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호 특집: <대학원보>에게 말한다]

<대학원보> 제200호 발행을 맞이해 독자와 함께 구성하는 특집란을 마련했다. 이에 독자들을 대표해 송재룡 일반대학원장, 전 편집장 이헌, 박송희 원생이 <대학원보>에게 글을 남겼다.




경희 학문공동체와 대학원보

200-13-1

<대학원보> 200호 출간을 축하합니다. 대학원보는 대학원 학문공동체의 중핵입니다. <대학원보>는 1986년 창간된 이후 28년 동안 경희 대학원 공동체의 정보 소통 채널의 역할은 물론이고, 젊은 지성인들의 성찰·비판적 담론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왔습니다. 하지만 28살이라는 나이에 걸맞은 청년의 완숙함에 기대되는 바와 같이 이 시대의 <대학원보>에게 기대하는 경희 공동체의 바람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 시대의 학인(學人)의 매체로서의 대학원보가 지향해 가야 할 이상적 역할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모든 공동체는 생래적으로 그 자체에 두 가지 관성적 힘이 작용합니다. 하나는 공동체의 중심에로 집중하려는 힘, 곧 구심력입니다. 구심력은 주로 질서나 통합을 조장하고 결속이나 연대를 통한 하나 됨이나 일치됨을 강조하는 경향을 갖습니다. 다른 하나는 공동체의 중심에서 멀어지려는 힘인 원심력입니다. 이 힘은 개인의 자율적 권위를 존중하고 그 개인들의 판단이나 선택을 강조하는 경향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전자의 속성이 근대의 공동체 유형에 지배적인 것이었다면, 후자의 속성은 이른바 탈근대형 공동체에 두드러진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21세기의 공동체는 이른바 ‘모던’ 대(對) ‘포스트모던’ 간의 쟁점 구도를 넘어가는 새로운 공동체를 지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공동체는 ‘공동체의 결속’ 측면과 그 구성원인 ‘주체의 자율성’ 측면을 모두 균형 있게 중시하는 입장을 지향해 갑니다. 이는 양자 간의 ‘공생적 조화(symbiotic harmony)’ 관계의 필요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65년의 역사를 따라 ‘학문의 권위’를 추구해가는 경희 공동체의 학술적 및 지성적 지향성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교시인 ‘문화 세계의 창조’란 바로 이렇게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공생적 조화의 패러다임을 통해 실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 즈음에 경희 대학원보의 역할이 자리매김 될 수 있습니다. 대학원보의 성찰적 비판 담론이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 공생적 조화의 패러다임을 지향해 가기 위해서는 그 어떤 냉철한 비판 담론의 지평-진리 주장의 지평-도 결코 절대적 우위를 가질 수 없음을 통찰해야 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여러 진리 지평들 간의 경쟁이 이른바 가다머(H-G Gadamer)가 말하는 ‘지평의 융합(fusion of horizons)’을 통한 일종의 ‘선한 경쟁의 정치학’으로 작동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선한 경쟁의 여정은 종점이 없습니다. 마치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c circle)’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대학원보의 이 해석학적 역할이 견지될 때, 이 시대의 경희 학문공동체가 구심력과 원심력의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그 경계에 선 채로 긴장을 잃지 않는 ‘공생적 조화’의 공동체로 이어져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세계’에서 신 세계로

200-13-2

 

 

 

 

 

 

 

 

<대학원보> 200호 특집을 앞두고, 사회적으로 지금과 비슷했던 2009년도가 먼저 떠올랐다. 당시 166호도 기성언론의 속보와 마찬가지로 예정된 인터뷰 기사를 연기하고 일종의 시국선언과 함께 잿빛 국화의 이미지를 게재했었다. 조금만 더 그 당시를 상기해보자면, 노무현 대통령 서거와 함께 중요한 사회적(사실상 정치적) 이슈로 속칭 ‘미디어법’ 개정이 화두였는데, 원보에서도 언론의 사유화와 이념편향, 궁극적으로는 ‘언론의 자유침해’를 우려하였다. 원보기자들은 여러 공청회에 참석해서 의견을 내기도 하고, 새로운 현안을 인터뷰나 특집시가로 다루기도 하였다. 미디어법의 주요 골자로 종합편성채널 허용 여부에 대해 여야는 물론 시민조직까지 가세해 미디어 도점과 사유화를 두고 논란이 컸지만, 결국 날치기 법안 통과로 충분한 논의나 제도적 보완 없이 신문과 방송 겸업을 허용하는 미디어족벌 기업이 용인되고 말았다. 그 결과는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사실상 소유주와 보수정권을 위해 관제언론으로 기능하고 있을 뿐이다.

5년이 지난 지금, 아이러니한 것은 한 종합편성 채널의 뉴스가, 공중파 방송에서 쫓겨난 기자들이 주축을 이룬 독립 언론사가 그나마 언론의 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들은 세월호 사건을 통해 사회 도처에 만연해 있는 불공정과 부정의를 겪으며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할 언론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지금 이 시기는 그만큼 정치, 사회는 물론 언론마저 숨겨둔 이익과 욕망을 대변코자 암묵적으로 계약된 게젤샤프트에 가까운 집단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이 글은 대학원보 200호를 축하하고 격려하기 위한 글이다. 대학원보는 세상에 대한 책임의식과 예비학자들의 치열한 탐구의식이 담겨있는 결과물인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자기계발과 개인의 만족 이전에, 사회적 책임감을 서로 공유하고 연대할 수 있는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에 소개되는 ‘더불어-있음’으로 존재의미를 서로 확인하고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사회의식이 결여되고, 이타심 없는 고도의 지식이 사회에서 어떻게 악용되는지 숱한 위정자와 자본가들을 통해 보아왔다. “큰 힘에는 더 큰 책임이 따라야 한다(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는 것은 할리우드 영화만 봐도 알 수 있다. 덧붙이자면, 최근의 현안을 계기로 인터넷에 다시 회자되는 글을 소개하고 싶다. 조지오웰의 『1984』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비교한 이 글은, 오웰이 『1984』를 통해 빅브라더에 대한 통제와 차단, 획일화를 우려했다면,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를 통해서 정보과잉 속에서 진실이 묻히고, 무분별하거나 무가치한 문화에 필요 이상의 관심을 쏟아 정작 사회적 관심과 참여에 이탈하는 대중을 경고하고 있다. 최후의 안전장치는 사회적 책임의식과 공감과 연대에서 비롯한다. 다시 상기하자면, 이 글은 <대학원보> 200호발행을 축하하고, 이 ‘멋진 신세계’에서 고군분투해야 할 대학원보를 격려하기 위한 글이다.

 

이헌 / 서울문화재단 기획조정팀 소속, <대학원보>전 편집장

원생들의 진정한 소통의 장이 되기를

200-13-3

대학원에 입학해 오며 가며 <대학원보>라는 글자가 눈에 띄어 처음으로 읽어보았던 게 벌써 두 해 전이네요. 그때 이후로 교내 곳곳에 비치된 <대학원보>가 보일 때마다 챙겨 보고 있습니다. 시간이 꽤 걸리는 지루한 통학 길에 <대학원보>를 통해 여러 분야의 지식도 쌓고 알지 못했던 대학원 소식을 접할 수 있어 틈틈이 즐겨 보고 있습니다. 특히 원보의 첫 면에 실리는 각 분야의 전문가의 사진과 인터뷰를 보고 읽으면서 그 분들처럼 자기 분야의 최고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앞으로도 <대학원보>가 우리 경희대학교 대학원생들의 진정한 소통의 통로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박송희 /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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