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호 인문학술1: 이완용] 이완용, 엘리트주의와 도구적 합리성의 결합

매국노는 사적인 이익을 탐해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을 뜻한다. 그렇다면 역사를 거쳐 간 매국노들은 왜 매국을 하게 됐을까? 이번 인문학술은 가서는 안될 길을 감으로써 지금도 부끄러운 이름으로 남아 있는 이완용과 페탱에 대해 추적해본다. 국가를 책임지는 한 개인의 잘못된 선택이 어떻게 국가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지 살펴보고 이를 통해 기존의 시각과는 다른 관점을 검토하고자 한다.

204-04-1

을사5적의 한사람, 정미7적의 우두머리, 그리고 1910년‘병합’조약을 협상하고 조인했던 이완용(1858~1926)을 우리는 ‘매국적’이라고 부른다. 팔 수 없는 것을 팔아 식민지배란 역사적 고통을 안겨줬던 그의 매국 행위는 사리사욕에 찌든, 도덕적으로 파탄난 인간성에 기인한다는 믿음이 이미 확고하게 형성되어 왔다. 그래서 그의 매국 행위의 원인을 기존의 믿음과 다르게 설명하려는 시도는 금기의 영역이 되어 버렸고, 다시 거론하려는 시도 자체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매국행위를 이완용 개인의 도덕성 문제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첫째, 그는 양반의 품위와 도덕성을 중시했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는 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에 대한 도덕적 비난은 1905년 이후『매천야록』이나『대한매일신보』등에 의해 만들어지고 과장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둘째, 전제군주국이었던 대한제국의 국가적 결정권은 황제에게 귀속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셋째, 을사조약, 정미조약, ‘병합’조약의 과정에서 최고결정권자가 조약 내용의 협상에 개입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국가적 결정과정의 문제, 즉 결정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의 태도와 관념 등을 반성적으로 고찰해야 하는 문제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매국적’이완용을 도덕적으로 파산한 개인으로 간주함으로써 결정과정의 책임을 그에게 모두 전가하기 보다는 그의 선택의 배후에 자리하고 있었던 그의 사회적 태도의 문제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개인의 사회적 선택의 문제를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개인적 욕망과 소신 사이에서 갈등하는 평범한 인간으로 사회적 지위와 환경에 의해 만들어지는 태도를 반성적으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매국조약의 체결 과정

 

1858년 경기도 광주군 한미한 집안이었던 이호석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완용은 어려서부터 영특하다는 소문이 났고, 이로 인해 1867년 서울 세도가였던 이호준의 양자가 되었다. 여느 세도가 양반집안 자제들처럼 교육을 받고, 과거를 통해 관직에 등용되었다. 경연에서 충성심을 보인 이완용은 고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고속 승진을 했다. 젊은 이완용은 조미조약 체결 이후 고종이 미국을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을 눈치 채고, 새로운 시대를 위해 영어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 입학해서 영어를 배웠다. 그리고 미국공사관 참찬관과 미국공사서리를 지냈다. 그는 조선이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갑오개혁에 참여하고 독립협회를 이끌면서 정치교육개혁을 실시하고자 했다. 전통적인 유교의 학문적 토대 위에 근대 지식을 습득했던 이완용은 합리적인 방식으로 갈등을 조정하는 정치 관료로 성장했다.

그런 그가 1905년 외교적 주권을 포기하는 내용의 을사조약에 동의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그의 변절이다. 갑오개혁 이전에는 친미파, 아관파천 시기에는 친러파, 그리고 1905년 이후 친일파로 변신했기 때문에 그는 기회주의자라는 평가이다. 그러나 그의 변신은 당시의 고종의 외교적 노선변화와 궤를 같이 하는 측면이 많았다. 따라서 그의 매국 행위를 그의 기회주의적 속성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을 만나 을사조약 체결을 강요했을 때 고종과 내각대신들은 모두 반대를 했고, 대신들의 반대를 빌미로 고종이 조약체결을 연기시키거나 반대하겠다는 대책을 세웠다. 그리고 반대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비해서 조약문을 수정했다. 고종은“대한제국이 부강해지면 보호국을 철회하겠다”는 조문을 넣자고 했고, 이완용은 “통감의 권한을 외교권으로 분명하게 한정하자”고 했다. 고종과 대신들의 조약문 수정은 반대할 수 없는 최후의 상황에 내놓을 카드였다.

다음날 이토는 고종을 직접 만나서 결정을 짓겠다고 하면서 고종에게 알현을 청했다. 그러나 고종은 인후통 때문에 이토를 만날 수 없다고 하면서“대신들이 알아서 잘 처리하라”는 명을 내렸다. 고종과 함께 마련한 대책이 무산되자 대신들은 전날 회의 내용을 이야기했고, 이토는 그 자리에서 수정안을 받아 적었다. 을사조약의 체결 과정의 문제는 최종결정권자인 고종이 자신의 책임을 대신들에게 전가한 것이었고, 대신들은 상황논리에 매몰되어 조약에 승인을 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1907년과 1910년에도 반복적으로 재현되었다.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일본은 전쟁을 하겠다고 협박하면서 고종의 폐위와 정미7조약 체결을 압박했다. 내각총리였던 이완용은 순종에게 황제의 지위를 물려주는 선위의 방식을 채택하여 황실을 유지시켰다. 1910년 ‘병합’조약 때에도 이완용은 황제의 지위와 대한제국 국호의 사용을 주장했다. 그리고 타협안으로 결정된 것인‘왕’의 지위와‘조선’이라는 국호였다. 일본의 조선침략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받아들였던 고종과 순종은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채 책임을 회피했고, 이완용은 황실과 허명뿐인 대한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조약협상에 임했다.

 

극단의 상황과 도구적 합리성

 

제국주의 국가 간 상호 승인된 일본의 침략, 대한제국이 대면한 극단의 상황에서 국가적 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있었던 이완용의 선택은 당시 상황논리에서 보면 비교적 실리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국제적 상황이 변화될 때를 대비해 황실의 유지가 필요하다는 생각, 일본과 전쟁하는 것 보다는 일본의 보호국 또는‘병합’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1905년 이후 대한제국 사회에서 확산되고 있는 것이었다. 지식인들은 일본의 보호국을 스웨덴-노르웨이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보다 훨씬 나은 상황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사실상 스웨덴의 식민지였던 노르웨이나 그보다 자치권을 더 확보한 헝가리에 비해 보호국은 대한제국이 부강해지면 곧 철회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미조약, 기유각서 등이 체결되면서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어 가자, 지식인들 대부분은 ‘보호국’상황을 지속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일진회와 그들의 주장을 지지했던 유생들은 두 제국을 모델로 한 한일 ‘병합’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지식인과 관료들은 1907년 정미의병 이후 지속적으로 전개된 의병의 폭력적 저항을‘도적떼’의 행위로 비난하면서 그들에게 총과 칼을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가서 실력양성에 힘쓸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여기에 1905년 이후 통감부가 철도, 도로, 항만을 구축하면서 토목사업이 붐처럼 일어났고, 노동인력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임금이 상승했다. 일본인이 밀려들면서 부동산 경기가 활성화되고, 주택건설 붐이 일어났다. 대한제국민들 사이에서는 일본어 학습이 붐처럼 일어났다. 일본인을 상대로 하는 사업, 일본인과의 협력 사업은 새로운 부를 창출하고 있었다. 경제적 부를 둘러싼 경쟁이 촉발되면서 대한제국 사회는 경제 발전에 대한 지향이 강하게 등장하고 있었다. 투자와 협력의 확대가 침략과 저항의 대립을 희석시키고 있었다.

이완용은 투자와 협력이 배태하고 있었던 ‘발전’의 공간에서 있으면서 침략과 저항의 공간을 멸시했다. 어리석고 우매한 백성들이 문명화의 이익을 모른 채 무조건 반대만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투자와 협력이 다수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강한 확신에는 ‘상황판단과 결정은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강한 엘리트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이완용은 그 신념에 다가갈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병합’을 승인했다.

이완용의 매국 행위는 그의 개인적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엘리트의식에 사로잡혀 침략과 저항의 공간을 무시한 채 상황을 독단적으로 판단했던 것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신념화된 것을 달성하기 위해 상황논리 속에서 가장 효율적인 선택을 한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이완용은 대한제국 사회에서 분출하고 있었던 다양한 요청과 소통하지 않은 채 엘리트주의에 사로잡힌 정치 관료의 도구적 합리성이 얼마나 위험하고 불행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김 윤 희 /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그림1: 영친왕과 이완용 친일 내각이 한일 병합 직전에 찍은 사진 (출처: mpva.tistory.com)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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