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호 영화비평: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2015)] 권력의 내부를 파헤치는 시선의 실체

우민호 감독의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이하, <내부자들>)은 영화 그 자체보다 스크린 밖의 세상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영화이다. 이것은 이 작품에 대한 비평보다 <내부자들>이 불러일으킨 기시감에 방점을 두고 영화를 사회 환원적으로 해석하려는 태도가 더 많았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징후는 감독의 인터뷰에서도 감지할 수 있다. 우민호 감독은 <내부자들>의 개봉 직후 한 영화 주간지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현실은 씁쓸할지언정 관객이 극장 안에서 통쾌한 낭만을 느꼈으면 한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 이 말은 스크린 밖의 세상이 변화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스크린에 펼쳐진 세상에서 대리만족을 느껴보라는 의미이다. 물론 영화가 감독의 의도를 오롯이 담아낼 수는 없으며 관객 또한 영화를 보면서 감독의 의도를 전부 파악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발언을 언급한 이유는 그것이 <내부자들>이 채택하고 있는 방법론 즉, 현실의 패배감을 영화 안에서의 승리로 바꿔버리는 스타일에 대해서 생각할 것들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관음적인 카메라의 시선

최근 한국영화의 경향 중 하나는 세상의 부당함이나 권력에 맞서 싸우는 인물들을 전시하는 것이었다. 이들 영화가 불러일으키는 카타르시스는 정의로운 인물이 거대 집단과 상대하면서 불리한 힘의 관계를 역전하는 것에서 발생하곤 했다. <내부자들>도 이 경향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전의 영화들과 다르다는 선언으로 자신을 차별화한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등장한 안상구(이병헌)는 “정의? 그런 달달한 것이 남아 있긴 한가?”라며 자신을 복수의 주체로 규정하면서 이전의 영화들과 다를 것이라는 선을 긋는다. 그는 한때 정치, 시장, 언론권력 카르텔의 부품이었지만, 이제는 그들에게 총을 겨누는 신세이다. <내부자들>은 역전의 상황을 배치하는 것으로 기성의 질서를 해체하는 것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내부자들>에서 찾을 수 있는 미덕을 고르자면 바로 이러한 영화적 태도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미덕이 <내부자들> 전체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이 영화는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기 위해 외설적인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내부자들>은 대기업 회장(김홍파)을 시장권력으로 세운 다음 그의 후원을 받는 대통령 후보 장필우(이경영)를 정치권력으로, 유력한 일간지의 논설 주간 이강희(백윤식)를 언론권력으로 묘사한다. 그런 다음 이들의 유착관계에 카메라를 현미경처럼 사용하는데, 여기서 <내부자들>의 외설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 세 명은 비밀 요정에서 옷을 전부 벗은 채 여성들과 짝을 이뤄 앉아 있다. 남자들은 성기를 방망이처럼 휘두르며 폭탄주를 제조하고 있으며 카메라는 이들의 모습을 다양한 앵글로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이들 장면은 필요 이상의 상상력을 가미한 과잉된 연출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세 명은 비밀 요정에서 여러 여자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데, 카메라는 이들의 행위와 여자들의 나체에 집중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미지의 외설성이다. 여기에 서사의 진행방향과 목적, 그러니까 <내부자들>이 권력의 추악함을 폭로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본다면 이 장면은 인물들의 추악함을 드러냄으로써 안상구와 세 인물의 성격을 가르는 기준선으로 작동하게 된다. 권력을 가진 이들의 뒷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이들을 악인의 경계로 밀어 넣게 되어 동질의 성격을 가졌던 안상구를 상대적인 선인의 경계 안으로 포획한다. 그러니까 주인공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외설적인 행위들을, 더 나아가 여성의 신체를 소모적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런데 영화는 이 자세를 바꾸지 않으려 한다. <내부자들>은 요정에서의 비밀 모임 재현을 한층 더 외설적으로 강화한다. 이 비밀스러운 요정에 세 명의 권력 주체가 다시 모였을 때, 카메라는 이들의 유착관계보다 방 한쪽 구석에 가슴을 드러내고 일렬로 서 있는 여자들의 나신에 집중한다. 물론 이 때의 클로즈업은 이 비밀모임에 잠입한 안상구의 측근인 김지현(이엘)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카메라는 ‘그녀가 거기에 있다’라는 단순한 정보를 실어 나르는 게 아니라 남성들의 권력 놀음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마네킹처럼 서 있는 여성들의 모습에 방점을 찍는다. 이것으로 인해 남성-권력의 외설성은 앞서 등장했던 장면보다 한 겹 더 덧칠해지게 된다.

과연 이 여성들의 나체가 이 영화에서 무슨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서사의 목적은 권력의 담합을 지적하는 것이다. <내부자들>은 정의나 올바른 세상에 대해서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이 상상하는 권력 내부의 모습을 스크린에 투사하기에 관심을 둔다. 그것도 이들에게 외설성을 덧칠하는 것으로 말이다. 이들이 왜 안타고니스트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사악함이라는 인상을 관객들에게 심어주고 있다. 즉 시장과 정치와 언론의 유착관계가 드러나는 게 아니라 과시되는 이미지에 의해 오히려 악행이 소비되는 것이다. 영화 속 세계를 단순하게 그려내기 위한 외설적 장치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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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naver.com

관음증이 정당성을 만났을 때

결정적인 것은 요정에서의 모임이 세 번째로 등장하는 순간이다. 여기서 잠시 이 장면의 맥락을 따져봐야 할 필요가 있다. 안상구는 자신을 이용하다가 내친 이강희에게 복수하기 시작하는데 여기에 우장훈 검사(조승우)가 우연한 계기로 개입하게 된다. 그는 장필우의 비자금을 조사하다가 그를 쫓는 안상구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서로 힘을 합치게 되고 권력의 카르텔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다. 영화 종반부 요정에서의 비밀 모임이 다시 등장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우장훈 검사가 포함되어 있다. 그는 이들의 악행을 폭로하기 위해 ‘내부자’가 되는 방법을 선택한 건데, 그는 정상적인 수사의 한계를 느끼고 내부자가 되어 이들의 모습을 몰래 카메라로 찍어서 인터넷에 폭로하기에 이른다. 이때 영화는 우장훈 검사가 촬영한 요정의 모임을 몰래 촬영한 형식으로 그 장면을 관객들에게 잠시 보여준다.

그러니까 <내부자들>이 마지막으로 모임 장면을 사용하는 맥락은 폭로적인 성격이다. 이전의 재현들은 관음적 카메라의 시선이었다. 카르텔 내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이들이 무엇을 즐기고 있는지에 방점을 찍고 있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이 영화를 지탱하고 있는 서사의 축은 복수의 플롯이다. 따라서 세 번째로 등장한, 그러니까 우장훈 검사의 시선으로 포착한 비밀 모임의 장면은 이미지의 외설성보다 폭로적인 성격에 집중한다. 이는 이 영상이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되었다고 말하는 일련의 쇼트들로 증명된다. 여기서 <내부자들>은 비밀 모임의 마지막 재현 장면을 이전의 장면들에서 떼어놓는다. 외설성 대신 정당성을 붙여 놓는 것으로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한다.

여기서 <내부자들>은 관객들이 마음껏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한다. 영화는 권력자들의 비밀 모임의 외설성을 스크린 밖에 있는 관객들에게만 제공함으로써 우리의 관음성을 자극시켰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인터넷으로 폭로한다는 설정으로 영화 속 재현 세계에 있는 대중들에게 권력의 추함을 보여준다. 이것을 통해 스크린 밖에 있는 관객들은 관음증이라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 영상은 더 이상 외설적인 성격이 아니고 혼자서 몰래 홈쳐보는 것도 아니며 대중이 함께 공유하는 것이고 부당함의 증거이고 권력의 카르텔을 무너뜨릴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영화 속 대중들과 극장에 앉아 있는 관객들이 공유하게 될 때, 말하자면 스크린이라는 경계가 허물어지게 되어 영화의 욕망이 현실로 전이될 때 관객들의 카타르시스는 극에 달하게 된다. 선정성을 도덕성으로 바꿔치기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내부자들>의 작동 방법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 때문에 <내부자들>은 동의하기 어려운 영화가 된다. 영화는 풍문으로 부유하는 선정적인 상상으로 권력의 내부를 재현하고 있으며 거기에 기대서 상대적인 인물인 안상구를 서사의 주체로 세운다. 안상구는 정의를 실현하기 이전에 폭력을 행사했던 인물이며 더 나아가 권력의 내부자였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카메라는 그런 그의 모습을 재현하기에 바쁘고 상대성에 기대 그에게 정당성과 정의를 부여하고 있다. 그 와중에 여성의 신체를 선정적인 것으로만 소비하고 있었다. 이렇기 때문에 “정의는 어쨌든 살아 있다” 라는 평가에 물음표를 붙일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허약한 또는 게으른 재현성으로 관객들의 관음을 자극하고 있으며, 시선의 외설성으로 공분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내부자들>의 이러한 내적 원리는 최근에 등장했던 다른 한국영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것은 영화가 치열한 서사 논리의 벽돌을 쌓기보다 쉽고 자극적인 소재로 대중의 감정을 자극하기에 여념이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현실정치에서의 패배감을 위로해주는 스크린의 서사는 점점 자극적이고 감정적으로 변하고 있다. 작금의 한국영화는 분노의 비등점을 높이는 것이 견고한 현실에 균열을 내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내부자들>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그 자세는 영화가 비판하고자 하는 현실과 닮아 있었다.

백태현 / 인하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강사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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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1. 동의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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