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호 인문학술: 수사학] 수사학의 역사 속으로

정치 협상에서부터 일상 속의 광고, 대화까지 우리에게 소통은 늘 중요한 키워드이다. 소통, 설득, 논쟁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수사학이 작동하고 있다. ‘설득의 학문’으로 불리곤 하는 수사학은 역사 속에서 중요한 학문으로 평가되기도 했고 말의 교묘한 장식이나 기교로만 취급되기도 했다. 오늘날, 기술의 발달로 끊임없이 소통의 새로운 형식이 등장하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범람의 시대에 수사학은 더욱 많은 영역에서 거론되고 있다. 이에 본보는 수사학의 역사적 흐름을 따라 서양의 수사학 논의 전개와 한자문화권의 수사학을 살펴보고 수사학의 진정한 의미를 논하고자 한다.

법정에 선 코락스와 티시아스

이탈리아 반도 끝에 시실리 섬이 있다. 기원전 5세기에 그곳에는 시라쿠사라는 도시국가(polis)가 있었다. 독재하던 참주 트라쉬불로스가 물러나자 민주주의가 열렸다. 독재자의 폭정에서 시달렸던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잃어버린 재산을 되찾기 위한 소송을 벌였다. 시민들은 법정에서 적으면 2백여 명, 많으면 5천여 명까지 되는 배심원들 앞에서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해야 했다. 말솜씨가 문제였다. 배심원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면 빈털터리로 돌아가야 했다. 대중의 절실한 필요를 읽어낸 선생들이 등장했다. “내게 오라. 법정에서 청중을 사로잡는 연설 솜씨를 가르쳐주겠다. 어떤 소송에서도 패하지 않을 것이다.”귀에 솔깃한 달콤한 유혹이었다.

코락스가 그런 선생의 첫 번째로 꼽힌다. 티시아스라는 청년이 그를 찾아왔다. 그런데 선생이 미덥지 않았나 보다. 실컷 배우고 나서 소송에서 지면 어쩌나 걱정이 태산이었다. 선생은 청년을 안심시켰다. “일단 배워라. 그리고 네가 첫 번째 소송에서 이기면 그때 수업료를 내거라.”티시아스는 안심하고 코락스의 제자가 되었다.

교육과정을 모두 이수한 티시아스는, 그런데 법정에 나가려 하질 않았다. 코락스는 애가 탔다. 수업료를 내라고 하니, “소송에서 이겨야 낼 것 아닙니까, 선생님”하고 대꾸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코락스는 괘씸한 제자를 법정에 세우고 말했다. “티시아스는 소송에서 이기든 지든 수업료를 내야 합니다. 만약 그가 이기면, 첫 소송에서 이기면 수업료를 내겠다는 계약에 따라 수업료를 내야 합니다. 반대로 그가 진다면 소송에서 졌으니 그 대가로 수업료를 내야 합니다.”꼼짝없이 걸렸구나 싶은데, 티시아스는 여유만만이다. 그는 선생이 사용한 논법을 그대로 써먹으며 받아쳤다.“ 저는 소송에서 지든 이기든 수업료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제가 지면, 첫 소송에서 이기면 수업료를 내겠다는 원래 계약에 따라 수업료를 내지 않아도 됩니다. 반대로 제가 이기면 선생님께서 소송에서 진 것이니 수업료를 낼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수사학과 소피스트

사람들은 코락스가 가르치던 말솜씨, 연설의 기술을‘레토리케(rhētorikē)’라고 했고, 그것을 우리는‘수사학(修辭學)’이라고 번역한다. 수사학은 그렇게 기원전 5세기경 고대 그리스에서 탄생했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아테네에서 활짝 피어났다. 애초에 그것은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연설가의 설득의 기술이었다. 일반 시민이 배심원으로 제비 뽑혀서 자리를 가득 채운 법정에서나, 국가의 주요 사안을 논의하기 위해 시민들이 모인 민회에서나, 엄숙한 마음으로 전몰 용사를 추모하는 장례식이나, 즐기기 위해 모인 축제의 한마당에서 연설가가 말솜씨를 뽐낼 때에 빛나는 것이 바로 레토리케, 곧 수사학이었다. ‘레토르(rhētōr)’라는 말이 원래‘연설가’라는 뜻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이 소피스트였다. 그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교육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한편 정치연설가들은 민주주의를 배경으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정치가요, 군인이었던 페리클레스는 탁월한 말솜씨로 아테네 시민들을 설득해 스파르타와의 전쟁을 벌였다.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받아들이게 했고, 참고 버티면 반드시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시민들을 독려했다. 그가 던진 메시지가 시민들에게 제대로 먹혔다. 그러나 그게 문제였다. 그의 설득력은 대단했지만, 아테네는 그의 말솜씨때문에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말은 맞지만 현실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는 자기 말을 끝까지 책임지지 못하고 전쟁이 일어난 이듬해에 느닷없이 전염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그 후 아테네 시민들은 그 없이 30년 가까이 전쟁을 치러야 했다. 국력은 고갈되었으며 결국 참패하고 말았다.

진정성을 가지고 조리 있게 말을 해도 누추한 현실을 개선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며, 사람 일이라는 건 정말 어떻게 될지 누구도 모르는 법. 그러니 말이 좋다고 모든 게 다 잘되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대중 연설가가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진실을 호도하고 그럴듯한 거짓으로 청중을 선동하기라도 한다면, 사회는 예상치 못한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수사학을 가르치는 소피스트들은 자신들의 지혜(sophia)를 과신하면서도 그 누구도 절대적인 진리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하며 혼란을 조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민주정의 아테네는 그저 각자의 의견만이 여기저기에서 들쑥날쑥 거리는 곳처럼 보였고, 거기에는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진리는 없는 것 같았다. 설령 그런 진리가 있다고 해도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안다고 해도 말로 옮길 수 있을까? 소피스트였던 고르기아스는 깊은 회의에 빠졌다.

또 다른 소피스트였던 프로타고라스는 진리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 인간들끼리 진리라고 합의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만물의 척도는 인간이다.”아니, 그렇게만 되어도 좋은데, 인간들 사이에 완전한 합의가 있을 수가 없으니, 각자 자기 판단만이 있을 뿐이다. 어떤 것에 관하여‘그렇다’, ‘그렇지 않다’는 판단은 철저히 각 개인에 달린 것이며,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의 척도는 각 개인이라는 말이다. 프로타고라스는 인식론적인 상대주의에 철저했다. 그들의 말에 아테네는 술렁였고, 모두들 각자의 생각을 자유롭게 드러내며 여기 저기서 목소리를 높였다.

소피스트에 맞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위기감을 느낀 철학자가 있었다.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프로타고라스에게 물었다. “당신은 무엇에 관한 지혜를 가르칩니까?” 프로타고라스는 대답했다. “도시국가에서 살아가면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한 지혜요.” 훌륭한 시민을 만드는 교육을 한다는 말이다. 그는 덧붙였다. “나에게 배우는 사람은 매일 더 나아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세속적인 부대낌에서 벗어나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고고한 철학자가 아니라, 격동의 삶의 현장 속 다양한 의견들이 격돌하는 논쟁의 소용돌이에서 설득의 힘으로 승부를 보려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다.

고르기아스에게 소크라테스는 물었다. “당신이 가르치는 것은 결국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말솜씨, 설득을 만들어내는 기술, 즉 수사학이군요.” 고르기아스는 수긍했다. 그렇다면 수사학이란 대중들의 구미에 맞는 말을 하면서 달콤하게 현혹하는 아첨의 기술이 아닌가? 그러나 지적인 회의주의에 빠진 고르기아스에게 소크라테스의 공격은 무의미하다.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이 없는 이상,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설득하려는 노력은 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말로써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 말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사람이 가장 유능한 사람이라는데. 어차피 고르기아스는 소크라테스가 추구하는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진리라는 것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믿는다.“ 설령 그런 것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그것을 알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언제나 변하고, 무엇 하나 그것 그대로 있는 것이 없는데, 무슨 변하지 않는 진리란 말인가?” 항상 제 모습을 지키는 존재라는 것,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오히려 환상일 것이다. 거친 사막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갈망하는 나그네 같은 인생에게, 그의 열망이 만들어낸 신기루 같은 것이다. 그것이 소크라테스가 찾겠다는 진리, 존재의 참모습, 이데아일 것이다. 고르기아스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기원전 399년,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의 법정에 섰다. 아테네가 믿는 신을 믿지 않으며, 청년들을 타락시킨 다는 고소에 맞서 자신을 변호했지만, 그의 변론은 통하지 않았다. 그는 끝내 독배를 마셨다. 플라톤은 스승을 죽음으로 몰아간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싫었다. 그것은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우매한 청중을 말솜씨로 휘어잡는 사악한 대중선동가들의 판이었다. 그는 감각적이며 변화무쌍한 현상에만 시선을 고정시킨 사람들의 위세가 등등한 동굴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동굴 바깥에서 빛나는 태양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겠다는 사명감으로 플라톤은 아카데미라는 학교를 세웠다.

수사학? 만약 그것이 제대로 된 것이라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그럴듯해 보이는 것을 말솜씨로 꾸며내어 현혹하는 기술이 아니라, 참된 지식에 입각하여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진리의 세계로 안내하고 구원하는 ‘영혼의 인도술(psukhagōgia)’ 이 어야 한다. 플라톤은 지상의 수사학을 비판하면서 천상의 수사학을 구상했다. 이데아의 세계로 상승하는 수사학, 그것은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수사학은 우리가 사는 이곳이 아니라 우리가 죽어야만 갈 수 있는 천상의 세계에서만 성립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감각의 세계만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들의 수사학은 환상을 쫓는 헛된 짓이 될 것이다. 아테네 시민들에 게는 그런 수사학이 아니라 이 땅에서 써먹을 수 있는 수사학이 절실했다.

이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대결

기원전 4세기에 걸출한 수사학 교사가 등장했다. 이소크라테스였다. 그는 티시아스와 고르기아스의 제자라고 알려져 있다. 기원전 5세기에 소크라테스가 고르기아스나 프로타고라스와 같은 소피스트와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면, 이어지는 4세기에 플라톤은 이소크라테스와 경쟁해야만 했다. ‘철학과 수사학의 결투’제2라운드가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표현에 는 어폐가 있다. 이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실천하는 말의 교육을 수사학(rhētorikē)이라 부른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교육을 철학(philosophia)이라고 자부했다. 그러니까 이소크라테스도 플라톤처럼 철학을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추구했던 절대적인 진리와 지식(epistēmē)을 부정했고, 그래서 그들과 전혀 다른 길로 가는 철학을 했던 것이다. 고르기아스의 지적 회의주의를 계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소크라테스는 고르기아스를 비판적으로 넘어서려고 했다. 절대적인 진리, 그것은 없다. 우리가 그것을 알 도리가 없고, 그것을 말로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최선은 절대적이며 보편적으로 확증할 수 없는 참된 지식(epistēmē)이 아니라, 내가 옳다고 판단하여 잘 다듬어내는 의견(doxa)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 의견만 고집하는 것도 잘못이고 아무 말이나 되는 대로 지껄여서도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시민들이 함께 모여 건전한 토의를 거쳐 합의를 도출해내는 지혜였다. 이소크라테스는 그런 지혜(sophia)를 추구했다. 그것도 지혜니까 이소크라테스 역시 지혜에 대한 사랑, 즉 철학(philosophia)을 한 셈이다.

이렇듯 이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는 다른 방식으로 지혜를 규정했다. 참된 지혜란 급변하는 정치적인 현실 속에서 시의적절한(kairos) 의견을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이 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말(logos)로 표현하여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론의 장에서 논의하고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사람이 진짜‘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자(philosophos)’라고 믿었다. 플라톤과 같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이나 존재를 추구한다는 것은 공허한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 그는 시의적절한 의견을 추구하는 철학자를 ‘수사적인 사람(rhētorikos)’이라고 불렀고, ‘공정하면서도 유연하게 처리해 나갈 줄 아는(epieikeiēs)’ ‘현명하고 슬기로운 사람(phronimos)’이라고 규정했다.

플라톤은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단호하게 이소크라테스의 교육을 경계하였다. ‘이소크라테스 안에도 모종의 철학이 있다. 하지만 그가 아무런 참된 지식도 없이 오직 의견만을 추구한다면, 그는 지혜(sophia)를 사랑하는철학자(philosophos)가 아니라 한갓 의견(doxa)을 추구하는 호사가(philodoxos)에 지나지 않는다.’ 쉬아파(E. Schiappa)나 콜(T. Cole)과 같은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수사학’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사람이 바로 플라톤인데,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철학과 이소크라테스의 그것을 구별하기 위해 그 말을 만들어낸 것 같다. 자기는 진짜 철학을 하는 것이고, 이소크라테스가 하는 철학은 ‘짝퉁’ 철학이며, 실제로는 철학이 아니라 수사학을 하는 것이라고 낙인(?)을 찍은 것이다.

210-04-1-1

▲ 장례연설을 하는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Perikles halt die Leichenrede). 필립 폴츠(Philipp Foltz). 1852   ⓒwww.the-thenaeum.org/art/

아리스토텔레스와 서구 수사학의 전통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구분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다. 그는 스승이 꿈꾸던 천상의 수사학을 이 땅 위에 실현할 가능성을 이소크라테스에서 발견하고 수사학을 철학적으로 체계화시키려고 했다. 설득은 인간의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인데, 인간의 영혼은 이성적인 부분(logos) 이외에도 감성(pathos)과 품성(ēthos)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진정한 수사학은 총체적인 설득을 위해 이 세 부분 모두를 적절하게 건드려야만 한다. 설득을 위해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말할 것인가? 더군다나 설득이 문제가 되는 곳은 필연성의 세계가 아니라, 이소크라테스가 말한 대로 급변하는 정치적인 현실이며 개연성이 작동하는 세계였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 함께 사는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의견에 합의하고 행동하고 실천하여 사회를 꾸려나가느냐는 것이었다. ‘절대적 진리’라는 것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공허한 독선처럼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립한 수사학의 이론은 그 이후 서구 인문교양교육의 전통을 형성하는 큰 틀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로마의 키케로와 퀸틸리아누스는 수사학의 실천과 이론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로마의 공화정이 무너지고 제국이 형성되면서 민주적인 시민들의 회합과 자유로운 토론과 합의에 근거한 정치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수사학은 본연의 기능과 모양새를 잃기 시작했다. 황제의 지침, 제국의 이념을 화려하게 찬양하고 선전하는 장식의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수사학은 공인된 절대적인 진리를 교화하는 수단으로 변했다. 청중의 바람과 욕망에 귀를 기울이며 공동체의 합의를 모색하며 떠들썩했던 그리스의 수사학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수사학은 정치와 윤리의 영역에서 벗어나 문학의 영역안으로 줄어드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에 대해 쥬네트(G. Genette)는 “쪼그라든 수사학”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며, 리쾨르(P. Ricoeur)는 “수사학이 황폐해진 떠돌이 분야가 되어버렸고” 결국 “죽어버렸다”고 애도했다.

그렇게 죽어버린 수사학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신수사학’을 제안한 사람은 20세기 후반에 활동한 벨기에의 법학자 페렐만(Ch. Perelman)이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이 갖는 정치적이고 논증적인 성격이었다. 그의 노력으로 인해 쪼그라들었던 수사학은 활개를 펴고 인간행동의 거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해 나가고 있다. 정치와 문학에서는 물론, 언어학과 경영학, 광고와 마케팅에서, 심지어 객관적 진리를 탐구한다는 과학의 영역에까지 수사학이 거론되지 않는 영역이 없을 정도다. 인간이 서로 말을 주고받고 논쟁하고 소통하고 합의하며 설득하는 곳에는 언제나 수사학이 작동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나가고 있다. 그래서 페르노(L. Pernot)는 우리의 시대를 “수사학의 시대”라 불렀고, “수사학의 제국”이라는 표현도 페렐만을 비롯해서 많은 학자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우리의 시대에서 “제3 소피스트 운동”을 보기도 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지난날 그리스의 민주정과 로마의 공화정이 그랬던 것처럼, 개인의 의견과 인견이 존중되는 민주주의와 다원주의 가치관이 널리 존중받는 현대 사회의 시스템과 무관하지 않다.

한자문화권에서의‘수사’와 품성의 수사학

지금까지 너무 서양 쪽 이야기만 한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이 원래 서양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서양의 레토릭(rhetoric), 레토리케(rhētorikē)를 그 이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수사학’이라고 옮겨 쓰기 때문에 덤으로 생각해야만 할 것이 있다. ‘수사(修辭)’라는 말이 한자문화권 안에 는 나름대로의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중국 고대에 작성된『주역(周易)』에“말을 닦아서 그 성실한 뜻을 바로 세운다”라는 뜻으로 새겨지는 “수사입기성(修辭立其誠)”이라는 표현에서 처음 나온다.

그 표현에는 말만 번지르르 잘 하는 것[교언영색(巧言令色)]을 경계하는 공자의 생각이 깃들어 있고 말보다는 행동과 인격을 강조하는 유교적인 가치관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참된 인격을 갖춘 군자가 되려면, 자신이 한 말을 반드시 지켜 행하고, 지난한 수련을 통해 마음과 인품을 정성껏 닦고, 성실하게 골라낸 말에 자신의 옳은 뜻을 담아내야 한다는 도덕적 지침이다. 따라서 우리가 수사학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단순히 말을 꾸미고 수식하는 기법에 멈추지 않고 말에 담기는 뜻과 생각, 그리고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의도와 품격까지 생각하며 말을 가다듬는 수련의 과정 전체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동양의 전통만도 아니다. 서구 수사학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가운데 하나인 이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에 몸을 담은 사람은 ‘말을 잘하는 것(rhētoreia)’보다는 공정하고 유연한 태도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쪽으로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키케로도 모두 말의 설득력은 말하는 사람의 인품에서 오는 신뢰감에 가장 크게 의존한다고 생각했다. 수사학이 말을 닦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말에 담기고 말에서 드러나는 뜻과 생각, 인품을 닦는 인격 수양의 길이라는 것에 동서양 모두가 합의하고 있는 셈이다. 수사학의 시대, 멋진 말을 오히려 경계하며, 말이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인품과 사상, 진정성에 목말라하는 우리의 갈망에도 다 그럴만한 똑똑한 이유가 있다.

김 헌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교수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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