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호 인문학술1: 긍정변증법, 부정변증법] ‘그림자 없는 인간’의 사회 ― 긍정의 문화와 그 역설

우리 시대의 긍정성은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하나의 지표가 됐다. 하지만, 자신의 본래 감정을 배제한 채 결핍을 가리기 위한도구로 ‘긍정성’을 이용하는 사례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두 편의 원고를 통해 긍정성이 부각되는 현대 사회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러한 논의들이 철학적 맥락에서는 어떻게 사유돼 왔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유재석’은 무엇의 이름인가

 우리 시대에 ‘긍정적’(positive)이라는 형용사는 사람의 성격을 지칭하는 많은 단어들 중에서도 최상의 찬사로 쓰인다.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이라는 표현은 클리셰지만, 동시에 그만큼 한국사회가 중요하게 평가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소개팅에서든, 학교에서든, 기업의 면접장에서든 ‘부정적’이거나 ‘비판적인’ 사람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현실에 맞지 않는 사람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한국에서 ‘현실’이라는 말이 가지는 엄청난 중량감을 떠올려 볼 때,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사람들에 대한 한국사회의 시선이 어떤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다.
‘긍정적’인 사람이 어떻게 처세하고, 성공하는지는 연예인들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삐딱하거나 부정적인 모습으로 인기를 얻는 사람도 있지만,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살아가는 연예인들은 대개 긍정적이다. 실제 삶과는 별도로, 텔레비전 화면 속의 이들은 언제나 긍정적으로 보인다. PD들의 어떤 요청도 마다하지 않고, 대중들의 어떤 비판에도 고개 숙이며, 첨예한 정치적 논쟁은 아예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연예인들은 오늘도 열심히 웃고 즐거워한다. 소위 ‘국민 엠씨’로 불리며 국민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유재석은 대표적이다. 한 주에도 몇 차례씩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그는 정치, 경제, 사회가 어떤 상태일지라도 무조건 즐겁다. 유재석을 보고 있노라면 방송국이야말로 그의 유일한 세계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바로 그의 그런 ‘비현실성’을, 그가 자신의 인공적 세계 속에서 펼치는 웃음과 재치, 그의 무한한 긍정성을 사랑한다.
‘긍정적인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이 닥쳐도 좌절하거나 남 탓을 하지 않고, 그 속에서 교훈을 찾아내거나 자신을 바꾸려 노력하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긍정적인 인간’은 세상을 바꾸기보다는 자기를 바꾸는 데 힘쓰는 사람, 즉 자기관리에 충실한 사람이다. 물론 긍정적인 세계관을 가졌으면서 사회의 모순을 지적하고 이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긍정적인 인간들은 자신의 ‘마인드’를 관리하는 데,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이나 ‘목표’ 등을 좇아가는 데 시간을 쓰기도 부족하다. 정치, 경제, 사회에서의 첨예한 문제들은 분명한 입장의 차이를 전제하며, 이런 문제들에 관심을 쏟다보면 필시 ‘대립’이 벌어지게 되는데, 이런 ‘대립’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심리적 비용’이야말로 긍정적인 인간들에게는 금기사항에 가깝다. 지극히 자기만족적인 이들이 지극히 탈정치적(depoliticized)인 성향을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백혈병적 파국

 ‘긍정적’을 뜻하는 영어단어 ‘positive’가 지금과 같은 심리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은 20세기 초부터다. 원래 ‘positive’는 ‘놓다, 위치시키다’(posit)과 통한다. 위치시킬 수 있다는 것은 ‘결여되지 않고, 존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의학에서 이 단어는 ‘예상하던 특징이 존재하는’, 즉 ‘양성반응’을 뜻하며, 철학에서는 ‘존재하는 사실만을 다루는 태도’를 지칭한다.  ‘긍정성’이 어원적으로 ‘존재성’, ‘실증성’과 통한다는 것은 흥미롭다. ‘긍정성’이 가진 어떤 정치적인 특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시 말해, 긍정성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만을 긍정한다. 그것은 지극히 실증적이고 현실적이어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이상적인 것들을 경멸한다. 그것은 현실에서 내가 실제로 얻을 수 있는 만족, 쾌락, 보상에 최우선적인 관심을 보인다. ‘결여되지 않은 것’에 대한 긍정성의 집착은 ‘결핍’을 견딜 수 없어한다. 긍정성은 어떻게든 결핍과 결여를 제거하고 이를 보충해서 ‘결여 없는 존재’로 나아가려고 욕망한다.
장 보드리야르는 『악의 투명성』이라는 책에서 부정성을 축출하고 긍정성을 과잉 기입한 인간을 ‘그림자 없는 인간’(man without shadow)이라고 불렀다. ‘그림자 없는 인간’은 부정 대신 긍정만을, 어둠 대신 빛만을 받아 안은 인간으로, 자신의 모든 결여를 표백해버린(whitewashed) 인간이다. 긍정성으로 충만한 그는 모든 태양빛을 존재에 투과시켜 자신의 그림자를 상실해 버린 존재다. 그의 ‘투명성’(transparency)은 포스트모던 문화가 가진 가장 핵심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선과 악, 진리와 반증 사이의 역동성으로 특징지어지는 변증법 대신 오직 플러스(+)만 있는 과잉 긍정을 택한 그 새하얀 ‘백색’의 문화는 ‘백혈구’(white blood cell)만으로 가득 차 결국 이질적 병균의 침입만으로도 죽음을 맞이하는 ‘백혈병’의 문화이기도 하다. 보드리야르에게 ‘악의 투명성’이란 바로 이것, 즉 가장 투명하고, 가장 새하얗고, 가장 긍정적인 문화가 가진 본질적 취약성을 의미한다. 모든 타자를 제거한 채 ‘자기’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데 바쳐지는 이러한 문화는 실은 백혈병적 파국을 예비하는 문화다. ‘그림자 없는 인간’이란 누구인가? 그는 결국 ‘실체 없는 인간’, 크리스테바가 영락물(abjection)이라고 부르는 것, 곧 시체이자 유령이자 귀신이다. 긍정성의 과잉은 결국 가장 극단적인 부정성과 통하는 셈이다. 긍정성이 가진 이러한 역설이 가장 두드러지게 발현되는 곳은 오늘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체제, 신자유주의다.

196-04-1

▲완벽한 긍정성은 완벽한 부정성과 닿아있는 것이다.

긍정적 인간, 호모 이코노미쿠스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그 핵심은 ‘모든 공통적인 것, 사회적인 것의 사유화’에 있다. 고전적 자유주의가 여전히 ‘국가’와 ‘사회’라는 최종심급을 두고 있었던 데 반해, 신자유주의는 국가와 사회 같은 공동체의 논리를 비즈니스의 논리로 대체하려 한다. 신자유주의의 탄생을 정치적 합리성의 관점에서 분석했던 미셸 푸코는 신자유주의가 생산하는 주체를 ‘호모 이코노미쿠스’(경제 인간)라 명명한다.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oeconomicus)는 단순히 경제적 이해관계에 집중하는 사람을 말하는 개념이 아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기업가(entrepreneur), 즉 자신의 능력을 ‘투자’함으로써 미래의 보상을 벌어들이는 인간, 곧 ‘자기 자신의 기업가’다. 신자유주의는 개인과 사회, 국가까지도 이러한 기업가로 만들려는 체제다. 그곳에는 ‘의지’ 대신 ‘자원’이, ‘정치’ 대신 ‘경제’가, ‘공익’ 대신 ‘시장성’만 있다. 자원, 경제, 시장성이 모두 가리키는 곳이 바로, 다시, ‘실증성’(positivity)이다. 실증적인 문화에 최적화된 인간형인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자기가 쓸 수 있는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투자하여 최대한의 이익을 벌어들이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는 지극히 ‘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생명정치의 탄생』에서 푸코는 말한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현실을 수용하는 인간, 혹은 환경의 변화라는 변수에 체계적으로 응하는 인간이다.”
진정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되기 위해서는 실증적이고, 긍정적이어야만 한다. ‘경제 인간’은 결국 ‘긍정적 인간’일 수밖에 없으며, 둘은 하나다. 이익 앞에서 모든 것을 던질 줄 아는 벤처 기업가가 가진 모험가의 이미지는 그가 자신의 삶과 미래를 긍정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긍정의 문화를 낳는다. 오늘날 하나의 산업이 된 자기계발, 힐링, 멘토의 열풍 역시 모두 긍정의 문화의 일부다. 이들은 모두 가장 극대화된 이익 창출을 위해 자기 삶을 어떻게 계발하고, 치유하고, 관리할 것인지에 대한 담론이다. 보드리야르식으로 말하면, 이들은 정신의 그림자마저도 제거해서 완벽한 긍정성을 향하려고 한다.
하지만, 긍정의 역설은 여기서도 어김없이 구현된다. 완벽한 긍정성은 완벽한 부정성과 닿아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신자유주의화 되기 시작한 15년 동안의 변화는 이를 증명해준다. 학문과 복지에서부터 에너지와 일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기업가 정신과 시장성이라 대원칙 속에서 재조정되었고, 그 속에서 삶 전체가 전쟁과도 같이 치열해졌으며, 약자를 혐오하면서 강자를 숭상하는 인터넷 집단이 생겨났다. 자신을 ‘잉여’라 부르는 이들이 양산되었고, 미래에 대한 꿈을 꾸는 것 자체가 특권이 되었다. 이러한 삶의 비참이 깊어갈수록 ‘너를 바꾸면 된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식의 긍정의 문화 역시 더욱 인기를 얻는다. 이러한 ‘정신승리’ 없이 신자유주의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승리’가 현실의 무게를 언제고 견뎌내게 만드는 전능한 힘이 될 수는 없다. 가장 현실적으로 보이는 판타지인 긍정의 문화는 우리에게 현실을 읽어내고 거기에 개입하는 새로운 입장을 요청하고 있는 셈이다.

 

문강형준 / 문화평론가

* 그림 설명 출처

그림1: 완벽한 긍정성은 완벽한 부정성과 닿아있는 것이다(출처: http://camp0310.tistory.com)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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