇게 영화는 수많은 해석과 억측 속에서 거대한 퍼즐이 된다. 말하자면 이 빈틈들은 ‘의도된 뻔뻔스러움’이다. 나홍진 감독이 천재라면 이런 미디어 환경을 즐길 줄 아는 영민함 때문이지 그의 영화가 걸작이기 때문이 아니다. 엘새서는 말한다. “이 영화들은 그들 자신의 지시성(referentiality)을 창조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이 지시하는 것은 게임의 규칙”일 뿐이다.

 

정영권 / 단국대학교 한국문화기술연구소 연구교수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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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1. 님이 지적하신 그 모든 부분들이 바로 사용된 텍스트(영화 언어)의 불확실성이 만들어내는 힘이죠. 그걸 실수이며 뻔뻔함이라 말할수 있다는건 텍스트의 변화무쌍한 가능성 자체를 부정해 버리고 신비평도 아닌 사이비 신비평을 잡는 노력 밖에 안됩니다.
    그렇게 따지면 해체주의 비평은 아예 불가능하고요, 해체학을 선택해 텍스트의 불특정성에 기대어진 모든 예술 작품은 다 실수고 뻔뻔함이 되겠죠.

    그리고 앨새서 교수의 글을 인용하기 이전에 영화의 텍스트에 대한 꼼꼼한 검증이 먼저죠. 일단 대부분의 비평들이 신비평의 관점에서 그 뿌리를 출발시키기 때문에 비평을 전개함에 있어서 텍스트를 막무가내로 손상시켜 버리면 안된다는건 기본 아닙니까?

    언급하신 일본인과 무당의 굿 장면에서도 텍스트는 일본인과 무당이라는 두개의 텍스트만 존재하는게 아니라 무명과 살이 꽂힐때마다 괴로워 하는 아이라는 두개의 텍스트가 더 있습니다.
    그리고 그 텍스트의 교차 편집은 일반적 몽타주 효과에 길들여진 관객의 인지가 서사를 구성하게 만드는 계산으로 적용된거죠.
    이러한 점은 이미 에드거 앨런 포 때부터 시작되서 이미 정형화된 퍼즐 전개의 방식입니다.

    게다가 일광이 종구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또한 기존의 텍스트들의 전개로 충분히 설명이 되는 부분입니다만.
    일광은 일본인과 한패인것이 기존 텍스트들로 드러나 있었고, 일본인의 음모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주인공이 닭이 3번 울기전에 집으로 들어가야할 필요가 있었죠.
    그가 당황해 하는것은 무명의 존재를 알게되었기 때문이죠.
    이처럼 텍스트를 꼼꼼하게 읽지 않으시고, 무엇보다 텍스트의 의미들이 하나로 고정될수 있다는 로고스 중심주의에 사로잡혀 계십니다.

    위쪽에서 장르는 종합되어 만들어질수 있다는걸 말하면서도 아래쪽에서 몽타주 효과의 새로운 배열에 대해서는 무책임이니 실수니 운운하시니 어이가 없네요.
    그리고 애초에, 영화 언어는 그 자체로 아무런 긍정적 부정적 가치를 가지지 않습니다. 영화 언어란 영화에서 네러티브를 전개하기 위한 모든 수간을 총 일컬어 말하는 거고요, 그걸 어떻게 배열하고 어떤 방식으로 조합할지는 어디까지나 창조자의 마음이죠.

    임페리얼급 디스트로이어의 등장이 영화 관객의 몰입을 해칠수 있다고 루카스에게 클레임을 걸고 결국 탈퇴까지 하게 만들었던 70년대 보수주의 미국 감독 협회를 연상 시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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