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호 인문학술1: 식민지 조선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사학 청산

 

식민사학의 정체성론

해방 이후 한국사학계의 가장 큰 과제는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을 핵심으로 하는 일제 식민사학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식민사학자로는 후쿠다(福田德三)와 시가타(四方博)를 들 수 있다. 원래 일본 경제사 전공자인 후쿠다는 19세기 말에 이미 당시 한국사회를 1,000년 전의 일본과 비교될 정도로 낙후된 사회로 보고 더 나아가서는 자력으로 근대화할 수 없는 한국이 취할 길은 일본에 동화되어 일본의 힘으로 경제발전을 기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일제의 식민통치를 미화하는 식민사학의 기반을 마련했다. 시가타는 이러한 후쿠다의 논리를 더 발전시켜 각종 통계수치를 내세워 한국은 자생적으로 근대화를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논리를 정교화했다. 시가타에 따르면 개항 당시의 한국에는 자본축적도 없고 기업적 정신에 충만한 계급도 없고 대규모 생산을 담당할 기계도 기술도 없었다. 당시 한국에 있는 것은 단순한 농작물 생산자인 농민, 여가노동에 가까운 수공업자, 잉여 생산물 및 쓸데없는 물건의 교통자인 상인, 그리고 농민·수공업자·상인 위에서 모든 권리를 누리고 모든 잉여를 흡수하는 관리·양반뿐이었다. 시가타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자본주의와는 무관한 존재였다. 따라서 시가타는 개항 당시 한국에는 자본주의를 일으킬만한 요소는 전혀 없고 그것을 저해하는 요소만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결국, 일본의 자본과 기술의 주도로한국에 자본주의가 성립되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 시가타의 결론이었다.

해방 이후 식민사학은 바로 청산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에 의해 친일청산이 좌절된 상황에서 한동안은 일제강점기 연구 자체가 금기시되었다. 친일세력이 반공을 내세워 한국사회의 기득권층으로 남아 있는 현실은 사학계에도 영향을 미쳐 일제강점기에 대한 연구를 회피하게 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소수의 연구자는 한국역사가 전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내재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는 문제의식의 일단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1960년 이후 본격화되었다. 그러면서 나중에 식민지 수탈론 또는 내재적 발전론이라고 불리게 되는 역사인식이 한국사학계의 큰 흐름을 만들기 시작했다. 여기서 먼저 전제할 것이 있다. 수탈론이나 내재적 발전론이라는 이름은 나중에 붙여진 이름에 지나지 않으며 그 안에서의 견해 차이도 다양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내재적 발전론에는 한국사의 주체적 발전과정을 법칙적으로 파악하고 체계화하려는 유물사관적 경향과 발전의 양적 측면을 강조하는 근대화론적 경향이 혼재되어 있다. 그러나 논의를 분명히 하기 위해 여기서는 일단 전자를 중심으로 ‘내재적 발전론’이라는 이름을 쓰겠다.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 경로 찾기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한 여러 연구는 일제강점기를 한국인에 의한 자율적 문명화와 근대화를 가로막은 시기로 파악했다.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한 일제는 우리 민족을 노예화했고 자원·금융·공공사업을 독점지배하는 한편 민족산업을 억제했으며 사회문화면에서는 전통적인 공동체 사회와 민족문화를 파괴하고 민족말살정책을 강행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이전 시기는 자본주의의 맹아가 근대로의 자생적 이행을 준비하는 시기로,일제강점기는 일제의 민족차별과 수탈로 자생적 이행 가능성이 압살된 민족사의 암흑기로 인식된다. 조선 후기 이래 내재적으로 성장해 온 근대화의 싹이 일본의 침략으로 짓밟히면서도 어떻게 살아남아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 더 나아가서는 해방 후의 새 국가 건설로 이어졌는가를 밝히는 데 집중된 일련의 연구는 결국 식민사학을 불식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리고 일제의 부당한 지배에 저항한 민족운동 세력에게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한국사회 안에서 내재적으로 싹이 트고 있던 발전의 가능성이 일제의 식민지배로 좌절되었다는 생각은 1930년대에 이미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경제사학자 백남운에게서 나타난 적이 있었다. 원래 마르크스주의의 유물사관은 한 사회의 내재적 발전을 이야기하면서도 아시아 사회에 대해서는 발전이 정체된 사회로 규정하는 두 얼굴을 지니고 있는데, 백남운은 유물사관의 내재적 발전이라는 틀을 한국역사에 적용함으로써 마르크스의 아시아 사회 정체론을 비판하는 동시에 일제 식민사학을 극복하려고 한 것이다. 백남운은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전했는가의‘내면적 법칙화’를 제시했다. 내면적 법칙화의 내용은 고대 노예제 사회와 중세 아시아적 봉건사회에 대한 실증적 연구, 조선 후기 자본주의 맹아의 발생 가능성, 식민지 이식 자본주의의 발달에 대한 전망을 통해 윤곽이 드러났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사에서 ‘내재적 발전론’의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것은 백남운이었다.

1950년대 말 이후 식민사학 청산을 내건 연구자들이 동일한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부의 연구자들은 일제강점기 백남운이 내세운 사회경제사학을 계승한다는 문제의식을 분명히 했다. 보기를 들어 대표적인 내재적 발전론자로 일컬어지는 김용섭은 “우선 자료의 선정 이용에 신중하고 실증적인 작업을 통해서 우리의 역사를 사실대로 파악하되, 이를 통해서 그 역사의 발전과정과 체계를 새로이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역사를 내재적 발전적으로 연구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러한 구도 위에서 17세기 이래 개항과 식민지를 거쳐 남북한의 농업개혁에 이르기까지 농업사의 체계를 구축했다. 현대 한국의 비극적인 체제분단을 농업사 측면에서 체계화하려고 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한국사의 발전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데 유물사관에서 말하는 사회구성체론을 활용하면서도 계급사관에 매몰되는 것을 경계하는 동시에 신 민족주의사학에서 제기했던 민족문제에도 주목해 한국사 전체를 민족문제와 계급문제를 중심으로 파악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내재적 발전론에 남겨진 과제

내재적 발전론은 한국사의 주체적·내재적 발전과정을 합법칙적으로 파악하고 체계화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과학적 역사학을 지향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난 반세기에 걸쳐 한국사의 발전과정에 대한 역사법칙적 인식, 근대화의 길에 대한 계급론적 인식, 현실 사회에 대한 사회구성체적 인식을 제고시켰다. 그러나 식민사학의 극복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까닭에 한국 근·현대사에서 민족적·민중적 발전의 전망이라는 큰 그림만 보였지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을 분명히 밝히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즉 반제민족운동의 귀결로서 민중이 주체가 되는 민주·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전망을 뚜렷이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아울러 발전의 계기와 요인을 기본적으로 내부에서 구함으로써 지정학적 요인과 국제교류의 영향에 대한 성찰을 소홀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된 것은 식민사학의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에 맞서려는 의식과 마르크스주의 경제발전 단계론이 영향을 미쳤다. 그렇지만 역사발전에서 내부적 요인과 외부적 요인은 모두 중요하며, 양자는 서로 연관되기도 한다. 최근 김용섭이 문명사적 측면에서 인류사 속의 한국사를 검토하면서 외적 계기를 경시하지 않고 있음을 드러낸 바 있지만,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내재적 발전론이 외적 계기와 내적 조건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단계로까지 나아가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사가 봉건제 등 정상적인 역사발전 단계를 경험하지 못하고 정체되었다고 보는 식민사학의 극복에 치중한 나머지 보편성을 지나치게 강조해 한국사의 개성 내지 특성에 관한 성찰을 소홀하게 만들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영토국가와 왕조의 장기 존속, 인류역사상 가장 강고한 조선시대 유교문화 등 한국사는 세계 학계에 이바지할 흥미로운 특성을 적지 않게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수성을 보편성 안에서 설명할 수 있는 한국사만의 틀을 만들어내는 데 실패함으로써 서양사의 경험에 비추어 한국사를 설명하려는 단선론적 역사인식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 준 식 /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그림 설명 및 출처

 – 그림 1: 1910년대 경기도 고양군(현, 고양시)에서 토지를 측량하는 모습. (출처 : history.yj21.net)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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