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호 인문학술2: 허균(許筠)] 경박한 천재, 허균을 이야기하다

최근 개봉된 영화 <광해>를 보며, 필자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영화 속에 그려진 허균의 모습이 정도 이상으로 심하게 미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침착함과 강단, 곳곳에서 발휘되는 천재적 지략까지…. 배우 류승용의 명연기로 재탄생한 영화 속의 ‘허균’은 그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완벽한 인간의 전형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듯 보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문헌 자료에 드러난 허균의 모습은 그렇게 멋있지가 않다. ‘불세출의 천재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허점투성이고, 처신이 서툴러 가는 데마다 분란을 일으키며, 앞과 뒤가 다른 이중적 행동으로 사람들을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명문가의 막내 도련님’, 이것이 바로 허균의 진짜 모습이다. 다음의 글을 보자.

나는 집안이 가난하고 형은 늙어 아주 떠날 수는 없으니, 다만 조그만 고을이나 맡아 처자식의 입에 풀칠이나 하고픈 생각입니다. (중략) 형께서 애석하게 여기신다면 권병(權柄 : 권력으로 사람을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는 힘) 쥔 사람에게 힘껏 말하여, 한 고을을 얻어 나가게 한다면 은혜가 그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 허균,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9, 「與李大中第一書」)

위의 인용 글에는 앞서 서술한 허균의 인물됨이 잘 드러난다. 그는 세상을 향해 ‘예교(禮敎)가 어찌 나를 구속하겠는가. 인생 부침(浮沈)은 마음에 달렸을 뿐. 그대들은 그대들의 법(法)을 따르시게. 난 나의 삶을 이루리니.(「성소부부고」권2, 「聞罷官作」)’라며 호방하게 외쳐댔지만, 그 한편으로는 지인에게 편지를 보내 작은 고을의 원님 자리를 구걸하는 이율배반적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허균은 「실록(實錄)」에 보이듯, ‘문장의 화려함에 있어선 세상에 짝할 사람이 없지만 몹시도 경박(輕薄)하여 행실을 단속하지 못하는’ 인물이었으며, 스스로도 그 점을 인정하였다.

저는 일찍이 부친을 여의어 엄한 훈계(訓戒)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어머니와 형은 그런 나를 어여삐 여기고 가르침과 경계를 가하지 않았으니 제멋대로 방랑하였지요. (중략) 남을 비웃고 시비(是非)를 가려 남의 이목(耳目)을 끄는 것에만 힘쓰다 보니 나도 모르게 경박(輕薄)한 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성소부부고」권9, 「與李大中第一書」)

허균은 위의 글을 통해, 자신의 경박함과 검속성(檢束性) 부족한 성품이 모두 가정교육의 부재에 기인한 것이라 변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주장은 말년의 기록인 「을병조천록(乙丙朝天錄)」에서도 계속적으로 반복되고 있어, 자신의 과오를 남들 탓으로 돌리는 유아적 성향이 평생 동안 그의 이면에 잔재해 있었음을 알게 한다.

 

마음 머무를 곳이 없어 서책(書冊)에 숨다

 

또한 허균의 이 같은 성품은 그의 독서와 학문에까지 영향을 미쳐, 종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이단(異端)’이라 배척하게 하는 결정적 빌미를 제공하고 만다. 자기 자신을 ‘유자(儒者)’라 자부했지만, 그는 처음부터 성리학이라는 하나의 이론적 틀에 안주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하여 어린 시절, ‘오로지 경학(經學)만 궁구(窮究)하는 것이 부끄러워 집에 있는 사부서(四部書)를 모조리 읽었으며’(허균, 「을병조천록」「病中記懷追敍平生」) ‘젊어서는, 일찍이 문장을 잘했던 사람들을 사모하여 책이라곤 들여다보지 않은 것이 없었고’(「성소부부고」 권4, 「送李懶翁還枳柤山」) 마침내는 삼교(三敎)를 비롯, 백가(百家)에 이르기까지 통관(洞觀 : 꿰뚫어 환히 살핌)하였을 뿐 아니라 축어(笁語 : 불교)를 독실히 믿는다’(이항복(李恒福), 「白沙集(백사집)」 권2, 「惺所雜稿序」)는 평판을 얻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의 독서 범위는 유학의 경전은 물론 불교와 도교, 시와 문장, 잡록과 소설류를 아우를 만큼 광범위한 것이었는데, 자신도 이를 자랑스럽게 여겨 ‘평생 서음(書淫 : 독서 또는 장서(藏書)에 탐미(耽味)하는 벽성(癖性)으로 이름이 났다’(「성소부부고」 권2, 「寓東廂作」)고 자부하였고, ‘만 권 서책 중의 좀벌레나 되어 남은 생애를 마치고 싶다(「성소부부고」 권6, 「湖墅藏書閣記」)’며 호기를 부리기까지 하였다.

그렇다면 그의 엄청난 독서욕은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의 독서 행위가 남다른 지적 욕구의 발로였던 것은 틀림없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숨겨진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외로움이었다. 실제로 허균은 자신이 ‘저녁마다 여러 교(敎)의 경전을 읽고 익힌 것은 마음 머무를 곳이 없었던 까닭’(「성소부부고」 권2, 「聞罷官作」)이었다고 고백하였는데, 이렇듯 세상과 불화(不和)하여 갈 곳 몰라 하는 그의 모습은 다음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허자는 성격이 소탈하고 호탕하여 세상과는 잘 맞지 않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꾸짖고 떼 지어 배척하므로, 문에 찾아오는 이가 없고 나가도 더불어 뜻에 맞는 곳이 없었다. (중략) 물러나와 생각건대, 온 세상이 나를 비천하게 여기고 사귀지 않으니 내가 어디로 가 벗을 구할 것인가.(「성소부부고」 권6, 「四友齋記」)

그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허균을 용납하지 않았다. 오만하고 경박한 성품, 이교(異敎)에 빠져 사습(士習)을 어지럽힌다는 세간의 비난은 번번이 그의 환로(宦路)를 가로막았고, 그때마다 좌절한 허균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서책 뒤에 숨어 스스로를 위로하는 일뿐이었다. 그에게 있어서의 ‘독서’란 녹록치 않은 세상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또, 세상 사람들은 허균을 가리켜 ‘유가(儒家)의 자제로서 이교에 빠져 승복을 입고 예불을 외우니, 몸은 조정에 의탁하고 있다 해도 사실은 하나의 중’이라며 격렬히 비난했으나 그가 진실로 불교에 귀의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에 대한 허균의 해명은 실로 모호하여, ‘나는 불교를 좋아하며, 비록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부처의 무리[釋徒]’(「성소부부고」 권5, 「送釋海眼還山序」)라 고백하는 한편, 자신은 불교를 업(業)으로 삼는 자가 아니며 신봉하지도 않는다는 이중의 주장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말년에 이르러서는 ‘삼십 년을 살아오며 노자(老子), 부처에 빠졌지만 심성(心性)에 관한 논설은 모두가 헛소리’(「을병조천록」, 「病中記懷追敍平生」)였다면서 잡학(雜學)에 침잠해 평생을 허송했던 자신의 지난날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그는 혁명을 꿈꾸지 않았다

 

이런 여러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허균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분명 재고되어야 한다. 그는 우리 문학사를 빛낸 조선조 최고의 문인 중 하나였으며, 뛰어난 감식안을 지닌 비평가였고 시선자(詩選者)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족하다. 허균이 지니고 있는 ‘혁명가’, 또는 ‘개혁가’로서의 이미지는 후대인들에 의해 조작되고 가공된 것일 뿐, 그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 허균의 글 속에 파격과 개혁의 정신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는 자신의 이상을 현실에서 구현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꿈꾼 것은 ‘혁명’이 아니었다. 동인(東人)의 영수 허엽(許曄)의 아들이요, 이조판서 허성(許筬)의 아우였던 그, 허균이 진실로 원했던 것은 ‘세상으로부터의 인정’이었고, ‘체제 안으로의 성공적인 진입’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613년(광해군5), 이른바 ‘칠서(七庶)’ 사건에 연루되어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된 허균은 대북(大北)의 실권자 이이첨(李爾瞻)과 결탁,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비록 그 마지막은 참혹했지만 꿈을 이룬 것이다.

‘역모(逆謀)의 수괴(首魁)’로 몰려 참형을 당한 허균이 사실 정쟁(政爭)의 희생양이었음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 국문학계의 주요 화두 중 하나인 ‘「홍길동전」의 작자 논란’을 끝내기 위한 명백한 증거를 찾아내는 것뿐이다. 「홍길동전」을 쓴 사람은 허균인가, 아닌가. 우리는 그것이 알고 싶다.

 

곽 정 례 / 국어국문학과 강사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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