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호 인문학술: 사마천 『사기(史記)』] 역사의 혼 사마천, 『사기』는 인간학의 교과서요 우리 삶의 지침서다

B.C. 90년경에 완성된 중국의 역사서 『사기』는 동양 역사서의 근간이자 인간학의 보고(寶庫)로서 중국 사학사와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걸작이다. 특히 『사기』는 사건 중심이 아닌 인물 중심의 역사로 쓰여진 점이 매우 특이하다. 우리는 『사기』를 읽으며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에 매료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을 인생의 롤 모델로 삼기도 한다. 이에 본보는 사마천의 『사기』집필 과정에서부터 『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 등을 통해 『사기』를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역사가의 붓이 세상을 밝히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 사가의 길을 간 사마천

3년 전 뜨거운 여름 나는 시안(西安)에서 2시간 반 쯤 거리인 사마천의 고향인 한청(韓城)에 있는 사마천의 사당에 들렀다. 이른 아침 고속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이었다. 20미터 이상은 됨직해 보이는 우뚝 솟은 사마천의 동상이 멀리 눈에 들어왔다. 관광객은 많지 않았다. 그의 무덤으로 올라가는 문 입구에 ‘사필소세(史筆昭世)’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역사가의 붓이 세상을 밝힌다’는 말이다. 이는 130편에 달하는『사기』52만 6,500자를 관통하는 단어로서 잘 쓴 글씨였다. 99개의 돌계단을 올라 그의 무덤에 다가서니 다섯 그루의 측백나무가 심어져 잎이 우거져 있었고 무덤은 콘크리트로 뒤덮여 있었다.

사마천이 누구던가? 아버지도 사관이요, 효성이 지극한 본인 역시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고 일찌감치 역사가의 길로 들어섰던 그다. 서문인「태사공자서」에서도 드러나듯 사마천은 어려서부터 경학을 공부했고, 일찌감치 중국전역을 답사하면서 자신이 기록하고자 인물들의 고향을 직접방문까지 해 가면서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심지어 촌로 등의 생생한 증언도 붓 끝에 담아 살아있는 인간의 역사로 만든 것이다. 특히 문헌상 의심 가는 부분은 의심 가는 대로 남겨두었다는 그의 일관된 사가로서의 자세는 중국의 24사(史), 그 어떤 정사보다도 개인의 분명한 시각을 견지하면서 인물을 논하고 역사적 사실을 평가하는 사가의 치열한 내공을 보여주었다. 엄정하면서도 생생한 그의 필력은 세상의 거의 모든 인물 유형을 다루었다고 평가받는 열전(列傳)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칫 딱딱한 역사서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웬만한 소설 못지않은 재미로 열전을 읽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제왕들의 전기를 다룬 본기(本紀)나 제후나 왕을 다룬 세가(世家)의 곳곳에도 그의 필력은 녹아 숨 쉬고 있었다. 과연 그 집필의 힘은 어디에서 나온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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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형의 치욕을 딛고서 인간사의 시비를 논하다

바로 자신의 친구를 변호하다가 한 무제의 역린을 건드려 억울하게 당한 궁형(宮刑)이라는 치욕을 가슴에 품고“이것이 내 죄인가? 이것이 내 죄인가? 몸이 망가져 쓸모없게 되었구나”「태사공자서」 라고 하였으며, 『사기』를 거의 다 완성하고 보내면서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하루에도 창자가 아홉 번씩 끊어지는 듯하고 집 안에 있으면 갑자기 망연자실하고 집 밖을 나서면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지 못합니다. 매번 이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땀이 등줄기를 흘러 옷을 적시지 않는 적이 없습니다”「보임소경서」라고 처절하게 외친 데서 확인되듯, 그가 20여 년 동안의 집필기간 동안 얼마나 자신의 울분을 삭히면서 인고의 세월을 겪었는가를 보여주는 구절들이다. 비교적 긴 편지이긴 하지만, 19차례나‘욕(辱)’이란 글자를 쓰고 있으니 사마천의『사기』야말로 이 욕됨을 승화시킨 위대한 인간 승리의 산물이요. 피눈물을 삼키면서 쓴『사기』가 아니겠는가? 그는 과감할 정도로 자신의 시각이 배어있는 역사를 집필하였다. 무제를 향한 원망은 세상의 거의 불공정함에 대한 시비문제로 이어져 수양산에서 굶어죽은 백이와 숙제를 열전의 첫머리에 두어 그들의 삶에 원망이 깃들어있다고 보았으며, 선한 삶을 살았으나 요절한 안회와 온갖 악행을 저지른 도척을 대비하여 세상은 착하다고 해서 보상받지 못한다는 점을 역사인물을 들어 예증해 나갔다. 아마도 조선 중기의 김득신이 무려 일억 번 이상 읽었다는 편이「백이열전」이 아닐까? 겨우 본문 전체가 1,000글자도 채 안되는데 10여 명의 인물이 다루어져 있고, 백이에 대한 기록은 겨우 215자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는 사마천이 다양한 고전을 인용한 자신의 이야기이기에 그렇다. 사마천은 공자가 백이와 숙제에 대해“인(仁)을 구하여 인을 얻었다”고 한 말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제기를 하면서 결론적으로 던진 말은 이렇다.

“요즘 시대에 들어서면서 하는 행동은 규범을 따르지않고 오로지 법령이 금지하는 일만을 일삼으면서도 한평생을 편안하게 즐거워하며 대대로 (부귀가) 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걸음 한 번 내딛는 데도 땅을 가려서 딛고, 말을 할 때도 알맞은 때를 기다려 하며, 길을 갈 때는 작은 길로 가지 않고, 공평하고 바른 일이 아니면 떨쳐 일어나서 하지 않는데도 재앙을 만나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나는 매우 당혹스럽다. 만일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라면 옳은가? 그른가?” -「백이열전」

사마천이 살던 시대에서 보면 백이는 먼 옛날 사람이었고 한나라는 당대였으니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꼭 선한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복잡한 세상의 권력구조 틀에서 움직이고 있는 변화무쌍한 인생사를 그리고자 그는 인물위주의 기전체(紀傳體)에 집중한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는 2,000여년의 긴긴 시간과 공간을 다룬 책이요, 춘추전국시대와 초한쟁패 과정의 역사적 전환기이자 혼돈의 시기를 살다 간 인물들의 이야기를 종횡으로 서술한『사기』야말로 인간과 권력에 대한 살아 숨 쉬는 경전이며, 인간의 모든 군상을 볼 수 있게 하는 살아 꿈틀대는 인간학의 교과서가 아닐까 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자들의 이야기, 그들은 집념의 소유자였다

그러므로『사기』속의 인물들은 다양하다. 백이와 숙제처럼 서로 왕의 자리를 양보했으나 결국 수양산에서 굶어죽은 자도 있는가 하면, 제 환공을 도와 춘추오패로 만든 관중(管仲)은 친구 포숙의 추천 덕분에 재상이 되어 2인자의 전형을 보여준 자이면서 자신이 죽을 때 후임 재상자리에 친구인 포숙을 추천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습붕을 추천한 자다. 오기(吳起) 같은 장수는 아내를 죽여 가면서 장수가 되고 부하의 종기마저 입으로 빨아 최고의 장수의 반열에 올랐다. 소진(蘇秦)이나 장의(張儀)는 세 치 혀로 천하를 주물렀으며, 여불위(呂不韋)는 자신의 임신한 첩을 진시황의 아버지에게 주어 훗날 자신의 성공에 활용했다. 오자서(伍子胥)는 충신이었으나 결국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서 자신의 눈을 뽑아 오나라 동문에 내걸어 오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죽어서라도 똑똑히 보겠노라는 저주를 품으며 삶을 마감했다. 이사(李斯)는 쥐 두 마리를 보고 인생의 지혜를 터득하고 자신의 조국 초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들어가 22년간 진시황을 도와 진나라 개혁과 혁신을 좌우했다. 그렇지만 자신이 추천한 한비(韓非)를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으며 진시황이 죽었을 때는 환관 조고(趙高)와 함께 유서 위조하는 데 동참하면서 대를 이은 성공을 하다가 최후의 몰락을 자초하였다. 그런가 하면, 맹상군(孟嘗君) 같은 이는 남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닭 울음소리를 내고 개도둑질을 잘하는 사람을 식객으로 두어 비웃음을 샀지만 결국 결정적 위기 순간에 자신의 목숨을 구하게 만들었으니 인재를 보는 탁월한 안목의 소유자였음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연나라 태자 단(丹)의 진시황 암살 작전에 투입된 자객 형가(荊軻)는 돌아오지 못할 자신의 운명을 알고 떠난 진정한 사내였다. 어디 이뿐인가? 거의 8년 동안 단 한 번의 패배를 몰랐던 항우(項羽)는 고조 유방(劉邦)에게 단 한 번의 일격을 당하고는 곧바로 31살의 나이로 자살을 택했으며, 월왕 구천(句踐)은 회계산에서의 치욕을 되갚고자 22년간 상담(嘗膽)의 세월을 보낸 뒤에 고소산에서 부차(夫差)를 자살하게 만든다. 이 구천을 도운 최측근 범려는 구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의 곁을 떠나 돈도 많이 벌고 나중에는 제나라에서 재상까지 되었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그가 갖고 있는 금전의 힘 때문이었다는 것도 사마천은 분명히 밝힌다.

인재등용론의 이사, 변법의 선구 상앙, 처세의 달인 소하

이사가 타국 출신이면서 이렇다 할 만한 현실적 기반 없이 무조건 진나라로 들어와 재상자리를 누리면서 진나라의 거의 모든 개혁을 주도한 이유는 무엇이며, 사마천이 그에게 주목한 까닭은 무엇인가? 바로 인재개방론이었다. 이사가 객경의 자리로 꿰차고 들어오자 기득권들은 반발하고 결국 축객(逐客), 즉 멀리서 오는 사람들을 내쫓으라는 여론을 형성하여 조직적으로 저항하게 된 상황에서 이사는 저 유명한「간축객서(諫逐客書)」를 진시황에게 올린다. 바로 그중 일부만 소개하면 이렇다.

“옛날 목공은 인재를 구하여 융에서 유여를 데리고 왔고, 완에서 백리해를, 송에서 건숙을, 진에서 비표와 공손지를 데려왔습니다. 이 다섯 사람은 진나라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목공은 이들을 중용하여 스무 나라를 통합하고 서융에서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태산은 한 줌의 흙을 사양하지 않고, 강과 바다는 조그만 흐름을 가리지 않는 법입니다.” -「이사 열전」

출신에 따라 인재를 배척하지 말고 능력 위주의 인재등용을 청하는 내용이었다. 이사의 정연한 논리에 진시황은 감복한다. 편지 한 장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꾼 이사는 진시황의 신뢰를 등에 업고 정위(廷尉)의 자리까지 오른것이 아닌가? 진시황의 명실상부한 2인자로서 그는 정녕 무에서 유를 창조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유서 위조에 가담하면서 결국 조고의 모함과 견제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좋지 않은 최후를 맞이한 것은 그가 순간의 선택과 결단,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탁월함은 있었으나, 결국 권력의 유혹을 견뎌내지 못해 죽음을 맞이했다는 점이었다. 사마천은 독특한 필치로 이사의 내면까지도 서술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어디 이뿐인가? 진나라에 비해 월등히 여건이 좋았던 초나라를 비롯하여 제나라 등 동방 여섯 나라는 좋은 조건들을 살리지 못해 결국 번영은 커녕 생존하지 못하고 패망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으니, 여건이 좋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고 주류(主流)라고 해서 늘 주류가 아니고 오히려 개혁과 혁신을 통해 얼마든지 비주류(非主流)가 주류의 자리를 꿰찰 수 있다는 좋은 본보기는「진시황본기」나「여불위열전」등을 통해 충분히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사례를 더 들어 보자. 진나라 개혁의 토대를 쌓고 법가를 창시한 인물 상앙(商鞅)은 왕족이었으나 첩의 소생출신으로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조국인 위나라를 버리고 진나라 효공(孝公)을 만나 개혁을 내세우지만 효공이 기득권의 저항을 염려하여 저항하자 이렇게 말하면서 그의 의구심을 떨쳐버리게 만든다.

“의심하면서 행동하면 공명이 따르지 않고, 의심하면서 사업을 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뛰어난 행동을 하는 자는 원래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마련이며, 지혜를 가진 자는 반드시 사람들에게 오만하다는 비판을 듣게 마련입니다.” -「상군 열전」

결국 이런 저돌적인 추진력으로 상앙은 군주의 권력 강화와 귀족의 특권폐지를 골자로 한 변법, 즉 법 바꾸기를 추진하여 강력하고도 확실한 개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자신을 강력하게 지지하던 효공이 죽자 기회를 노리던 반대파들의 반격에 그는 거열형(車裂刑)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가 죽으면서 던진 말, “아! 법을 만든 폐해가 결국 이 지경까지 이르렀구나”「상군열전」는 바로 독선적인 개혁을 한 자신의 행동에 대한 한탄이었던 것이요, 그 자신이 민심의 향방을 살펴가면서 개혁의 수위를 조절하지 못하여 역사적인 개혁가로 남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의 말이 아니었을까?

물론 처세의 달인이었던 소하는 달랐다. 그는 늘 낮은 자세로 권력을 경계하며 자신이 구축하고 있는 입지를 흔들리지 않으면서 꾸준히 이인자의 자리를 구축하여 그의 주군인 고조 유방에게 가장 많은 분봉을 받았다. 심지어 그런 논공행상의 부당함을 항의하는 공신들을 향한 유방의 냉소적인 말, 즉“그대들의 공로는 사냥개 같지만 소하는 개 줄을 풀어 짐승이 가는 곳을 알려주는 사냥개 같은 사람”이라는 극찬마저 들었으며, 그의 자손까지도 그의 후광을 누리게 만들었으니 그의 생존방식은 귀감으로 삼을 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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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공과를 소신과 직필로 적어낸 사마천, 인간과 권력을 이야기하다

나는 이런 생생한 인물들의 성공과 실패, 희망과 좌절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사기』를 완역하기까지 16년여의 긴긴 시간동안『사기』를 수없이 읽어 보면서 나는 인간의 성공이란 자신이 몸담은 세상에서 올바르게 처신하며 살아가는 자세에 미치기 어렵다는 평범한 진리도 생각해 보았다. “값이 비싸면 내다팔고, 값이 싸면 사들인다”「화식열전」는 돈버는 방식처럼, 세상의 엄정한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고, 단순한 용기와 배짱이나 승부사적 기질만 갖고 무모한 사마귀처럼 앞만 보고 돌진해서도 안 된다는 세상의 진리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유효하리라는 생각 말이 다.

사마천이 다룬 인물들은 대부분 힘겹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면서 끝내는 무엇인가 성취를 이룬 계기를 마련한 사람들이었고, 그 힘의 원동력은 자기 내면에 꿈틀대고 있는 치욕이나 결핍, 주류보다는 비주류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그런 점 때문에 갖은 난관 속에서도 자신의 초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 세상에 족적을 남긴 자들이 대부분이라는 점도 알게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어떤 역사인물이든 그의 공과(功過)는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한다는 점도 사마천이 각 편의 말미에 던진‘태사공왈(太史公曰)’을 비롯한 인물평 속에 스며들어 있다는 점도 나는 생각해 보았다. 상앙이나 이사만 놓고 보더라도 그의 공과 과를 긍정과 부정 두 가지 측면을 다 고려해서 보아야 한다는 점이었고, 극악무도한 여제(女帝)로 폄하되는 여태후(呂太后)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마천의 평처럼 그녀가 없었더라면 한 고조 이후 한나라 제국의 초석다지기 작업이 결코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었다. 사마천은 그녀가 자신만의 제국을 세우려고 한 허물 역시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그녀의 단면만 보고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본기 속에 그녀를 수록하였으니, 사마천의 시각은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파격적인 것이었다.

바로 사마천이 고민했던 인물과 역사에 대한 평가 문제는 그가 역사를 어떤 시각을 바라보는가 하는 관점의 문제였고, 그가 역사인물을 향해 던진 평가문제는 오늘 이 시점의 대한민국에서 보더라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이 나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를 전율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자, 오늘 이 시점에서 우리는『사기』를 통해 무엇을 생각해볼 것인가? 2,000여 년 전의 사마천이 오늘의 대한민국 사회, 아니 우리의 삶을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물론 해답은 『사기』를 읽는 데서 시작해야겠다. 바로 우리 인생에 대해 좀 더 애정을 갖고 살아가라는 조언의 메시지가 너무나도 많은 인간학의 교과서이기에 그렇다. 자신의 삶에 대해 행복하냐는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아니다’라고 대답한다면『사기』속 인물들의 삶을 읽어 보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세상을 열심히 살아간다고 해서 반드시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현실을 탓하지도 말고, 그 반대의 경우라고 해서 너무 우쭐대지 말며, 사소한 것에 만족을 너무 느끼면서 살아가는 안분지족도 그리 바람직하지는 않다. 그리고 지금 빛을 보지 못하고 좌절하는 시간이 좀 길더라도 실망하지 말아야 하고 시대를 고민하고 세상을 향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하는 질문을 던지며 살아가야 한다.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을 믿고 뚝심 있게 밀고 나가면 언젠가 자신이 원하는 나래를 펼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이다. 마치 사마천이『사기』의 운명이 결코 순탄치 않음을 예고하여“정본(正本)은 명산(名山)에 깊이 간직하고 부본(副本)은 수도에 두어 후세의 성인군자들의 열람을 기다린다”「태사공자서」고 하면서 역사의 평가에 맡겨보고자 했고 상당기간 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그의 책이 사찬(私撰)임에도 불구하고 24사의 정사로 우뚝 자리매김했으니 말이다.

사마천은 역사인물 속에서 권력과 인간을 보았다. 선하게 사는 것만이 좋은 결말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명제를 던지고 하늘의 뜻은 인간의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자신의 체험적 삶으로 느꼈기에 그 명제는 더욱더 깊이 다가왔다. 사마천이 던진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마천이 그러했고 그가 다룬 수많은 인물군상들이 그러하듯 주머니속의 송곳(囊中之錐)처럼 모든 사람은 능력이 있고 의지와 집념이 있으면 빛을 발하기 마련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떠올리며 우리를 담금질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삶에 승부수를 던질 준비가 되어 있고,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패기만만한 젊음과 열정이 있으니까 말이다.

김원중 / 단국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그림설명 및 출처

그림 1. ▲사마천(司馬遷, B.C.145? ~ 86?),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역사가이다.  ⓒm.sisapress.com/news

그립 2. ▲사백이와 숙제를 그린 <채미도(採薇圖)>.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연명하다 굶어 죽은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를 묘사했다.     ⓒnavercast.naver.com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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