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호 인문학술: 서발턴의 전략] 서발턴 개념의 한계와 연구 전략

탈식민주의 논의가 국내에 소개된 지 20여 년이 되어가고 있다. 특히 인문학 분야에서 탈식민주의 논의는 그 이론적 실험과 적용에 있어 그동안 많은 성과를 거두어 왔다. 그러나 그 성과가 이론적 유행에 편승한 것은 아닌지, 탈식민 주의 논의 자체가 비판적으로 제고되어 왔는지는 다시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보에서는 특히 ‘서발턴(subaltern)’과 관련한 논의의 난점과 한계를 점검해 봄으로써, 탈식민주의 논의에 대한 비판적 논의의 장을 마련해 보고자 한다.

 

서발턴과 포스트식민주의

포스트식민주의는 서양(유럽과 북아메리카)에 종속된 비서양(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의 경제적 불평등과 문화적 종속을 비판하는 문제설정이다. 여기서 문제설정이라고 하는 이유는 포스트식민주의가 단일한 사상 체계나 실천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과 입장의 혼합물이기 때문이다. 포스트식민주의는 기존의 반(反)식민지 해방운동을 계승하면서 사회주의, 페미니즘, 생태주의, 사회 정의 등 다양한 흐름과 연결되어 있으며, 비서양의 여러 권리만이 아니라 서양의 권력 구조와 지식체계를 비판한다. 포스트식민주의의 기원에 놓여 있는 것은 1956년 반둥회의에 모인 29개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의 ‘비동맹운동’이며, 1966년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제3세계의 연대를 위해 아바나에서 열린 트리컨티넨탈(tricontinental) 회의이다.[로버트 J. C. 영, 김용규 옮김, 『아래로부터의 포스트식민주의』, 현암사, 2013, 38~39쪽.]

이와 같은 포스트식민주의에서 세공한 핵심 용어가 서발턴(subaltern)이다. 영어권에서 서발턴은 군대의 낮은 서열에 있는 하급사관을 지칭하며, 어원상 하층(sub)에 있는 타자(altern)를 나타내듯이 넓은 의미에서 하층민이나 종속 집단을 가리킨다.

서발턴 개념을 이론적인 맥락에서 최초로 사용한 것은 그람시였다. 예컨대 그는 서발턴이란 용어를 다음과 같이 사용한다. “ 지배계급들의 역사적 통일성은 국가를 통해서 실현된다. 그리고 그들의 역사는 본질에서 국가들의 역사이며, 국가들로 이루어진 집단들의 역사이다. … 하위계급들(subaltern classes)은 정의상 스스로 ‘국가’가 될 수 있기까지는 통일되지 않으며 될 수도 없다. 따라서 그들의 역사는 시민사회의 역사와 뒤섞여 있으며 그것을 통하여 국가들과 국가 집단들의역사와 연결된다.”[안토니오 그람시, 이상훈 옮김, 『옥중수고』2, 거름, 1993, 70쪽.] 그람시는 1930년대 이탈리아 북부(산업 도시)와 남부(낙후한 농촌)의 불균등한 정치, 경제, 문화의 조건에서 남부 농민의 저항을 사유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라는 개념이 불충분하다고 판단하고, 그 대신에 헤게모니 집단을 제외한 나머지 종속 집단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서발턴을 사용한다. 그에 따르면, 서발턴은 지배 집단의 헤게모니에 예속되어 통일적인 주체가 되기는 어렵지만 그 지배의 틈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며 이것이 저항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람시 이후 서발턴 용어를‘발굴’한 것은 인도의 역사학 연구 집단이다. 라나지트 구하(Ranajit Guha)가 주도한『서발턴 연구』(Subaltern Studies)는, 1980년대에 엘리트주의적 관점을 가진 우파의 민족주의 역사학이 엘리트주의적 관점을 갖고 있고, 좌파의 계급주의 역사학이 역사 서술에서 식민주의와 공모한다고 비판하면서 등장했다. 구하는 서발턴 용어를 엘리트 이외의 모든 인도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활용해 농민봉기를 연구한다.[라나지트 구하, 김택현 옮김, 『서발턴과 봉기: 식민 인도에서의 농민 봉기의 기초적 측면들』, 박종철출판사, 2008.]

하지만 이를 ‘세계화’하는 데 공헌한 것은 가야트리 차크라 보르티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이다. 그녀는 1976년 자크 데리다의『그라마톨로지』를 영역해 유명해졌고, 1988년에「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논문으로 포스트식민주의 연구와 서발턴 개념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스피박은 구하가 서발턴의 이상형을 설정하는 본질주의에 빠져서 서발턴을 대상화할 위험이 있다고 비판하면서 서발턴의 복합성과 혼종성을 파악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서발턴의 탈구축적(deconstructive)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스피박은 서발턴을‘상황적 개념’으로 보자고 제안한다. “나는 한 가지 이유에서‘서발턴’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서발턴’은 본래 군대 내 특정 계급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람시는 검열을 피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일원론’으로, 프롤레타리아를‘서발턴’으로 불러야 했다. 구속 상태에서 사용된 이 단어는 엄격한 계급 분석으로 분류되지 않는 모든 것을 지칭하는 말로 변형되었다. 나는 이 말에 이론적 엄격함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좋아한다.”[스티브 모튼,『 스피박 넘기』, 이운경 옮김, 앨피, 92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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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개념화는 서발턴 용어가 주어진 맥락(context)에 따라서, 또는 다른 용어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지칭하는 대상과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 따르면 예컨대 서발턴은‘자본관계에서는 노동자이고, 남녀관계에서는 여성이며, 세대의 차원에서는 청소년이고 … 등등’이 될 것이다.

하지만 스피박의 보다 중요한 논점은 서양의 ‘앎의 방식’에 대한 비판에 있다. 서양의 지식인들이 비서양의 서발턴(특히 서발턴 여성)을 객체로 대상화하고, 자신들의 앎을 객관적, 과학적, 보편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인식론적 폭력(epistemic violence)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서발턴은 자신의 목소리-의식(voice-consciousness)을 스스로 표현할 수 없고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서양 사상의 어휘나 지배 담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이중적인 조건에서 서발턴은 말할 수 없으며 재현될 수 없다는 것이 스피박의 강력한 주장이다. 이런 문제 제기는 서양 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지식인이 자신만의 틀과 시각으로 서발턴을 재단하는 한계를 성찰할 것을 촉구한다는 긍정적인 함의를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피박의 근원적인 비판은, 그렇다면 서발턴을 어떻게 연구하고 재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남긴다. ‘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라는 비판에 기초할 경우 서발턴을 재현한다고 자임하는 기존의 담론들이 갖는 한계들을 부정적으로 지적할 수는 있어도, 서발턴에 관한 적극적인 연구 전략을 구성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서발턴 여성들

스피박은 서발턴이 말할 수 없다고 하는 사례를 두 가지로 제시한다. 첫 번째 사례는 사티(sati)이다. “힌두 과부는 죽은 남편을 화장한 장작더미에 올라가서 자신을 불태운다. 이것이 바로 과부 희생이다(산스크리트에서 과부를 관습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는 사티(sati)이다. 식민 초기 영국인들은 이것을 수티(suttee)라고 썼다). 이 제의는 보편적으로 수행된 것도, 특정 카스트나 계급에 한정된 것도 아니었다. 영국인들에 의한 이 제의의 폐지는 일반적으로‘황인종 남자에게서 황인종 여자를 구해 준 백인종 남자’의 한 사례로 여겨져 왔다. … 이 문장에 맞서는 진술로는‘여자들이 죽고 싶어 했다’라는, 상실된 기원을 향한 향수를 패러디하는 인도 토착주의 진술이 있다. 이 진술은 지금도 여전히 개진되고 있는 중이다.”[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로절린드 C.모리스 엮음, 태혜숙 옮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서발턴 개념의 역사에 관한 성찰들』, 그린비, 2013, 104~105쪽.]

스피박에 따르면, 영국인들은 사티(sati)를 수티(suttee, 殉死)라고 잘못 번역하면서 그것을 인도의 야만적인 관습으로 규정하고 영국의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했다. 영국인들이 인도를 지배해 사티를 폐지한 것은‘백인종 남자가 황인종 남자에게서 황인종 여자를 구해주는 이야기’로 만들어졌으며, 이는 식민 지배가 문명화를 가져온다는 식민주의 담론과 공명한다. 또한 인도 토착주의 담론에서도 사티에 관한 진술이 서발턴 여성을 재현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인도의 고대 문헌을 검토해보면, 사티라는 과부의 자기 희생 관습은 힌두 종교법에서 금지한 자살 행위가 아니라 예외적인 신성한 행위에 해당하는데, 이는 남편의 화장용 장작더미 위에서 함께 죽는 과부의 행위를 자살이 아닌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게 하고, 여성을 남자의 소유 재산으로 재정의하면서 가부장제를 재생산한다. 더구나 힌두 문화에서는 사티가 여성이 자유 의지로 수행하는 도덕적 행위라는 담론을 통해 ‘좋은 아내’를 가리키는 기표로 작동하면서 여성의 행실에 관한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한다. 영국의 제국주의 담론이든 인도의 토착담론이든 서발턴 여성은 재현되지 못하고 있다.

두 번째 사례는 부바네스와리 바두리의 자살이다. “열여섯 내지 열일곱 살의 젊은 처녀 부바네스와리 바두리(Bhubaneswari Bhaduri)는 1926년 북캘커타에 있는 자기 아버지의 평범한 아파트에서 목매달아 자살했다. 그녀의 자살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자살하던 때 생리 중이었으므로 불륜으로 인한 임신 때문에 자살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 부바네스와리는 인도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에 개입한 수많은 집단 중 한 단체의 구성원이었다. 이 사실은 자살한 지 거의 10년이 지나서야 그녀가 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혀졌다. 그녀에게 정치적 요인을 암살하라는 임무가 맡겨졌다. 그녀는 이 과업을 감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실제적 필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스피박, 같은 글, 133쪽.]

스피박은 부바네스와리가 생리 중에 자살한 데 주목한다. 이는 부바네스와리가 자신의 자살이 불륜과 임신 때문인 것으로 간주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날짜를 계산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물론 정확한 자살 동기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의 자살은 사티-자살이라는 사회적 텍스트로 해석되거나, 투쟁적인 여성이 가족을 위해 헌신했다는 방식으로 이해될 뿐이다. 스피박은 부바네스와리의 자살이 “여성으로서 서발턴은 들릴 수도 읽힐 수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강조한다.

물론 스피박이 제시한 말할 수 없는 서발턴 여성의 두 가지 사례는 다르게 읽을 경우 서발턴이 진정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지시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요컨대“힘을 박탈당한 특정 집단들이 말을 할 수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들의 발화 행위가 재현의 지배적인 정치체계 안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들리거나 인식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스티브 모튼, 같은 책, 127~128쪽.] 그러나 스피박의 사례들은 과연 그에 대한 다른 해석과 재현의 여지가 완전히 닫혀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남긴다. 만일 그렇다면, 스피박의 논점은 주어진 지배적인 정치체계의 한계만이 아니라 언어 자체의 한계를 가리킨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스피박은 언어 자체가 갖는 한계를 서발턴의 말의 불가능성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언어로 재현할 수 없는 사물이나 사건은 도처에 존재하며, 이는 서발턴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다리안 리더,『 모나리자 훔치기: 왜 예술은 우리를 눈멀게 하는가?』, 박소현 옮김, 새물결, 2010, 124~128쪽.]

 

아이티의 흑인들은 어떻게 저항했는가?

과연 서발턴은 말할 수 없는가, 또는 어떻게 말하는가에 관한 논의를 위해, 본격적인 포스트식민주의 연구는 아니지만 알튀세르 이후 ‘이데올로기 연구’를 새 지평으로 이동시킨 지젝을 참조해볼 수 있다. 지젝은 아이티의 흑인들이 어떻게 반란했는가에 주목한다. 그는 수전 벅-모스의『헤겔, 아이티, 보편사』를 참조하면서, 프랑스 식민지인 아이티에서 흑인 노예들은 프랑스혁명의 원리(자유, 평등, 박애)를 따라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강조한다. 반란을 일으킨 흑인들은 “프랑스혁명의 슬로건을 프랑스인들 자신보다 더 글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계몽주의 이데올로기에 넘쳐나던 모든 암묵적 단
서들(자유를-그러나 이성적인‘성숙한’주체들에게만 줄지니, 자유와 평등을 누릴 자격을 갖추려면 먼저 오랜 교육 과정을 거쳐야 하는 거칠고 미성숙한 야만인들에게는 불가결하다…)을 무시했던 것이다.”[슬라보예 지젝, 김성호 옮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창비, 2010, 223~224쪽.]
‘프랑스혁명의 슬로건을 프랑스인들보다 더 글자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이 반란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프랑스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의 검은 군대에 접근했을 때, 검은 무리를 이룬 아이티인들은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를 부르고 있었고, 군인들은 자신들이 진압하려는 대상에 대해 혼란스러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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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 탈-노예들이‘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는 것은 결국 식민주의적 종속의 표지가 아닌가(예컨대 반미운동을 하면서 미국 국가를 노래하는 것처럼), 식민지 민족 자신들의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지젝은‘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는 것은 동화나 모방이 아니라, ‘우리가 프랑스인보다 더 프랑스적이라는 것’을, 프랑스혁명의 이데올로기를 프랑스인이 감당할 수 없는 지점까지 밀고 나간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반박한다. 프랑스인들은 아이티를 식민화했지만 프랑스혁명을 통해 노예를 해방하고 아이티를 독립시키는 반란의 이데올로기적 기초를 제공했으며, 탈식민화 과정은 서양과 동일한 권리를 식민지 민족들이 요구했을 때 촉발되었다.

반면에 흑인들이 자신의 전통적인 정체성을 되찾으려 하는 것은 반란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흑인들은 ‘아프리카의 뿌리’라고 하는 신화적인 정체성과 단절해야 하는데, 그것은“‘백인’문화와의 고리를 끊음으로써 피억압자들에게서 잠재적 동맹군은 물론 그들의 투쟁에 결정적인 지적 도구(즉 평등주의적-해방적 전통)까지 빼앗는다.”[슬라보예 지젝, 같은 책, 239~240쪽.] 식민 권력이 두려워하는 것은 백인 문화와 아무 관련이 없는‘아프리카의 뿌리’라는 신화가 아니라, ‘백인’의 평등주의적-해방적 전통의 핵심 요소를 전유하고 변형시키는 것이다. 지젝은 백인 문화의 바깥에서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백인들이 스스로 자신의 전통을 규정하는 독점권을 빼앗는 것이 진정한 저항이라고 지적한다.

이와 같은 지젝의 논변은 프란츠 파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 나는 결코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인식의 공간에서 사라진 흑인의 문명을 복원하는 데 필생을 바치지 않을 것이다. 내 자신을 과거의 인간으로 만들고 싶지 않고 내 현재와 미래를 희생하면서까지 과거를 들추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프란츠 파농, 이석호 옮김, 『검은 피부, 하얀 가면』, 인간사랑, 2013, 309쪽.] 파농은 흑인만의 세계, 백인만의 세계란 것은 없으며, 따라서 백인에게 저항하기 위해 흑인의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흑인과 백인을 모두 뛰어넘는 새로운 권리와 문명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것은 흑인의 욕망이 백인의 것으로 번역되는 것을 비판하고 흑인을 백인의 가치로 번역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백인의 권리와 가치를 탈번역화하고 재번역화하는 것이다.[로버트 J. C. 영, 같은 책, 207쪽.]

 

서발턴의 빌려온 언어

흑인들이 프랑스혁명의 슬로건을 프랑스인들보다 더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보편성을 실현함으로써 프랑스인보다 더 프랑스적이 된다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반역이 지배이데올로기와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지배이데올로기에 내재한 정치적 보편성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집단적인 실천으로 가능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김정한, 「정신분석의 정치: 라캉과 지젝」,『 라캉과 지젝: 정치적, 신학적, 문화적 독법』, 글항아리, 2014, 56~57쪽.] 이와 유사하게, 서발턴연구를 주도한 구하는 이미 스피박 이전에 농민의 서발터니티(susbalternity, 서발턴의 내재적 속성)를 엘리트의 담론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서발턴의 목소리는 엘리트의 담론 안에 충분히 기록되어 있고 재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농민의 서발터니티의 역사는 엘리트 담론 안에 더 충분히 기록되어 있고 재현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항상 그 담론이 그 담론의 수혜자들을 위해 갖고 있던 이해관계 때문이다.” 구하는 반란자의 발화에 관한 당국자의 기록을“가로채인 담론”이라고 부른다.[라나지트 구하, 같은 책, 26~27, 34쪽.] 가로채인 담론은 반란 농민의 적들이 지닌 의도 못지않게 반란 농민의 의식도 증명할 수 있다. “농민이 반란을 수행하기 위해 꾸며낸 ‘이름들, 구호들, 복장들’은 모두 그 적들에게서 가져온 것이었다.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권력을 향한 프로젝트였으나, 그 용어들은 농민이 뛰어든 봉기의 대상인 바로 그 권위 구조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따라서 농민은‘빌려온 언어’-그 밖에는 알지 못했으므로 적의 언어-로 이야기했다.[라나지트 구하, 같은 책, 103쪽.] 다시 말해서 서발턴은 적들에게서 ‘빌려온 언어’로 말한다. 이와 같은 개념화는 서발턴이 말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연구와 재현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상의 논의는 서발턴 개념이 서양의 지식체계에 대한 비판이나 ‘말과 사물’의 관계를 둘러싼 언어의 한계, 주체의 불가능성을 지적하는 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서발턴 연구의 본래적 문제의식으로 돌아가 서발턴이 어떻게 저항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 분석이 필요하다는 것을 함의한다. 국내의 서발턴 연구가 한때 크게 주목을 받았으나 지금까지 답보 상태에 있는 근본적인 이유도 구체적인 저항이나 봉기의 사례를 연구하는‘작품’이 등장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김 정 한 /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그림1: 서발턴 개념을 세계화하는 데 기여한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 1942~ ) (출처: globalcenterforadvancedstudies.org)

그림2: Slavoj Zizek(1949~ ), 지젝은 백인 문화의 바깥에서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백인들이 스스로 자신의 전통을 규정하는 독점권을 빼앗는 것이 진정한 저항이라고 지적한다. (출처: mirror.enha.kr)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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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1. 와 어렵다. 근데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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