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호 인문학술1: 지젝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이데올로기의 구조를 폭로하다: 지젝에 대한 긍정적 평가

‘동유럽의 기적’이라 불리며 여러 번의 내한 강연으로 한국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세계적인 학자 지젝. 취업난과 빈부격차, 민주주의의 위기 등 21세기 ‘불안한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지젝의 사유는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가? 오늘날의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지젝의 철학은 우리에게 어떤 통찰을 제공하며 그 한계는 무엇인가? 이번 인문학술은 논지를 달리하는 대표적인 두 명의 국내 지젝 전문가 이택광, 홍준기 교수를 통해 지젝 사유의 빛과 그림자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우리 사회의 위기들에 대해서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208-04-1-1

 

지젝의 자기식 읽기

 

최근 슬라보예 지젝의 작업은 ‘주체적 유물론’을 정립하는 것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유물론에 대한 다양한 정의에서 빠져 있는 ‘주체’의 문제를 새롭게 제기하는 것이 지금 설정하고 있는 과제인 셈인데, 그는 네 가지 정도로 오늘날 목격할 수 있는 유물론의 경향을 분류한다. 첫 번째 경향으로 뇌과학이나 다윈주의로 대표되는 자연과학적 유물론이 있고, 두 번째 경향으로 푸코와 데리다로 표상되는 담론적 유물론이 있다. 또한 서구의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는 두 가지 반향으로 불교와 하이데거적인 유물론을 거론하고 있다.

지젝은 이런 네 가지 유물론적 경향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주체’라는 중요한 범주가 누락되어 있다고 말한다. 지젝의 말이 얼마나 옳은지 그른지 가늠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유물론에 대한 지젝의 견해를 소개하는 까닭은 그가 어떤 방식으로 기존의 이론에 접근하는지 알아보기 위함이다. 유물론에 대한 지젝의 주장은 전형적인 그의 방법론을 보여준다. 기존에 있는 유물론적 경향을 나열한 뒤에 그것에서 도외시되거나 배제되어 있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지젝스러운’ 접근방식인 것이다.

따라서 지젝을 일종의 ‘논평가’로 취급하는 태도가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또한 기존의 텍스트들에 대한 지젝의 읽기가 그렇게 성실하거나 정밀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많은 부분 그의 논의는 환원론에 가까운 ‘자기식 읽기’에 근거하는 경우가 많다. 지젝에 대한 비난 내지 불만은 오해를 남발하는 지젝의 독법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지젝의 장점과 단점을 굳이 나눠서 전자만 강조하는 경우,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사실상 모든 이론가들이 이런 운명에 놓여 있고, 단점 없는 완벽한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이론은 자신만의 결여에 근거한다. 들뢰즈의 말처럼 철학자들끼리의 대화가 불가능한 까닭이 이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불성실한 지젝의 독법을 지적하고 기존 이론에 대한 오해를 아무리 문제 삼는다고 해도 여전히 지젝은 읽힐 것이다. 이것은 ‘우매한 독자’나 ‘부실한 학계’의 문제라기보다, 철학 자체가 이런 운명에 처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철학이 억견을 넘어서 무엇인가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려면, 아무래도 진리를 진단해야한다는 문제에 부딪힌다. 그 진단은 세계에 대한 논평을 통해 하나의 ‘풍경’을 제공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보편적인 진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고 자기 세계에 침잠할 때 철학은 이런 자신의 소용을 곧잘 망각한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 다시보기

 

‘논평가’로서 지젝이 수행하는 것은 기존에 완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신념체계에서 구멍을 찾아내서 그것이 결코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을 까발리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자기 세계에 침잠하려는 철학을 끊임없이 끌어올려 다른 경계로 나아가게 만든다. 물론 이런 방식이 종종 ‘융복합’이나 ‘통섭’, 또는 ‘학제간’이라는 다양한 고깔로 이용당한 측면이 없지 않다. 알튀세르가 영국의 ‘학제간 연구’를 비판했던 것도 이런 방식으로는 결코 일반이론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겉으로 보면 지젝의 행보는 오해를 불식시키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싸이의 강남스타일까지 온갖 것들을 ‘지발도네’처럼 뒤섞어놓는다는 점에서 지젝은 학제적 연구의 ‘최악’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그러나 지젝에게 과연 이론이 없는가 질문한다면 딱히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젝이 가장 활발하게 이론적인 작업을 전개했던 때가 있었다. 영어권에 처음으로 영어저작을 발표하던 무렵이 그때일 것이다. 이미 그 당시에 지젝은 비영어권에서 꽤 알려진 신예이론가였고, 이런 사실은 <이데올로기의 숭고 대상>에 실려 있는 라클라우의 서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젝의 이론은 무엇인가. 그에게 숨은 대화 상대가 있는데, 알튀세르와 데리다이다. 물론 그는 공개적으로 라캉과 헤겔을 자신의 원천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자기 홍보에 가깝다. 라캉과 헤겔에서 영향을 받지 않은 이론가가 어디에 있겠는가. 문제는 자신의 시대에 줄곧 논쟁을 거는 자기 시대의 동료일 것이다. 지젝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을 재해석하면서 적극 활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라캉과 헤겔은 알튀세르와 대결하기 위해 지젝이 들고 나온 무기일 뿐이다. 지젝이 알튀세르의 대안을 찾기 위해 불러온 유령이 하이데거가 아니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이야말로 하이데거에 대한 문제제기인데, 지젝은 라캉을 통해 하이데거의 문제를 중화하는 길을 택했다. 복잡한 논의가 있어야하지만, 한 마디로 지젝의 이데올로기 이론을 정리한다면 이렇다. 지젝은 알튀세르의 호명이론을 비판하면서, 주체는 이데올로기의 호명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이데올로기가 주체의 증상이라는 것이 지젝의 반전이다. 이런 생각은 라캉의 욕망이론에 근거한다. 라캉에 따르면 욕망은 증상을 만들고, 이 증상은 끊임없는 욕망의 순환을 의미한다. 욕망은 대상을 바꾸면서 즐거움을 누린다. 이 즐거움이란 다름 아닌 만족감이다. 그러나 이 욕망이 더 이상 대상에서 만족을 얻지 못할 때, 문제가 생긴다. 증상이 고통을 주기 시작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질병이라면 환자는 증상을 치유하고 낫게 하기 위해 병원을 찾는다. 그러나 욕망의 증상은 정반대이다. 증상을 지속시켜주기를 원하기 때문에 환자가 분석가를 찾아온다는 것이 라캉의 생각이다. 이런 의미에서 환자는 언제나 거짓말을 한다. 증상은 스스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폭로하면 모두가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젝은 이런 생각에 도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오히려 주체는 이데올로기의 해체를 경험할 때 그것의 존속을 더욱 절실하게 원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소멸시킬 수 없다. 이데올로기는 재구성될 뿐이다. 증상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방식으로 지젝은 라캉의 판타지 이론으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을 다시 읽고자 한다. 지젝의 관점에서 모든 것은 이데올로기이다. 심지어 이데올로기는 나쁘다고 말하는 탈이데올로기조차 이데올로기이다. 모든 이념을 비웃는 냉소주의야말로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이다. 이데올로기는 보이지 않아야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이런 지젝의 진단은 이데올로기 이론의 중핵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혁신적인 관점을 제공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서

 

지젝의 비판은 보편적인 것으로 당연시되는 이데올로기의 구조를 폭로하는 것에 가깝다. 당연히 자유주의는 오늘날 가장 강력하고 자명한 이데올로기이다. 누구도 자유주의를 이데올로기로 파악하지 못한다. 다문화주의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이런 문제를 적절하게 짚고 있다. 지젝은 다문화주의가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는 태도라기보다는 문화적 차이를 강조해서 오히려 구별짓기를 강화하는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한다. 자유주의는 필연적으로 위계를 만들어내고, 그것에 근거해서 ‘자발적인 권위주의’를 유지하고자 한다고 지젝은 말한다.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작동방식을 농담으로 증명하곤 하는데, 그 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것이 있다. 동유럽의 노동자가 시베리아로 일을 하러 가게 되었다. 그 노동자는 친구에게 떠나기 전 이르기를 파란잉크로 편지를 쓰면 진실을 말하는 것이고 빨간잉크로 편지를 쓰면 거짓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노동자는 떠나고 몇 달 뒤에 친구에게 편지가 왔는데, 모두 파란잉크로 쓰여 있었다. 그런데 그의 편지는 그곳의 상황을 지상낙원으로 묘사하다가 “다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면 빨간잉크가 없다”는 말로 끝났다. 이럴 경우 과연 그 편지가 전하는 그 상황은 진실일까 거짓일까. 겉으로 본다면 그 편지는 진실이지만, 전체 수사의 구조로 판단한다면, 그 편지는 거짓을 통해 진실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에 대해 이보다 더 훌륭하게 예시를 제시하는 경우는 없을 것 같다. 지젝의 장점은 이렇게 아이러니를 드러내면서 이데올로기의 작동방식을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물론 지젝의 이론을 일반이론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지젝의 ‘논평’은 분명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환기시키는 효과를 달성한다. 정치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론화의 영역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이런 지젝의 접근방식은 분명 지금 현재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빨간잉크’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그것이 ‘파란잉크’로 쓰여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택광 | 글로벌커뮤니케이션 학부 영미어문학과 교수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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