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호 인문학술2: 아나키스트(Anarchist)] 당신이 아는 것은 아나키즘이 아닐 수 있다!

 

 

아나키즘에도 이론가들이 있는가? 데이비드 그레이버(D. Graeber, 1961~)는 『아나키스트 인류학에 관한 단상들』에서 유명한 이론가들이 없는 이유를 분석한다. 사실 아나키즘의 기본원리인 자조, 자발적인 결사, 상호부조는 인류역사만큼이나 오래된 행위양식이다. 그래서 이 오래된 양식을 설명하기 위해 탁월한 이론가가 필요하지는 않다. 아나키스트들은 새로운 이론이나 교리보다 그것을 실현할 개인의 윤리, 사회관계에 관심을 쏟았고, 어떤 목적을 위해 스스로를 조직하는 방법으로 정체성을 증명하려 한다. 따라서 아나키스트들은 “회의를 진행할 때 무엇이 진정 민주적인 방식인가, 조직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도록 어디서 멈춰야 하는가 등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또는 대항권력의 윤리학에 관해 논의”했다. 그럼에도 아나키즘 운동의 좌표를 잡은 사람들은 있었다. 물론 이 방향타 역시 어떤 지적 논쟁보다는 실천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203-05-1

사적 소유는 도둑질이고 국가는 폭력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을 장식했던 인물은 단연 프루동, 미하일 바쿠닌(M. Bakunin, 1814~1876), 크로포트킨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의 사상은 조금씩 다르지만 사회의 발전이 한 개인의 노력보다 여러 사람들의 협동으로만 가능하고, 그렇기에 소수의 사람들이 그 부와 성과를 독차지할 수 없다고 주장했던 공통점을 가진다. 지금 시대와 달리 그 시대에는 사적 소유권이 논쟁의 주제였고 국경을 넘나드는 활동들이 자연스러웠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이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다.

 

근대국가와 사적 소유권이 평등한 노동조건에서 각자가 재산을 평등하게 나누고 그런 관계를 통해 자아의 통일성과 단일성을 유지시키는 정의로운 질서를 거부하기 때문에 프루동은 그것이 사라져야 한다고 봤다. 프루동은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대의제도의 정치적인 가능성을 믿지 않게 되었고, 인민은행과 상호부조하는 노동조직을 통한 지속적인 사회변화를 추구했다.

 

바쿠닌은 이런 생각을 이어받아 국가에 대한 거부와 연합주의, 정치활동 거부, 농민의 중요성 등을 강조했다. 국가는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 주인과 노예, 착취하는 자와 착취를 당하는 사람의 구별을 결코 없애지 않기에 그 자체가 폭력이다. 국가가 아니라면 무엇이 개인의 자유를 보장할까? 바쿠닌은 생산과 소비를 담당하는 각각의 결사체들이 연합의 원리에 따라 사회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쿠닌은 단 한명의 사람이라도 노예상태에 있다면 그것이 모든 사람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라며 공동체 내에서만 머무는 자유를 비판하고 서로의 해방을 위한 연대를 강조했다.

 

크로포트킨은 국가가 없어도 사람들이 서로 협약을 맺어 자율적으로 사회를 관리할 수 있고 그런 사례들을 인류 역사에서 무수히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크로포트킨은 『빵의 쟁취』에서“임금제와 자본가에 의한 대중의 착취에 입각한 사회는 의회주의에 만족한다. 그러나 공동유산의 소유권을 다시 찾은 자유사회는 자유로운 집단과 집단의 연합 속에서, 역사의 새로운 경제 단계와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조직을 탐구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기적인 욕망은 어디서나 나타날 수 있지만 크로포트킨은『상호부조론』에서 생존경쟁과 상호부조라는 원리가 항상 함께 존재해 왔고 우리는 어떤 원리를 택할 것인가라고 묻는다. 만일 상호부조를 택한다면 우리는 그런 사회를 우리 삶에서 실현해야 한다.

 

유럽만이 아니라 아시아와 아메리카대륙에서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활동을 펼쳤지만 싹을 채 틔우기도 전에 대대적인 탄압을 받고 사라졌다. 한국에서도 이회영, 신채호, 유자명, 유림처럼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활동했지만 그 꿈을 실현하지 못했다.

 

다시 연방주의와 자율적인 연대투쟁으로!

 

지금 우리 귀에 익숙한 아나키즘 지지자들은 노엄 촘스키 (N. Chomsky, 1928~)와 머레이 북친(M. Bookchin, 1921~2006), 데이비드 그레이버, 이와사부로 코소(S. Kohso,1955~) 정도이다. 언어학자 촘스키는 『촘스키의 아나키즘』에서 발달된 산업사회에 맞는 합리적인 체제가 바로 아나키즘이라고 주장한다. 그 사회에서는 노동자들이 체제를 운영할 수 있는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고 노동자 평의회나 평의회 총회가 국가를 대신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촘스키는 “권력은 그 정당성을 입증해야 하며, 만약 그 정당성을 입증할 수 없다면 분쇄해야 한다는 확신”을 품고서“민주적인 사회질서를 확립하려면 노동자들의 관리와 자유로운 연합, 그리고 연방조직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북친도 연방주의를 강조하는데, 특히 북친은 아나키즘에 내재된 생태주의를 강조한다. 아나키즘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만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포함해 모든 지배관계를 없애고자 하는데, 그러려면 단순히 자연을 보호하고 보전하는 차원을 넘어서 생태위기를 만든 사회의 성격을 바꿔야 한다. 그래서 북친은 사회생태론(social ecology)을 주장하며 자연 현상과 사회적인 현상을 연관시켜 이해하고자 한다. 북친은『머레이 북친의 사회적 생태론과 코뮌주의』에서“코뮌주의의 삶이 실현되면 기존의 경제학은 윤리학으로 바뀐다. 기존의 경제학은 가격 문제와 희소자원에 주로 관심을 쏟았다. 하지만 윤리학은 인간의 욕구를 실현하는 일, 좋은 삶을 추구하는 일에 중점을 둔다.”며 삶과 사회의 변화를 강조한다.

 

그레이버는 전 세계 곳곳에서 아나키스트의 활동이 이미 두드러지고 있다고 본다. 그레이버는 아나키즘이 이념보다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창조하는 운동이고 이 새로운 형태의 조직이 바로 이념이라고 주장한다. 그레이버는 『민주주의 프로젝트』에서 어큐파이 운동이 바로 직접행동을 전면에 내세운 전략이자 이념이라고 주장한다. “20세기 초반에 이것은‘낡은 껍질 안에서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라 불렸고, 1980, 90년대에는‘미래를 살아가는 정치(prefigurative politics)’로 알려졌다.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든 법률을 무시하고 소금을 만드는 것이건 모임을 봉쇄하거나 공장을 점거하려는 것이건 직접행동은 현재의 권력구조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듯 행동한다. 결국 직접행동은 우리가 이미 자유로운 것처럼 행동하자는 도전적인 주장이다.”뉴욕시 주코치 공원에서의 일상적인 모임과 집회, 도서관, 밥집, 그 곳을 채웠던 춤과 노래는 일상을 지금 당장 재구성하는 활력을 드러냈고 이런 활력은 자율적인 연대를 통해 유지되었다.

 

비슷하게 코소는『뉴욕열전』에서 이념보다 거대한 대중운동, 잡다한 도시공간을 유지했던 다양한 삶과 힘에 주목한다. 보통 이런 역사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인데, 코소는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것은 반드시 항상 시민권에 의해 보호받는 그 국가의 국민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 혹은 그 땅에 노동하며 생활하고 생산하던‘세계민중’”이었다고 강조한다. 그런 관점에서 코소는 맑스주의와 아나키즘의 대립이란 낡은 구도를 넘어서 아직 이론으로 정립되지 않은, 정립될 수 없는 전 지구적인 운동에 주목하는‘새로운 아나키즘’을 주장한다. 이 새로운 아나키즘은 새로운 감정과 관계, 관습을 통해 자본주의와 대결하고 새로운 삶을 건설하는(어떤 면에서는 파괴가 곧 창조라는 바쿠닌의 주장을 재구성하는 듯한) 삶과 운동의 역동성을 강조한다.

 

마주봄/함께함의 실천학/실천윤리

 

21세기에 아나키즘은 어떤 이론의 성격보다는 함께 만들어가는 사회의 구성 원리, 생태적이자 민주적인 사회를 운영하는 방법, 수평적인 네트워크운동, 새로운 사회를 지금 당장 살아가자는 관계와 관습으로서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이런 사회운동이 가능하려면 기존의 구획화된 사회운동의 관행과도 대결해야 하고, 말 그대로‘함께 살자’, 즉 함께 살려는 준비를 당장 해야 한다. 그리고 함께 살려면 먼저 서로를 마주봐야 한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어떤 의미이고 우리가 어떤 삶을 지금 살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하고 상상해야 한다. 그렇게 서로 마주보고 구체적인 실천을 함께 하다보면 미래의 좋은 삶을 마냥 기다리지 않고 지금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으로서의 아나키즘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다.

 

현실을 분석하는 관점이 삶과의 연관성을 잃어버리거나 어떤 법칙이나 이론의 틀에 갇혀버릴 때 그 관점은 오랜 세월 누적되어온 삶의 지혜를 망각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쟁과 집중화의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단기적인 처방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삶의 기반을 재구성할 관점과 지혜이다. 이런 관점과 지혜는 선험적으로 주어질 수 없고 현실과 능동적으로 대결하고 충돌하며 새로운 삶과 구조를 구성할 때에만 드러난다. 그러니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라는 완결된 특정한 사상보다 현실의 틈을 파고드는 실천윤리로서 우리 앞에 제시되고 있다.

 

하승우/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연구위원

*그림 설명 및 출처

그림1: 역사는 두 종류의 사람을 기억한다. ‘살인자들’과 ‘맞서 싸운 자들’

(출처:libguide.wustl/edu/anarchism)

작성자: khugnews

이글 공유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