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호 추모] 미원 조영식 학원장 추모 ‘경희’의 큰 별이 지다

 

 

 

고인은 다방면에서 큰 업적들을 이뤘고, 이제는 영원한 휴식을 위해 우리 곁을 떠났다. 그는 한 평생 ‘문화세계의 창조’라는 창학이념(創學理念)을 밑바탕으로 경희대학교를 ‘학문과 평화’의 중심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성장시켰다. 그는 경희학원을 국내는 물론 국제적인 명문사학으로 성장하도록 힘썼다. 남아있는 우리는 오직 ‘경희’와 함께 걸어온 그의 발자취를 잊어서는 안 된다. 고인이 닦아놓은 학문의 터에서 학자의 길을 걷는 우리 역시 그저 개인적인 성공을 쫓는 편협한 사고의 학자가 아닌 고인이 그랬던 것처럼 국가와 민족, 더 나아가 세계와 인류에 기여할 수 있는 학자들로 성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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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학원 설립자 미원(美源) 조영식 학원장 별세

 

경희대학교의 전 총장이자, 학교법인 경희학원 설립자인 미원(美源) 조영식(趙永植) 학원장이 지난 2월 18일 향년 91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미원 조영식 학원장은 1921년 평안북도 운산 광산촌에서 태어나 광산을 경영하는 부친 밑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이미 “생각하는 자, 천하를 얻는다”는 자세를 가지고 주변의 사물에 대 해 항상 깊게 생각하는 사상가의 길을 걸었다. 해방 이후 서울로 남하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으며, 졸업한 후 본격적으로 교육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교육자의 길을 걸으며, 미국 마이애미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등 34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1944년 1월에는 평양에서 일본군에게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돼 공병부대에 배치됐다. 이내 탈출을 결심하고 조선인 학도병을 규합해 모의하다가 계획이 탄로나 1개월 간 고문을 받고 석 달간 수감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는 감옥 안에서 동지들과 토론식 학습을 했고, 감옥에서의 그러한 경험들은 그에게 다양한 생각들이 충돌해 조화롭게 발전하는 것을 배울 수 있게 해줬다.

 

‘慶熙’- 문화의 부흥을 꿈꾸다

 

조영식 학원장은 1951년 서른이 되던 해에 대학운영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6·25 동란 중에 현재 경희대학교의 전신인 2년제 신흥초급대학을 인수한 것이 바로 그 시작이다. 당시 피란 정부의 부통령이었던 이시영 선생의 부탁을 받고, 번듯한 건물과 땅도 없이 천막으로만 이루어진 대학을 인수한 것이다. 너무나 어려운 시작 이었다. 그렇지만 설립과 동시에 교시를‘문화 세계의 창조’라고 명했다. 이는 곧 교육을 통해 빈곤을 탈출하고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했으며, 더 나아가 세계평화까지 구현하고자 했던 고인의 이상이었던 것이다. 조영식 학원장은 어려운 가운데 사재를 들여서까지 건물을 세웠으나, 2년 만에 불에 타 잿더미가 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학교를 건설하는 것에 힘썼다. 이렇게 신흥초급대학은 전쟁 중에 많은 어려움을 딛고 당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종합 대학 인가를 받게 됐다.

 

1953년 전쟁이 끝나고 정부가 서울로 복귀하자 조영식 학원장은 지금의 경희대학교 터(서울시 동대문구 회기동)를 확보했다. 2년 뒤에는 4년제 종합대학 인가를 받고, 본인이 손수 마스터플랜 을 계획했다. 마스터플랜이라는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 후 같은 해인 1955년에 부산에서 서울로 학교를 옮겨 본격적으로 회기동 캠퍼스를 꾸려나갔다. 1960년에는 교명을 현재 이름인 경희대학교(慶熙大學校)로 바꿨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전쟁 뒤 어수선한 국토와 쇠퇴한 문화를 부흥시킨 조선의 영조와 정조가 머물던 정궁인 경희궁(慶熙宮)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대학의 중심으로 본부 역할을 하고 있는 본관 건물의 설계부터 캠퍼스 내의 세세한 조경에 이르기까지 경희대학교의 모습에서 조영식 학원장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주변 사람 모두가 불가능한 할 것이라 생각해 만류하던 등용문과 본관 석조전 건물 건설은 오직 고인의 젊은 시절 뚝심으로 일궈낸 일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경희학원은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해 유치원에서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와 대학 및 대학원, 전문대학원을 포괄하는 3개 캠퍼스의 대 종합학원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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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사회의 평화를 위해

 

조영식 학원장은 학교 밖에서도 교육자이자 사상가, 실천가로서 국가와 사회, 더 나아가 인 류의 발전을 위해 기여하고자 했다.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며, 4·19 학생 의거와 당시 군사정 권의 근대화가 본격화되던 1960년대에는 조영식 학원장도 시대에 호응해 농촌의 발전을 위한 농촌계몽운동, 잘살기운동, 애림녹화운동 등을 주도했다.《우리도 잘살 수 있다》라는저서를 출간했으며,‘ 잘살기운동’의 노래를 보급했다. 이후에는 급속한 경제성장과 근대화의 부작 용으로 나타난 물질 중심주의를 극복하고자 1975년 10월 경희대학교에 밝은사회연구소(the Institute of Brighter Society Studies)를 설립해 밝은사회운동을 전개했다. 이어 1976년 3월에는 인류사회재건연구원(the Center for Reconstruction of Human Society)을, 1979년 12월에는 국제평화연구소(the Institute of International Peace Studies)를 각각 설립했다.

 

특히 1980년대에는 국내에 그치지 않고 세계평화 운동에도 관심을 가지고 활발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1981년 당시 우리나라가 UN 비회원국임에도 불구하고, UN 총회로부터 매년 9월 셋째 화요일을 UN 세계평화의 날로, 1986년을‘UN 세계평화의 해’로 제정하게 하는 선도 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조영식 학원장은 코스타리카 산호세에서 개최된 세계대학총장회의에 서‘UN 세계평화의 날’제정을 제안했으며, 제36차 UN 총회에서는 만장일치로 결의안을 채 택해 선포했다. 이렇게‘UN 세계평화의 해’로 지정된 1986년에는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기 념행사가 진행됐으며, 특히 미국과 소련으로 인해 전 세계에 대두됐던 냉전체제와 핵무기 확 산이 평화를 위협하던 당시에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TV 인터 뷰를 통해‘UN 세계평화의 해’를 맞이해 세계평화 증진에 서로 노력할 것을 다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누구보다도 세계평화에 큰 관심을 가졌던 고인은 대외적인 활동뿐만 아니라 경희대학교를 평화운동의 토대가 되는 장으로 만들기 위해 힘썼 다. 고인은 전쟁을 일으키는 것과 평화를 유지하는 것 모두 인간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고 생 각해 후학들에게 세계평화를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터득할 수 있도록 고심했다. 그 리하여 고인은 1984년 9월 국내에서 최초로 평화복지대학원(the graduate institute of peace studies)이라는 이름 아래 평화교육 전문기관을 설립했다. 이어 세계평화대백과사전 을 편찬하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평화복지대학원에 입학한 유학생들 모두에게 생활비와 전액 장학금을 지급해 세계평화를 실현하는 국제적인 리더로 성장할 수 있도록 평화교육과 지도자 훈련을 실시했다. 고인은 이렇게 평화운동가로서 추구하던 진정한 가치를 구체적으로 실현해 약육강식의 정신으로 가득해 패권주의와 팽창주의가 대두하던 시절 우리사회에 평화에 대해 경종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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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세계 창조 – 남아있는 경희인들의 몫

 

 

조영식 학원장은 1965년 세계대학총장회의(IAUP)를 창설하고 영구명예회장에 추대됐다. 이외에도 세계대학총장회 산하 평화협의회(HCP) 의장, 밝은사회국제클럽(GCS International) 국제본부 총재, 오토피아 평화재단 총재, 통일고문회의 의장으로 활동했다. 고인은 조국의 근대화와 세계평화의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1회 세계인류학자 세계대회의 인류최고 영예의 장(章) 함마슐트상, 유엔평화 훈장, 아인슈타인 평화상, 비폭력을 위한 마하 트마 간디상, 대한민국 정부 국민훈장 무궁화장, 만해 평화상 등 무려 67개 상훈을 수상했다. 고인은 이렇게 다방면에서 큰 업적들을 이뤘고, 이제는 영원한 휴식을 위해 우리 곁을 떠났 다. 그는 한 평생‘문화세계의 창조’라는 창학이념(創學理念)을 밑바탕으로 경희대학교를‘학 문과 평화’의 중심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성장시켰다. 그는 경희학원을 국내는 물론 국제적 인 명문사학으로 성장하도록 힘썼다. 남아있는 우리는 오직‘경희’와 함께 걸어온 그의 발자 취를 잊어서는 안 된다. 고인이 닦아놓은 학문의 터에서 학자의 길을 걷는 우리 역시 그저 개 인적인 성공을 쫓는 편협한 사고의 학자가 아닌 고인이 그랬던 것처럼 국가와 민족, 더 나아가 세계와 인류에 기여할 수 있는 학자들로 성장해야 할 것이다.

 

 

송현아|sha919@khugnews.co.kr

<그림 설명 및 출처>

그림 1: 1970년대 매주 월요일 1교시, 본관 앞에서 진행된 민주시민론 특강

그림 2: 고황산에 올라 건설중인 회기동 캠퍼스를 내려다 보는 故조영식 학원장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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