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호 인문학술1: 타자와 공동체] 공동체는 어디에 있는가-블랑쇼와 낭시의 공동체론

90년대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거대담론이 사라진 지적담론의 영역에서 ‘공동체’에 대한 논의가 들어설 자리는 급격히 축소 되어 왔다. 그러나 ‘미시담론’에 편향돼 왔던 그간의 흐름들은 ‘다른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가운데, 조금씩 변화되고 있다. 블랑쇼와 낭시의 공동체론과 사르트르의 ‘익명의 증여’개념은 타자를 공동체 속에서 사유하는 새로운 인식의 단초를 제 공해줄 것이다.

197-04-1

왜 공동체인가

1848년 마르크스·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주아의 지배에 저항하는 혁명의 파도에 ‘공산주의(communism)’ 라는 명칭을 부여한 이래 공산주의는 피착취, 피억압 계급의 해방을 가져올 자본주의의 유일무이한 대안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공산주의 이념에 의해 통치된 20세기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이 보여준 것은 결코 혁명도, 해방도 아니었다. 20세기의 공산주의는 러시아혁명 직후의 짧은 시기를 제외하곤 전체주의, 즉 권력을 유지하는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였다. 비슷한 시기 독일에서는 히틀러의 나치즘이 대중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등장했다. 그것은 인종주의와 민족주의를 결합시켜 ‘민족’이라는 거대한 운명공동체를 생산하는 프로젝트였다. 이처럼 20세기 유럽 역사에서 ‘공산주의’와‘공동체’는 프롤레타리아의 해방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럽 지식인들이 ‘공동체’에 대해 강력한 반감을 지니게 된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알랭 바디우는 현존하는 공동체를 “오늘날 ‘공동체’는 반동적 정치들에서 사용되는 이름이다. 나는 매일 정치적으로 다양한 형태들의 공동체주의와 맞서 싸우는데, 의회주의 국가는 바로 그러한 공동체주의들을 통해 잠재적인 민중적 거점들을 분할하고 비응집화 하려 한다. 내가 ‘아랍 공동체’, ‘유대인 공동체’, ‘개신교 공동체’와 같은 표현 속에서 보는 것은 단지 민족적이고 종교적인 반동일 뿐이다.”라고 비판했다. 최근 국내에 집중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 역시 공동체주의를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성에 대한 꿈”이라고 힐난한다. 사실 바디우가 비판하는 공동체는 오늘날 우리가 쉽게 목격하는 공동체이다. 선거 때마다 보수 정치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슬로건이 ‘공동체’ 아닌가? 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공동체의 대부분이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방어와 배제의 메커니즘에 의해 작동된다. 바우만은 이러한 내부성의 공동체를 이렇게 비유했다. “민족주의는 문을 잠근 후 문고리를 떼어내고 초인종까지 못 쓰게 만들어버리고 나서는, 집안에 있는 이들만이 그 곳에있을권리가있다고,영원히 정착할 권리가 있다고 못박는다.”

 

무위의 공동체

 

공동체에 대한 장-뤽 낭시와 모리스 블랑쇼의 사유는 기본적으로 전체주의로 흘러버린 전통적인 공산주의, 구성원의 동일성/동질성을 생산·유지하기 위해 타자를 배제하는 공동체의 외부에서 공산주의(communism)-공동체(community)- 소통(communication) 문제를 재검토함으로써 ‘공동체’로 되돌아간다. 정확히 말하면 ‘공동’의 존재론적 의미이다. 낭시와 블랑쇼는 공산주의/공동체에 대한 비판이 자동적으로 ‘개인’에 대한 긍정으로 귀결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세계를 위해서는 공동체라는 편위(clinamen)가 필요한데, 개인 주의는 그러한 공동-내-존재로의 기울어짐을 망각했다는 것 이 낭시의 생각이다. 요컨대 그는 현존하는 공동체들이‘공 유’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사고함으로써 전-근원적인 실존의 나눔을, 함께 있음 자체를 망각했다고 지적한 것이다. 공동체 에서 ‘공유’를 삭제하면 어떻게 될까? 낭시에 따르면 우리(공동체)는 공통되는 것 때문에, 혹은 ‘무엇’을 나누기 위해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함께 있음 그 자체가 목적이고, 함께 있음 자체를 나누는 실존적 접촉이 곧 공동체이다. 낭시는 이것을 공유-내-존재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공유’란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타인을 향한 외존(外存, ex-position), 즉 타인을 향해 존재하고, 타인과의 관계 내에 존재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낭시는 공유-내- 존재의 만남/접촉을 유한한 존재들의 만남으로 규정한다. 여기에서 유한성의 구체적인 내용은 ‘죽음’이다. 낭시에게 ‘죽음’이라는 존재의 공통성은 무위의 공동체의 공통성에 속한다. 요컨대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는 유한한 존재들의 유한한 접촉, 공통성이 아니라 접촉 자체가 목적인 접촉이며, 이를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전-근원적 실존의 공통성에 있다. 그에게 공동체는 융합을 위한 계획의 대상도, 이루어야 할 과제도 아니다.

 

부정의 공동체

 

한편 블랑쇼는 낭시의『무위의 공동체』(1983)에 응답하기 위해 쓴『밝힐 수 없는 공동체』(1983)의 첫머리에 “어떤 공동체도 이루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라는 조르주 바타유의 문장을 파라텍스트(paratext)로 인용하고 있다. 흔히 공동체는 “어떤 단일성 아래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연합과 융합의 흐름”으로 이해되고, ‘단일성’의 정체에 따라 공동체의 성격이 결정된다. 그러나 공동체를 공동성에 근거하여 사유하는 이러한 태도는 그 공동체에 속할 수 없는 사람을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므로 “어떤 공동체도 이루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란 바로 이처럼 공동체들에서 배제된 존재들이 형성하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공동체에 포함·귀속되지 않은 존재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블랑쇼는 그런 공동체 아닌 공동체는 불가능한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블랑쇼는 이러한 공동체를 밝힐 수 없는 공동체, 공동체 없는 공동체라고 부른다. 공동체에 대한 블랑쇼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자’이다. 전통적인 공동체 모델이 타자를 억압·배제함으로써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했다면, 블랑쇼의 ‘공동체’는 타자와의 절대적인 거리, 불가역적인 분리라는 존재론적 조건에서 출발한다. 즉 블랑쇼의 공동체론은 일종의 타자론이다. 그가 공동체를 사유하면서 어떠한 ‘구성’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고 오직 ‘무위(無爲)’만을 강조하는 것은 지난 시절 주체의 구성 의지에 의해 시작된 공동체들이 타자의 타자성을 억압하는 전체주의로 귀결되었다는 뼈아픈 각성 때문이다. 그는 지난날의 “감옥과도 같은 공동체”에서 “융합과 합일을 위한 공모에서 비롯되는 희극”을 보았던 것이다. 공동체의 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는 ‘우 정’에서도 블랑쇼는 친구와 ‘나’사이의 거리를 핵심으로 간 주한다.그에게 거리는 모든 것을 잴 수 있게해 주는 간격이고, 친구에게 ‘나’의 힘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해주는 제한적 조건이다. 따라서 ‘거리’는 친구와의 소통을 방해하는 장애가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필수적인 조건이다. 블랑쇼에게 ‘거리’는 다름/차이 안에서 서로를 연결시켜주는 장치같은 것이다.

 

공동체의 부정신학을 넘어서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와 블랑쇼의 ‘부정의 공동체’는 우리가 흔히 ‘공동체(주의)’라는 말에서 연상하는 강력한 구성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 특히 블랑쇼에게 공동체는 부정신학 처럼 어떠한 공통성의 창조도 과제로 삼지 않아야 하며 ‘영위의 공동체’로 실체화될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 이들은 작품/ 작업으로서의 공동체에 저항한다. 그래서 이들의 공동체는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 없고, 거꾸로 없다고 생각한 곳에 있(고병권, 이진경 외,『코뮨주의 선언)다.” 그런데 구성적 공동체와 선명하게 구분되는 이러한 논리를 밀고 나가면 진정한 공동체는 공동체가 없는 곳에만 있다는 역설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은 공동체의 부정신학이다. 어쩌면 이러한 주장이 일체의 구성적 공동체를 차이를 동일성으로 환원하는 나르시즘적 공동체라고 비판하고, 반대로 공동체에 대한 어떠한 구성 의지도 없는 근대적 개인주의나 현대의 ‘개인’을 진정한 공동체라고 부르는 인식의 착종상태를 불러오지 않을까? 또 하나 이들은 공동체를 ‘죽음’의 공동체로 간주한다. 낭시는 인간이 죽음이라는 한계(유한성)를 분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동체를 발견했고, 블랑쇼는 죽어 가는 타인의 손을 붙 잡고무언의대화를나누는나의현존을 통해 공동체를 정의했다. 타인의 죽음을 나와 관계하는 유일한 죽음으로 떠맡음으로써 우리는 스스로를 내 자신의 ‘바깥’에 놓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죽음의 공동체가 우리의 현실과 어떻게 연결 될 수 있을까? 이제는 우리가 응답할 차례이다.

 

 고봉준 /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교수

* 그림설명및출처

– 그림: 장-뤽 낭시(Jean Luc Nancy, 1940~ ) ⓒupload.wikimedia.org/wikipedia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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