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호 인문학술1: 올림픽] 올림픽 열풍, 그 신드롬의 역사

 

 

한국은 이번 올림픽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종목 다변화의 개척 정신과 패자를 위로할 줄 아는 페어플레이의 성숙함을 보여주며 삶의 질과 행복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도 세리머니’ 파문과 판정 시비 등으로 국제적 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올림픽은 이미 오래전부터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되며 전쟁터가 되어 버린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이 평화와 희망의 전도사로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아본다.

 

세계5위 런던성과가 말하는 것

 

런던 올림픽의 일진태풍이 지구촌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 열기는 어느 때보다 뜨거웠으나 이 땅의 폭염을 이겨내는 청량한 바람이기도 했다. 우리에게 올림픽은 이처럼 언제나 민족 자부심을 고양해주는 희망이요 신바람을 안겨주는 광희(狂喜)이며 국민의 마음을 이어주는 끈이기도 하다.

 

한국의 이번 올림픽성과는 기대이상이었다. 메달성적을 따지기 이전에 선전(善戰)의 내용 모두가 우리의 국격(國格)을 높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삶의 질과 행복이 무엇인지 일깨워주었다는 점에서 역대최고였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4년 전 베이징에서는 죽기 살기로 해서 졌습니다. 이번에는 죽을 각오로 싸워서 이겼습니다.” 유도 금메달리스트 김재범의 이 한마디는 바로 한국스포츠의 스피릿이며 아이콘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헝그리정신을 살려가면서 종목다변화의 개척정신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가하면 유럽 우월주의의 심한 견제를 받아가면서 오심(誤審)의 눈물을 슬기롭게 참아냈고 패자를 위로할 줄 아는 페어플레이의 성숙함을 보여주었다.

 

미국, 중국, 영국, 러시아 다음의 스포츠강국. 올림픽 성적표가 반드시 선진국 지표가 되는 건 아니지만 이 패기, 이 자신감이라면 주저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어 보인다. 광복절을 앞둔 날, 동메달을 건 축구 한일전 승리의 통쾌함은 국민의 시름을 한 번에 날려버린 셈이다. 과연 일본의 충격은 어떠했을까 짐작할 만하다.

 

런던 올림픽은 이처럼 스포츠의 힘이 위대함을 증명해주었다. 무엇보다 세계열강을 향한 자신감, 사회갈등을 극복하는 통합정신을 확인한 게 큰 성과였다. 그런가하면 축구선수 박종우의 우발적 ‘독도 세리머니’파문이 국제사회에 큰 논란을 야기한 점이나 판정시비와 관련하여 외교력 빈곤을 드러낸 점 등 경기력 이외의 세계화교육과 이에 따른 준비가 필요하다는 숙제를 남겼다.

 

‘이젠 슬퍼서 울지 않는다’는 그 뜻

 

런던축제가 끝난 뒤 경희대를 비롯한 6개 대학 공동이름으로 된 신문전면광고가 눈길을 끌었다. “눈물을 축제로 만드는데 걸린 시간 76년, 이젠 슬퍼서 울지 않습니다(…)” 그렇다. 태극기를 가슴 속에 묻고 베를린 시상대에 우뚝 섰던 우리의 영웅 손기정 선수, 바로 우리 선조들의 눈물을 생각해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잠시 76년 전으로 가 보자.

 

정치미학으로 나치스 선전장을 만들어 올림픽정신을 더럽힌 베를린 올림픽이지만 우리에게는 또 다른 기쁨과 슬픔을 안겨준 의미 있는 무대였다. 로마 콜로세움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베를린 스타디움. 8만여 독일인들은 일제히 손을 치켜들고 “하일 히틀러”를 외쳤다. 이 자체가 바로 전율이다. 나치즘은 이렇게 스포츠를 통해 종교가 되어갔다.

 

손기정 선수가 2시간 30분의 벽을 깨고 스타디움에 들어왔을 때 일본인의 광기(狂氣)도 절정에 달했다. 8월 9일 그 날로부터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서울에서는 난리가 벌어졌다. 동아일보가 시상대에 선 손기정 선수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건으로 일본총독부가 발칵 뒤집힌 것이다. 시상대에서조차 침울한 표정으로 일관한 그 모습은 바로 민족의 울분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 일장기말소사건은 언론을 통한 민족정신을 표출한 최대의 의거로 기록되어 있다.

 

올해 스포츠영웅 제1호 ‘불멸의 혼, 손기정’편을 저술한 필자는 확실하게 밝힐 수 있다. ‘우리의 올림픽정신은 이렇게 강인한 민족정신과 도전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오는 10월 탄생 100주년을 맞는 그 분의 높은 뜻, 큰 빛을 기리며 세계정상을 향한 우리 스포츠의 투혼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보이콧광풍의 서막 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은 이미 오래전부터 전쟁터가 되어 버렸다. 정치바람에 휩쓸리고 제국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 갈등으로 멍들어갔다. 올림픽 전문기자를 자임하는 필자는 우리의 첫 금메달리스트를 탄생시킨 36년 전 몬트리올에서 스포츠정신의 실종을 체험했으며 중화주의의 광풍을 일으켰던 4년 전 베이징 올림픽광장에서는 섬뜩한 공포를 느끼기도 했다. 훗날 한국방문 초청에 흔쾌히 응해주었던 제프리 밀러 AP통신 체육부장은 그의 저서 ‘올림픽의 내막’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올림픽헌장을 전투적으로 수호한 브런디지 전 IOC위원장만 하더라도 지친 나머지 말기에 가서는 환멸을 느꼈다. 그 뒤를 이은 킬러닌 위원장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올림픽을 이용하는 것을 걱정했다. 몬트리올에서 남아공을 고립시키려는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보이콧으로 정치적 광란(狂亂)이 시작되었다. 이어 중국을 의식한 캐나다정부가 대만(당시는 중화민국)선수단의 입국을 불허함으로써 IOC는 큰 상처를 입었다. 캐나다정부는 베이징과의 소맥(小麥)무역의 길을 열고 싶었다. 그들이 결국 중화민국의 승인을 취소함으로써 올림픽정신은 100만 뷰셀에 달하는 소맥에 파묻히고 만 것이다.> 제프리 밀러의 이러한 증언은 진실이다. 당시 올림픽참가의 길이 막히고 그들 국가의 이름마저 잃어버린 대만을 위로하고 싶었다.

 

스포츠는 종종 국가주의 또는 패권주의의 전위대가 되기도 한다. 스포츠가 세계평화라는 원심력(遠心力)보다 민족단결이라는 구심력(求心力)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흐르면 체제선전의 도구가 되거나 국민동원의 수단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나치 독일과 구소련의 국가관리 체제였다. 우리도 88서울올림픽과 2002한일월드컵축구에서 체험했듯이 전체주의적 열정에 빠진 경험이 있지만 세계선진그룹으로 업그레이드된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올림픽의 최대 위기는 1980년 모스크바와 4년 후 로스엔젤리스 두 대회가 동서 양대 진영의 보이콧으로 반쪽이 되고 말았을 때였다. 당시 상황에 대해 올림픽전문 저널리스트의 한 사람인 더 타임스의 데이비드 밀러는 ‘올림픽 혁명’이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로잔 IOC총회에 참석한 벤스 미국 국무장관은 모스크바 올림픽의 부당성을 강력히 제기했다. 고대 올림픽 때부터 올림픽이 열리는 기간만큼은 모두 휴전상태에 들어갔고 적대행위를 하는 나라는 올림픽 참가를 봉쇄당했다는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이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항의하여 모스크바대회에 대한 전 세계의 보이콧운동을 호소하면서 전 세계의 평화가 위협받는 것은 올림픽정신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이해 소련은 미국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올림픽에 파견된 자국 선수들을 철수시키는 강수를 두었다.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소련의 로스엔젤리스 대회 보복 보이콧이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겉으로는 전쟁억지라는 평화메시지를 담고 있었지만 미국과 소련 두 슈퍼파워의 정치 쇼에 올림픽이 말려든 것이란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이렇게 두 조각났던 올림픽의 상처를 88서울 올림픽이 완전 봉합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는 올림픽파괴가 더 이상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세계 각국의 합의가 큰 힘이 되었다. 필자는 1984년 문제의 로스앤제리스에 이어 1996년 애틀랜타 대회에서 그리고 이번에는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대회 개막식에 참석하여 정치에 멍든 올림픽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았다. 9.11테러에 긴장한 미국의 우월주의, 일방주의로 올림픽의 가치가 희석되고 있는데 대한 우려를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로운 유희를 위한 축제에서의 공연예술

 

현대 축제의 대표적인 특징인 인간의 자유로운 유희를 지향하는 축제에서 공연예술은 사실상 축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연물과 그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체험 프로그램 들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현대에는 공연예술을 축제의 중심부에 배치하는 공연예술축제들이 개최되어지고 있다. 인간의 자유로운 유희를 유도하는 축제에서는 바라봄과 체험이라는 두 가지 측면의 특성을 가지게 되는데, 바라봄은 축제 행사를 감상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체험이라는 영역은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아마추어 공연을 수행하는 행위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바라봄은 다양한 축제 중 공연을 감상하면서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면, 체험의 영역은 새로운 문화에 참여함으로서 일상적인 삶에서의 자신의 지위 및 역할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유희를 즐길 수 있도록 유도하는 영역이다.

 

단순한 즐거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자유로운 유희는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새로운 세계로 자신을 던짐으로서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를 경험하는 행위 전체를 명명하는 개념으로 일상으로 되돌아 올 자신에게 정화시켜줄 기회를 갖게 해 준다. 이렇듯 바라봄과 체험을 특징으로 하는 축제 속의 공연예술은 새로운 삶을 개척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로운 사유를 유도하게 되는 것이다.

 

유엔보다 탁월한 올림픽의 힘

 

올림픽이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는 의미에서 유엔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올림픽은 평화를 지키는 소극적 차원이 아니라 보다 원대한 목표를 갖고 있으니 같은 잣대로 견줄 일이 아니다. 세계화의 심벌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올림픽이 더 민주적일 뿐더러 그 파급효과는 비교할 여지가 없다. 유엔은 정치적 산물로서 여기에는 힘의 논리가 작용한다.

 

올림픽 우월성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는 학자가 프랑스의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축구가 열기를 뿜고 있을 때 서울을 방문 라운드테이블 토론에 참여했던 그를 필자도 만난 적이 있지만 그는 세계문명의 동진설(東進說)을 주창하면서 한국이 여기에 앞장서기를 기대하곤 했다. 그는 또 이렇게 주장했다. “유엔은 적들을 대립시키지만 올림픽은 그들을 화해시킨다. 정치, 경제, 외교의 세계화는 때로 우리를 위협하고 권태롭게 만든다.” 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지난 베이징 올림픽은 거대한 중국이 안고 있는 문제를 모두 노출했다. 올림픽이 인권존중의 압박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과적으로 베이징대회는 중국 민주화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올림픽이야말로 그 역사가 증명하듯 정치의 벽을 넘고 차별을 극복하는 희망의 전도사임을 누구나 인정하게 되었다. “변하지 않고 영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 끝났을 때 미국 USA 투데이지의 카버스토리 타이틀로 장식했던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리투스의 말이다. 스포츠에 열광하는 미국인들의 개혁적 열망을 반영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올림픽운동의 경우 보수적 아마추어리즘(브런디지) 시대와 개방주의, 상업주의(사마란치) 시대를 거쳐 투명성과 합리주의(로게) 시대로 이어졌지만 우리 사회의 스포츠정책에는 어떤 변화와 긍정효과가 나타나고 있는지 두고 볼 일이다. 혹시라도 베이징에 이은 런던에서의 쾌거에 도취되어 ‘선진국 노래’만 부르다가 미래설계와 재정투자의 기회를 놓친다면 그 결과는 후진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터다. 스포츠의 위대한 승리와 놀라운 가치가 확인된 이번 기회에 정치적 고려나 시혜가 아닌 근원적 진흥책이 나오기를 기다려 본다.

 

 

이태영 /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KOC 국제위원

 

*사진설명 및 출처

– 올림픽 축구대표팀은 일본과의 3, 4위전에서 2:0승리를 거머쥐며 국민들에게 올림픽 출전 64년 만의 첫 메달 획득과 한․일전 승리라는 기쁨과 환희를 선물했다. (출처:  www.google.com)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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