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호 인문학술1: 아나키즘(Anarchism)] 세월호 이후의 한국사회, 아나키즘은 어떤 질문을 던지나?

보통 아나키즘을 비현실적이거나 과격한 사상, 헛된 공상이라 여긴다. 물론 모든 이념이 그렇듯이 아나키즘에는 그런 요소도 숨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념이 현실 속에서 출현해 현실을 이끄는 힘이라면, 때로는 현실이 그런 요소들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에 본고에서는 아나키즘의 중요한 개념을 살피고, 아나키스트들이 무엇을 위해 살았으며 어떤 이념을 품었는지 살펴봄으로써 그것이 현실을 살아가는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203-04-1

 

아나키즘은 지배를 거부하는 사상이다. 흔히 무정부주의로 번역되지만 아나키즘은 국가만이 아니라 자본의 지배에도 단호히 맞섰다. 물론 근대국가와 자본주의의 폐해에 맞서고자 한 사상이 아나키즘만은 아니었다. 사회주의로 통칭되는 흐름도 그런 폐해에 맞서고자 했고 아나키스트들도 초기에는 사회주의자를 자처했다. 러시아 아나키스트 표트르 크로포트킨(P. Kropotkin, 1842~1921)도『청년에게 고함』에서 사회주의라는 대의(大義)에 동참하라고 청년들에게 호소했다.

 

아나키즘이 사회주의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건 단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반감만이 아니었다(사실 맑스주의도 근원적으로는 국가를 해체시키고자 한 사상이다). 사상을 현실에 구현하는 과정이나 대안을 사유하는 방식도 달랐다. 아나키즘은 혁명 이후의 사회에 대한 청사진을 마련하지 않았다.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뒤 벌어진 일련의 사태에서 아나키스트들은 볼셰비키와 다른 길을 걸었다. 아나키스트 역사가 폴 애브리치(P. Avrich, 1931~2006)나 조지 우드콕(Woodcock, 1912~1995) 등은 아나키스트가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어떠한 형태이건 간에 억압을 증오했고 그로 인한 언어와 문화의 타락을 경고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아나키즘이 쇠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

 

국가의 힘은 정말 소멸하고 있는가?

 

이미 정부라는 통치체계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고 시민이 복지국가의 강화를 바라는 시대에 아나키즘이 다시 거론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자본주의 경제나 근대국가의 위기와 같은 상황들이 아나키즘을 다시 불러내고 있는 걸까? 그런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우리 시대가 다시 야만의 시대, 폭력의 세기로 돌아가고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아나키즘 운동이 다시 등장한 건 야만과 폭력이 강화되고있기 때문이다. “통치받는다는 것은 지성도 없고 미덕도 없는 것들에게 감시당하고, 조사당하고, 정탐당하고, 규제당하고, 세뇌받고, 훈계받고, 저들의 명단에 오르고, 측정당하고, 평가받고, 검열받고, 부림받는 것이다. 통치받는다는 것은 뭔가를 할 때마다 사사건건 지적당하고, 기재당하고, 합산당하고, 값이 매겨지고, 야단맞고, 금지당하고, 개정당하고, 시정당하고, 교정당하는 것”이라는 피에르 프루동(P.J. Prodhon, 1809~1865)의 피동사 목록처럼, 타인과 더불어 자기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아나키즘은 어두울수록 가장 생각나는 사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나키즘의 문제의식들 중 여전히 유효한 몇 가지를 따져보자. 사실 세월호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터져 나오고 있다. 재난에서 국민을 구조하지 않는 국가, 생명보다 이윤을 위해 사건·사고를 만들 수밖에 없는 국가는 국민에게 어떤 의미인가? ‘민영화’라는 말은 마치 자본이 국가를 지배하고 기업이 정부를 대체하는 듯 보이게 만들지만 실제로는 둘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현상을 가리킨다. 올 초에 개봉한 영화 <블랙딜>(2014)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힘을 쥔 강자들의 검은 거래가 바로 민영화이다. 그러니 신자유주의 물결이 가져온 것은 국가의 후퇴가 아니라 국가의 변형이다. 노골적으로 국가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줄어들었지만(여전히 한국정부는 강정마을이나 밀양, 청도 등지에서 노골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런 변형된 체제는 실업에의 공포나 불안정한 노동, 대중매체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런데 한국 현대사를 장식하는 수많은 사건·사고를 겪으면서도 사람들은 ‘국가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 믿음은‘애국’이나‘국익’으로 불리기도 했다. 강렬했던 이 믿음이 흔들리는 건 세월호 사건의 충격이 그만큼 크다는 점을 뜻하고, 지금 정부가 세월호 사건을 은폐하거나 망각시키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에 대한 실망이 때론 헤어짐보다 집착을 낳기도 하듯이 의문이 곧바로 부정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나로부터 시작되는 변화는 허상(虛想)인가?

 

국가가 아니라면 무엇이 가능한가? 아나키스트들의 대답은 조금씩 다르다. 국가 없는 사회 그 자체를 주장하는 개인부터 새로운 사회조직이나 반(反)국가주의 연방국가를 주장하는 코뮌주의자들까지 다양하다. 이렇게 생각은 다양하지만 하나의 공통점은 어떤 사회여야 하는지를 결정할 힘이나 권한이 특정 인물에게 일방적으로 위임될 수 없다는 점이다. 모두를 위한(for) 사회가 아니라 누구나 함께 하는(with) 사회, 여민동락(與民同갪)의 대동사회(大同社會)가 아나키스트들의 사회였다.

 

하지만 어떤 세력이 그런 사회의 구성을 끊임없이 방해한다면? 아나키스트이지만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와 함께 활동했던 빅토르 세르주(V. Serge, 1890~1947)는 긴급한 위기시에는 아나키스트들이 무기력했다고 지적했다. 아나키스트들의 삶이나 실천이 무기력했던 것이 아니라 혁명 이후의 다양한 위험과 위협들이 그런 노력을 의미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세르주는『한 혁명가의 회고록』에서 아나키스트들이 원칙적인 입장 외에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고 혼란에 빠졌다고 지적했다.

 

변화를 반대하는 세력에 아나키스트들은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 만약 이 질문이 국가의 효율적인 운영과 관련된다면 아나키스트들이 이 물음에 답하기 어렵다. 효율적인 운영을 논하는 순간 이미 존재하는 국가라는‘프레임’에 갇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병역거부자들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가족이 공격을 당해도, 상대방이 먼저 공격을 해도, 한국이 침략을 당해도 총을 들지 않겠냐는 물음이다. 그런데 아직 오지 않은 가상의 상황 때문에 현재의 분명한 불의(不義)를 눈감거나 견뎌야 할까? 달리 말한다면 언제, 어떻게 실현될지 모를 경제적인 이익 때문에 강을 파헤치고 땅을 죽여야 할까?

 

적어도 나는 총을 들지 않겠다, 나는 그런 일에 동참하지 않겠다는‘수동적 거부’는 나로부터 세상을 변화시킨다. 평화활동가 애먼 헤나시(A. Hennacy, 1893~1970)가 그렇게 해서 세상이 바뀌겠냐는 질문에 “나는, 만약 내게 용기가 있다면, 사람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오늘 당장 살기 시작할 수 있다. 나는 사회가 바뀔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방법은 자기 자신의 변화를 위한 시도다”라고 답한 것도 그 때문이다. 헤나시는 이를‘한 사람의 혁명(one-man revolution)’이라는 말로 풀이했다. 국가 없는 세상은 지금 당장 국가에 대항해 세금납부를 거부하고 군대에 참여하기를 거부할 때 이미 어느정도 실현된다. 자본주의 없는 세상은 불필요한 물건을 생산하기를 거부하고 무절제한 소비의 쾌락에서 벗어날 때 이미 실현되는 현실이다. 혁명은 멀리 있지 않고 내 삶 속에 있다. 그러나 총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이익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득권층의 앞잡이가 되어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 다른 조건이라면 친구가 되었을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거나 그들의 보금자리를 파괴해야 한다. 이런 폭력이 피해자만이 아니라 가해자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그리고 폭력이 사라질 먼 미래까지 지금의 폭력과 불의를 견뎌야 할까? 이것은 체제가 아니라 인간 존엄의 문제이다.

 

사회혁명 없이 정치혁명이 가능한가?

 

무정부주의라는 말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아나키스트들이 극렬하게 저항하는 건 국가와 더불어 자본주의이다. 시민에게 노예노동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체제야말로 국가를 유지하는 핵심이다.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은‘정치혁명’이 아니라‘사회혁명’을 주장한다. 정치체제만 바꾸는 것으론 충분하지 않다. 다른 세상을 만들려면 다른 식으로 삶을 지속시킬 방법이 필요하다.

 

독일의 아나키스트 란다우어(G. Landauer, 1870~1919)는 『사회주의를 위하여』에서 국가란“혁명에 의해 없어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조건이자 인간관계, 인간 행동양식”이라 봤다. 따라서“다르게 관계를 맺고 다르게 행동함으로써 국가를 없앨 수 있다.”그에게 사회주의는 중앙집권적인 국가보다 영성을 가진 자각된 민중의 의지였고, 그는 민중에게“자본주의 밖으로 나가자”고, “인간이 되기 시작하자”고, “현존 질서 내부에서 지금 대안사회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란다우어는 농촌 공동체들과 도시의 코뮌들, 그리고 그 둘을 잇는 다양한 협동조합들이 지역자치와 노동자 자주관리의 분권화된 사회가 근대국가와 자본주의를 당장 대체할 수 있는 힘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사회혁명의 방법은 하나일 수 없다. 이탈리아 아나키스트 에리코 말라테스타(E. Malatesta, 1853~1932)는 『국가없는 사회』에서“우리는 시작부터 대중이 혁명의 이로움을 느끼도록 만들고 싶고 그럼으로써 과거의 질서가 다시 세워질수 없도록 상황을”만들 거라고 주장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대중이 변화의 이로움을 당장 느끼고 동참할 방법일지 모른다. 아나키즘은 그런 다양한 실천들이다.

 

하승우/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연구위원

*사진 설명 및 출처

사진1: 아나키스트의 검은 깃발을 든 청년 (출처: cnt-tarragona.ourproject.org)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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