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호 인문학술2: 19세기 프랑스 문학]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L’homme aux semelles de vent)

들어가며

 19세기 프랑스 상징주의 선구자 시인 중 한 명으로 일컬어지는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 1854-1891)에 대해 언급할 때, 그의 문학 세계보다 먼저 그의 삶에서의 많은 일화와 더불어 반항과 방랑의 부단한 동적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곤 한다. ‘바람 구두를 신은 사나이’, ‘나그네’, ‘행려 편집광자’, ‘자유의 불사조’ 그리고 ‘떠도는 유대인’이나 ‘혜성’ 등과 같은 별명들은 바로 시인의 반항과 방랑 이미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랭보의 삶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반항과 방랑의 여러 모습들은 그의 시 세계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특징 중 하나인 동적 이미지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이로 인해 다른 시인들에 비해 아주 짧은 문학 생애와 적은 작품들에도 불구하고 시인 랭보가 프랑스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가늠케 해주고 있다.

 랭보는 1854년 북프랑스 샤를르빌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부터 직업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그리움과 혼자서 가정을 이끌어 가야하는 어머니의 차가운 성격과 기독교적 엄격함에 대한 반항과 저항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그의 초기 시에 이런 성향이 잘 드러나 있다. 랭보는 학교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이 시기에 벌써 그는 라틴어 시를 쓰기 시작한다.

16세가 되던 1869년은 랭보에게 있어 의미 있는 한 해가 된다. 1월에 프랑스어로 된 그의 첫 시작품인 「고아들의 새해 선물」이 발표되고, 후에 시인의 시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며 스승이자 친구 관계로 지내게 되는 수사학 선생 조르쥬 이장바르를 만나게 된다. 1870년에는 당시 고답파의 거장 테오도르 드 방빌에게 자신의 시들을 보내 시인의 꿈을 이루려고 했으나 성사되지는 않는다. 이어, 보불전쟁과 파리 코뮌의 와중에 랭보는 가출을 하며 그 경험들을 통해 사회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바로 이 시기에 쓴 시들이 시인의 초기시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200-05-1

▲베를렌이 그린 랭보의 일러스트. 아르튀르 랭보라는 이름 밑에 서명된 ‘P. V.’가 폴 베를렌의 그림임을 보여준다.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 반항과 방랑

 1871년은 랭보에게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이 시기를 전후로 랭보는 결정적으로 고답파적 경향의 시 세계를 버리고 그의 독창적인 문학 세계를 추구하게 된다. 그는 당시 파리 문학계의 유명 인사였던 베를렌에게 편지를 하고,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취한 배」와 함께 파리로 올라가 그를 만난다. 이후는 그 유명한 두 사람 사이의 일화가 펼쳐지게 된다. 방금 결혼해 신혼 가정을 꾸리고 있고 랭보보다 10년이나 연상인 베를렌은 가정을 버리고 랭보와 함께 유럽 전역을 같이 돌아다니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성격은 판이하게 다르고 또한 서로 추구하는 문학적 성향도 달라서, 결국은 다툼으로 브뤼셀에서 베를렌이 랭보에게 총을 쏘고, 이로 인해 베를렌은 감옥에 가게 되고 랭보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 때 고향에서 쓰게 되는 작품이 바로 『지옥에서의 한 철』로서, 시인 자신이 유일하게 펴낸 산문 시집이다. 이 후 둘 사이의 관계는 거의 왕래가 없었고, 랭보는 여전히 그 특유의 방랑벽으로 또 다시 다른 시인과 유럽 전 지역을 돌아다니는데, 이 때 쓴 시가 바로 그의 사후에 나오게 되는 시집 『일뤼미나시옹』이다. 시인의 나이 25세였다. 이어 그는 문학 세계를 완전히 버리고 다른 일을 하게 된다. 유럽 전역은 물론, 중동 그리고 자바 지역 등을 전전하면서 노동자, 용병, 건축 감독 등으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프리카에서 무기 거래를 하며 상인으로 일을 하다 병이나 프랑스로 돌아와 다리 절단 수술을 받고 곧 이어 사망을 한다. 37세의 나이로…

 

시인의 본질: 투시자(voyant)

 그렇다면 과연 시인 랭보에게 있어 이러한 부단한 떠남 또는 방랑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

시인의 목표는 바로 ‘미지’에 도달하는 것인데, 이것은 현실이라는 외관상의 본질의 부분적 투영을 통해서는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사물들, 규칙에 얽매여 있는 현실이라는 허구의 본질을 제거하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시인에게 필요했던 것은 바로 ‘파괴’였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현실과 전혀 다르고 동떨어진 세계를 순수하게 그리기보다는, 그 새로운 세계의 출발이 되는 현실 세계를 분해하고 해체하여, 자신이 의도하는 새로운 시 세계의 구성 요소를 찾아내고, 바로 이렇게 얻어진 시적 요소들을 가지고 시인 고유의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방법은 완전한 허구의 세계가 아닌, 현실로의 출발과 그 재구성, 재배치를 통해, 시인이 벗어나려는 현실 외관 너머의 가능한 새로운 세계를 재창조하려는 의도 또한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일명 「투시자의 편지」(1871년 5월 13일과 15일 편지)에서 보듯, 랭보에게 있어, 시인이란 바로 ‘투시자’, 즉 진정한 현실성과 접촉시켜줄 수 있는 기능들을 머릿속에서 깨어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작가’이며 ‘창조자’인 시인은 자기 ‘영혼’을 인식하는 것에만 만족하면 진정한 시인이 될 수 없다. 즉, 투시자가 된다는 것은 영혼의 인식뿐만 아니라, 시인 자신의 영혼을 제대로 인식하고 나아가서 그것을 확인하고 발전시킴으로써, ‘기괴한 영혼’을 만드는 것까지 밀고 나간다. 이 때 기괴한 영혼을 만든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정확한 인식으로 출발하여 모든 대상을 눈에 보이는 현상과는 다르게 관찰할 수 있고, 또 그 현실의 모습 너머 감지 할 수 있는 숨겨진 다른 모습을 투시자로서 본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시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추구해야 하는 것이며, 의지적 활동의 사물이고 정확한 의미, 즉 무의식이 우리에게 우연히 전달해 주는 이미지들의 ‘체계적인 발전’ 속에서 실행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모든 감각의 오래되고 광대하며 추론된 착란’에 의해서 실행된다. 바로 이 ‘해체’라는 시적 방법이 랭보 시 세계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를 이루고 있다.

 

프로메테우스와 미래의 시인

 따라서 시인은 불의 도둑인 것입니다.

그는 인류를, 심지어 동물들까지도 책임지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만들어 낸 것을 느끼게 하고 만지게 하며 듣게 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가 저곳에서 가지고 오는 것이 형체가 있다면 그는 형체를 부여하고, 만약 그것이 형체가 없으면 형체 없는 것을 부여하게 됩니다. 언어를 발견해야지요.

-결국 모든 말들은 사상이기 때문에, 보편적 언어의 시대가 도래할 것입니다. …(중략)

그런 언어는 영혼에서 영혼으로 전해지며 모든 것, 즉 향기와 소리 그리고 색깔들을 함축하며 생각과 생각을 연결시켜주고 끌어내게 될 것입니다.

-「투시자의 편지」중- 

 

랭보에게 있어 시인은 불의 도둑인 바로 프로메테우스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시인은 다른 편지에서, “나는 일하는 사람이 될 겁니다. 바로 그 생각이 나를 사로잡고 있지요”라고 자신의 미래를 말하고 있다. ‘일을 한다’는 개념이 후에 문학의 세계를 버리고 현실의 삶에 뛰어든 그의 실존적 삶이건, 시인의 후기 시 세계가 보여준 시적 태도이건 간에, 그의 시적 세계의 변화는 바로 이 ‘일’의 개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언자, 마술사 그리고 초월적 신의 위치에서 시인의 모습은 바로 후기 랭보의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시인의 모습과는 대립이 된다. 왜냐하면 예언자나 마술사 모습으로서의 시인은 현실을 떠나 초월적인 예지와 영감으로 나타나 ‘일’의 개념과 동떨어진 시인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전의 시 세계에서 랭보 자신은 바로 예언자나 마법사로서 너무나 초현실적이고 환영적인 시를 보고 그것이 바로 정신적, 예술적 갈등을 그린 『지옥에서의 한 철』로 나타난 것이다. 결국 ‘투시자 이론’은, 그 때까지 추구한 자신의 시 세계에 대한 후회와 반성을 보여주는 시집 『지옥에서의 한 철』에서 다시 새로운 시적 세계를 보여주는 시집 『일뤼미나시옹』을 거치면서 초월과 영감을 지니는 예언자나 신의 모습으로서의 ‘오르페우스적 시인’으로부터, 먼저 시인 자신의 철저한 인식 아래 현실을 직시하고 그 현실의 해체와 재창조를 통해 새로운 시 세계를 창조하려는 ‘프로메테우스적 시인’으로의 변화상을 보여주며 현대적 시인상을 개척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또다시 이러한 이 시인의 모습을 이제는 문학과 완전히 단절된 현실의 세계에서 보여주게 된다. 특히 『일뤼미나시옹』의 많은 시들은 랭보가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항상 다른 것을 찾아 떠나려는 경향을 보여주는데, 예를 들면 시 「민주주의」에서 “이곳은 안녕, …(중략 그것은 진정한 행군이다. 앞으로 전진!” 이라 외치면서, 이번에는 영원히 문학의 세계를 떠나 현실적, 실존적 삶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문학에서 시인으로서의 자신을 해체하고 현실에서 일상인으로서의 랭보를 재창조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록 랭보가 후에 문학 세계와 완전히 결별했지만, 그의 전체 삶에서 조망하면 결국은 문학과 삶의 단절이라기보다는 문학에서 현실 삶으로의 진행이며, 시인 자신을 포함한 기존의 모든 것에 대한 끝없는 파괴, 해체 그리고 재창조의 여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곽 민 석 /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강사

*그림 설명 및 출처

그림1: (출처: blog.naver.com/jmy1121)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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