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호 인문학술 2: 타자와 공동체] 사르트르와 증여-익명의 증여를 위해

197-05-1

증여의 의무

 

‘증여’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프랑스 민족지학의 아버지’ 로 불리는 모스의 『증여론』(1923~1924)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는 그 당시 자본주의에 편승해 ‘경제적 동물’이 되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그 대안의 일환으로 고대사회에서 행해졌던 증여를 고찰하게 된다. 그 결과 가『증여론』이다. 하지만 그는 처음 의도와는 달리 이 연구로 인해 절망에 사로잡혔다. 그 이유는 증여에 포함된 세 가지 의무에 있다.

증여에는 ‘주어야 하는 의무’, ‘받아야 하는 의무’, ‘갚아야 하는 의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모스의 주장이다. 첫 번째 의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하우(hau)’개념에 의지한다. 하우는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들어있다고 여겨지는 ‘영(괈)’으로, 원래 있었던 곳으로 되돌아가려 하고 또 이를 방해하는 자에게 해를 끼치는 특징을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한 사람이 물건들을 지나치게 많이 갖게되면 그것들의하우가 그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 그로부터 ‘주는 것이 의무’라는 의무가 도출된다.

두번째 의무는 ‘받아야 하는 의무’이다. 주는 물건에는 그 소유자의 하우가 들어 있다고 했다. 오래 쓴 물건에 사용자의 ‘혼(婚)’이 붙어 있다는 표현을 상기하자. 이처럼 주는 물건에는 주는 자의 하우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는 타인에게 이것을 주면서 자신의 일부분을 준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타인이 이것을 받는 것을 거절하는 경우, 그는 이 행위를 결례(缺禮)로 판단한다. 그로부터 ‘받는 것이 의무’라는 의무가 도출된다. 세 번째 의무는 주어진 것과 같은 가치나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갚아야 하는의무’이다. 이 의무를 설명하기 위해 모스는 ‘포틀래취(potlatch)’에 주목한다. 이것은 고대 사회에서 볼수 있는 힘 과시(誇示)의식이다. 이 의식을 통해 부족들은 힘을 겨루기 위해 귀중한 물건들을 경쟁적으로 파괴한다. 한 부족이 다른 부족에게서 받은 물건들에 상응하는 것들을 파괴하지 못하면, 그 부족은 다른 부족에 비해 열등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게 된다.

이처럼 모스는 고대사회의 증여에 주목하고, 이 행위가 궁극적으로는 ‘경제적 교환’임을 밝히고 있다. 이런 이유로 그 는 경제적 동물이 되어가던 동시대의 사람들의 도덕심 고취를 위한 노력에서 절망을 맛보게 된다. 하지만 그는 위의 세 가지 의무 중 첫 번째 의무를 통해 희망을 갖게 된다. 그는 이 의무를 바탕으로 일종의 ‘추렴’ 제도를 구상하게 된다. 오늘날 협동조합 등에서 볼 수 있는 이 추렴은 ‘고귀한 지출’(d ́epense noble)로 지칭된다.

 

 

순수 증여

 

모스에 의해 촉발된 증여 논의는 그 뒤로 계속 이어진다. 그 선봉에 바타이유가 있다. 푸코는 그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가”로 규정한 바 있다. 바타이유는 포틀래취에 주목하면서 ‘순수 증여’를 탐색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주권자(souverain)’개념을 내세운다. 인간이 가진 가능성의 한계로의 여행을 꿈꾸는 바타이유는 사유와 언어의 극한 지점에서 삶에 긍정적 가치를 부여한다. 이렇게 하면서 그는 신(神)을대신할 수 있는 대체물(ersatz)로서의 인간상을 제시한다. 곧 신을 손아귀에 넣음으로써 전일자(全一者; Tout)가 되려는 포부, 곧 신성(神性)을 확보하려는 포부를 숨기지 않는다. 이 런포부를실현할수있는자가곧주권자이다.

이와 관련하여 바타이유는 ‘일반경제’ 개념을 제시한다. 이 개념은 ‘생산’ 중심의 ‘제한경제’와 대비된다. 일반경제의 핵심은 ‘소비’이다. 포틀래취에서 보았듯이 더 많이 파괴하는 자,곧 소비하는 자가 더 강한 힘을 가진 것으로 인정된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주권자는 가장 많이 소비할 수 있는 자이다. 그런데가장 많이 소비할 수 있는 자란 곧 가장 많이 줄 수 있는 자이기도 하다. 그것도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자기가 주는 것에 대해 그것을 받은 상대방이 도저히 갚을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을 줄 수 있는 자이기도 하다. 이런 종류의 증여가 곧 ‘순수 증여’이며, 주권자는 이런 증여를 실행하면서 절대적‘황홀감(extase)’을 느낀다는 것이 바타이유의 주장이다.

 

 

증여와 시간

 

증여에 대한 논의는 데리다에게로 이어진다. 그는 여러 저서에서 증여를 다루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저서가『시간을 주기』이다. 이 저서에서 그는 증여에 대한 모스와 바타이유의 주장을 해체한다. 이를 위해 데리다는 ‘시간’ 개념에 주목한다. 뭔가를 받은 사람이 그것을 준 사람에게 곧장 갚는 것은 ‘경제적 교환’에 해당한다. 이와는 달리 갚는 것을 무한정 미룬다면 증여는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증여는 이처럼 시간을 전제로 한다. 이처럼 시간 개념에 주목해 보면 증여에 대한 모스의 사유는 옳으면서도 그르다. 우선 모든 증여는 그 발생 순간을 제외하면 ‘경제적 교환’일 수밖에 없다. 증여가 이루어지는 아주 짧은 순간이 지나면 주는 자는 우월함과 변제를 생각하게 되고, 또 받는 자는 열등함과 변제 의무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그렇다고 모든 증여가 경제적 이성에 지배되는 것 만은 아니다. 증여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순수한 증여가 최소한 순간적으로나마 발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데리다에 의하면 순수 증여를 주장하는 바타이유의 사유 역시 모스의 경우와는 반대 의미에서 옳으면서도 그르다. 데리다는 이렇게 해서 증여가 항상 순수 증여와 경제적 교환이라는 두 체계의 공존 속에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이런 결론에도 불구하고 데리다는『시간을 주기』에서 증여의 실천에 대한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는 그 이후에 출간된『죽음을 주기』라는 저서에서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아들 이삭을 번제(燔祭)드리려고 하는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 도덕적 행동의 한 전형을 제시한다. 하지 만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드리려고 할 때 하느님으로부터 올 수 있는 두 가지 가능성, 즉 상벌(賞罰)의 가능성을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는 데리다의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익명의 증여

 

『시간을 주기』에서 제시된 결론, 곧 순수 증여와 경제적 교환의 결합, 특히 그 실천적 가능성의 단초를 사르트르의 ‘익명의 증여’에서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사르트르는『존재와 무』와 특히 유고집으로 1983년에 출간된『도덕을 위한 노트』등에서 증여에 대해 계속 관심을 표명한다. 가령 그는『존재와 무』에서 증여에 부정적 의미를 부여한다. ‘포틀래취’에 내포된 파괴적 힘에 주목하면서 그는‘주는 것’을 ‘타자의 자유를 굴복시키는 것’으로 여긴다.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다른 인간을 객체화시켜야 하는데, 증여가 이를 위한 유력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요컨대『존재와 무』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증여는 타자의 자유를 분쇄시키는 ‘독성(毒性)’ 이 있는 행위이다.

하지만『도덕을 위한 노트』에 오면 증여는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 받는다. 이 저서에서 사르트르는 주는 자와 받는 자 모두 자유여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증여는 인간들 사이의 자유에 대한 상호인정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따른다. 주는 자가 자신의 신분을 숨겨야 한다는 조건, 곧‘익명의 증여’의 조건이 그것이다. 이는 증여의 ‘독성’을 약화시키기 위함이다. 주는 자는 우월성을 느낀다. 이는 당연 하다. 하지만 이 우월성을 드러내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받는 자의 자유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한편, 받는 자는 고마움과 열등함, 그리고 변제의 의무를 느낀다. 이것 역시 당연하다. 하지만 익명의 증여가 이루어지면 그는 특히 변 제의 의무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주는 자는 주는 자 대로 뿌듯함과 우월함을 느낄 수 있고, 받는 자는 받는 자 대로 고마움과 열등함을 느끼면서도 변제의 의무를 더 적게 느낄 수 있는 증여! 사르트르가 구상했던 증여가 바로 이같은 익명의 증여로 보인다. 이런 증여라면 하나의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 사이의 도덕과 윤리의식의 고취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멋진 ‘장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변광배 / 한국외국어대학교 외래교수

 

* 그림설명및출처

– 그림: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 ⓒthegravitycollective.files.wordpress.com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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