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호 인문학술2: 긍정변증법, 부정변증법] 부정변증법 ― 비판과 구제의 길

현실적으로, 부정적인 것은 한 번에 부정되지 않는다. 부정적인 것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속적으로 극복되어야 한다. 끝없는 부정의 과정만이 고통의 뿌리를 제거할 수 있다.

긍정주의는 약탈자의 이데올로기다

 행복주의의 다른 이름인 긍정주의라는 기이한 마취제가 허가받은 마약처럼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 ‘웃으면 행복이 찾아온다!’는 말로 이름을 날린 대표적인 전(도)사들이 하나 둘씩 고통스럽게 세상을 떠났지만 척박한 거리엔 여전히 새로운 마약 거래상들로 넘쳐난다. 웃을 일이 줄어들수록 웃음을 파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역설이 비판적 사고를 요구한다.
긍정주의는 어떤 것이 진리이거나 정의라서, 혹은 아름답기 때문에 긍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든 긍정하면 진리와 정의가 되고, 또 아름다워진다는 마법의 방망이, 곧 마약과 마취제를 함께 투여하라는 처방전이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긍정주의는 긍정적인 것을 긍정하라는 의사의 처방전이 아니라, 부정적인 것을 긍정하라는 병원균의 은밀한 속삭임이다.
부정적인 것으로 이득을 취한 약탈자는 같은 것으로 손해를 본 사람이 그 까닭을 제 탓으로 여겨야만 수탈을 계속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통념은 이런 방식으로 강자의 수사가 된다. 결국 약탈자의 이데올로기가 된 긍정주의는 언제나 나의 불행이 사태를 부정적으로 바라본 나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가르친다. 책임은 언제나 나, 좀 더 정확히 말해서 매사에 부정적인 나의 마음에 있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경우에 따라 꼬인 일도 잘 풀리는 경우가 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긍정주의에 쉽게 현혹된다. 더구나 대부분의 큰 종교들이 ‘고통에 큰 뜻이 있다’고 가르치다보니 긍정주의는 때로 구원의 불빛처럼 포장되기도 한다. 하지만 고통은 고통일 뿐이다. 때로 적극적으로 미래를 밝히라는 마취제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그 역시 치료를 위해서일뿐 마약처럼 복용해서는 안 된다.
현실을 긍정하고 미래를 진취적으로 개척했지만 여전히 고통스럽다면 그것은 당신이 충분히 긍정적이거나 진취적이지 못해서가 아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마취제를 복용할수록 고통의 뿌리는 더 크게 자랄 뿐이다. 그러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통의 뿌리를 찾아서 잘라야 한다. 부정적인 것을 부정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부정의 철학인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심장이 뛰고 있다.

 

196-05-1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마취제를 복용할수록 고통의 뿌리는 더 크게 자랄 뿐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부정적 현실을 부정하는 비판이론

 프랑크푸르트 학파란 1930년대부터 지금까지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 사회조사연구소를 중심으로 현실사회를 비판하면서 대안사회를 모색하며 ‘비판이론’을 함께 만들어온 다양한 영역의 연구자 집단을 가리킨다. 흔히 이들은 3세대로 나뉜다. 1세대는 『도구적 이성 비판』으로 비판이론의 출발점을 제공했던 호르크하이머(M. Horkheimer), 그와 함께 비판이론의 나침반으로 평가받는 『계몽의 변증법』을 서술했으며 『부정변증법』과 『미학이론』으로 비판이론의 기초를 다진 아도르노(Th. W. Adorno), 『파사주』 프로젝트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등을 통해 문학 평론 및 문화 비판을 주도한 벤야민(W. Benjamin), 『일차원적 인간』, 『부정』, 『에로스와 문명』으로 억압 없는 문명을 향한 실천에 몰두한 마르쿠제(H. Marcuse), 『소유냐 존재냐』, 『사랑의 기술』 등으로 비판적 사회심리학을 구축한 프롬(E. Fromm) 이외에도 철학, 문학, 사회학을 횡단한 수많은 학자들이 1세대에 속한다.
그리고 의사소통적 행위이론과 담론이론을 제시하며 주관성에서 상호주관성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수행한 하머마스(J. Habermas)가 2세대를 이끌어 왔다면, 최근 인정이론을 통해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는 호네트(A. Honneth)가 3세대 학자를 대표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 모두의 이론을 하나의 끈으로 묶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이 공유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정신은 부정적인 것을 부정하는 사회비판을 하면서 배제되고 감금된 자들의 시선으로 대안 사회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타자성을 유폐하는 계량주의적 동일성 철학과 폭력적이고 고통스런 현실을 은폐하는 긍정주의적 실증주의를 비판함으로써 소통할 수 없는 것을 소통하려는 과제를 공유한 학자들을 가리킨다.

이중부정이 긍정이라는 논리는 상식

음수(부정) 곱하기 양수(긍정)를 하면 양수가 나온다는 것은 긍정주의자들이 제시하는 마법의 공식이다. 반면 음수 곱하기 음수는 양수, 다시 말해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라는 셈법은 어느덧 상식의 논리가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추상적 형식의 논리다. 그렇다면 변증법은 이들과 어떻게 다른가? 헤겔(G. W. Hegel)과 마르크스(K. Marx)를 거쳐 프랑크푸르트 학파로 계승된 변증법은 빛 속에서 어둠을,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가는 사고와 사태의 과정이다. 따라서 사태를 변증법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은 우선 긍정과 부정의 이분법, 곧 양자택일의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일반적으로 긍정이 수용, 승인, 충족, 충분, 같음, 완전을 가리킨다면 부정은 거부, 부인, 결여, 결핍, 다름, 불완전을 가리키기 때문에 둘의 관계는 그만큼 적대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떤 것을 긍정하는 것은 곧 다른 것을 부정하는 것이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폭력을 수용하는 것이 비폭력의 거부이듯, A가 B와 같다는 것은 동시에 A가 B가 아닌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긍정과 부정은 단순히 평행선처럼 동행하는 개념이 아니라 뫼비우스 띠처럼 안팎을 구별할 수 없는 한 몸이다.
긍정과 부정이 이처럼 동시에 이루어진다면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을 긍정하고 부정할 것인가가 문제다. 맥락 없는 긍정과 부정은 공허한 만큼 허구적이다. 그러니 사회 역사적 관계 속에서 맥락에 따라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긍정하면서 부정하고 부정하면서 긍정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변증법은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 속에 숨어 있는 긍정적인 것을 찾아 구제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긍정적이라고 말하는 것 속에 숨겨진 부정적인 것을 찾아서 비판한다. 변증법은 이렇게 구체적 현실 속에서 편견과 권위를 극복하면서 부정적인 어떤 것을 내재적으로 부정해가는 과정이다.

부정적인 것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부정적

 누구에게나 부정적인 것을 한 번에 부정할 수 있다면 최선일 것이다. 더구나 부정적인 것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원인일 경우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부정을 꿈꾸는 것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고통스런 현실에서 단번에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죽음을 통한 구원뿐이다. 구원의 종교와 유사하게 현실을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허무주의, 부정부주의, 해체주의가 매혹적인 까닭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부정적인 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려는 사람이나 이론은 전체주의에 현혹되기 쉽다. 전체적인 부정은 겉으론 급진적이지만 속으론 전체만 긍정하는 폭력이다.
현실적으로 부정적인 것은 한 번에 부정되지 않는다. 그러니 부정적인 것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속적으로 극복되어야 한다. 끝없는 부정의 과정만이 고통의 뿌리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은 긍정과 부정을 이항 대립시키고 한쪽을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전체주의적 편견에 끝없이 대항하는 과정이자 그에 대한 철학이고자 한다.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은 정신과 물질의 우선성을 다투는 관념변증법과 유물변증법의 사이비 대결을 넘어서려 한다. 이상적인 것을 현실화시키거나 현실을 이상적으로 만들려는 이론이나 실천은 아도르노에게 배제되고 감금된 것을 너무 쉽게 긍정의 체계 속으로 동화시키며 억지 화해를 조장하는 것으로 비판받는다. 아도르노가 바라본 현재의 지배체계는 자신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비판과 저항조차도 체계를 공고화하는 자양분으로 활용한다. 자기조차 부정할 만큼 급진적인 저항도 상품화되는 세상이다. 멈춰진 부정은 결국 부정적인 것을 암묵적으로 인준한다.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은 말도 증언도 할 수 없는, 소통은 고사하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에 노출된 모든 것, 다시 말해 언어를 빼앗긴 모든 것의 언어가 되고자 한다. 그러니 부정변증법은 ①불의를 끝없이 부정하며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철학이면서, ②현실 지배적 편견이 부족하다고 무시하고, 다르다고 거부하고, 나쁘다고 가둔 것이 자신의 언어로 스스로를 변호케 하는 구제의 철학이다. 세상에 동화될 수 없는 것이 외치는 비탄의 통곡에서 세상의 진리를 찾아가는 비판과 구제의 과정이 부정변증법이다.

 

박구용 /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 그림 설명 출처

그림1: 완벽한 긍정성은 완벽한 부정성과 닿아있는 것이다.(출처: blog.naver.com/smartkipa)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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