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호 테마서평: 고미숙의 <달인 삼종세트>] 달인 이야기, 창조적 삶을 위한 제언

200-10-1-4▲창조적인 삶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도전해야 한다.



  구획정돈이 잘 된 도시, 첨단 기자재가 제대로 갖추어진 학교와 병원 그리고 구조적으로 완전해 보이는 조직사회 등은 근대자본주의 기획의 산물이다. 낡고 오래된 것을 청산하고 새롭고 편리한 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제도가 만들어주는 편리함을 선물로 받았다. 그러나 이 조직적이고 단아한 문명의 산물들 속에서 근대 이후 인간의 삶은 행복한가? 차량들이 질주하는 아스팔트는 운전자들에게 도로 내부를 사유하게 하지 않는다. 검은 칠이 덮인 길 안쪽이 폐수와 중금속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해도 검은 색으로 마감된 길 외부와는 철저히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대의 병폐가 여기에 있다. 평온하고 행복해 보이는 일상의 내부에는 우리가 사유하지 못했던 혹은 묵과했던 불편부당함이 있다. 고미숙 선생의 <달인 삼종세트>는 ‘공부와 사랑 그리고 돈’을 중심 화제로 삼아, 검은 자본에 가려진 삶의 내부를 투시한다. 자본주의적 근대에 의해 포박된 생의 본질을 포착하고 또한 이로부터 탈주해야 하는 필연성과 그 해답의 과정을 들려준다.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근대시민교육의 산실이었던 학교가 인생과 우주에 대한 지혜를 산출하지 못하고 다만 성적을 관리하는 기관으로 전락한 지 오래 되었다. 우리는 모두 대안 없는 교육에 몰입하고 있다. 거칠게 말하면 상급학교 진학이나 취업을 위한 관문으로서의 기능마저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입시학원의 도움 없는 학업과 전문학원의 도움 없는 자격증취득이 가능한가?) 불구적 형태로 학교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건물의 외향은 커가지만 지성의 내부는 유령화 하는 곳.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점에 누구도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잠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 보자. 트리나 포올러스의 저서 『꽃들에게 희망을』은 주인공 줄무늬 애벌레가 아무런 반성과 회의도 없이, 더구나 동료들을 짓밟고 위로 오르기만 하는 어리석음을 반성하고 이로부터 ‘탈주’(애벌레-고치-나비와 같은 탈바꿈의 과정을 겪는다)하여 나비로 우화, 마침내 진정한 삶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탈주’란 ‘도주’와는 다르다. ‘도주’가 책임감 없이 도망가 버리는 것이라면 ‘탈주’란 다른 ‘신체’가 되는 것이다. ‘쿵푸’는 ‘다른 신체 되기’이며 이를 위해서는 ‘타자들과의 향연’과 ‘그를 통한 대반전’을 가져야 한다. 진실은 간명하지만 실천이 없는 진실은 허위에 불과하다. 진정한 공부를 내면화하는 효율적인 실천은 ‘글쓰기’이다. 글쓰기는 성장의 기록이며 진화의 요람이다. 추상적인 생각의 덩어리를 성장의 기제로 돌려놓는 살아 있는 ‘쿵푸’가 글쓰기이며 이런 글쓰기의 표현은 새로운 사고와 성장을 돕는 기제로 작동한다는 점, 굳이 언어 결정론자들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설득력이 있다. 학교라는 기관에 포획되지 않은 글쓰기가 어떻게 개인의 진화와 성장을 돕는지는 고교 자퇴생 ‘청년백수’ 김해완의 저서 『다른 십대의 탄생』을 통해서 그 놀라운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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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의 공존, 사랑의 새로운 배치

 근대 이후 자본에 잠식된 ‘사랑과 연애’는 화폐로 계량화한 학벌, 재산, 외모가 중요한 잣대로 작용한다. 각종 무한 질주와 인정 욕구의 증식이 제공한 이러한 신화는 그러나 허구이다. 근본적으로 삶을 찾아가는 사랑의 방식은 행복을 전제로 한 것이어야 한다. 사랑은 존재를 깨우는 자기장과 같은 것, 지금의 나를 다른 것으로 변화시키지 않는 것은 사랑이라 이름 지을 수 없다. 위대한 사랑은 삶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지평으로 인도’해 준다. 거래나 교환이 만들어내는 감각적인 쾌락본능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하지만 호시탐탐 현대인을 노리는 상품들의 ‘홈 파인 회로’를 어떻게 피해갈 것인가? 쿵푸다. ‘화폐 권력’에 맞서는 힘, ‘세상의 척도와 관습’에 대해 저항하는 힘을 기르는 방법은 ‘앎’을 무기로 한 행군밖에는 없다. 사랑의 위대함은 그것이 단순히 ‘타자’에 대한 열정과 지향이 아니며 내 운명의 주인이 바로 ‘나 자신’임을 알아가는 성장의 과정이다. 사랑은 그 ‘대상과 세계와의 공존을 기획’하는 일이며 새로운 삶의 창조에 기여하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나와 세계와의 마주침에 작용하는 두 좌표는 시간과 공간이다. 시공의 결합으로 조우하는 대상과의 마주침 거기서 일어나는 자기장의 충만한, 황홀한 확대가 사랑의 발현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로병사의 궤도를 도는 우리는 이 아름답고 황홀한 마주침과 그 지나감, ‘시절 인연’의 생성과 소멸까지를 싸안아야 하는 사랑의 실체를 ‘쿵푸’로 배워 나가야 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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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환과 계약에서 증여와 순환으로

 화폐가 군주가 된 것이 대략 200여 년 전이니 그리 오래 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것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 돈에 평정당한 세상은 하루도 그의 폭정에 휘둘리지 않는 날이 없다. 화폐가 개입이 되면 모든 공동체는 ‘화폐 공동체’로 변환된다. 인간도 상품성을 갖추어야 살아남는다. 우리는 스스로를 상품화하는 무한 경쟁 속에서 죽음을 각오한 인정투쟁을 벌이고 있다.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꽃이 피고 있’는 곳과 헤겔이 명명한 ‘욕망 투쟁의 장’이 바로 이 지점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죽음보다 못한 삶이다. 그렇다면 자기증식에만 여념이 없는 냉혈한의 실체를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 ‘학교(직장)-집-병원-교회-쇼핑-외식’ 등의 일상적 동선 어디에서건 우리는 화폐의 신민으로 복무한다. ‘회로에 갇혀 답답하’지만 벗어날 용기를 내지 못한다. 화폐를 중세의 ‘신’으로 환치한 이런 현실에서 인간의 행복은 보장받을 수 없다. 그러나 엄두가 나지 않는 ‘회로의 탈주’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돈에 무게 중심을 두지 않는 선물, 자본이 주인인 저잣거리를 벗어난 데이트, 자본의 극렬한 암약을 타개하기 위한 각종 기념일의 폐지, 가족 이기주의를 넘어선 공동체 활동 등 극명한 실천 등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화폐는 근본적으로 유동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고여 있기를 거부하는 화폐를 붙잡아 소유하려고 할 때 부패가 발생하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온갖 이전투구와 협잡, 기만과 살상이 화폐의 순환을 막은 사태의 증표들이다. 그러므로 화폐의 ‘증여와 순환’은 그 흐르는 본성을 여여(如如)하게 풀어놓는 것이며 ‘돈에 질식당하는 영원한 ‘을’의 위치를 벗어나고 ‘막힘’과 ‘쏠림’ 현상의 온갖 병폐를 차단하는 가장 근본적인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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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인 삼종 세트>가 범박한 공감을 이끌어내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자본을 중심으로 ‘배치’된 현실에 대한 직시와 반성, 그 재배치를 역설하는 무거운 주제를 명쾌하게 풀어내는 문장과 용법이 기발하다. 재기발랄한 표현과 유머가 작렬하는 친근한 태도를 줄곧 유지한다. 제가백가의 질문을 가까이에서 찾아내면서도 절대 현학적이고 권위적인 태도를 유지하지 않는다.(고전평론가라는 고리타분한 명함을 가진 분이 도처에서 보여주는 헐! 허걱! 과 같은 표현의 친밀도가 독자를 무장 해제시킨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더 큰 감흥은 허언으로 치장된 문법이 아니고 그 스스로 실천의 주체로서 활동의 현장성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공감을 유도하는 근사한 주장과 제안은 누구도 가능하다. 그러나 말뿐인 대안이거나 혹은 자신을 예외로 한 다른 이의 실천을 추동한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수유 너머>나 <감이당>과 같은 지식공동체에서 몸소 보여주는 ‘공부’와 ‘밥’의 나눔, 여러 삶의 역동적 만남, 길에서 배우는 지혜, 화폐에 휘둘리지 않고 군림하지 않는 지혜 등, 나아가 <문탁네크워크>와 같은 새로운 생성과 전이를 가능하게 하는 모든 활동에 대한 신뢰가 그 감흥의 원천이 된다.

스스로 여러 채널을 통해 공언한 것처럼 그는 프리랜서이다. 무턱대고 정규직을 염원하는 코드로 판이 짜여가는 현재의 지점에서 화폐의 권력에 갇히지 않은 진정한 자유인으로서의 자아, 주체의 본성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그를 통해 비록 생업이 정규직일지라도 사유는 정규직에 갇히지 않는 진정한 자유를 선물 받을 수 있다. 학위를 받은 선생이 대학에 머물렀다면 좁은 네트워크에 해당하는 향원(鄕原-맹자)에 갇혔을 지도 모르는 일. 그는 세대나 지역을 아우르는 차이들의 역동성을 생명으로 하여 자본주의의 확대재생산에 기여하는 학교에서 탈주해야 한다고, 자본의 홈 파인 공간인 화폐의 종속에서 벗어나 생각과 일과 삶을 재배치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그의 ‘쿵푸’를 ‘쿵푸’해야 하는 이유는 계속될 것이다.

 

유정이 / 시인, 문학박사

※ 사진 및 그림 설명 출처

-사진 1: GettyImages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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