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호 인문학술: 레비나스] 레비나스의 주체물음과 형이상학-척박한 세상에서 삶의 구원과 풍요로움을 찾다-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학’은 근대 서구 지식 담론의 출발점이었던 견고하고 단독적인 주체 이전에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이 있음에 주목한다. 얼굴과의 마주침을 통해서만 비로소 주체 역시 가능하다고 말하는 레비나스의 철학은 세월호 사건 이후 우리 지식 담론의 영역에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본보에서는 레비나스의 윤리학이 어떠한 이론적 입장 위에서 이루어졌는지를 검토하고 우리 사회와 학문의 장에서 차지하고 있는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왜 그의 타자철학인가?

레비나스(Emmanuel Lévinas, 1906~1995)의 타자철학은 데카르트 이후 서구 근대철학의 전통을 차 지해 왔던 사유 중심적인 주체철학에 저항한다. 그에 따르면 서양철학의 역사는 사유의 체계성을 중시하면서 존재의 일반화와 관념주의를 초래했으며 이것으로부터 귀결된 지식의 추상성은 인간주체의 고유한 영역을 희석시키거나 비인간적인 폭력성을 불러 왔다.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과 학살을 목격했던 그는 그런 철학적 비판의식을 갖고 당시의 시대적 흐름이 낳았던 실존주의에 호응하며 타자철학을 주장한다. 그의 철학은 철저하게 인간의 한계를 직시하며 실존적 고독으로부터 탈출구를 찾고자 하고 현실적 인간의 번민으로부터 삶의 구원과 자유를 얻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래서 그의 절실한 철학적 고민은 ‘지금 여기에’ 있는 그대로의 주체와 그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하고 실추된 인간의 위기를 윤리적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이런 연유로 그의 타자철학은 휴머니즘을 지향한다.

212-04-사진1

우리는 레비나스의 사상적인 깊이가 유다이즘에 관한 그의 종교적 관심을 토대로 완성될 수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그는 유년기에 부모로부터 히브리어를 배웠고 유대인 마을의 시나고그(synagogue, 유대인 전통교회)에서 전통적인 신앙을 키울 수 있었다. 이후 청년 레비나스는 파리의 유대인 공동체 모임에서 중세의 유대인 학자 마이모니데스를 연구하며 유대인들의 지적인 전통을 계승하고자 했다. 탈무드에 관한 조예와 깊이는 탁월했으며 6권의 주석서를 내놓기도 했다. 지적인 다른 성장배경으로 그는 독일의 프라이부르크로 유학을 떠나 후설과 하이데거의 철학을 배우고 와서 1930년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후설의 직관이론을 중심으로 대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한다. 그는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에 앞서 프랑스에 최초로 후설의 철학과 현상학을 알리는 역할을 하며 후설의 『데카르트적 성찰』을 불어로 번역 출판한다.

이후 가족들이 나치정권에 의해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고 새로운 철학의 가능성과 인간의 문제를 사유하기 시작한다. 서구사상의 전체주의적 논리와 폭력성을 비판하고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대립각을 세우기도 하는데 그의 철학적 사유가 독창적으로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 『시간과 타자』(1948)이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의 실존적 한계와 불가피성을 토로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구원의 메시지를 제시하며 신과 타자 그리고 실존의 관계를 설명한다. 이후 대표 저서 『전체성과 무한』(1961)은 그의 타자철학과 형이상학을 완성한다. 그의 타자사상은 현대 철학사에서 하이데거의 존재론이나 후설의 현상학과 비교되면서 1980년대부터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리고 그 핵심은 ‘타자란 무엇인가’라는 존재물음이다. 한국에서도 20년 전부터 회자되기 시작한 그의 사상에 대한 진부한 의심들 중의 하나는 결국 타자 철학이 주체의 도덕성을 중시하고 당위론적 가치를 되풀이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윤리학의 일부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그의 타자 철학은 유대-기독교의 전통에 서서 신 중심적인 가치를 제안하기 때문에 존재론적 이해와 논증적 가치를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소문과 달리 새로운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점들은 타자철학이 갖고 있는 매우 혁신적이면서 독특한 점들에 대한 주요 이해가 간과됐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그의 철학이 유럽은 물론이고 미주지역에서도 국제적으로 큰 호응을 얻어내고 있는데 짧은 시간동안 그토록 다양하게 이해되고 있는 이유들은 무엇인가? 왜 그의 철학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인가? 무엇보다 우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의 타자윤리에 대한 기대를 하게 되는데 그 이유를 먼저 언급해 보도록 하자.

첫째, 사상적으로 타자철학에는 서구사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헤브라이즘의 전통이 숨쉬고 있으며 타자를 중심에 두고 신과 인간의 관계를 역동적으로 사유하는 방식은 차별화된 지적인 궤도를 보여주면서 인간정신의 지평을 크게 확장한다. 데카르트의 자아 중심적인 사유주의 이후 발전한 관념론의 철학은 ‘이성적인 주체’에 시대적인 관심을 실어 왔지만 인간이해를 위한 철학적 체계성이 더욱 난해해지고 추상화 됐다. 레비나스는 타자존재를 부활시키면서 새로운 휴머니즘을 제창한다.

둘째, 인간의 삶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나’이외의 다른 숨겨진 부분들 속에서 찾고자 하는 지적인 관심들이 현대사회에서 커지고 있는데 삶의 차원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건강한 생명과 자연환경, 타인들과 함께할 수 있는 공동체의 윤리, 종교적인 영생 등에 관한 대중적 이해도가 높아진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점에서 타자는 이미 고유한 주체 자신의 중요한 일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타자는 자아 자신이거나 주체에 대한 사유의 심화를 가져오는 지평이 될 수 있는데 레비나스는 여기에 천착한다.

셋째, 지난 한 세기 동안 인간과 진리의 본질을 다각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과 가치들이 인문·사회 분야의 여러 지식들 가운데 등장하게 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신체, 타자, 감성, 언어, 무의식 등이 그것이다. 특히 레비나스의 사상을 실존철학, 현상학, 언어철학, 종교학 등의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할 때 그런 현대적인 주제들이 함께 등장하고 있는 것을 주시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는 인간이해의 지평을 타자, 욕망, 물질, 향유, 유일신주의 등과의 연관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넷째, 철학적 사유가 실증적인 과학적 사고에 밀려 자신의 영역을 좁혀가는 현대적인 추세 속에서 레 비나스가 20세기의 마지막 형이상학자로 불리듯이 그의 철학과 사상은 타자의 부활을 통해 새로운 인간 정신을 선언하고 있는 셈이고 점차 삭막해져가는 현대인들의 정서를 비판하는 지식인들은 여기에 호응 한다. 그의 윤리학이 신과 인간의 관계를 기초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요 구하는 타자윤리의 제안은 개인윤리가 정당화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새로운 가치의 지침을 주고 있다.

타자철학의 특수성: 탈(脫)주체성의 철학과 타자의 형이상학

데카르트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약칭)의 주체성은 완전성(perfection)을 본질로 한다. 그래서 인간은 이성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이에 반해 레비나스에게 있어 주체는 불완전한 존재이며 그 본질은 타자성에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원천적으로 물질적 세계에 떨어져 나온 ‘분리’의 존재이다. 그는 『존재에서 존재자로』(1947)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주는 혼돈으로 입을 벌리며 작열한다. 말하자면 암흑이며 부재의 장소이며 ‘있음(l’il y a)’이다.” 여기서 ‘있음’은 존재가 발생하는 현실적인 구조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초월의 존재가 될 수 없다. 척박한 물질세계에서 죽음이 존재하는 그런 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적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위치는 그런 ‘있음’ 의 공간에서 발견되며 ‘있음’의 외연적 구조 내지 관계 속에서 죽음의 운명과 타자와의 만남은 실존의 현주소를 갖게 한다.

그렇다고 하이데거와 같이 죽음이 존재의 종말은 아니며 사르트르가 주장하듯 존재의 심연은 무가 아니다. 그들과 사상적으로 결별하고 있는 레비나스는 『윤리와 무한』(1982)에서 존재의 본질을 언급한다. “있음은 비인칭적(impersonnel) 존재의 현상, 그(il)이다.” 여기서 비인칭대명사 ‘그’로서의 있음의 존재는 철저히 자기 자신만의 주체적 지위를 부정한다. 즉 본질이 없는 존재, 언제나 타자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주체의 운명이다. 주체의 실존은 타자들 가운데 익명으로 숨겨져 있기에 주체는 타자로서의 존재이다. 그는 『시간과 타자』에서 그런 주체의 실체를 물질과 고독으로 이뤄진 ‘자립체 (hypostase)’라고 부른다. 이런 자립체의 용어는 플로티노스의 삼위일체(일자, 정신, 영혼이라는 세 가지의 자립체가 모두 동일하다는 뜻)에서 가져온 것으로 레비나스가 주체의 실체를 지칭할 때 자주 사용한다. 이것은 인간존재가 물질세계에 내던져진 존재이지만 영혼과 에로스를 지니고 있고 이런 연유로 본성에 있어 신과 타자에게로 향한다는 그의 믿음이 내비쳐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위와 같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타자철학의 특수성을 설명해 나가기 위해 그의 주체이해와 타자의 형이상학을 초점에 두고 다시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주체란 무엇인가? 어느 날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집안 식구들이 다들 모여 있었다. “아들 지금 왔어”, “아빠 왔다”, “오빠 저녁 먹었어?”, “처남 얼른 들어와” 등등 나에게 쏟아지는 다양한 명칭들은 타자들로부터의 ‘나’에 대한 주체의 호출이며 여기에 응대하는 주체성은 그런 타자관계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는 이런 주체를 자립체라고 부르며 그 본질은 타자성이다. 그리고 이런 타자성은 주체가 타자들에 대해 존재론적 빚이 있다는 것이고 그들에 대한 책임감을 피할 수 없다는 윤리적 근거가 된다. 따라서 나의 정체성은 더 이상 나 자신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 사이에서 아들, 아빠, 오빠, 처남 등으로 숨겨져 있다. 여기서 주체의 속성은 자신의 바깥에 있는 익명성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주체 바깥으로(hors du sujet)’라는 주체의 본성을 읽고자 하며 타자에의 욕망은 거기서 나타나는 필연적 사건이 된다.

이제 타자란 무엇인가? 레비나스를 전혀 모르시던 교회목사가 설교 중에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한국 개신교의 문제들 중의 하나는 설교하는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내세우면서 자신의 주장과 생각대로 말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와 다른 타자로서 계시기 때문에 무엇보다 경청하는 마음이 있어야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그렇다. 신과 타자는 나의 마음 안에 있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사유주의로부터 빚어진 결과이다.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신은 타자이며 나의 바깥에서, 아니 나와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 가운데 자신을 내보이며 계시를 준다. 그래서 타인의 얼굴은 성전(聖殿)이며 모든 윤리가 발생하는 원점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신은 모두 몇인가? 인간의 얼굴들 수만큼이나 계신다. 예를 들어 강의실에 30명이 앉아 있다. 여기에 신은 모두 몇 분이 있는가? 물론 한 분이 맞다. 그러나 정확한 답은 30×29=870(분)이다. 이런 계산법을 이해해야 신과 타자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나와 마주하고 있는’ 타인의 얼굴들은 무한성의 현시이며 계시이고 신의 얼굴이다. 따라서 우리는 내 앞에 있는 타인들을 외면하면 도저히 신을 만날 수 없다. 즉 나의 이웃을 멀리 하고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없다. 타자의 낯선 출현은 무한성과의 조우를 암시한다. 타자는 곧 하나의 신(un Dieu)이다.

사실 레비나스가 주체보다도 타자를 강조하는 바는 주체의 존재론적 구조, 욕망의 형이상학적 사유 그리고 지적 믿음의 터전인 유다이즘에서 비롯된다. 그 이유는 이렇다.

첫째, 『시간과 타자』를 살펴보더라도 존재는 물질성과 고독에 기초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적인 에로스가 발생할 수 있는 주체를 구성한다. 그리고 타자성은 주체 자신을 주조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현주소이다. 그래서 존재 자신은 스스로 본질을 가질 수 없으며 나 자신의 ‘있음’이라고 하는 것은 사적존재가 아니라 공적존재 또는 숨겨진 존재이며 그 속성은 익명성이다.

둘째, 그런 존재론적 사유로 인해 타자에의 가까움(proximité) 또는 욕망은 주체가 세계 속에서 ‘다르게’, ‘또 다르게’ 위치하는 존재론적 이유가 되며 그 욕망 속에 그가 말하는 ‘형이상학의 하강’이 발생한다. 다만 이런 사건은 나와 마주한 타인과의 사이가 구체적인 계기로서 주어지는 것이며 그런 사이의 관계는 이미 존재의 기원이 나와 타인 사이의 일체성, 즉 자타불이(自他不二)의 관계 때문에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타자철학에서 흔히들 평가할 수 있는 타인에 대한 책임감과 윤리가 단순히 주체의 도적적인 당위론에 기초하고 있다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셋째, 그에게 있어 유다이즘은 신의 뜻이 세상에서 실현되는 역사, 즉 메시아니즘을 지칭하지만 이것은 마치 디아스포라와 같은 삶의 파종(播種)으로 인해 세상의 밭이 일궈져서 신의 무한성이 타자들로서 생산되는 역사이다. 즉 무한성은 타자들의 현시에 의해 늘 새롭게 갱신되는 것인데 레비나스에게 있어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바로 타인에의 욕망(Désir d’Autrui)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타자에의 책임감과 욕망은 지고(至高)의 존재가 이 세상에서 자신을 실현하는 방식이며 주체에게 있어서 이것은 타인에의 에로스를 통해 구체화된다.

개인주의적 윤리를 넘어 타자세계의 지평에서

레비나스는 인간주체의 정체성이 원래는 하나의 원천에서 비롯되었다는 가정을 통해 갈등사회에서 빚어지고 있는 인간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 치유가 그런 원초적 관계로의 회귀로부터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둘이 아니라 하나다. 그는 『성스러움에서 성자에게로』(1977)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는 하나의 존재이면서 둘로 이뤄진 존재이다. 실재의 한가운데 있는 분열, 찢겨짐이다”라고 말한다. 즉 주체와 타자는 각각 둘이 아니라 본래는 하나의 존재다. 그래서 ‘가까움’ 또는 에로스로 불리는 타자에의 욕망은 그런 분열과 찢겨짐을 치유하며 심지어 자아의 구원을 가져올 수 있는 형이상학적 사건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마치 이것은 플라톤의 『향연』에서 에로스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는 아리스토파네스가 원래 한 몸이었던 인간이 신의 단죄를 받아 두 몸으로 분리된 이후 서로 다시 하나가 되려는 본성, 즉 에로스가 생겨났다고 설명하는 것과 유사하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에로스 또는 사랑은 내적인 주체성의 구조를 바깥으로 생산하는 것이며 ‘가까움’을 통해 타자세계에 참여하도록 한다. 다만 여기서 사랑은 지고의 정신이 실현되는 형이상학적 욕망이기도 한데 타인에의 얼굴을 향해 발생한다. 그 얼굴은 무한성을 현시하는 초월적인 신비이며 애매성 그 자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 얼굴은 신의 얼굴인가, 인간의 얼굴인가?

로댕의 위대한 작품 <성당>(1908)을 눈여겨보면서 나와 타자 그리고 신의 관계를 이해해 보도록 하자.먼저 사랑하는 사람들인 듯 두 사람이 손을 모아 맞잡고 있는 이 작품의 제목이 왜 성당일까에 관해 선뜻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성당은 신이 이 땅에 거주하는 신성한 장소이며 이곳에서 인간들은두 손을 모아 그에게 기도를 드린다. 기도를 올리면서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을 수 있거나 성령의 존재를 체험할 수도 있다. 기독교의 전통에서 그런 성스러운 장소를 성당 또는 교회라고 부른다. 그런데 로댕의 조형작품에는 성당의 외형적인 이미지는 없고 단지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와 타인이 나누는 사랑의 교감(타인에의 욕망) 가운데 여기에 신이 와 계신 것은 아닐까? 인간의 아름다운 마음이 있는 곳에 신도 함께 있고 그래서 여기가 성당인 것이 아닐까? 레비나스에게 있어서도 나와 타인이 만나는 곳에, 즉 타인의 얼굴이 있는 곳에 계시가 있고 신이 존재한다. 말하자면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고 그가 우리를 보호한다는 뜻이다.

212-04-사진2

우리는 레비나스의 타자철학이 타인과의 만남과 그에게의 책임감을 통해 구원의 계기를 찾고자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는 『성스러움에서 성자에게로』에서 “주체의 일체성(Unité du sujet un)은 타자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소환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주체는 타자에 대해 이미 파기될 수 없는 그와의 일체를 구성한다. 따라서 우리는 타자에 대한 주체의 이타적인 가치가 인간에 대한 신의 명령으로서 요구된다는 종교적 차원에 대한 이해를 떠나 공동체가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나와 타자 사이의 유대와 인격적인 관계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점에서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타자철학의 가능성은 그런 관계를 인식함으로써 확인될 수 있다.

이웃의 얼굴은 거울을 들여다보고 비춰지는 나 자신의 얼굴과 같으며 죄 지은 자의 행실도 우리 모두의 책임으로부터 벗어나 있지 않다. 공동체의 모든 얼굴들은 나 자신을 이미 구성해 놓은 자아의 형상과 다르지 않다. 특히 소외된 사람들의 얼굴은 가장 보호받아야 할 우리의 얼굴이다. 그 얼굴들은 가장 구체적인 나 자신성과 같다. 따라서 타자들에 대한 실천은 나 자신에 대한 그것이며 책임윤리의 복원만이 레비나스가 말하는 유토피아에 다가서는 길이다. 그의 타자철학은 공동체의 주요 덕목들로서 요구되곤 하는 소통, 화해, 관용 등의 윤리적 관념이 왜 가능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윤리적 근거와 정서를 제시한다.

 

윤대선 /경기대학교교양학부조교수

*그림설명 및 출처

그림 1. ▲엠마누엘 레비나스가 서거한 직후 <르몽드> 신문은 그를 20세기의 마지막 형이상학자라고 불렀다. ⓒlevinas.nl

그림 2.  ▲로댕의 <성당>(1908)은 나와 타인의 관계, 그리고 신과의 만남을 설 명할 수 있는 적절한 작품이다.

 

작성자: khugnews

이글 공유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