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호 인문학술1: 허균] 시대에 맞서, 용납될 수 없었던 지식인의 초상 ‘허균’

허균은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나 자유분방한 삶을 살아갔던 시대의 이단아로 평가된다. 그의 정치적 굴곡과 뛰어난 문재는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그를 거듭 주목하고 재평가하게 했다. 최근 영화 <광해>의 흥행으로 다시 화두가 된 허균의 정치적 행보, 사상, 문학 등에 대해 짚어 보고자 한다. 그가 시대를 앞서간 혁명가였는지, 혹은 철없는 천재였는지 두 편의 원고를 통해 조명해 본다.

 

왕조가 사라질 때 까지 지워지지 않은 금수와 괴물의 낙인

 

“천지간의 괴물(怪物)”, 이것은 광해군 10년(1618) 남대문의 흉서를 계기로 발생한 역모혐의와 관련하여 양사가 합계해 올린 글에서 허균을 지칭한 표현이다. 이 밖에도 허균은 “개․돼지(狗彘)”, “금수(禽獸)”로 표현되며 간악한 역적이자 짐승과 같은 존재로 규정되었다. 그에 대한 이 같은 평가는 조선 후기에 와서도 지속되었다. 숙종 26년(1700)에는 광주부윤(廣州府尹) 시절 박태순(朴泰淳)이 허균이 찬집한 「국조시산(國朝詩刪)」을 간행했던 일로 탄핵되기도 하였고, 경종 2년(1722)에는 기사환국 당시 폐모를 주장했던 일을 상기하며, 당시 연루자들을 일러 “역적 허균보다 그 죄가 심하다”고 평해지기도 하였다. 결국 허균은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끝내 신원이 회복되지 못한 체, 줄곧 금수와 괴물로 낙인 찍혀 회자되고 말았다.

역모에 연루되어 죽었다는 측면에서 실록의 기록이 아름답지 못한 것은 이해할 수 있겠으나, 우리는 그가 금수와 괴물로 표현된 그 이면의 의미에 보다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금수는 곧 인간과 대비된다. 성리학 질서의 조선사회에서 인간과 금수의 분별은 바로 인륜(人倫)을 세우고 지켜나가는 점에 있으며, 이 때 금수는 바로 인륜과 무관한 존재를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시대 허균이 금수로 평가된 것에는 그의 행적에 인륜과 연관된 무엇이 있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괴물은 무엇인가. 괴물은 기괴한 존재로써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수용되기 힘든 특별한 그 무엇을 의미한다.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생태교란 동식물’들을 언급하듯이 괴물은 경우에 따라서는 기존의 질서와 구조를 흔들고 위협하는 존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허균에 대한 평가는 그의 행적이 당시 조선사회의 질서와 체제를 위협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봐야 하는 것일까?

 

성리학의 무게를 조롱하는 자유분방한 지적영역

 

과연 허균은 어떤 사람인가. 그의 아버지는 바로 사암(思庵) 박순(朴淳)과 더불어 서경덕(徐敬德)의 학맥을 대표하는 양대 산맥인 초당(草堂) 허엽(許曄)이다. 허엽은 문장 뿐 아니라 학문을 통해 사대부의 존숭을 받던 인물로 정치적으로는 동인(東人)의 수장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복형 성(筬)과 동복형제 봉(篈)․난설헌(蘭雪軒) 모두 뛰어난 문장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허균 또한 혹독한 평가 속에서도 문재(文才)만큼은 ‘그 재주가 사람의 것이 아니다’고 평해질 만큼 뛰어났다.

그러한 문재를 바탕으로 허균은 선조 30년(1597) 중시(重試)에서 장원을 차지했다. 또 여러 차례 사행(使行)에 참가하거나, 명(明)의 사신을 영접하는 종사관으로 발탁되어 활약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당시 시를 암송하여 의견을 주고받는 ‘수창(酬唱)외교’의 특성상 그의 탁월한 문재가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하겠다. 하지만 우리는 허균의 문재보다 그의 학문과 삶의 태도에 대해 더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쫓겨났다. 그 중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 시절에는 서울에서부터 창기(唱妓)와 함께 부임하여 지냈던 점으로, 삼척부사(三陟府使) 시절에는 치의(緇衣)를 입고, 수령으로써 불재(佛齋)를 지내며 불경을 암송하였던 점으로 탄핵되어 모두 파직되었다. 원칙적으로 조선은 지방관이 식솔들과 함께 부임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동시에 지방관의 주요소임으로 강조된 수령 7사에서는 ‘학교흥(學校興)’을 요구하였음을 생각해 볼 때 허균의 이 같은 소행은 매우 중대한 사안으로 인식될 만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에 대한 허균의 인식과 대응이다.

그는 창기와 함께 생활하는 것에 대해 이를 전혀 문제로 인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조관기행(漕官紀行)」, 「기유서행기(己酉西行紀)」등을 저술하면서 기생과의 생활을 세세히 기록하고 남겼다. 허균은 남녀의 감정과 이에 충실한 것을 천리(天理)라고 여겼다(男女情欲天也 倫紀分別聖人之敎也․․․我則從天而不敢從聖人-「澤堂集」). 따라서 세상의 시선에 연연치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살 것이라 고집하였다(君須用君法 吾自達吾生-「惺所覆瓿藁」)

이러한 태도는 그의 학문관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심성론을 바탕으로 이론적 심화가 뚜렷하게 나타난 중기의 조선사회에서 허균은 성리학만을 정론이라 고집하지 않았다. 앞서 보았듯 그는 불교에 매우 심취해 있었으며, 불가와의 교류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사명당과는 형제의 의를 맺어 그의 비문을 직접 작성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명의 사신으로 왕래하는 과정에서 이탁오(李卓吾)의「분서(焚書)」를 구입하여 깊이 탐독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기독교에까지 관심을 두었다.

이러한 자유분방함으로 그는 당시 조선사회의 현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남 함열(咸悅) 유배시절 저술한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의 내용 중 「유재론(遺才論)」과 「호민론(豪民論)」은 허균의 파격적 인식의 정수이다. 버려지는 인재(遺才)에 대한 안타까움은 그대로 그의 행동에 반영되었다. 평소 서얼들과의 교류에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공주목사(公州牧使) 시절에는 임지에 서얼 출신들을 불러와 그들의 식솔까지 부양하기도 하였다. 이 역시 대간들의 탄핵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그의 관심은 민(民)에게까지 이어졌다. 허균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는 백성을 호민(豪民)으로 분류하고 그들의 존재를 적극 옹호하였다. 조선사회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이 호민이므로 보다 적극적인 민생정치가 이뤄져야 한다는 취지에서였다. 이제 그의 자유분방함은 개인의 삶과 학문관을 넘어 정치사회적 지배질서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는 왜 사라져야만 했는가

 

허균이 살던 시대는 그의 자유분방함을 용납할 수 없는 시대였다. 각종 사회적 모순과 폐단을 야기한 훈구가 사라진 후 집권한 사림은 전 시대의 문란함을 거두고 세도(世道)가 뿌리내린 이상적이고 안정적인 사회질서의 구축을 자신들의 소명으로 여겼다. 이들은 그 해법을 성리학의 심학화(心學化)라는 원론적 측면에서 찾고자 했고, 그 염원은 ‘성학(聖學)’으로 규정되어 군주인 선조(宣祖)에게 제왕학으로 제시되기까지 하였다. 더욱이 임란을 경험한 이후 조선의 재건과 사회질서의 재구축이라는 측면에서 그 요구는 더욱 절실한 문제였다.

이때부터 조선은 마음의 문제를 탈세속적 측면으로 접근하는 도불(道佛)을 더욱 철저히 배척하고 성리학 중심의 교조적 성향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허균의 자유분방함은 당시 시대의 요구 속에서는 수용 불가능한 것이었다. 오히려 정학(正學)을 왜곡하고 저해하는 이단에 가까웠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그는 천리와 정욕이 같다고 하였지만 조선은 ‘존천리거인욕(存天理去人欲)’의 세상이었다. 인욕에 사로잡혀 마음을 방자하게 놓아두고도 이를 천리라 강변했으니 이단이 분명했다. 더구나 대놓고 불제자를 자임하지 않았던가. 율곡이 초년에 잠시 불교에 몸담았던 일로 인해 숙종대에 가서야 겨우 문묘종향이 이뤄졌음을 생각해봤을 때 허균의 행적은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성리학 본질에 천착하지 않고 이단사설에 치우친데다가 이미 퇴계에 의해 비판 받은 양명학을, 그나마도 양명학 내에서 조차 좌파로 비판 받은 이탁오에 주목했던 허균, 게다가 기독교까지 기웃 거린 그의 학문관은 당 시대의 사상적 분위기와는 정면으로 배치될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역모에 근거한 것이지만, 그는 대북 이이첨(李爾瞻)과 손잡고 인목대비 폐출과 영창대군 제거과정을 주도하는 입장에 서고야 만다. 결론적으로 허균은 성인(聖人)의 도(道)와 인륜을 저버린 금수일 수밖에 없었다.

「성소부부고」에 담겨진 내용들도 심상치 않은 것이었다. 유학에서의 정명(正名)은 곧 사회질서의 척도다.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각자 정해진 역할과 위치에 있어야 사회질서는 유지되고 안정이 확보될 수 있다고 보는 것, 이것이 유학적 사고였다. 사농공상의 직업관은 바로 이것을 반영하며, 농업사회 차원에서 본말(本末)을 나눴듯, 정치는 지식을 독점한 사대부계층의 전유물이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가내에서는 적서(嫡庶)의 분별을 확립하고 사회적으로는 사대부의 권위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이는 개국 이후 2백여년에 걸쳐 성리학을 기준으로 어렵게 확립한 질서요 체제였다. 적서와 사농공상의 분별, 이것이 이를테면 당시의 정의였다.

하지만 허균은 이 부분에서도 조선사회를 향해 자기 마음껏 소리를 질러댔다. 그가 후원하고 교류했던 서얼들은 7庶의 난을 일으켜 체제전복을 꾀했다. 국가안보에 대한 위기감은 왜란 직후 다시 한 번 요동쳤다. 급기야 그의 심복인 현응민(玄應旻)이 사주한 남대문 흉서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허균은 사회 불만세력들을 배후에서 조정 하여 체제전복을 기도한 흉적임이 드러났다. 고문과정에서는 의창군(義昌君)을 추대하려 했으나, 허균이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다는 진술까지 나왔다. 이렇게 그는 조선사회에서 괴물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낙인이 아니었다. 실제 허균이 처형되기 전 그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성균관 유생들이 나타났는가 하면, 일군의 백성들은 횃불을 들고 의금부 감옥을 파옥하여 그를 구출하겠다고 몰려가기까지 하였다. 조선의 지배층인 사대부들은 경악하였다. 그가 진정 괴물이었음이 증명된 셈이다. 허균은 조선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새로운 구조, 새로운 질서가 마련되지 않는 한 그는 제거되어야할 존재였다. 그래서 허균은 홍길동을 율도국의 왕으로 만들어야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가 한 바퀴 뒤바뀐 오늘 허균은 더 이상 금수와 괴물이 아닌 시대의 한계를 타파하고자 한 초인(超人)으로 이해되고 있다.

 

최 문 수 /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 수료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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