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호 인문학술2: 페탱] 정의가 바스러진 세상에서 정의를 찾기

어떤 이는 말했다. “정당성을 잃은 정부, 그것은 강도 집단과 마찬가지이다.”

또 어떤 이는 말했다. “최악의 정부라고 해도, 정부가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다.”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울까? 매우 특별한 시대, 난폭한 현실에 짓눌려, 정의도 질서도 모조리 찌그러지고 바스러져 버린 세상을 살아간다고 할 때, 우리는 의문을 품게 된다.

또 한 가지가 있다. 그렇게 정의가 현실에 짓눌려 질식해 버린 시대를 살아간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그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그는 현실 자체를 부정하고 자신의 긍지와 신념을 연료 삼아서 한 줄기 불꽃이 되었어야 할까? 아니면 현실은 현실이라고 말하고, 그 속에서 최선이라고 여겨지는 일(그것이 정말 최선인지 가늠해 줄 기준 따위는 없다. 어쨌든 정의가 바스러진 세상이니까)을 했어야 할까?

앙리 필리프 페탱(H. P. P´etain, 1856~1951)이라고 하는 사람의 선악을 판단하기 위해, 그리고 그가 했던 일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이런 질문들은 거듭 제기될 필요가 있다.

 

204-05-1

 

‘참 군인’이고 싶었던 사람

 

“마레샬 드 프랑스(Mar´echal de France, 프랑스의 원수)!”1918년 12월 8일, 페탱은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군인, 국민적 영웅으로 이 칭호를 받았고, 그 표시로 수여된 지휘봉에 박힌 일곱 개의 별은 그의 영광과 권위를 위해 찬란하게 빛났다. 그가 그런 인기를 얻게 된 계기는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독일군이 교착 상태의 서부전선을 돌파하기 위해 최대의 화력과 병력을 집중하여 프랑스군이 지키던 베르됭으로 밀려 왔을 때, 페탱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10개월 동안 버티며 독일군을 막아냈다. 결국 베르됭을 돌파하지 못하고 물러난 독일군은 너무 많은 전력을 소진하여 이후로는 완전히 열세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사상 최고의 방어전이라고 할 수 있는 베르됭 전투를 성공적으로 치러내고, 결과적으로 조국에 승리를 안긴 페탱에 대한 열광은 폭발적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정치에 욕심이 생길 만도 했고, 실제로 전쟁이 끝난 1918년에는 여기저기서 그를 모셔가려고 난리였다. 그러나 그는 매번 사절했다. “북프랑스의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이래, 나의 영혼을 사로잡은 것은 오직 군대뿐이었다.” 그런 고고함을 계속 지켜나갔으면 좋았을 것을, 1년 뒤에는 주변의 충동을 견디다 못해 대통령 선거에 나선다. 하지만 실패한다. 공연히 창피만 당한 셈인 그는“역시 나는 정치와는 맞지 않는다. 죽을때까지 정치 쪽은 얼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 말만이라도지킬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종전 당시에는 인기가 하늘을 찔렀던 페탱이 1년 만에 대선에서 고배를 마신 배경에는 전후의 복구 과정에서 프랑스인들이 겪고 있던 심각한 고난이 있었다. 그 때문에 전쟁과 관련된 것이라면 생각도 하기 싫다는 분위기가 지배했던 것이다. 페탱은 최고 군사전문가로서 프랑스의 국방력 재편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그가 베르됭에서 거둔 승리는 종전대로 물량을 쏟아 붓는 공세 위주의 전략 대신 철저히 방어에 치중하는 전략으로 돌아서는 좋은 근거가 되었으며, 이에 따라 그 유명한 마지노선도 건설되었다. 하지만 페탱은 한편으로 항공력과 전차 전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는데, 이는 정치권에서 매번 거절당했다. 방어 위주의 전략을 채택했던 가장 큰 이유가 국방비를 대폭 삭감해야 한다는 방침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페탱의 군비증강론이 먹힐 리가 없었다. 정부의 국방력 축소가 지속적으로 진행되자 페탱은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북아프리카를 지킬 수 없고, 동쪽에서의 또 다른 침략도 막아낼 수 없다!”고 부르짖었으나 마이동풍이었다. 몹시 상심한 페탱은 직업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을 더욱 깊게 키우면서, 이제는 화려했던 옛날을 되새기며 조용히 여생을 보내는 은퇴자의 길을 가려 했다.

 

‘조국과 국민을 위해’ 반쪽 나라의 독재자가 되다

 

그러나 운명은 그와 그의 조국에 안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끝장난 듯했던 숙적 독일은 광란의 독재자 아래 다시 힘을 모아 대전을 촉발했다. 프랑스는 전력상 독일보다 한참 위였다. 그러나 전략에서, 지도력에서, 사기에서 뒤졌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진지 겨우 한 달 만에 프랑스군은 박살이 났고, 1940년 6월 14일에 독일군은 파리에 입성했다.

이런 공황과 혼란의 도가니에서, 프랑스의 정권은 이리저리 돌다가 페탱 앞에까지 굴러왔다. 페탱은 이미 84세였다. 자신에게 돌아온 정권이 결코 영광이 아닌, 오히려 무거운 짐임을 모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정권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수락했다. “저는 여러분과 영광의 날을 나눴습니다. 이제는 어둠의 날도 나누려 합니다.” 그는 대통령에 취임하여, 독일과 굴욕적인 정전협정을 맺던 날 대국민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찍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프랑스에 최고의 영광을 안겼던 주인공. 그가 이제 최악의 불명예를 십자가처럼 짊어지고, 고난의 길에 동참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이 노병의 진실성을 많은 사람들이 인정했다

그러나 추한 현실이 마음만으로 아름다워지지는 않는다. 협정의 결과 페탱은 비시에 신설된 정부 수반이 되어 프랑스 영토의 5분의 2를 직접 통치하게 되었으나, 나머지 5분의 3은 독일군의 점령지가 되어 실질적으로 주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두 나라 사이의 해묵은 영토 분쟁지역인 알사스-로렌도 사실상 독일의 영토가 되었다. 비시정부가 추축국에 어긋나는 외교정책이나 국방정책을 세우는 일도 불가능했다.

이런 가운데 페탱은 프랑스의 국익과 프랑스인의 안녕을 위해 가능한 노력을 했다. 할 수 없이 추축국의 대열에 서 있으면서도, 갖은 방법을 써서 프랑스군이 독일군과 함께 연합군과 싸우지는 않도록 만들었다. 또 피에르 라발(P. Laval, 1883~1945) 같이 본래 파쇼적이던 정치인이 정부각료가 되어 강력히 주장했음에도, 프랑스에서도 독일에서처럼 대대적인 유대인 인종 청소가 일어나지 못하게 막았다. 독일군 두 명이 살해된 일을 앙갚음하려 독일에 억류되어 있던 프랑스군 포로 백 명을 처형하겠다고 히틀러가 으름장을 놓았을 때, 페탱은 “그러면 제일 먼저 나부터 죽여라”고 맞서서 결국 처형을 철회시킨 적도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의지를 최대한 존중한다는 전제가 있는 이상, 그의 정부가 프랑스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일 수만은 없었다. 페탱은 상당수의 젊은이를 의용병으로 전선에 파견하고, 유대인들을 공직에서 내쫓고 시민권을 뺏는 식으로 히틀러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해야 했다. 또한 그가 적극적으로 반민주적인 길을 걷기도 했다. 그는 대통령이 되면서 입법권과 헌법개정권을 포함한 거의 모든 정부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체제를 세웠는데, 나치 체제의 수권법을 모방했다고 볼 수 있었다. 이 노병이 오랫동안 정치인들에게 품어온 염증은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회의로까지 확대되어 있었으며, 그는 프랑스 제3공화정이 자신의 주장을 무시하고 병력을 감축한 것이 패전의 원인이라고 굳게 믿었다(그의 주장에 따라 설치된 마지노선이 쓸모없었음은 고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정치인들이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정치인들을 심판대에 세운 1942년 2월의 리옹 재판은 모든 문제를 구정권 세력에게 돌리고 그들을 희생양 삼아 정국을 타개하려는 “보복정치”의 전형이었다. 페탱은 피고들의 유죄 여부와 형량까지 일일이 ‘지시’했으나, 비시정부 자체가 적법하지 않다는 피고인들 측의 완강한 저항에다 피고들을 ‘전범’으로 처단하기를 바랐던 히틀러의 불만이 겹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광기와 파워게임을 넘어서는 심판을 위하여

 

히틀러가 몰락하고 점령이 끝나자, 프랑스 전역은 일종의 광기에 가까운 “대숙청”의 물결에 휩쓸렸다. 독일군에게 음식을 판 노점상이나 이발을 해준 이발사까지 거리로 끌려나가 군중의 린치를 당했다. 히틀러에게 비협조적이었다 하여 독일에 끌려가 있던 페탱도 귀국했지만, 이제 그를 반기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반면 레지스탕스의 상징으로 금의환향한 샤를 드골(C. De Gaulle, 1890~1970)은, 한때 페탱을 무척 존경하여 맏아들의 이름을 페탱의 이름을 따 필리프라고 붙였던 드골은, 그를“보복정치”의 희생양으로 삼기로 했다. 페탱과 비시 정부의 수뇌들은 1945년 7월 말에 법정에 섰으며, “시련의 시기에 조국과 국민을 지키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는 변명에도 아랑곳없이, 재판부는 페탱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다만 이미 90이 넘은 그의 나이를 감안해 집행은 유예되었고, 그는 마치 나폴레옹처럼 대서양의 일드외 섬(Ile d’Yeu)에 억류되어 있다가 그곳에서 숨을 거뒀다.

역사는 다채로운 색깔의 실로 짜인다. 그러나 이념은 그것을 오직 흑 아니면 백, 두 가지로만 보라고 한다. 그런 가운데 백을 지향하면서도 결국 흑의 자리에 서게 되는 사람이 있다. 또한 그런 사람이 백이라고 하면서 실제로 흑의 행동을 자행하게 되기도 한다. 그런 사람을, 그런 시대를 어떻게 심판할 것인지, 우리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심판해야 한다. 정의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시적 광기에 휩쓸려서, 또는 냉혹한 권력의 법칙에 따라서 심판해서는 안 된다. 모두가 함께, 동정과 관용의 정신을 잊지 않으며, 합리적 원칙을 따르면서, 충분한 숙의(deliberation)를 통해 심판해야 한다. 그것이 민주적인 방식으로 정의를 추구하는 길이며, 민주주의가 역사의 조롱거리, 파워게임의 외피가 아님을 확인하는 길이다.

 

함 규 진 / 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그림 1: 히틀러와 악수하는 페탱 (출처: kk1234ang.egloos.com)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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