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호 인문학술2: 숭례문 복원] 숭례문이 입지한 장소가 갖는 지리학적 의미

지난 5월 4일, 숭례문이 활짝 열렸다. 안타까운 방화사건으로 성문이 무너져 내린지 5년 3개월만이다. 숭례문 화재가 발생했던 2008년 2월 10일, 처음에는 성문에 불이 붙지 않고 여러 대의 소방차가 물을 뿜어댔기 때문에 사람들은 연기가 곧 멈출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자정이 지나면서 연기는 거대한 불기둥으로 변했고, 결국 숭례문은 무너져 내렸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도 견뎌왔던 숭례문이었 건만, 그렇게 한순간에 폭삭 주저앉아 버렸던 것이다. 그랬던 숭례문이 강인한 생명력을 자랑이나 하듯, 태연하게 우리 곁으로 찾아왔다. 숭례문을 지켜내지 못한 우리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의젓한 위용으로 우리 품에 다시 돌아왔다.

 

조선의 도읍지 한양, 성곽도시로 건설되다

 

대숭례문 복구에서 반가운 소식 중 하나는 성문 양옆의 성벽을 새롭게 복원한 일이다. 서쪽으로 16미터, 동쪽으로 53미터까지 성벽을 쌓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조 선의 도읍지 한양이 성곽도시였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지내왔던 것 같다. 숭례문 양옆으로 애초부터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음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연 몇이나 될는지. 원래 성문이란 도성의 안과 밖의 공간을 출입할 수 있도록 설치된 문을 뜻할진대, 매일같이 숭례문 옆을 지나치고도 그러한 역할을 했던 숭례문의 모습에 우리는 무감각해왔다. 옛날에는 자동차들이 다니는 도로 위에 숭례문 하나만 덩그러니 자리잡고 있었지만, 이제는 성문 양쪽으로 성벽을 거느린 웅건한 자태를 갖추었다.

숭례문은 남산과 인왕산 사이에 있는 고개에 자리 잡았다. 고개는 지리학적 의미로 산등성이 봉우리 사이의 가장 낮은 지점을 말하므로, 그렇게 고개에 서있는 숭례문은 남산과 인 왕산이 연결된 산줄기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자리했다고 할 수 있다. 즉 남산의 산줄기가 끝남과 동시에 인왕산의 산줄기가 시작되는 장소이기도 하고, 바꾸어 말하면 인왕산의 산줄기가 끝남과 동시에 남산의 산줄기가 시작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남산과 인왕산 사이에는 한양도성의 성문이 숭례문 외에도 소의문(서소문)과 돈의문(서대문)이 있었다. 물론 이들 성문도 남산과 인왕산을 연결하는 능선 상에서 작은 언덕을 이루는 지점에 자리했지만, 그곳의 해발고도는 숭례문보다 모두 근소한 차이로 높게 측정된다. 가령 소의문이 있었던 곳은 숭례문보다 1미터 정도 높고, 돈의문이 자리 잡았던 곳은 숭례문보다 5미터 가량 높은 곳으로 확인된다.

숭례문 일대의 지형이 평평해 보여서 숭례문이 평지에 세워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남산에서 내려온 산줄기 위에 숭례문이 서있다. 실제로 숭례문 서측의 대한상공회의소 건물 앞에서 성문을 바라보면 숭례문이 약간 높은 곳에 세워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서울역에서 차를 타고 서울시청으로 넘어갈 때, 숭례문까지는 오르막길이었다가 이 지점을 통과하고 나서는 내리막길로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정녕 숭례문은 능선 상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이 능선은 소의문과 돈의문을 거쳐 인왕산으로 이어지고, 인왕산에서 내려온 산줄기는 창의문을 거쳐 북악산으로 연결된다. 북악산은 백두산에서 시작한 백두대간이 강원도와 함경남도의 경계인 추가령에서 갈라져 나온 한북정맥의 한 지맥에 자리 잡은 산이다. 따라서 남북이 통일되면 북악산에서 한북정맥의 산줄기를 따라 추가령까지 걸어갈 수 있고, 이곳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백두산까지 종주할 수도 있다.

 

194-5-1

 

산은 물을 넘지 않는다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 신경준이 쓴 《산경표》에 의하면, 우리나라 산줄기는 1개의 대간, 1개의 정간, 그리고 13개의 정맥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체계는 ‘산은 물을 넘지 않는다’는 원칙에 기초하는데, 이 원리에 따르면 물줄기를 뺀 나머지 공간은 곧 산줄기가 된다. 백두대간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면, 우리나라 육지 어디서든 물을 건너지 않고 백두산까지 종주할 수 있다. 즉 우리나라 물줄기 지도상에서 미로 찾기를 하듯 물줄기와 교차하지 않게 백두산까지 선을 이으면, 그렇게 그려진 선이 물을 넘지 않고 백두산까지 종주할 수 있는 루트가 된다.

우리가 지리 교과 시간에 배웠던 산맥은 1903년 일본인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가 발표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산맥 체계에서는 ‘산은 물을 넘지 않는다’는 법칙이 통하지 않는다. 예컨대 차령산맥을 따라가다 보면 산줄기가 크고 작은 물줄기와 여러 곳에서 만나고 있음이 확인된다. 남한강과 차령산맥이 교차한 지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자연의 순리인데 남한강이 차령산맥을 넘어간다고 설명해야 하는가? 하지만 우리 선조들이 인식했던 1대간 1정간 13정맥의 개념으로 설명하면 이러한 모순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고토 분지로가 분류한 산맥에는 왜 물이 산을 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일까? 이는 그가 융기와 침강 등 지형이 만들어지는 지질 활동을 중심으로 산맥을 분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지형을 바라보면, 산줄기는 반드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산줄기가 물줄기에 의해 단절되어 있더라도 지질 구조가 같다면 그 줄기 또한 같은 것이다. 지리 교과서에 표현된 산맥이 일제의식민 잔재라 하여 고토 분지로의 이론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자연현상을 규명하기 위해 자연지리학적 관점으로 지형을 바라보고자 하는 이에게는 고토 분지로의 산맥 체계가 더 적합할 수 있다. 반면에 자연환경이 생활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인문지리학적 관점으로 지형을 바라보려 한다면, 《산경표》의 산줄기 체계가 더 유용할 것이다.

숭례문은 남산과 인왕산이 이어진 산줄기 상에 세워져 있으므로, 도성 안과 도성 밖의 공간을 가르는 분수계(分水界)상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분수계란 물이 서로 다른 수계로 흘러가는 유역의 경계를 의미하는데, 대체로 산줄기와 일치하는 까닭에 분수령(分水嶺)이라고도 부른다. 《산경표》의 1대간 1정간 13정맥은 바로 이러한 분수령을 기준으로 산줄기 체계를 구분한 것이다. 여하튼 숭례문이 분수령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이 일대에 내리는 비가 도성 안에서는 청계천으로 흘러가고 도성 밖에서는 용산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런데 이러한 원리는 비단 숭례문(남대문)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사대문인 흥인지문(동대문)·돈의문(서대문)·숙정문(북정문), 그리고 사소문에 해당하는 소의문(서소문)·창의문(자하문)·혜화문(동소문)·광희문(수구문) 등 한양도성의 모든 성문에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는 도성이 인왕산·북악산·낙산·남산 등 내사산(內四山)의 산줄기를 따라 축성되어, 성곽이 지나가는 자리가 곧 분수령이 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당연한 현상이리라.

 

한양도성의 진정한 매력

 

남산과 인왕산이 만난 고개에 숭례문이 들어섰듯, 인왕산과 북악산이 만난 고개에 창의문이, 북악산과 낙산이 만난 고개에는 혜화문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낙산과 남산이 만난 도성의 동쪽 땅에는 한양도성에서 가장 낮은 곳을 이루는 청계천이 흐른다. 이처럼 성곽이 분수령을 따라 쌓아졌기 때문에 도성 안의 모든 물은 청계천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한양도성에 수문(水門: 성곽이 물줄기와 만나는 지점에 물이 통할 수 있도록 설치한 문)이 오간수문과 이간수문 등 두 군데에 불과할 수 있었다. 진정 한양도성은 자연지형을 최대한 살려 과학적이고도 효율적으로 축성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육백여년 전 이성계가 인왕산의 선바위를 도성의 안과 밖 중에 어디로 둘 것인지 고심하다 눈이 쌓인 곳을 따라 비로소 성터를 결정했다는 속설은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한양도성은 분수령 상의 축성을 처음부터 계획해 성터가 그토록 지혜롭게 결정됐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만일 이성계가 무학대사의 말을 들어 인왕산의 선바위를 도성 안으로 포함시켜 성을 쌓았더라면, 성터는 청계천의 유역(流域: 지표수가 같은 물줄기로 흘러드는 공간적 범위)을 일탈한 셈이 되어 도성의 서쪽에도 또 다른 수문을 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즉 선바위를 도성 안에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인왕산-무악재-안산-남산의 산줄기를 따라 성을 쌓아야만 하는데, 그렇게 축성했다면 안산과 남산 사이로 흐르는 물줄기로 인하여 또 다른 수문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도성이 내사산의 자연지형을 활용하여 축성되었다는 점, 바로 여기에 한양도성의 매력이 있다. 수려한 내사산 줄기를 따라서는 600년 역사의 숨결이 느껴진다. 또 계절마다 형형색색 물드는 풍경은 단연코 압권이다. 겸재의 인왕제색도가 발 아래 펼쳐지는데, 풍경의 눈 맛이 어찌 짜릿하지 않겠는가. 한양도성의 매력은 여러 문학작품에서도 회자된다. 그중에서도 신경숙의 장편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서는 도성의 풍경이 이렇게 묘사된다. ‘서울 성곽(서울 한양도성)은 정말 아름다워. 눈앞에 바로 보여서 짧은 것 같아도 구간 구간 복잡하고 길고, 게다다 끊기고 이어지기도 해서 다시 내려왔다 올라가야 하고…. 제대로 순례하려면 이박삼일도 모자라.’ 이제, 차곡차곡 쌓인 성 돌을 더듬으며 가장 우리다운 우리만의 역사 유적인 한양도성을 순성(巡城)하며 성 안팎의 풍경을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한양도성의 자연과 역사를 알고 나면 애정이 생기고, 애정을 갖게 되면 도성을 제대로 보는 안목이 생기며, 그렇게 되면 순성하고자 하는 마음도 계속 생겨난다. 바로 그러한 ‘순성의 즐거움’이 많은 이들에게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김 도 형 / 한국지방행정연구원 연구원, 지리학과 박사과정

 

그림 설명 및 출처

<그림 1> 한양도성은 내사산의 산출기를 따라 축성되었다. 그 결과 숭례문을 포함한 도성의 모든 성문이 분수령에 들어섰고, 도성 안의 모든 물은 청계천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출처: 이상구)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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