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호 인터뷰: 이명학 한국고전번역원 원장] 우리 고전의 길

고전(古典)에는 힘이 있다. 고전이 태초부터 고전이었던 것은 아니다. 고전 앞에는 유수한 문화적 토양이 있고, 고전 이후로도 풍요롭고 다채로운 삶의 지혜와 결정들이 열려 있다. 고전은 늘 앞선 선현들의 지혜와 뜨거운 질문 위에서, 그리고 그 고민들을 이어받으려는 다음 세대들의 진지한 노력 속에서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난다. 우리 세대는 이러한 고전의 근원으로부터 얼마나 가깝고, 또 멀리 있는가? 이에 본보에서는 지난 3월 18일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이명학 원장을 만나 치열한 현재성 속에서 고전을 사유하고 느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들어봤다.

 

우리 고전의 길

206-01한국고전번역원이란?

Q. 먼저 한국고전번역원의 연혁과 주된 활동에 대해서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본원은 1965년 민족문화추진회라는 민간단체를 전신으로 합니다. 박종화, 이병도, 이희승 선생님 등 당대 교육·예술계 원로 50여 명이 모여, 우리 민족유산을 어떻게 계승·발전시킬 것인가를 고민한 끝에 만든 재단법인이죠. 이것이 2007년에 교육부 산하 학술기관인 한국고전번역원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국가공공기관이 된 것입니다. 본원에서 주력하고 있는 사업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최치원의 『계원필경』부터 황현의 『매천집』에 이르기까지 개인문집을 번역하는 작업이 있고, 그 다음에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서 『승정원일기』, 『일성록』, 『조선왕조실록』등 역사문헌 번역작업이 있습니다. 끝으로 특수고전이라고 해서 앞의 사항에 속하지 않는 글들, 이를테면 옛 행사에 관한 기록인 의궤나 백과사전 류의 책들을 번역합니다. 즉, 고전문헌들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번역 및 보급하는 것이 본원의 주된 업무입니다.

 

Q. 국가기관으로 전환되면서 달라진 점(장점, 단점)이 궁금합니다.

민간단체일 때는 예산을 받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지금은 예산을 1년 단위로 안정적으로 받고 있죠. 경제적인 측면에서 안정이 된 것은 분명한데, 다만 여전히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번역인원이 많아야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데, 예산상 인원 증원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또 인건비 문제도 있죠. 교육부 산하 기관 중에서 가장 낮은 연봉을 받습니다. 여기에 있는 분들 모두 사명감 하나로 일하고 있지만, 가정이 있는 생활인들입니다. 번역인원 확보, 인건비 문제 등에 있어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합니다.

 

고전번역의 방향성

 Q. 단순한 문자의 번역과 차별되는 고전의 번역은 어떠해야 하나요?

『명심보감』 <성심편>에 보면, “大富由天(대부유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흔히들 “큰 부자가 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라고 번역하는데, 이건 그냥 일차번역일 뿐입니다. 이렇게 번역하면 이 문장은 운명론 내지는 숙명론을 함의하는 것으로 오해될 여지가 있습니다. 심층적인 번역으로 들어가려면 여기에서‘天’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게 자연적인 天인지, 인격적인 天인지, 질서를 의미하는 天인지를 알아야 올바른 번역이 됩니다. 자기가 마음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하늘을 감동시키면 큰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번역할 수도 있는 것이죠. 글자 그대로만 번역해서는 의미 전달이 잘못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회적·정치적·경제적·문화적 배경을 알아야 정확하고 올바른 뜻을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겁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Q. 고전번역의 이상적 방향성이 있다면 어떠한 것이 있을까요?

번역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대중적인 번역이고, 다른 하나는 학술적인 번역이 있겠죠. 어정쩡한 번역보다는 확실히 둘을 분리해서 대중들이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풀이한 번역과, 당대의 학술적인 성과를 집약적으로 담아낸 학술번역이 공존해야 좋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본원의 번역방식도 기본적으로는 이두 가지 방식에 따라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물론 현재로서는 완전한 학술번역을 지향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중간 단계까지로는 번역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전, 내일로 가는 옛길

Q. 복잡한 현대사회의 흐름 속에서 지닐 수 있는 고전의 가치가 궁금합니다.

살면서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왜 사는가,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해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그냥 사는 거죠. 단지 생존 때문에 살아가잖아요. 고전이 갖는 힘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고전은 내가 지금 살아가는 방식이 옳은가, 나는 정말 사람답게 살고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고전은 ‘내일로 가는 옛길’이라고도 합니다. 선현들은 어떤 지혜를 갖고 살았나, 어떻게 대처했나, 어떤 식으로 살라고 얘기했는가를 읽음으로써 우리가 살아갈 내일의 길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겁니다. 그 길을 만들어가고 찾아가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몫이지만, 길을 만들어낼 계기를 주거나 방향을 제시해주는 힘은 고전에 있는 것입니다.

 

Q. 고전연구가 혹‘우리 것의 우수성 내지 순수성’에 사로잡혀 사상의 다양성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는 고전뿐만이 아니라 모든 학문이 지닐 수밖에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성적인 비판이 존재하지 않는 학문은 도그마(dogma)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고전연구뿐만이 아니라 모든 학문에는 현재성이 있어야 합니다. 현재의 삶과 생활, 사회문제에 고전이 어떤 역할을 하느냐, 혹은 해야 하느냐, 이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소위 학문의 순수성이 갖는 독소가 빠질 수 있습니다. 현재성을 망각했을 때 학문은 도그마가 됩니다. 현재성을 끊임없이 성찰하는 것,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죠.

 

고전의 대중화

 Q. 고전과 대중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고전번역원에서 특히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고전을 하나 번역하면 그걸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읽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지금 헛일을 하고 있나?’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사실 우리한테도 책임이 있습니다. 모든 부분을 다 읽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글들을 주제별로 묶어서 선집으로 대중에게 제공한다면, 그 자양분을 일반인들이 섭취하게 되고 그것이 고전의 대중화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학술연구기관이 아니다보니 시민강좌를 하지는 않지만, 초·중·고등학교 도서관에 가서 초·중·고등학생용으로 나온 고전도서들을 나눠주고 강좌를 엽니다. 일종의 도서관 인문학이죠. 학생들 반응도 좋습니다.

 

Q. 고전이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받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고전은 당장 읽지 않아도 생활에 불편하지 않죠. 읽어도 당장 변화는 나타나지 않아요. 그러나 오래도록 읽으면 천천히 바뀌죠. 느리게 바뀌는 대신 다시 되돌아가진 않아요. 은근하고 오래가는 게 있죠. 그런데 사람들이 그걸 못 참는 겁니다. 당장 읽고 무엇을 얻어야 되는데 고전은 그렇지가 않은 거죠. 고전은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줍니다. 정신적인 여유와 삶의 멋. 그걸 알게 되면 고전을 오래도록 접하게 되는데, 거기까지 가기가 어려운 것이죠. 고전을 ‘오래된 새로움’이라고도 하는데 아주 오래 전 살아갔던 많은 분들의 글 속에서 이 세상을 살아갈 새로운 가치를 모색해보는 것이 중요하지요.

입시위주인 학교교육의 문제도 한몫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고전이라는 게 무슨 시험과목에 들어갈 수도 없는 것이고, 방과 후 과목 정도로 다루는데 학생들이 열심히 읽을 이유가 없죠. 주입식의 고전 읽기도 통하지 않으리라 봅니다. 그보다는 아주 간단하게라도 직접 읽고 학생들끼리 토론하고, 옛 선현들은 어떻게 저렇게 살았나, 저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 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공감해보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삼국사기』 <열전>이 굉장히 좋다고 생각해요. 삼국시대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거쳐 간 삶의 궤적들이 담겨 있습니다. 지금 보면 이해 못할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간단히 읽고 토론한다면, 자기의 삶도 풍부해질뿐더러, ‘아, 고전 재밌네? 그럼 다른 것도 읽어볼까?’라면서 고전과의 친화성을 갖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206-02

 

우리 고전의 길

Q. 현재 북한과의 공동번역 사업도 추진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상의 차이에 따른 난점이 예상되는데요. 어떻게 해결하고 계신지요?

일단 남과 북의 고전번역 방식이 다릅니다. 북한은 한자어를 다 우리말로 풀어서 고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번역을 합니다. 반면 우리는 개념으로 쓰인 한자어는 대체로 그대로 두죠. 어떻게 보면 대학생 정도의 수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북한의 민족고전연구소에 공동번역 제의를 했고 긍정적인 답변은 받았지만, 먼저 어떤 번역 방식을 택할 것인가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돼요. 그 다음엔 어떤 종류의 책을 번역할 지도 결정해야 합니다. 북한은 봉건왕조에 봉사했던 사람들은 비판하거나 배제하는 경향이 있죠. 그래서 먼저 하려는 게 인문지리서입니다. 이념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죠. 당장은 실효성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남과 북이 점점 이질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같은 민족임을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향후 남북 초·중·고등 학생들이 함께 읽을 수 있는 민족고전문고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Q. 이번 해에는 청사 이전부터 해서 원장님께서 여러 사업을 기획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청사 이전은 40년 숙원입니다. 연구 환경이 대단히 열악했죠. 여전히 석유난로를 사용하고 있고, 여름이면 누수로 늘 고생했습니다. 고전종합DB를 보관하고 있는 센터가 있는데, 거기가 누수 되면 자료가 다 없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게 늘 염려가 됐는데, 마침 기획재정부와 교육부에서 예산지원을 받아 청사신축을 하게 됐습니다. 물론 신축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공공기관이 지역사회와 동떨어진 독립된 성처럼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전하게 되는 곳이 은평구인데, 근처에 은퇴하신 분들이 많이 삽니다. 그분들 모셔다가 인문학 강의를 해서 관내 학교 방과 후 선생님으로 활동하시게 했으면 합니다. 지식의 선순환이죠. 또 초·중·고 학생들을 위한 고전 인문학 강좌도 열 계획입니다. 1층 도서관을 일반인에게 개방할 예정인데,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고전도 읽고 차도 마실 수 있도록 꾸며놓을 생각입니다. 강북 인문학의 메카가 될 수 있다면 좋겠죠.

 

Q. 끝으로 학문에 정진하고 있는 대학원생들에게 인생의 선배이자, 스승으로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쓴소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정도라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나, 아니면 사회적 인식이나 남들의 시선 때문에 하고 있나’,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한번 해봤으면 좋겠어요. 하고 싶지 않은데 남들 때문에 하고 있다면 불행한 인생이겠죠.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내가 이걸 해서 사회에 무엇을 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도 던져봤으면 합니다. 학문하는 사람일수록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인접학문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회적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학문은 이기적인 학문일 뿐입니다. 생각 없이 살면 편협해집니다. 맨날 땅 보고 앞만 보며 살지 말고, 하늘도 보고, 별도 보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당장의 일에만 얽매이지 말고 생각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학문의 길은 임중도원(任重道遠)입니다. 이런 고민의 시간을 충분히 갖고 나서 떠나면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대담·정리 : 이철주│vertigo1985@khu.ac.kr

사 진 : 박운호│whpark@khu.ac.kr

작성자: khugnews

이글 공유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