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호 기획: 재특회] 대치하는 한일 양국의 내셔널리즘과 재특회

재특회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극우단체들은 아베정권이 들어서면서 뚜렷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아베정권의 집단자위권 법안 강제 통과로 인해 일본 사회 분위기가 극우적 경향에 대한 일정한 비판적 경향을 띠게 되었지만, 집단자위권 법안 자체가 일본의 전후 극우 움직임 속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온 흐름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단순히 희망적인 것으로 단언하기도 어렵다. 이에 본보에서는 재특회로 대표되는 일본 극우 세력들이 집단자위권 법안 통과 이후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그 전망은 어떠한지 전체적으로 조명해 보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다.

재특회의 정식명칭은 <재일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이다. 재일코리안이 부당한 ‘재일특권’을 누리고 있으니 그것을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 이 단체의 주장이다. 그들이 지목한 재일특권은 꽤 여러 가지인데 가장 대표적인 ‘특권’으로 공격대상이 된 것은 ‘특별영주권’과 ‘생활보호/연금’ 수급이다. 특별영주권은 다른 외국인이 취득할 수 있는 영주권에 비해 강제퇴거될 가능성이 지극히 낮은 우대된 재류자격이고, 생활보호와 연금은 원래 ‘국민’만이 대상이지만 재일코리안의 역사적 특수성을 고려해 지급되고 있다. 이러한 대우의 대부분은 한일 간의 합의로 주어진 것이고 그런 점에서 일본 자민당 정권도 그 실시에 동의한 조치들이다. 재특회가 세상에 충격을 준 것은 역대 보수정권도 인정해 온 이 대우를 ‘부당한’ 것으로 보고 대대적인 공격대상으로 삼은 것과 그것을 재일코리안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직결시켜 “조선인을 죽여라” 등 차별적인 구호를 앞세워 가두시위를 벌여왔던 과격주의 때문이었다. 이렇게 심한 차별 발언을 대중 앞에서 공공연하게 쏟아내는 행동은 일본 사상 초유의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고, 그 주장은 ‘인종(민족)차별주의’나 ‘배외주의’, 또는 그것에 바탕을 둔 극단적인 ‘국민주의’ 등의 말로 특징지을 수 있다.

 

혐한이 낳은 ‘적자’, 재특회

유의해야 할 것은 재특회의 공격대상은 남북한을 포함한 한 민족 전체이며 재일코리안에 대한 공격은 그 일환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7년 초에 정식으로 발족한 재특회가 가두에 진출한 것은 2010년을 전후한 시기이고 그 과격행동이 절정에 달한 것은 2013년이다. 한국에 대한 공격은 이미 21세기 들어 니찬네루(2ch)로 대표되는 인터넷 사이버공간에서 활성화되어 있었는데, 그러한 공격에 열을 올리는 사람은 ‘넷우익’으로, 한국을 극도로 혐오하는 그들의 태도는 ‘혐한’으로 불렸다. 넷우익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한국을 근대화시킨 것이었다는 역사수정주의적인 입장에서 한국의 역사청산이나 사죄/보상 요구를 부당한 억지트집이라고 공격했고 독도를 한국이 지배하는 것도 영토 침략이라고 비난했다. 그들의 언행이 과거에도 있어 왔던 역사수정주의자나 극우세력과 다른 점은 그러한 공격을‘한국=한국국민=한민족 전체’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로 확장시킨다는 점이다.

2005년 이러한 넷우익의 주장을 집대성한 만화 『혐한류』가 베스트셀러가 됨으로써 그들의 언행은 일반사회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재특회 창립의 중심인물인 사쿠라이 마코토(桜井誠)는 2003년쯤 넷우익의 논객으로 두각을 나타내 그 연장선상에서 재일코리안 문제에 초점을 맞춘 단체의 설립을 계획해 실행에 옮겼다. 재일코리안도 ‘얄미운’ 한국인의 일원이고 ‘부당한’ 요구를 한다는 점에서 한반도 본국에 사는 한국인과 똑같으니 그들을 먼저 표적으로 삼자는 발상이다. 이렇게 보면 재특회는 21세기 들어 급속히 확대된 혐한의 궁극적 도달점이자 혐한이 낳은 ‘적자’라 할 수 있다.

 

한일 양국 내셔널리즘의 고조와 재특회의 등장

재특회의 등장은 일본사회의 보수화와 그에 바탕을 둔 배타적인 내셔널리즘의 고조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한국인과 재일코리안을 주된 공격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 1990년을 전후하여, 냉전이 해체된 후 한일 양국의 내셔널리즘이 전면적으로 대치하게 된 상황이 그 배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냉전 시기 한국은 군에서 정권을 잡고 있었고 일본에서는 자민당이 확고부동한 여당으로 장기 집권하고 있었다. 군사정권은 과거사 문제에 대해 적당한 선에서 일본과 타협하였고 독도 문제도 일본을 자극하는 행동은 자제하였으며, 국내에서 반일 감정이 고조되는 것을 막아 왔다. 한편 자민당 정권은 ‘보수본류’로 불리는 온건 보수세력이 당권을 장악해 과거사와 관련해서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는 당내 극우세력으로 대두하는 것을 억제해 왔다. 또 당시는 사회당과 공산당으로 대표되는 혁신세력이 건재했고 그들이 극우세력의 대두를 막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자민당 주류파는 혁신세력과 대치하면서도 당내 극우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혁신세력을 이용했다. 자민당과 혁신세력의 관계는 ‘대립 속 협력’이라는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냉전 시대 한일 양국은 자유주의 우방으로서의 협력을 최우선하고 과거사나 영토 문제는 적당하게 타협하거나 덮어두려 했다. 그러나 이 구조는 냉전 해체와 함께 무너진다.

한국에서는 민주화가 이루어진 1990년대 들어 식민지 시기 강제연행을 겪은 사람들이 기업과 일본정부를 상대로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잇따라 제기하는 등 과거 청산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구체화됐다. 또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과거사 최대 이슈로 부상했는데 군사정권하 억압돼 왔던 요구가 분출된 것이고 한국정부도 더 이상 그 요구를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뿐만 아니라 그러한 과거사 문제를 정부가 정권 유지에 이용하는 현상마저 나타났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정권 말기인 2012년 8월, 역대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독도를 전격 방문했고 이어 일본 천황을 겨냥해 방한하고 싶으면 독립운동 희생자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대통령이 천황에게 직접 사죄를 요구한 것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박근혜 현 대통령도 취임 이후 위안부 문제 해결 없이 한일관계의 개선은 없다는 강경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군사정권의 계열을 잇고 정치적인 성향에서는 원래 일본 보수 세력과 친화성을 갖는 정권이 과거사에 대해 강경자세로 나왔다는 사실은 한국의 변화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일본에서는 1993년 장기집권해 온 자민당이 하야한 것을 계기로 정권 재편이 대대적으로 일어나 1998년 보수세력의 일부와 사회당 출신 의원의 일부가 합류해 민주당이 결성됐고 이후 자민당과 민주당이 2대 세력으로 대치하는 구도가 형성됐다. 사회당은 사회민주당으로 명칭을 바꾼 후 약소정당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혁신정당의 몰락은 냉전 해체가 초래한 불가피한 현상이었지만 일본사회의 보수화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었다. 1996년에는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결성돼 역사수정주의를 퍼뜨리는 데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이듬해 새역모와 연계한 자민당 내 우파의원이 <일본의 전도와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의 모임>을 결성해 위안부에 관한 기술을 교과서에서 삭제할 것과 위안소 설치에 군이 관여한 사실을 인정해 사죄의 뜻을 밝힌 1995년 ‘고노 담화’의 철회를 목표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 모임의 사무국장을 맡은 것이 당시 2선 의원이던 현 수상 아베 신조(安倍晋三)다. 역사수정주의 세력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역시 위안부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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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터 세력의 등장과 향후 전망

2012년 말 제2차 아베 정권이 발족한 것은 재특회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가 됐다. 재특회가 과격한 차별 시위를 빈번하게 벌인 것이 2013년이었다는 사실은 바로 그러한 상관관계를 반증한다. 하지만 재특회의 활동은 2013년을 고비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추세는 2014년 말 이 운동을 이끌어온 사쿠라이가 회장직을 사임하고 재특회를 떠난 것을 계기로 더욱 가속화되어, 2015년에 들어와서는 시위 참가자 수도 현저히 줄어들었고 “조선인을 죽여라”등 한 때 난무했던 과격한 구호도 거의 모습을 감췄다. 이는 그러한 차별 구호를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라는 범죄 행위로 규정해 그것을 봉쇄하려 꾸준히 활동해 온 재특회 반대 세력의 노력이 이끌어 낸 결과였다. 2013년 재특회 시위가 위험수위를 넘자 그에 반대하는 시민이 자발적으로 모여 시위 현장으로 달려가 재특회 시위대와 대치하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을 카운터 세력으로 칭했다. 양 세력 간의 충돌로 체포자가 발생하며 아수라장이 되기도 했으나 이 카운터 활동이 재특회 시위를 봉쇄하는 데 큰 힘을 발휘한 것은 틀림없다. 또 일부 국회의원이 변호사 및 학자와 연대해 헤이트 스피치를 금지하는 법안 준비에 착수해 해당 문제가 정치권에 불거진 것도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었다. 이 법안은 아직 성립되지 않았으나 재특회를 심리적으로 상당히 압박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앞서 지적했듯이 혐한과 그 적자인 재특회의 등장은 냉전이 해체된 90년대 이후 고조되어 온 과거사를 둘러싼 갈등과 그것이 조장한 한일 양국 내셔널리즘의 대립에 그 뿌리가 있기 때문에, 이 구도에 변함이 없는 한 일시적으로 활동이 약해졌다 하더라도 재특회나 그에 유사한 운동이 다시 고개를 들 가능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또 재특회의 활동이 침체에 빠졌다 하더라도 그들이 퍼뜨린 ‘재특회적인’ 감정, 즉 “몇 번 사과의 뜻을 표명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사죄만 요구하는 한국인은 싫다”는 감정이 어느 정도 일본사회에서 자리 잡은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재일코리안에게 일본의 지방참정권을 부여하려는 일본 정계의 움직임이 거의 힘을 잃었다는 사실은 그 단적인 예다. 지방참정권 부여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이 조직의 최대목표로 삼아 주력해 온 사안이었다. 민주당이 2009년 정권을 잡은 후 당내에서 논의가 상당히 이루어졌는데 당시 야당이던 자민당은 물론 민주당 안에서조차 반대 의견이 강해 결국 법안 제출에 이르지 못했다. 이는 국민 고유의 권리인 참정권을 요구하는 것은 외국인의 주제넘은 부당한 특권 요구라는 재특회의 주장이 영향을 끼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재특회가 다시 고개를 들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한일 양국 모두 내셔널리즘의 고조를 억제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일본은 잘못된 과거를 미화하는 역사수정주의를 억제하고 성실하게 과거 청산에 임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한편 한국도 정당한 과거 청산 요구는 하되 필요 이상으로 반일감정을 불태우는 자세는 지양해 적절한 타협점을 찾으려는 냉정한 외교전략이 요구된다. 서로가 내셔널리즘을 통제하지 못하고 대립각을 세우는 사태가 계속된다면 재특회로 상징되는 극단주의가 다시 기승을 부릴 가능성이 있고 그렇게 되면 그 공격의 화살은 고스란히 재일코리안에게 돌려질 것이다.

 

이 성 / 한신대학교 글로벌협력대학 일본학과 겸임교수

* 사진 설명 및 출처

▲도쿄 신오쿠보(新大久保) 코리안타운에서 한국 음식점 앞을 지나가는 재특회 혐한 시위대   ⓒ tanakaryusaku.jp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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