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호 비평: 페르소나(Persona)] 가면의 이중성 – 『페르소나』

대립 너머의 이중성177-08-1

 

이중성(double)은 대립이 아닌 ‘이면’을 지시한다. 두 개의 머리와 네 개의 팔, 네 개의 다리로 둥근 원을 이루어 빠른 속도로 굴러다녔던 인간을 두려워했던 제우스는 인간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인간을 둘로 나누게 된다. 회전하며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던 머리는 이제 자신이 볼 수 없는 뒤통수를 갖게 되고 인간은 볼 수 없어 위험에 노출된 ‘등’을 ‘뒤’로 한 채 걷게 된다. ‘하나’에서 ‘둘’을 만들어내는 ‘거세’(cutting)는 그러므로 다시 결합하면 온전하게 되는 대립쌍을 생성해내는 것이 아니다. 불완전성의 표지는 바깥이 아닌 안에 기입된다. 비가시적 형태로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있는 ‘뒤’는 가시적인 대립물을 통해 결핍이 없는 하나로 다시 복귀하려는 시도를 불가능하게 한다. 사랑은 볼 수 없어 알 수 없는 ‘뒤’ 즉 타자가 제거할 수 없는 형태로 이미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거울 속에 자신의 뒤통수가 나타나는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사랑은 지울 수 없는 얼룩으로 드러나는 ‘뒤’를 껴안는 행위이다. 『페르소나』라는 가면은 진실의 대립항으로서의 가면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베르히만(Ingmar Bergman)의 『페르소나』는 대립이 보지 못하는 이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이중성, ‘뒤’를 위한 사유를 전개하고자 한다. 알마(Alma)와 엘리자베스(Elizabeth)의 사랑을 하나에로의 융합이나 둘의 대립이 아닌 이중성으로 읽어낼 때 비로소 우리는 『페르소나』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다. 가면은 이질적 가면들의 수평적 배열로 이루어져 있다. 이미지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해줄 초월적이고 기원적인 이미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초월성이나 기원을 지시해주는 수직적 배열에 무관심한 채, 연결고리를 찾기 어려운 이미지들이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간다. 무성 영화의 한 장면, 발기된 페니스, 못박히는 손, 엘렉트라의 역할을 연기하는 엘리자베스, 불 속에서 희생제물이 되는 승려, 거미, 희생양, 신원불명의 시체들, 시체처럼 누워있는 소년. 시체 중의 하나가 갑자기 눈을 뜨는 순간 소년 역시 이불을 걷어차고 어울리지 않는 큰 안경을 쓴 채 책을 읽는다. 알 수 없는 얼룩 하나가 소년의 머리 위에 있다. 소년은 손을 뻗어 희미한 얼룩, 엘리자베스인 것처럼 보이다가 알마로 바뀌는 그리고 다시 엘리자베스가 되는 이미지를 붙잡으려 한다. 거울 속의 얼룩은 잡을 수 없는 그러나 결코 사라지지 않는 대상으로 남아 소년을 사로잡고 있다. 이미지들은 거미줄처럼 텍스트를 구성하고 있지만 단순히 의미를 재현하는 가면이 아니라 또 다른 가면을 위한 가면일 뿐이다. 의미를 실어나른 후 사라지는 빈 수레가 아니라 바로 그 텅빔으로 말미암아 의미가 설명할 수 없는 공간으로 남게되는 이미지들은 의미의 ‘이면’을 지시하고 있다. 이미지들은 또다른 이미지들을 불러냄으로써 그것을 의미로 고정시키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방해한다. 미로를 빠져나오는 아리아드네의 실이 또 다른 미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페르소나』에서 이질적 이미지들은 이렇듯 의미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보지 못하는 ‘뒤,’ 의미의 뒤통수를 형성하고 있다. 의미의 잉여물로 남아있는 이미지들이 가면의 이중성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과 환상과의 관계 역시 인과성이나 시간성을 갖지 못한 채 공존하고 있다. 『페르소나』는 이전에 억압된 것이 다시 돌아오는 공간이 아니다. 알마가 힘들게 억압하고 있지만 결코 온전하게 억압될 수 없어 다시 돌아오는 상처인 아이의 유산까지도 알마의 환상인지 현실인지 분명하지 않다. 유산은 순전히 알마의 ‘서사’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알마는 엘리자베스의 침묵의 원인을 ‘드러내기’ 위해, 지우고자 했지만 지울 수 없었던 엘리자베스의 아이에 대한 증오를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유산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는지 모른다. 영화 전편에 걸쳐서 침묵하고 있는 엘리자베스와는 달리 알마는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라깡의 말대로 ‘거짓말할 수 없는 언어는 언어가 아니다.’ 더욱이 엘리자베스를 치료하기 위한 알마의 이야기가 실패로 끝나고 만다면 보이드(David Boyd)의 말대로 『페르소나』는 드러냄과 꾸며냄의 ‘간극’을 통해 스스로를 형성하고 있는지 모른다. 드러냄이 꾸밈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면, 현실이 허구적 구성을 통해서만 드러난다면 허구는 현실의 대립항이 아니라 현실을 가능하게 해주는 ‘이면’이다. 거울 뒤의 불투명한 주석박이 거울을 가능하게 하듯 허구는 현실을 위해 벗어던질 수 있는 가면이 아니라 집어던지면 현실까지도 사라져버리는, 현실 역시 가면일 뿐임을 보여주는 ‘원인’이다. “우리는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알마는 엘리자베스로, 엘리자베스는 알마로”라고 읊조리다가 알마가 잠이 들었을 때 “침대로 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식탁에서 잠들겠네”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알마는 그 말을 되풀이한다. “나는 지금 침대로 가야해요. 아니면 식탁에서 잠들고 말아요.” 알마는 자기방에서 잠들어 있고 엘리자베스가 그 방에 들어왔다 나간 후에 다시 들어온다. 다음날 알마가 어제 내 방에 왔느냐고 물었을 때 엘리자베스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또다른 장면에서 억지로 엘리자베스에게 말을 시키려던 알마가 오히려 심하게 맞게 되자 끓는 물을 엘리자베스의 얼굴에 부으려 할 때 ‘아니! 안돼!’라는 소리가 들리지만 우리는 엘리자베스가 말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엘리자베스의 목소리라고 생각되는 것은 알마의 환상인가?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는 엘리자베스가 거짓말하고 있는 것인가? 환상은 현실에 의해 억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나란히 있다. 그것은 현실 속에서 현실에 난 ‘구멍’으로 기능한다. 손탁(Susan Sontag)의 말대로 『페르소나』는 ‘생략’을 통해 전진하는 것처럼 보인다. 환상의 간극은 현실을 생략하는 구멍인 동시에 그것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연결점이다. 현실은 환상에 의해 분리되는 동시에 연결된다. 또한 현실의 원인으로 간주되는 환상은 ‘사후에’ 구성된다.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전제되는 ‘원인’이 이후에 만들어지는 ‘결과물’인 것이다. 알마에게 죄의식의 원인으로 기능하는 해변에서의 소년들과의 정사나 엘리자베스의 남편과의 사랑 역시 서사적 필요에 따라 사후에 만들어진 ‘기원’이다. 다시 보이드의 말대로 두 장면의 구조적 유사성은 너무나 분명하다. 알마와 카타리나가 해변에 누워있고 카타리나는 알마와 소년과의 정사를 훔쳐보고 있다. 마치 엘리자베스가 남편과 알마의 정사를 그 앞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얼굴은 카메라를 향해 있다. 관객들 역시 이미 이 장면에 개입하고 있는 참여자인 것처럼. 『페르소나』의 세계에서 중립적 관찰이란 불가능하다. 현실과 허구는 인과성을 상실한 채 사후적인 방식으로 연결(분리)되어 있으며 전후관계의 겹침은 안전한 거리를 두고 영화를 바라볼 수 있는 관찰자의 위치 자체를 의문시한다. 관객은 영화 밖에서 영화의 의미를 탐구하는 관찰자가 아니라 영화의 한가운데에서 의미를 구성해내야 하는 또하나의 참여자일 뿐이다.

 

이중적 읽기 (double reading)

 

알마는 관객이 동일시할 수 있는 해석자가 아니라 또다른 독자일 뿐이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알마는 언어를 통하여 엘리자베스의 침묵을 치유하는 분석자 역할을 자임하지만 후반부에서는 오히려 엘리자베스의 분석 대상이 된다.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담당 의사이자 알마의 상관이기도 한 여의사에게 보낸 편지를 몰래 보게 된 알마는 자신이 오히려 여의사와 엘리자베스의 분석대상이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엘리자베스는 알마의 역할, 그녀의 연기를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녀는 자신이 분석자라고 생각할 때에도 분석대상이었다. 자신의 욕망의 근원인 해변에서의 정사를 이야기하는 알마에게 말없이 귀기울이고 있는 엘리자베스는 이미 분석자이다. 분석자와 분석대상이 겹치는 장면은 알마의 이중적 읽기 속에서 생성된다. 아들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엘리자베스 앞에서 아이와 그녀와의 관계를 구성해내는 알마의 독백은 두 번 반복된다. 첫 번째 독백에서 카메라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비추고 알마는 분석자가 된다. 그러나 두 번째 독백에서 카메라는 알마의 얼굴을 비추고 알마는 분석대상이 된다. 같은 내용을 반복하지만 역할은 반전된다. ‘반복’이 알마를 분석자인 동시에 분석대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독백이 끝날 무렵 알마의 얼굴은 반은 알마, 반은 엘리자베스의 얼굴로 변한다. 이것은 알마나 엘리자베스 모두 온전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관객은 알마나 엘리자베스 모두에게 동일시할 수 없다. ‘알마-엘리자베스’는 융합이나 분리가 아닌 제3의 공간, 이중적 읽기가 발생하는 장소이다. 주체와 대상, 드러남과 꾸며냄, 사실과 허구, 분석자와 분석대상의 대립이 불가능해지는 공간에서 우리는 알마나 엘리자베스가 아닌 ‘알마-엘리자베스’라는 괴물, 대립의 이면과 마주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둠만이 있었다. 두 부분이 점차 밝아지고 그것들은 램프의 불빛임이 드러난다. 이후에 앞에서 이야기되었던 이질적 이미지들이 스치며 지나간다. 손을 뻗어 ‘알마-엘리자베스’의 얼굴을 껴안으려는 아이가 등장한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이미지들은 마지막에 다시 반복된다. 램프의 불빛이 꺼지고 마치 다 써버린 전지처럼 영화가 우리 눈 앞에서 사라진다. 베르히만에게 영화는 영원한 의미를 전달하는 초월적 기표가 아니라 모든 의미를 박탈당한 채 소진되는 대상일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알마가 자신의 말을 반복하라고 강요할 때 엘리자베스는 ‘Nothing’이라고 말한다. 가면 뒤에는 아무 것도 없다. 가면의 기원이나 역사, 그것이 갖는 의미는 모두 가면의 텅빔을 채우려는 절박한 시도일 뿐이다. 엘리자베스는 그 텅빔을 보았고 연극은 중지되었으며 이후로 그녀는 침묵했다. 언어로 재현될 수 없는 텅빔, 알마는 환상을 통해 그것을 피해가지만 결국 그것과 맞닥뜨린다. 알마의 놀란 얼굴이 말 그대로 거울처럼 부서지고 타버리는 장면이 이를 입증한다. 언어를 통해 엘리자베스의 침묵을 치료하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할 때 알마 자신도 분열된다. 영화 역시 알마의 부서진 얼굴처럼 어떤 의미도 보장해주지 못하는 대상일 뿐이다. 가면은 의미로 채울 수 없는 텅 빈 공간을 드러내는 동시에 숨긴다. 그러나 인간이 되기 위해 우리는 보이지 않는 가면을 써야 한다. 내가 볼 수 없는 ‘이면,’ ‘뒤’와 만날 때, 그것을 품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나일 수 있기 때문이다.

 

민 승 기 / 후마니타스 칼리지 강사

작성자: khugnews

이글 공유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