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호 영화비평: <한공주>] 위로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200-08-1

 

누군가가 겪은 폭력적 경험이 사회의 문제와 조우한다면, 그래서 그 폭력을 다른 이들과 공유해야할 필요가 있다면, 영화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이수진 감독의 첫 장편영화 <한공주>를 보고 나서 떠오른 궁금증이다. 주지하다시피 <한공주>는 2004년 밀양 성폭행 사건을 모태로 하고 있다. 이 사건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모두 미성년자라는 사실과 가해자가 집단이라는 사실은 우리 사회를 커다란 충격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어떤 이들은 가해자들의 학부모에서 극단적 개인주의를 읽어냈으며 몇몇은 경찰과 사법부의 행동에서 사회 제도에 대한 불신을 발견했다. 요컨대 밀양 성폭행 사건은 피해자 개인에게 일어난 폭력인 동시에 공동체의 도덕성에 균열이 가 있음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궁금증에 대한 답을 모색하기 위해 잠시 한국영화의 풍경을 살펴보자. 한국영화의 최근 경향은 사회적으로 공유해야 할 기억을 찾아서 재현하는 것이었다. 그 기억의 범위는 아동 대상의 강력범죄부터(<도가니>(황동혁, 2011), <돈 크라이 마미>(김용한. 2012) <공정사회>(이지승, 2012) 등) 역사적인 사건까지(<26년>(조근현, 2012), <남영동 1985>(정지영, 2012)) 실로 다양했다. 어떤 영화들은 스릴러의 외피를 뒤집어쓰고 장르 유행을 선도했으며 또 다른 영화들은 정의감에 무장한 채 관객들의 분노를 자극하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이들 영화들에서 흥미로운 점을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극적인 이미지와 고통의 스펙타클을 스크린에 전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들 영화는 타인의 불행을 관객들의 공분(公憤)을 자아내는 땔감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비판에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첫 문장에서 제기한 물음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타인의 고통을 공유하기의 어려움

 이러한 물음을 안고 전제조건을 다듬어 보자. <한공주>를 비롯한 유사 영화들의 목적은 피해자가 경험한 과거의 폭력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지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가 폭력을 망각하는 것을 방지하고 폭력에 갇혀 사회 밖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는 피해자들을 다시 포용하고자 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영화나 소설을 통해 대중이 공유하는 이야기가 타인이 실제로 경험한 폭력이라는 점이다. 이야기를 통해 사건에 접근하는 것은 외부로부터의 접근일 수밖에 없으며, 타인의 고통을 직접 체험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에 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사건의 폭력성에 대해 공감하고 사고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해나가야만 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니다. 대중매체를 통해 공유하려는 노력에는 폭력을 가능한 완벽하게 표현하려는 욕망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오카 마리는 <기억 서사>에서 이 욕망이 망각의 폭력을 부추기는 요인이라 말한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재현한다는 명분 아래 만들어진 영화나 소설이 오히려 피해자들이 경험한 폭력에 거짓된 의미를 둘러씌운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건을 경험한 이들의 기억 대신 다른 이들의 의미가 마치 그 사건의 전체이고 진실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어 사건 내부의 진실에 다가가는 길을 차단하게 된다. 영화나 소설이 재현한 사건이 전체 사건의 전부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은가. 그런 영화들은 관객을 하나의 반응을 보이도록 이끌면서 진영 선택을 강조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영화가 고통을 스펙타클로 전이하는 태도를 경계하는 동시에 영화의 서사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떠올려야 한다.

이러한 전제 아래에서 <한공주>를 살펴보자. 세상을 향해 날카로운 날을 세우고 있는 공주(천우희)는 새로운 도시로 전학을 오게 된다. 그녀는 과거에 경험한 폭력 때문에 여전히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녀에게 무관심하며 때론 그 무관심이 그녀를 과거의 기억으로 견인한다. 그녀는 “저는 잘못한 게 없어요.”라고 외치지만 항상 어딘가로 도망쳐야 하는 신세이다. 이처럼 <한공주>는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이차폭력을 서사의 중심에 놓고 있다. 여기서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영화가 주인공의 과거를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폭력을 직접적으로 재생산하는지의 여부이다. 피해자 서사이니 당연히 그 장면을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공주>는 이 점을 상당히 경계하면서 민감하게 보일 수 있는 지점을 교묘하게 빠져나간다. 교묘하게라는 표현을 쓴 것은 타인의 고통에 보듬으려는 시도 아래에 영화의 민낯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가장(假裝)된 시선과 위선(僞善)의 형식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글은 <한공주>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을 면밀히 따져보자는 것이다.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선생님과 함께 새로운 곳으로 떠나기 위해 공주가 짐을 싸는 장면에서 선생님은 벽에 걸린 선풍기를 바라보며 “이거 고장 났어?”라고 말한다. 그러면 공주가 선풍기를 바라보는 장면이 이어진다. 선풍기는 바람을 내뿜고 있지만 고개는 돌아가지 않는다. 딸깍거리는 소리를 내는 선풍기를 공주는 무심히 지켜본다. 이 편집의 순서는 선풍기가 고개를 돌려 공주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선풍기는 영화 후반부에 다시 등장하는데, 처음과 완전히 상반되는 이미지로 작동한다. 마지막 장면의 카메라는 공주가 겪었던 폭력의 순간을 재현하고 있다. 이때 카메라는 선풍기의 시선이 되어 사건이 벌어지는 풍경을 직시하고 있다. 첫 장면에서 공주를 바라보지 못했던 선풍기는 왜 결정적인 장면에서 그녀를 응시하는 것일까? 이것은 어떻게 해서라도 관객에게 그 사건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의지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의지는 사람이 아닌 기계(선풍기)의 시선을 경유한다. 기계로 가장(假裝)된 시선은 관객을 윤리적인 책임감에서 멀어지게 만든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 없다. 보고 싶어서 본 것이 아니라 선풍기 회전하는 바람에 폭력을 우연히 목격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속임수의 시선은 누구의 것일까? 마지막 장면을 살펴보자. 영화 속 은희(정인선)는 공주의 과거를 전혀 모르고 있다. 은희는 공주가 음악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보고 그녀를 성심성의껏 도와준다. 그런 은희를 유일한 친구로 생각한 공주는 그녀에게 자신의 죄의식을 은밀히 고백한다. 똑같은 폭력을 당한 친구의 마지막 전화를 외면했다는 것이 그 내용인데,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은희를 비슷한 상황에 던져 놓는다. 이 상황에서 은희도 공주와 똑같은 선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공주의 모습 대신 파문으로 일렁이는 강물을 잠시 보여준다. 그러면 물속에 가라앉았던 공주가 강물 위로 떠올라 수영을 시작한다. 이때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공주를 응원하는 구호가 들리기 시작한다. 영화에서 공주는 항상 수영 보조 기구를 들고 있었으며 단 한 번도 수영에 성공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렇기 때문에 한강에서 능숙하게 수영하는 공주의 행동은 감독의 환상이 개입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환상의 개입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자. 영화는 2시간 남짓의 시간을 할애해 공주의 고통과 좌절을 반복했는데, 그것은 관객에게 일종의 책임의식과 부채감을 형성하게 만든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공주는 갑자기 능숙하게 수영하기 시작하고, 응원의 목소리가 비디제시스 사운드(non-diegesis sound, 서사 공간 바깥의 사운드)로 스크린 전체에 울려 퍼진다. 그 순간, 그녀가 죽지 않고 떠오른 것을 확인한 관객은 폭력의 연루에서 벗어나게 되며 응원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응원 구호가 화면 속 인물에게 들리지 않는 서사 공간 바깥의 사운드로 오로지 관객들만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말하자면 이 영화의 마지막 응원 시퀀스는 화면 속 인물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주를 응원하고 있다는 믿는 화면 밖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상처를 치유하는 명목으로 타자를 재현하는 일은 항상 신중한 방식을 요구한다. 그 폭력의 바깥에 있는 우리가 피해자의 경험을 온전히 경험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영화들이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려고 애를 썼지만 닿을 수 없음만을 확인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노력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경계해야 할 것은 타자의 고통을 착취하여 정의로운 대의로 꾸며내는 일이다. <한공주>는 그 실패의 길을 당당히 걸어가고 있다. 사람들의 무관심이 그녀를 폭력으로 견인한다고 믿는 이 영화는 ‘나는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며 그들이 힘을 내기를 바라고 있다’라는 자기만족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피해자의 고통 보다 그들을 위로하는 자신의 모습을 더 사랑하는 태도는 타인을 고통의 경험 속에 영원히 가두어 놓는 것의 또 다른 모습이다.

 

백태현 / 인하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강사

※ 사진 설명 및 출처

-사진 1: movie.naver.com

작성자: khugnews

이글 공유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