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호 테마서평: 트라우마와 치유] 사회적 트라우마와 문학의 물음

『마지막 테우리』(현기영, 창비, 1994) 『소년이 온다』(한강, 창비, 2014) 『거짓말이다』(김탁환, 북스피어, 2016)   2014년 4월 16일 침몰한 세월호가 1,073일 만에 첫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의 흐름을 짐작케 하듯 녹슬고 낡은 거대한 선체를 보며 사람들은 이 참혹한 사건이 일상의 시간에 남긴 파장을 되새긴다. 세월호를 바라보며 대부분의 평범한 시민들은 그동안 이 사건을 잊은 적이 없음을, 또한 진상규명에 대한 요구 역시 늦춰진 적이 없음을 실감한다. 진은영의 전언대로 참사 이후 3년여의 시간은 희생자 가족과 선량한 시민들이 “본 것과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며 참사의 진실을 검토하고 밝히려” 노력했던 시간인 동시에 “진상규명을 원하는 모든 이들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의 상태에 감금하려는” 온갖 정치적인 시도가 횡행했던 시간이었다.(진은영, 「무능력의 정치학을 넘어서」, 『한겨레신문』2017년 3월 28일자) 삼 년이나 연기되었던...

219호 책지성: 닉 수재니스,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

  생각을 언플래트닝 하라! 만화로 된 철학책 어린아이는 물론이고 성인까지 만화를 한 번도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생각해보면 우리는 일상 속에서 웹툰, 만화책, 신문, 광고 등 다양하게 만화를 접하고 있다.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는 ‘컬럼비아 대학 최초로 논문 심사를 통과한 만화’, ‘하버드 대학이 출간한 최초의 만화 철학책’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책이다. 보통의 경우 어린이를 위한 책들이 만화로 된 걸 감안한다면 상당히 특이한 책이다. 이 책에선 철학이라는 결코 단순하지 않은 소재를 만화라는 매우 익숙한 장르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한마디로 만화로 된 철학책인 것이다. 언어와 상호작용하는 시각적 이미지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에서 만화는 단순히 내용을 이끌어가는 수단이 아니다. 만화를 통해 저자의 철학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언어는 인간의 사유를 도와주는 매우 중요한...

[219호 리뷰: 예술의 전당, <르 코르뷔지에 展>] 4평의 기적 – 작은 위대함 결국 본질만 남는다

“슬퍼하지 말게 언젠가 우린 또 다시 만나게 되는 거니까. 죽음은 우리 각자에게 출구와도 같다네. 나는 왜 사람들이 죽음 앞에 불행해하는지 모르겠네. 그것은 수직에 대한 수평일세, 보완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지.”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감미로운 멜로디에 감성이 흠뻑 젖었다. 1965년 9월 1일, 르 코르뷔지에의 장례식은 앙드레 말로에 의해 루브르 궁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전시장 곳곳에서 감미롭게 울려 퍼지던 배경 음악은 르 코르뷔지에가 직접 자신의 장례식을 위하여 선곡한 것으로 실제 장례식 때 사용된 곡이었다. 어찌 자신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감미로운 음악을 선사할 수 있을까. “삶은 현기증이 일 정도로 빨리 지나가 버렸고 최후가 다가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의 업적만 보아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부단한 노력을 하며 살아왔는지. “만약 누군가 내 건축 작품에 있어 장점을...

[219호 테마서평 특별호: 2017 지방 신춘문예 당선작]중심과 주변, 중앙과 지방의 이분법적 시각의 극복

『켄의 세계』(최은, 《경인일보》신춘문예 당선작: 소설부문) 『끝없는 밤』(김선희, 《한라일보》신춘문예 당선작: 소설부문) 『과녁』(이서안, 《경상일보》신춘문예 당선작: 소설부문) 필자가 사는 곳은 경남 양산이다. 서울에 사는 지인들과 통화를 할 때면 나도 모르게 서울은 ‘올라가는 곳’이 되고 양산은‘내려가는 곳’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미 일상의 언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서울의 ‘대표성과 중심성’은 권력과 자본의 집중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속에는 문화적인 우월성이 더 많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보통 ‘신춘문예’하면 경향일보, 조선일보 등 주요 신문사를 떠올린다. 그러나 지방에 있는 신문사들도 매년 신춘문예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2017 지방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우수한 작품 들이 각종 언론을 통해 대거 소개됐다. 그 중 공통적인 주제로 소설, 시 등 다양한 장르에서 수 상한 작품들이 있다. ‘최은, 「켄의 세계」(《경인일보》신춘문예 당선작)’ , ‘김선희, 「끝없는...

[219호 영화비평: <컨택트 Arrival>(2016)] 경계를 허물고 나아가는 것에 대하여

이전의 작품들을 통해 증명되었듯이, 드니 빌뇌브는 서사 정보를 조절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감독이다. <그을린 사랑 Incendies>(2010)이 제한된 서사 정보를 하나씩 공개하는 것으로 전체 그림을 완성하는 일종의 퍼즐과도 같은 영화였으며, <프리즈너스 Prisoners>(2013)는 하나의 사건을 추적하는 두 인물에게 각기 다른 정보를 제공해 사건에서 계속 미끄러지는 주인공들을 보여주었던 작품이었다. <컨택트 Arrival>(2016)는 관객에게 전달되는 서사적 정보를 조절하는 감독의 능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동시에 정확히 구성된 편집의 능력까지 더해진 작품이다. 요컨대 드니 빌뇌브는 배우와 가까운 거리에 카메라를 설치하여 캐릭터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이나 미장센을 활용하는 방법보다 플롯의 구성력을 더 신뢰하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가 주로 롱쇼트를 사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숨어 있다. 관객에게 서사 정보를 전달하거나 숨기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이전까지...

[219호 특강취재: 다중지성의 정원, <자크 랑시에르와 영화- 이후의 시간과 이미지>] 랑시에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영화: 우화로서 영화

다중지성의 정원은 지난 1월부터 3월까지 총 8주에 걸쳐 <자크 랑시에르와 영화- 이후의 시간과 이미지> 특강을 개최하고 있다. 이 특강은 영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 1940~ )의 사유와 저작을 되새기려는 취지에서 기획됐다. 랑시에르는 그의 저서 『영화 우화』의 프롤로그에서 드러나듯 영화감독 장 엡스탱(Jean Epstein)이 거짓으로 치부한 우화(fable)로서 영화를 상정했다. 더 정확히 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하는 시학을 넘어 영화를두 시학이 엇갈리게 얽힌 우화로 간주했다. 신은실(인디다큐페스티벌 집행위원) 강연자는 지난 2월 23일에 열린 네 번째 강의에서 “‘우화’의 영화 2”라는 주제로 우화의 감독들로 분류되는 프리츠 랑(Fritz Lang, 1890~1976)과 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 1906~1977), 두 영화감독의 작품들을, 작품들에 대한 랑시에르의 관점과 함께 소개했다. 허구로서의 기억   강연자는 이전 강연의 내용을 다시 환기하면서 강연을 시작했다. 진리로 여겨지는...

[219호 문화비평: 컴퓨터 게임 <댓 드래곤, 캔서>(2016)] 만질 수 있는 타인의 고통

    <댓 드래곤, 캔서>(2016)라는 매우 사적인 컴퓨터 게임이 있다. 이 게임은 게임 개발자 라이언 그린이 암에 걸린 자신의 아들 조엘의 투병 과정을 소재로 만든 게임이다. 통상의 미션수행 과정이나 퍼즐, 목표가 이 게임에는 없다. 다만 게이머는 아픈 조엘을 달래주고, 부모의 고통에 공감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즉 조엘을 살려낼 수는 없지만 토닥일 수는 있다. 상호작용을 극대화한 컴퓨터 게임이라면 살려내는 일(혹은 그 반대의 일)까지 가능해야 하지 않겠나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게임이 디자인한 상호작용은 ‘위로할 수 있는 자유’다. 이렇게 자유가 제한된 이유는 실제 모델인 조엘이 게임 제작과정에서 사망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게임으로 구현된 거짓 희망보다는 그 이상의 경험을 게이머와 공유하고 싶다는 제작자의 의도가 담겨 있기도 하다. 상호작용 디자인은 창작자의 의도가 없는 디자인이...

[218호 책지성: 칼 세이건, 『코스모스』] ‘코스모스’는 계속된다

『코스모스』만큼 유명한 과학책도 드물 것이다. 유명할 뿐 아니라 1980년에 나온 책인데도 35년이 넘도록 여전히 베스트셀러 대열에서 그 위력을 떨치고 있다. 몇백 년의 세월을 견뎌온 소설도 많은데 35년 세월이 뭐 그렇게 대단하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 과학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 지를 생각한다면 과학책이 세월의 속도를 견뎌내기 힘들다는 것을 바로 이해할 것이다. 교과서마저도 몇 년 사이에 핵심적인 내용이 변하는 것이 과학의 현실이다. 『코스모스』도 물론 그 기간 동안의 과학의 새로운 발견 앞에 낡은 책이 되어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시 우주의 나이와 현재 과학계에서 받아들여지는 우주의 나이의 값은 달라졌지만 이에 대한 보편적 통찰이 살아있기에『코스모스』는 현재에도 건재한 것 같다. 당시에는 태양계 밖에서 외계행성이 발견된 적이 없었지만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

[218호 리뷰: 음악문화공간, <스트라디움>] 음악을 보고, 듣고, 말하는 시간

    모니터의 전원을 껐다. 한 주 내내 글자들과 마주 앉아 있었다. 공부와 일과 관련된 문서를 만들고 메일을 쓰는 동안 수많은 말들이 소리 없이 오고 갔다. 밤을 새우고 취재를 위해 집을 나서기가 무섭게 스마트폰이 울린다. 각종 SNS의 알림 소식과 메시지들이 확인을 기다리고 있다. 지하철을 타러 가며 습관적으로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재생버튼을 누르고 눈을 감는다. 어떤 곡이라도 괜찮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으면, 노래의 가사를 곱씹고 있는 순간만큼은, 아무도 내게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대답하지 않아도, 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작은 위로를 음악에서 얻는다. 한강진역 1번 출구를 빠져나와 이태원 방향으로 조금만 걸으면 스피커를 연상케 만드는 검은색 건물, ‘스트라디움’이 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에 와 닿는 일요일 오전의 거리는 평소보다 더 고요하지만, 속이...

[218호 테마서평: 파스칼 키냐르의 시간] 시간의 섬광, 시간의 황홀경

『심연들』(파스칼 키냐르 저·류재화 역, 문학과지성사, 2010) 『옛날에 대하여』(파스칼 키냐르 저·송의경 역, 문학과지성사, 2010) 『떠도는 그림자들』(파스칼 키냐르 저·송의경 역, 문학과지성사, 2003) 무언가에 고통스럽게 쫓길 때마다 주문처럼 외웠던 말, 나에게는 신비한 약효, “페스티나 렌테(Festina lente)”. 이 말을 그대로 풀이하면 “빨리 천천히”이다. 이 역설적인 비문(非文)은 나에게 일종의 비문(秘文)이 되었다. 파스칼 키냐르의 전언에 따르면, 페스티나 렌테는 고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허리춤에 늘 지니고 다니던 사냥칼에 쓰인 문구이다. 빨리 하되 천천히. 이 말을 ‘빨리 한 후에 천천히, 천천히 한 후에 빨리’라는 시간의 순차성에 따른 인과적 연차 행위로 이해하기보다, 거의 측정 불가능한 극미한 최소 시간 단위 속에 벌어지는 전이, 이동으로 이해할 때 그 의미는 더욱 감미롭고 알싸하다. 다시 말해, 그것은 ‘거의 동시에’이다. 같은 길이로, 같은...

[218호 문화비평: 문화전쟁] 문화전쟁의 시대?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은 전 세계인을 깜짝 놀라게 했다. 거침없는 언행과 대중주의적 수사로 유권자들을 현혹하는 난세의 기인 정도로 평가받는 인물이 아니던가. 그가 공화당의 보수주의자들에게 얼마간의 인기를 끌지언정, 미국의 대통령직에 오를 수 있으리라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더욱이 선거 막판 트럼프는 인종차별적 발언에 더해 성추행 논란에 휘말리기까지 했다. 그러니 지난 대선에서 흑인 대통령 오바마를 당선시켰던 미국인들이 어째서 이번엔 함량미달의 극우 정치인을 선택했는지 많은 이들이 혼란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아가 트럼프의 미국이 예고하는 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혐오의 정치에 대해 벌써부터 공포감을 표출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트럼프의 당선 요인을 두고 많은 논평자들이 그가 내세운 미국우선주의와 이민자 배제정책이 경제적 곤궁에 빠진 백인 노동자계급을 효과적으로 공략했다는 진단을 내놓고 있다. 소위‘러스트 벨트’라 불리는...

[218호 영화비평: <4등>(2015)] 경쟁구조에 갇힌 이들에게 던지는 작은 물음표

  정지우 감독의 <4등>(2015)은 1998년 박세리 선수가 LPGA에서 우승한 소식을 전하는 흑백의 뉴스 장면으로 시작한다. 거기서 박세리 선수는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쥔 수많은 선수 중의 한 명이 아니라 IMF 시대를 관통하는 국민에게 희망을 전한 스포츠 영웅으로 호명된다. <4등>은 그런 박세리 선수의 모습 위에 전도유망한 국가대표 수영선수인 어린 광수(정가람)를 포개놓는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있던 그는 연습 때마다 한국 신기록을 갈아 치우더니 급기야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 아시아 신기록으로 우승까지 하게 된다. 이제 광수에게 남은 것은 아시안 게임에서 우승해 박세리 선수처럼 유명한 스포츠 스타가 되는 길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실력을 과신한 채 고향에서 선배들과 노름을 하느라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 소집에 무단으로 불응하게 된다. 뒤늦게 태릉선수촌으로 향한 광수를 맞이한 것은 “이게 다 너를 위한 거다....

[218호 특강취재: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 <아시아학교-인도의 과거, 인도의 오늘>] ‘인도’는 ‘인도’다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는 11월 9일부터 12월 7일까지 매주 수요일마다 서울시 통인동에 위치한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에서 2016 가을 인문학교 ‘아시아학교-인도의 과거, 인도의 오늘’이란 제목으로 특강을 개최한다. 본 강연은 1강 ‘인도는 가난한 오리엔트인가’, 2강 ‘역사와 강을 따라 인더스 문명에서 21세기까지’, 3강 ‘힌두와 카스트는 불변인가’, 4강 ‘간디를 통해 본 인도의 저항운동’, 5강 ‘인도의 민주주의는 왜 역동적인가’로 구성됐다. 이옥순(인도문화연구원장, 연세대학교 연구교수) 강연자는 지난 11월 9일 첫 강의에서 식민지 인도와 사회, 문화, 정치 등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도에 대한 인식을 재조명했다. 인도에 대한 편견 문학이론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adie Said)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을 “동양과 서양 간의 인식론적 구분을 창조하고 확인하는 데 기여한, 서양의 동양에 대한 연구와 서양에 의해 재현되고 지지된 어떤 이념적 관점”이라고 말한다. 즉,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217호 특강취재: 수유너머N, 토요인문학 <장소성의 정치철학>] 블랑쇼와 장소성, 나의 바깥에 선다는 것

수유너머N은 9월 3일부터 11월 12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 3시부터 5시 30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위치한 수유너머N 건물 대강당에서 <장소성의 정치철학> 강의를 진행한다. 총 열 차례에 걸쳐 진행되는 이번 특강은 ‘장소성’을 화두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랑시에르까지 여러 정치 철학자들의 사유를 우리 삶의 구체적인 사례들과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자리다. 심아정(수유너머N 연구원) 강연자는 지난 9월 24일에 열린 세 번째 강의에서 ‘바깥/외부’를 주제로 ‘블랑쇼, 나의 바깥에 선다는 것’을 통해 블랑쇼의 사상과 철학을 조명했다. 40여 석의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높은 참여율을 보이며 시작된 강의는 예정된 강의 시간을 넘어서까지 이어졌다. 강의 내내 심아정 강연자와 수강자는 질의응답을 통해 블랑쇼의 생애와 ‘장소성’의 의미를 되짚으며 진정성 있는 담론을 나눴다.     장소와 장소성의 의미 ‘장소(place)’는 누군가가 속해 있는...

[217호 책지성: 모옌, 『인생은 고달파(生死疲勞』] 죽어도, 다시 살아도 고달픈 여섯 번의 生

  1955년 중국 산둥성 까오미 현에서 태어난 관모예(管謨業)는 “말 대신 글로 표현 하겠다”는 의지로 ‘모옌(莫言)’이라는 필명을 사용한다. 1978년 군 복무 도중에 첫 소설을 쓰기 시작한 그는 1981년 단편 「봄밤에 내리는 소나기」를 통해 중국 문단에 등단했다. 1987년 발표한 장편 『홍까오량 가족 』은 장이모우(張藝謀) 감독의 각색을 통해 「붉은 수수밭」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제작되어 1988년 베를린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이는 모옌의 소설이 전 세계 20여 개국으로 번역 출간되는 계기가 된다. 중국어권 작가 중 가장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던 모옌은 201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묵언(默言)하고, 막언(幕言)하다 2006년 발표, 2008년 국내에 번역되어 상·하 권으로 나뉘어 출간된 장편 인생은 고달파는 2012년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에서 “환상적인 리얼리즘을 민간의 구전문학과 역사, 그리고 동시대에 잘...

[217호 테마서평: 황순원, 소설 속 공간] 6·25 전후(戰後) 공간의 의미 -황순원의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곡예사」 (『황순원 전집 2』, 문학과 지성사, 1992) 「참외」 (『황순원 전집 3』, 문학과 지성사, 1992) 「모든 영광은」 (『황순원 전집 4』, 문학과 지성사, 1992) 작가 황순원은 1915년 평양 대동군에서 출생하여 104편 가량의 시와 단편 104편, 중편 1편, 장편 7편을 창작하고 2000년 작고하셨다. 1946년 5월, 황순원 일가는 토지개혁이 시행되던 평양을 떠나 38선을 넘어 남한에 정착하게 된다. 고향을 등지고 자유를 찾아 내려온 월남민의 고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치러야만 했던 6·25전쟁체험은 작가로 하여금 역사와 현실,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감당해야만 했던 정신적 갈등과 절망감을 그의 문학 속으로 끌어들이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황순원에게 있어서 6·25의 전쟁체험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커다란 억압관념으로 자리 잡게 되고, 그의 문학세계에서 뚜렷한 분기점을 이루게 된다. 6·25 전후 공간의...

[217호 리뷰: 북티크 심야서점] 금요일을 보내는 아주 평범한 방법

    버거웠던 한 주가 가면 금요일 밤이 남는다. 내일이 토요일이라는 기쁨과 그 다음날은 일요일이라는 안도감 때문인지 그 어떤 밤보다 길게 남겨두고 싶다. 금요일 밤을 보내는 방법은 많다. 친구들을 만나거나 집에서 밀린 예능을 보거나 무엇이든 ‘불금’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가끔씩 그 무엇도 내키지 않는 날이 있다. 소음도 고독도 내 것이 아닌 날, 그런 날이면 마음먹고 집을 나서도 정작 발길 닿을 곳이 없다. 그날도 꼭 그런 기분이었다. 몰아치는 일정을 꾸역꾸역 끝내고서 찾아온 유쾌하지 않은 금요일, 그냥 쉴 수도 없는 기분에 ‘심야서점’으로 향했다. 서교동 부근 번화한 거리를 지나면 한적한 혹은 적막한 거리가 나온다. 그 거리에는 새벽 2시에도 홀로 환한 심야서점이 있다. 새벽이 되면 문을 연다는 일본 만화 속 심야식당처럼 금요일...

[217호 영화비평: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2016)] 진정한 보수주의의 가치를 생각하다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Sully)>(이하 <설리>)의 초반부에서 체슬리 ‘설리’ 설렌버거(톰 행크스)는 자신이 조종하는 여객기가 뉴욕 도심의 숲을 가로질러 빌딩과 충돌하는 악몽을 꾼다. 이 이미지는 즉각적으로 우리의 기억을 15년 전 뉴욕으로 이끈다. 9·11은 자신의 영토에서 외부로부터 공격 당해본 적 없는 미국인들에게 심대한 트라우마를 야기했으며, 부시 정권은 상처받은 미국인들의 자존심을 복수심으로 치환시켜 악무한의 폭력으로 치달은 ‘테러와의 전쟁’을 벌였다. 우리는 그 참담함의 끝을 기억한다. 거기에는 ‘나의 국민이 이런 일을 당했으니 내가 책임진다’는 국가적 리더의 어떤 결연함이 있다. 물론 그 결연함이 그릇된 사고방식과 잘못된 방향으로 치달을 때 어마어마한 비극도 있다는 것 또한 우리는 안다. 그것은 책임 있는 자가 자신의 책임을 광적으로 완수하고자 할 때, 역설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무책임의 극치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리고...

[217호 문화비평: 반지성주의] 반지성주의와 타자 혐오

  멀게는 미국에서 부는 트럼프 열풍과 유럽 각국에서 극우정당들의 득세, 가깝게는 여성혐오와 지역혐오를 거리낌 없이 표출하는 ‘일베’ 유저들을 보며 ‘반(反)지성주의’의 폐해를 경고하는 목소리들이 거세다. 그뿐이랴. 하루가 멀다하고 반복되는 정치인들의 폭언과 망언,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천명하는 종교단체들, 21세기에 되살아난 ‘빨갱이’ 사냥과 극우 민족주의까지, 자유민주주의의 역사적 승리를 통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줄 알았던 광폭한 열정이 미디어를 타고 전 세계에 흘러넘치고 있다. 오늘날 시민들은 동료 구성원들에게서 응당 기대하는 책임감과 덕성을 발견하지 못해 좌절감에 휩싸여 있으며, 지식인들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새로이 부상한 대중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탐색하고 있다. 극우 근본주의, 배타적인 민족주의,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 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각각 상이한 맥락을 갖는 이데올로기이지만, 그 근저에 공통적으로 ‘반지성주의’적열정이 깔려 있다는 데에 많은 지식인들이 합의를 이루고...

[216호 문화비평: 올림픽] 올림픽의 정치학

  기록적인 무더위와 함께 여름밤을 수놓았던 전 세계인의 스포츠 축제, 리우 하계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이번 올림픽은남미에서 최초로 개최된 올림픽이자, 최초로 난민 팀이 출전함으로써 지구촌 화합의 뜻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은 종합 8위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나, 예년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졌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4년여를 준비한 선수들의 땀과 열정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닐 터이다. 어쨌거나 지구 반대편에서 펼쳐진 한여름 밤의 축제는 기나긴 열대야를 그나마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리우 하계올림픽을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올림픽이 더 이상 맹렬한 민족주의적 감정이 동원되는 국가대항전이 아니라, 문화적 축제로서의 성격이 강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미디어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올림픽 경기와 관련 뉴스로 도배되었지만, 시민들이 느끼는 올림픽의 무게감은 예전 같지 않은 듯하다. 대체로 종합순위나...

[216호 테마서평: 한여름 밤의 스티븐 킹] 스티븐 킹과 은유로서의 호러

『캐리』(스티븐 킹 저·한기찬 역, 황금가지, 2003) 『샤이닝』상, 하 (스티븐 킹 저·이나경 역, 황금가지, 2003) 『스탠 바이 미(사계)』(스티븐 킹 저·임영선 역, 영언문화사, 1993) 인간 내부의 얼룩 나는 인간의 내부에는 누구나 얼룩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얼룩은 크고 어떤 얼룩은 작다. 어떤 얼룩은 발목 정도 차오르는 얕은 곳에 있고 어떤 얼룩은 마리아나 해구처럼 영혼의 심해에 침잠해 있다. 어떤 얼룩은 성능 좋은 세정제로 닦일 수 있지만 어떤 얼룩은 지워지기는커녕 건드릴수록 더 심하게 영혼을 더럽히는 것도 있다. 광기와 악의, 혐오와 타자화는 이러한 얼룩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다. 인간이 자기 내부에 있는 얼룩에 개성적인 이름을 붙여주기 시작한 것은 근세기 이후의 일이다. 이를테면 프리드리히 니체나 지그문트 프로이트 같은 이가 얼룩을 재발견하고 라벨을 붙이기 시작했다. 이제야 비로소 인간의 얼룩은 고유한 이름을...

[215호 리뷰: 서울시립미술관 덕수궁관, <이중섭, 백년의 신화>展] 끝없는 사랑의 표현

  “나만의 소중하고 또 소중하고 고귀하고 끝없이 상냥하며 우주에서 유일한 사람 나의 빛, 나의 태양, 나의 사랑 모든 것의 주인, 나만의 천사, 사랑하는 현처 남덕씨, 건강하신가요” -제3전시실, 5부 ‘편지화’ 中에서 말이 참 곱다. 무척 아름답다고 느끼면서도, 요즘 세상에 이렇게 편지를 쓰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 어른’이 아닌, 감수성 풍부한 사춘기 문학소년 같다. 저렇게 솔직하면서 애틋한 표현은 오랜만이라서 낯이 뜨거워진다. 만약 저런 내용의 편지를 받는다면 간지러워서 다 읽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 앞으로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토록 순수한 편지를 써 볼 수나 있을까. 일본에 있는 아내에게 이중섭이 보낸 편지다. 이번 전시에서 실제 편지와 그 내용을 번역한 글들이 한 파트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7월경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내고 홀로 남았다....

[216호 특강취재: 철학아카데미, <정치철학 고전강좌2: 근대 이후>] 정의(正義)의 철학자,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

서울 통의동에 위치한 철학아카데미는 7월 14일부터 9월 29일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7시에 <정치철학 고전강좌 2: 근대 이후>를 진행한다. 본 특강은 칼 슈미트부터 에티엔 발리바르까지 총 10명의 20세기 주요 정치 철학가들의 사상을 살펴보고, 오늘날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짚어본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지난 8월 11일 김은희(건국대 교양대학 교수) 강연자가 ‘존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주제로 네 번째 강의를 진행했다. 이날 강연은 존 롤스(John Rawls, 1921~2002)의 가장 유명한 저서 『정의론』(1971)에서 시작됐다. 롤스가 정의론 이후 받은 비판을 토대로 새로이 고민해 만든 결과물이 『정치적 자유주의』(1993)이기 때문이다. 김은희 강연자는 『정의론』과 『정치적 자유주의』, 두 권의 책을 동시 상영하듯 풀어내며 롤스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다. 롤스의 정의론은 많은 이들을 감화시키며 20세기 미국 철학계의 주류를 이루었다. 서구 민주주의 가치를 바탕으로...

[216호 영화비평: <부산행>(2016)] 부산행 열차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영화 <부산행>(연상호, 2016)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동시대 한국 사회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반영했다는 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우리 사회가 점점 계층화되고 경쟁이 심화하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슬픔을 표현한 영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과연 그것을 제대로 구현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많은 이들이 언급한 것처럼 <부산행>이 가지고 있는 재난의 풍경은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 이후의 현실을 반영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사실 그런 식의 해석을 가능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영화 곳곳에 배치되어 있긴 하다. 그런데 이 요소들은 영화 내러티브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요소라기보다 표층적인 차원에서 움직이고 있어 사회적인 조건과 쉽게 결합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부산행>을 대사회적 의미가 있는 영화라고 말하는 작업은 영화 그 자체의 내적 완결구조보다 영화가 풍기는 분위기에 편승한 것처럼 보인다. <부산행>은...

[216호 책지성: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언제까지나 아름다운 봄이기를

  지난 8월, 우리는 유난히 더운 여름을 보냈다. 연일 열대야가 지속되었고 남부지방의 체감온도는 40도를 웃돌았다. 지금까지 알던 여름과는 달랐다. 이렇게 더운 여름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다음 해 그리고 그 다음 해에 올해와 같은 여름이 반복된다면, 우리는 ‘여름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원래의 여름에 대한 기억은 곧 희미해질 것이다. ‘봄’ 역시 마찬가지다. 본디 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과수원은 푸르고, 철새 무리들이 떼를 지어 날아간다. 울새, 산비둘기 등 새들의 합창이 울려 퍼지고, 꿀벌이 윙윙거리며 꽃 사이를 옮겨 다닌다” 그러나 실제 우리가 보내는 봄은 그렇지 않다. 추운 겨울과 더운 여름의 사이에서 짧게 스치고 지나갈 뿐이다. 이제는 희미해져 버린 봄을 위해 쓰인 글이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 1907~1964)의 『침묵의 봄(Silent Spring)』이다. 침묵의 봄은 생태학...

[215호 영화비평: <곡성 哭聲>(2016)] 미끼, 그 의도된 뻔뻔스러움

*다량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곡성 哭聲>이 개봉한 지 20여 일이 지났지만 이 영화에 대한 인터넷상의 논쟁(?)은 식을 줄 모른다. 대체로 기자나 평론가들은 걸작이 나왔다고 극찬하는 쪽이다. 아니 적어도 시종일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몰입하게 만드는 극적 흡인력에 찬사를 보낸다. 여기에 나도 동의한다. 적어도 긴장감 있는 리듬으로 서사를 전개시키는 나홍진 감독의 재능은 칭찬해 줘 마땅하다. 관객들의 반응은 명확하게 호불호가 나뉜다. 어떤 이들은 풀리지 않는 퍼즐을 맞추는 데 열광하고, 어떤 이들은 서사의 허점을 비난한다. 사실, 기자, 평론가들도 역작이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찜찜한 구석을 무시하지 못한다. 나는 그런 찜찜한 구석을 일거에 날려버릴 어떤 명쾌한 해석을 할 생각도, 의도도, 능력도 없다. 애초부터 그런 건 존재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글은...

[215호 문화비평: 여성혐오] 여성혐오의 범죄화와 감정의 정치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혐오’라는 기표를 사회적으로 안착시키면서 다양한 사회적 반응을 낳고 있다. 이미 지난해부터 ‘나는 페미니스트다’선언이나 ‘메갈리아’등을 통해 터져 나오던 반-여성혐오 운동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질적인 단절을 겪은 듯 보인다. 여성을 비하하는 남성들에게 혐오표현을 고스란히 되돌려주고, 마음껏 ‘설치고 말하고 떠들자’던 자부심과 발랄함은 일순간 공포와 두려움으로 전환되었다. 여성혐오에 대한 투쟁이 여성을 차별하고 멸시하는 사회구조에 맞선 ‘문화전쟁’이 아니라, 실질적인 살해 위협에 맞선 ‘생존투쟁’으로 전환된 것이다. 잔혹한 사건 현장이 이내 거대한 추모 현장으로 변모한 현실은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던 공포와 두려움이 얼마나 심원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일상생활에서 24시간 내내 폭력과 추행, 멸시와 관음증적 시선의 위협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여성들의 응어리진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강남역 추모게시판에 붙은 ‘살女주세요’라는 다섯 글자는 여성들의 절박함 심경과 그들이...

[215호 책지성: 아서 단토, 『예술의 종말 이후』] 예술의 종말, 현대미술의 부활

‘모방의 시대’→‘이데올로기의 시대’→‘탈역사적시대’, 이렇게 예술의 역사를 요약할 수 있을까? 다원주의자로써 아서 단토(Arthur C. Danto, 1924~2013)는 위대한 예술은 매우 다양한 형식으로 언제나 가능하다고 믿었다. 미국 뉴욕의 미술평론가로서 그는 미술이론이 아니라 미술에 대한 (주로 뉴욕의) 직접적 체험으로서 자신의 비평을 형성한다. (이러한 사실은 미학과 미술비평 그리고 미술 실천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되는 칸트, 헤겔, 그리고 하이데거 등과는 경우가 매우 다르다. 그들은 실제 작품과 대면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고 더욱이 예술계와 직접적인 교류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의 철학적 체계와는 전혀 다른 비평적 판단을 하는 것이다. (반면에 예술철학은 일반적이어야 한다.) 그의 미술비평은 그가 이룩한 예술철학으로부터 권위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철학과 미술비평은 본질적으로 다른 계열이다. 미술비평은 평론가가 관람객이 보는 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작업하는 수사학의 형식이다. 현대 철학은 다르다. 실재하는 것으로서 세계를 묘사하는 심화된...

[215호 리뷰: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기증 작품 특별전: 시대의 선각자, 나혜석을 만나다] 현실에서 괴리된 삶을 살아내기

  “사남매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신생활에 들면서>, 『삼천리』, 1935.2   어느 수업 중 한 교수님이 우리에게 물었다. 만약 다시 태어나 살아갈 시대를 선택할 수 있다면 언제가 좋겠느냐고. 대부분의 원생들이 이대로 다시 태어나 현재를 살고 싶다고 답했다. 리셋, 인생을 초기로 되돌려 다시 시작하기를 바라고들 있었다. 하지만 나는 1920년대, 혼돈의 시대에 태어나서 무언가를 하고 그로써 역사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수업이 끝난 나른한 어느 금요일 오후, 나는 나혜석을 만나러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으로 향했다. 전통과 혁신, 신구의 갈등과 분열이 휘몰아치던 시대에 태어나 저항하며 살다간 나혜석을 만나러가는 발걸음이 왠지 모르게 무거웠다. 시대의 선각자, 신여성이라 불린 ‘센 언니’의 정체를 알고 싶기도,...

[215호 테마서평: 밀란 쿤데라] 밀란 쿤데라와 키치

『소설의 기술』(밀란 쿤데라 저 · 권오룡 역, 민음사, 2008)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 저 · 이재룡 역, 민음사, 2009) 『불멸』(밀란 쿤데라 저 · 김병욱 역, 민음사, 2010) 소설은 인식의 도구 체코의 브루노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망명한 소설가 밀란 쿤데라의 창작 여정은 흔히 세 사이클로 나뉜다. 첫 번째는 『농담』(1967)에서『삶은 다른 곳에』(1973)로 이어지는 ‘체코 사이클’이다. 작품 소재를 주로 체코라는 ‘국가적’ 틀 안에서 찾은 시기다. 두 번째는『웃음과 망각의 책』(1978),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 『소설의 기술』(1896), 『불멸』 (1990)로 이어지는 ‘중간 사이클’이다. 망명 작가 쿤데라가 국가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신의 소설적 탐구의 정체성을 유럽이라는 대(大)맥락에서 찾는 시기다. 이 시기까지 그의 작품들은 모두 체코어로 씌어져 불역되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느림』(1995), 『정체성』(1997), 『향수』(2000)로 이어지는 ‘프랑스 사이클’이다. 우리가 살펴볼...

[215호 특강취재: 학술단체협의회 봄 기획특강 <가능성의 글쓰기>] ‘몸’과 접촉하는 열림의 공간, 글쓰기

경희대학교 일반대학원 학술단체협의회는 4월 27일부터 5월 25일까지 매주 수요일(5월 18일 개교기념일로 휴강)에 2016학년도 봄 기획특강을 개최했다. 이번 기획특강은 <가능성의 글쓰기>라는 제목으로 총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본 강연은 1강 ‘프로이트의 ‘다른’유산-사후적 글쓰기’, 2강 ‘로넬의 어리석음-백치의 글쓰기’, 3강 ‘낭시의 몸-몸을 쓰기 또는 몸을 향하여 쓰기’, 4강 ‘데리다의 텔레파시-남아 저항하는 편지들’로 구성됐다. 민승기(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강연자는 지난 5월 11일과 5월 25일 두 강의에 걸쳐 낭시의 몸에 대한 사유에 대해 설명하고 그 의미를 재조명했다. 몸을 쓰다 우리는 때때로 나의 몸이 내 몸 같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나의 몸이 무겁게 느껴질 때도 있고, 때로는 가볍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의 몸은 매일, 매시간 시시각각 다르게 다가온다. 글을 쓰고 있을 때 느껴지는 나의 손가락, 컴퓨터...

[214호 리뷰: 일민미술관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 그래픽 디자인의 풍경

    수많은 시각정보들을 마주치며 하루를 보낸다. 길거리의 포스터, 커피숍의 로고, 서점의 책표지들을 훑는 우리의 눈은 바쁘다. SNS와 인터넷에는 업데이트가 끊이지 않는다. 화면 위로 쏟아지는 시각정보를 손가락으로 밀어내며 새로운 자극을 찾곤 한다. 전시 서문은 “시각 매체에 텍스트와 이미지를 배치해 내용을 전달하는 기술과 실천”으로 그래픽 디자인을 소개한다. 일상적으로 길에서 마주하는 시각정보인 광고, 홍보물, 로고 등을 포괄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시장에 들어서면 그 익숙한 일상 속 이미지들은 보이지 않는다. 전시는 지난 10년 동안 서울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 스튜디오’의 그래픽 디자인을 회고한다. 소규모 스튜디오는 문화 영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소수·개인 디자이너들로 이루어져 저예산 문화 영역 작업을 주로 맡았다. 그들의 작업은 2005년 무렵부터 적극적 의미를 띠며 디자인계와 문화 예술계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이들 소규모 스튜디오는 대규모로 향해가는 과정으로서의 소규모가 아닌,...

[214호 테마서평: 청계천 헌책방 ‘설레어함’] 왜 작가들은 죽음이라는 물음을 놓지 못할까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문학동네, 2007) 『슬픈 예감』(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민음사, 2007) 『이반 일리치의 죽음』(레프 톨스토이 지음, 고일 옮김, 작가정신, 2014)     서평을 쓰는 일은 단순히 책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는 것과 다르다. 책의 내용뿐 아니라 저자에 대해서도 파악해야 하고, 그 글이 생산된 시기의 사회적 맥락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 ‘설레어함’이라는 수수께끼 상자를 받아 그것에서 튀어나온 세 권의 책으로 서평을 쓰는 일은 때문에 난해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이와 같은 주제로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무작위로 받은 세 권의 책이 공통된 무언가를 말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각기 다른 국가, 다른 시대의 작가들이 가장 궁금해 하고 집중하는 주제가 있다면 무엇일까. 오히려 무작위로...

[214호 문화비평: 사회적 투자와 민주주의] 금융과 ‘사회적인 것’, 민주주의의 위기

최근 서울시는 아시아 최초로 ‘사회 성과 연계 채권(Social Impact Bond, 이하 SIB)’ 1호 사업을 개시한다고 밝혔다. 이름도 생소한 SIB사업은 민간투자로 공공정책 사업을 시행한 후, 성과 목표를 달성하면 정부가 사업비에 이자를 더해 민간투자자에게 지급하는 제도이다. 일반적인 공공복지사업이 사전에 정부가 예산을 집행하고 사업결과에 대해 정부가 책임을 지는 반면, SIB사업은 사업성과에 따라 사후적으로 예산을 집행하고 사업결과에 대한 리스크는 민간 투자자들에게 분산된다. 정부는 성공한 사업에만 예산을 집행하게 되어 예산 낭비를 줄일 수 있고, 투자자는 사회공헌과 투자 사업을 동시에 실행할 수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SIB를 통해 성과 중심 행정으로 예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민간과 공공이 협력하여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며 높은기대를 드러냈다. SIB사업은 최근 각광받는‘사회적 투자’의 한 사례이다. 20세기 후반 들어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과 빈곤, 환경오염...

[214호 영화비평: <사울의 아들(Son of Saul)>(2015)] 재현의 딜레마와 그 고민의 흔적들

라즐로 네메스 감독의 <사울의 아들>(2015)은 영화가 아우슈비츠 학살 장면을 재현하는 것에 대한 논쟁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 논쟁은 이탈리아 영화감독인 질로 폰테코르보의 <카포>(1959)에 대한 프랑스 영화감독이자 비평가인 자크 리베트의 <천함에 대하여>라는 짧은 비평에서 시작되었다. <카포>는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한 소녀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크 리베트는 이 영화를 천함(abjection)이라는 단어 하나로 규정하는데 그 이유는 영화 중반부에 등장하는 한 장면 때문이다. 수용소 생활 속에서 하루하루 비참해지는 자신의 존재를 비관한 테레즈(엠마누엘 리바)가 전기 철조망에 몸을 던지는 장면이 바로 그것인데, 카메라는 이 장면에서 철조망에 걸린 죽은 테레즈의 몸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자크 리베트는 이 장면에서의 카메라 기법, 즉 테레즈의 죽음을 트래블링 쇼트(traveling shot)로 포착한 것은 카메라의 관음증에 불과하다며 이러한 재현은 관객들을 점차 참혹한 것에...

[214호 특강취재: 서울시민대학 대학연계 강좌(경희대) <동양철학, 그 불멸의 지혜를 읽는다>] 우언으로 열리는 없음의 세계, 장자

서울시에서는 우리 대학과의 대학연계 시민대학 운영으로, 3월 24일부터 6월 9일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4시부터 두 시간씩, <동양철학, 그 불멸의 지혜를 읽는다> 강의를 진행한다. 강연은 우리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전호근 교수가 맡아 진행하며, 서울교정 호텔관광대학 본관 703호에서 이루어진다. 서울시민대학은 서울시민이 인문학 교육을 통해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서울시가 운영하는 배움의 장이다. 2013년부터 시민청 및 3개 연계대학에서 인문학적 성찰·시민민주주의·삶의 터전·예술적 감성 등을 주제로 다양한 인문강좌를 진행해왔으며, 2016년에는 18개소, 총 230개 강좌로 확대·운영되고 있다. 이 중 ‘대학연계 시민대학’은 우리 학교를 포함한 14개 대학이 서울시와 협력 운영해 보다 다양한 인문 전문강좌를 기획해오고 있는 중이다. 그 일환으로 구성된 본 강좌는 동양철학의 주요사상가 10명(공자, 맹자, 노자, 장자, 묵자, 순자, 상앙, 한비자, 손자, 사마천)의 생애와 사상을 매주...

[214호 책지성: 서경식, 『 언어의 감옥에서』] 계속되는 식민주의를 바라보는 재일조선인의 눈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을 맞은 지 어느덧 7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한국인이 일본으로부터 느끼는 심리적 저항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는 패전과 함께 끝이 났지만, 식민지배에 대한 식민국의 사과와 반성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계속되는 일본의 식민주의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재일조선인의 눈으로 언어 내셔널리즘 문제와 ‘계속되는 식민주의’의 청산을 막는 위험으로서 일본 리버럴 세력에 대해 다루고 있는 서경식의 『언어의 감옥에서』(2012)가 어쩌면 그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사회가 계속되는 식민주의를 극복하고 다시금 우리 사회와 화해할 수 있는지 여부를 가늠하는 성찰의 기회를 재일조선인이라는 소수자의 입장에서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서는 매우 의미 있다고 하겠다.   언어의 감옥에 갇힌 경계인   1945년 일본은 패전했고, 조선은...

[213호 문화비평: 예의바른 관계] ‘예의바른 관계’의 지옥

일본 츠쿠바대학에서 인간관계를 가르치는 도이 다카요시 교수는 현대 일본 젊은이들의 관계맺음 형태를 ‘친절한 관계’라고 묘사한다. 그가 말하는 친절함은 타인과 적극적으로 관계 맺고 배려하는 통상적인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적극적인 관계맺음이 상대에게 부담을 줄까봐, 나아가 자신이 상처를 받을까봐 두려워 서로 주의 깊게 처신하는 데서 오는 친절함을 일컫는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 신중하게 인간 관계를 추구하고, 상호 간의 차이를 적극적으로 확인하려 들지 않으며, 조심스레 상대방의 눈치를 살펴 말과 행동을 가린다. 그리하여 친절한 이들이 모인 공간에는 살얼음을 밟듯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상호 간의 암묵적인 합의하에 형성된 ‘분위기’가 그 장소의 인간관계를 좌우한다. 이 관계는 서로 선을 넘지 않는 ‘예의바른’관계인 동시에, 끊임없이 타인의 눈치를 보는 숨 막히는 관계이기도 하다. 일본의 어느 중학생은 교실에서의 이런 관계를...

[213호 영화비평: <동주>(2015)] 행동과 성찰은 같이 갈 수 없는 걸까?

영화 <동주>(이준익, 2015)의 첫 장면은 1935년 북간도 용정에서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를 공산당이 운영하는 인민학교로 내 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벌이는 언쟁이다. 마을 어른 한 명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이 마을이 기독교 신앙으로 하나가 된 곳임을 강조한다. 이에 질세라 세계인민의 평등을 주창하며 당돌하게 인민학교로의 전환을 설파하는 한 젊은이가 나선다. 송몽규(박정민)다. 그는 언변과 패기로 마을 어른들의 말문을 막히게 한다. 그는 영화의 타이틀 롤인 윤동주(강하늘)의 사촌이자 평생을 같이 한 친구이다. 영화의 시작을 주인공이 아닌 캐릭터에게 강한 인상이 남게 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영화 전편에 걸쳐서 몽규는 적어도 행동으로는 동주를 압도한다. 동주는 그러한 몽규의 행동력 앞에서 항상 머뭇거린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 <동주>는 독립운동이든 무엇이든 과감하게 앞에 나서지 못했던 한 청년의...

[213호 책지성: 로타 폰 팔켄하우젠, 『고고학 증거로 본 공자시대 중국사회』] 인문학으로서의 고고학과 고대 중국 연구

  최근 한국의 인문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대학의 구조조정과 맞물려 유행처럼 퍼져가고 있는 말이 있다. 바로 ‘인문학의 위기’라고 하는 것이다. 아카데미 사회의 구조조정 정책과 방향성은 학문 분과의 융합과 통폐합 경향을 가속화시키고 있으며, 실제로 인문학 강의 개설의 축소와 지양으로 인문학 연구자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가중되고 있는 이러한 인문학에 대한 연구자들의 시중 인식과는 다르게 오히려 각종 매체와 대중문화교육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인문학 강의와 교육은 일반 대중들에게 그 접근성과 기회가 훨씬 향상된 것처럼 보인다. TV나 인터넷을 통한 인문학 강연뿐만 아니라 여러 문화센터에서 제공하는 고전에 대한 강독과 강의는 인문학에 대한 위기의식의 고양과 더불어, 역으로 인문학 부흥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최근 이러한 인문학에 대한 위기의식으로 출발한 인문학 고양에 대한 각성과 노력의...

[213호 리뷰: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 우리문화재를 지키다>] 역사를 더듬는 장인정신

  세상의 모든 물건에는 육하원칙이 있다. 저마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왜, 어떻게’에 대한, 눈에 보이지 않는 내용들을 머금고 있다. 그런데 흙 속에, 무덤 속에, 누군가의 창고에 너무 오래있던 나머지 자신이 무엇이었는지 잊어가던 물건들이 있었다. 두꺼운 먼지와 녹으로 덮여 형체를 알 수 없거나 수백 조각으로 흩어져 단지 ‘낡은 물건’이 되어버린 것들의 육하원칙을 밝혀 그들을 ‘문화재’로 만들어내는 것이 보존과학이다. 현대과학기술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전시에서는 전보다 정밀해진 보존과학이 문화재의 정확한 원재료, 제작기술, 성분을 밝히면서 새로운 사실을 찾아낼 수 있게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고리자루큰칼의 칼집장식에서는 녹슬어 가려져있던 ‘이사지왕(尒斯智王)’이라는 글자가 보존처리 중 발견되었다. 이는 지금까지 확인된 고대 신라의 명문 중 왕과 관련된 최초의 것이며 신라사와 고대 문자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보존처리...

[213호 테마서평 : 프리모 레비의 증언문학] 증언 문학의 거장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 저, 이현경 역, 돌베게, 2007) 『휴전』 (프리모 레비 저, 이소영 역, 돌베게, 2010)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프리모 레비 저, 이소영 역, 돌베게, 2014) 나치즘과 홀로코스트라는 20세기 역사의 질곡에서 탄생한 증언문학의 대표 작가 프리모 레비는 1919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출생했다. 그는 1943년 반파시즘 레지스탕스 운동 조직인 “정의와 자유(Giustiziae Libertà)”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었다. 요즘 발사믹 식초로 우리에게도 유명한 모데나 근처의 포솔리 임시집결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다가 1944년 2월 아우슈비츠로 강제 이송되는 무시무시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된 것은 그의 나이 24세, 청춘의 한가운데에서였다. 그 ‘죽음의 수용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레비는 1947년, 첫 작품『이것이 인간인가』를 출간하고, 이후 『휴전』(1963), 『 주기율표』(1975), 『 지금 아니면 언제?』(1982),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1986) 등 증언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작품들을 출간했다. 이들 작품 외에도 다수의 단편...

[213호 특강취재: 푸른역사아카데미 기획 강연<뮤직비디오와 현대미술>] 소리를 화면에 담다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는 <뮤직비디오와 현대미술>이란 주제로 3월 16일부터 5월 18일(4월 6일, 4월 13일 휴강)까지 매주 수요일 오후 2시부터 강연을 진행한다. 음악과 미술, 영상이 합쳐진 뮤직비디오가 생겨난 이후로 뮤직비디오는 전방위적 행보를 보이며 현대 예술의 확고한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 본 강연은 뮤직비디오를 보며 역사, 정치, 음악과 예술 등을 전반적으로 살펴보고자 기획됐다. 총 8강으로 진행되며, 세부적으로 1강 ‘백남준 혹은 엠티비의 도래’, 2강 ‘뮤직비디오 시장의 폭발’, 3강 ‘데이비드 보위/브라이언 이노’, 4강 ‘피터 게이브리얼’, 5강 ‘크라프트베르크’, 6강 ‘데이비드 실리언’, 7강 ‘그 외(글램록, 펑크, 랩, 힙합, 일렉트로)’, 8강 ‘류이치 사카모토와 친구들’로 구성됐다. 허경(철학박사, 음악평론가) 강연자는 지난 3월 23일에 열린 두 번째 강의에서 ‘뮤직비디오 시장의 폭발’이라는 주제로 비디오 아트와 뮤직비디오 탄생, 뮤직비디오 속에 담긴 시대적...

[212호 문화비평: <프로듀스 101>] <프로듀스 101>, 자본과 대중의 공모극

▲“당신의 한 표가 소녀들의 운명을 결정한다.”<프로듀스 101> ⓒ www.huffingtonpost.kr 엠넷의 <프로듀스 101>이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아이돌 연습생 101명을 모아 최종적으로 11명의 아이돌 걸그룹 후보를 선발하는 이 프로그램은 기존 오디션 프로그램이 머뭇거리던 지점에서 과감히 한 발 더 나아간다. 101명의 소녀들이 영업을 개시한 마트의 직원들처럼 일제히 허리 굽혀 “국민프로듀서님,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인사하고, 대형무대에서 “Pick Me, Pick Me”를 노래하며 군무를 추는 영상은 가히 인상적인 스펙터클을 제시한다. 교복풍의 유니폼을 입고 자신을 뽑아달라며 눈웃음을 건네는 101명의 “소녀”들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눈길을 돌리기엔 늦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프로듀스 101>의 취지는 중소 기획사에 소속되어 몇 년간 하염없이 데뷔만을 기다리는 101명의 연습생들에게 “국가대표 걸그룹”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212호 영화비평: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2015)] 권력의 내부를 파헤치는 시선의 실체

우민호 감독의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이하, <내부자들>)은 영화 그 자체보다 스크린 밖의 세상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영화이다. 이것은 이 작품에 대한 비평보다 <내부자들>이 불러일으킨 기시감에 방점을 두고 영화를 사회 환원적으로 해석하려는 태도가 더 많았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징후는 감독의 인터뷰에서도 감지할 수 있다. 우민호 감독은 <내부자들>의 개봉 직후 한 영화 주간지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현실은 씁쓸할지언정 관객이 극장 안에서 통쾌한 낭만을 느꼈으면 한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 이 말은 스크린 밖의 세상이 변화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스크린에 펼쳐진 세상에서 대리만족을 느껴보라는 의미이다. 물론 영화가 감독의 의도를 오롯이 담아낼 수는 없으며 관객 또한 영화를 보면서 감독의 의도를 전부 파악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발언을 언급한 이유는 그것이...

[212호 리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육명심>] 그날, 거기와 여기

       ▲<육명심> 사진을 보고 있는 어느 가족, 부부, 연인의 모습이다. 그날은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대공원역 4번 출구에서 국립현대미술관으로 향하는 셔틀버스를 탔다. 굽이굽이 산길을 달리던 버스는 미술관 앞에서 멈춰 섰다. 내려서 처음 마주한 광경은 산이었다. 수증기로 인한 짙은 안개가 산을 굽이굽이 휘감고 있었다. 그 속에 미술관이 자리했고 단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내 켜켜이 빗방울이 굵어졌고 사람들은 서둘러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필자도 서둘러 <육명심> 전시장으로 향했다. 육명심(1932~ )은 “한국적인 정서와 정체성을 탐구해온 한국 사진의 선구적 작가”라고 알려져 있다. 이번 <육명심>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한국현대미술작가시리즈”의 사진 부문 첫 전시다. 지난 12월 11일부터 시작된 전시는 오는 6월 6일까지 무료로 계속된다. 평소 사진전엔 그리 큰 흥미가 없던 터라 이번 취재는 단지 리뷰를 위한 목적뿐이었다. 그렇게 전시장...

[212호 특강취재: 다중지성의 정원 <현대를 진단하는 사회인문학 - 아프니까 공부한다>] 구분을 넘어서

다중지성의 정원은 1월 15일부터 3월 4일까지 매주 금요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현대를 진단하는 사회인문학 – 아프니까 공부한다>를 진행한다. 총 여덟 차례에 걸쳐 진행되는 본 강좌는 ‘아픔’이 우리 모두의 공통 주제라는 점을 바탕으로, 수강자들에게 다양한 책을 통해 혼자만의 고통에서 벗어나 삶을 헤쳐 나가는 용기와 세상에 대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인(작가) 강연자는 지난 2월 5일에 열린 네 번째 강연에서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의 책,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로 ‘여성혐오’ 안에 숨어 있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 그리고 여성혐오의 근거들을 상세하게 파헤치며 문제의식을 전환했다. ‘혐오’라는 단어는‘싫어하고 미워하다’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혐오’라는 단어를 듣는다면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이 아닌 어쩌면 ‘증오’에 가까운 의미로 해석할지도 모르겠다. ‘혐오’라는 단어는 누군가를 천 배쯤 ‘미워하고싫어하’는...

[212호 책지성: 에밀 뒤르켐, 『자살론』] 무엇이 그들을 죽음으로 이끄는가

   ▲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 1858~1917)  ⓒ blog.naver.com/alliswellbop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삶의 무게가 무거워 ‘죽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죽음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평소에 우리는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아”, “배고파서 죽을 것 같아”, “행복해서 죽을 것 같아” 등 기분이 좋거나 슬플 때도 ‘죽고 싶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생각해보면 죽음이란 단어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일상생활에서 많이 사용하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용어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실 이 말은 가볍게 생각해서도, 쉽게 선택하여 사용해서도 안 된다. 죽음이란 단어 속에는 많은 의미들이 내포되어 있으며 누군가가 던지는 ‘죽고 싶다’라는 말, 그 한마디는 그 사람이 우리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자살에 대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대두되고, 이에 대한 연구도...

[212호 테마서평: 빅토르 위고] 빅토르 위고와 그로테스크

『파리의 노트르담』(빅토르 위고 저. 정기수역, 민음사, 2005) 『레 미제라블』(빅토르 위고 저. 정기수 역, 민음사, 2012) 『웃는 남자』(빅토르 위고 저, 이형식 역, 열린 책들, 2009) 빅토르 위고는 프랑스 문학 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사망했을 때 팡테옹에서 국장을 치를 만큼 국민들로부터 존경 받는 작가이다. 우리도 한번쯤은 그 이름을 들어보아 모두가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그에 대한 이해는 유감스럽게도 대단히 부족한 편이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들 중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많지 않아 우리가 쉽게 구해 읽을 수 있는 것은 『레 미제라블』이나 『파리의 노트르담』, 『웃는 남자』 정도이기 때문이다. 위고가 위대한 작가로 평가받고 국민들에게서 존경받는 것은 그가 낭만주의 이론의 완성자인 동시에 자신의 이론을 작품에서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삶에서도 실천한, 인류의 발전을 믿는...

[211호 문화비평: 대학가 선거 파행] 대학가 선거 파행과 민주주의의 미래

올해도 어김없이 대학가의 선거 파행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성균관대는 후보로 나섰던 두 선거운동본부(이하 선본) 모두 선거운동 기간에 경고가 3회 누적돼 자격을 박탈당했고, 중앙대도 두 후보 중 한 선본이 경고 누적으로 선거 하루 전날 자격을 박탈당했다. 부산의 한 대학에서는 특정인의 후보 등록을 막기 위해 무리하게 선거시행 규칙을 바꾸었다는 의혹이 일었고, 결국 피해학생들이 개정 세칙에 관한 효력정지가처분 신청을 해 법원이 이를 받아들였다. 동덕여대에서는 한 학생이 학교 측으로부터 총학생회장 후보 입후보를 제의받았다는 ‘양심선언’이 터져 나왔고, 결국 선거가 무산되었다. 그나마 긍정적인 소식이 들려온 곳은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한 후보자가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된 서울대 정도였다. 매년 11월이면 대학가는 총학생회 선거와 관련된 잡음으로 한차례 진통을 겪는다. 선본들 간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와의 갈등과 마찰, 학교 측의 선거 개입, 투표율...

[211호 영화비평: <검은 사제들>(2015)] 다시 돌아온 그는 소녀를 구할 수 있을까

장재현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인 <검은 사제들>(2015)이 4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베테랑>(류승완, 2015)이후 최고의 흥행작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측과 함께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장르적 특성이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관심의 화살표는 두 방향으로 갈라지는데, 한쪽 길은 오컬트 무비의 계보와 특징 확인하기라는 이정표를 가지고 있다. 그 길을 따라가 보면 <악마의 씨>(로만 폴란스키, 1968)와 <엑소시스트>(윌리엄 프리드킨, 1973)를 호출한 다음, <검은 사제들>과 비교하는 이들을 만날 수 있다. 이들은 개별 영화에 대한 깊은 이야기보다 영화들을 가로지르는 공통적인 특징들에만 관심을 보인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다른 화살표는‘한국형 오컬트 무비 찾기’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화살표는 <너 또한 별이 되어>(이장호, 1975)를 시원으로 삼은 다음, <퇴마록>(박광춘, 1998)을 거쳐 <퇴마 : 무녀굴>(김휘, 2015)에 도착하는 여정을 가지고 있다. 요컨대...

[211호 특강취재 : 푸른역사아카데미 기획 강좌 <한국 미술사>] 화려미의 시대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 위치한 푸른역사아카데미는 지난 11월 6일부터 오는 12월 18일까지 매주 금요일, <한국 미술사> 기획 강좌를 진행한다 총 6주에 걸쳐 진행되는 본 강좌는 고려시대부터 19세기까지 한국 미술의 전개를 통시적으로 살펴볼 뿐만 아니라 공시적 상호관계 등과 같이 국가를 넘나드는 교류와 영향을 다루고 있어, 복합적인 미술사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도록 기획됐다. 류승민(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강연자는 지난 11월 6일과 20일에 열린 첫 번째와 두 번째 강의에서 ‘보편문명 속 특수미의 발현’이라는 주제로 고려미술을 개괄하였다. 미술의 중심은 서화이다. 그러나 고려시대는 회화작품이 거의 남아있지 않고, 조각이나 불화와 같은 공예의 일부를 가지고 살펴봐야 하기 때문에 고려의 미술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화려한 승탑과 탑비 승탑은 부도탑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고승이 열반에 들고, 다비를 한 후에 수습한 사리를 모아서...

[211호 테마서평: 일본 문학 속 섹슈얼리티, 『노부코』, 『一本の花(한 송이 꽃)』, 『乳房(유방)』] 미야모토 유리코의 몸, 그리고 언어- 경계를 그리는 섹슈얼리티

『노부코』(미야모토 유리코 저. 한일여성문학회 역, 어문학사, 2008) 『一本の花(한 송이 꽃)』(미야모토 유리코, 靑空文庫, 1927) 『乳房(유방)』(미야모토 유리코, 靑空文庫, 1935) 이성애주의에 입각한 로맨틱 러브의 체현자로서, 동성과의 우애적 사랑의 실천자로서, 그리고 만년은 프롤레타리아 여성의 대변자로서, 문자 그대로 불꽃같은 삶은 살다간 신여성 문학자 미야모토 유리코. 그녀가, 1916년 단편『가난한 사람들의 무리』를 발표한 지 1세기가 지나, ‘섹슈얼리티’라는 주제로 지금, 여기에 소환되었다. 근대 로맨틱 러브에 의한 결혼, 6년간의 결혼 생활을 경험한 후에 감행한 이혼, 여자로서 겪은 삶의 편린들을 글로 엮은 장편소설『노부코』, 이혼 후 동성 유아사와의 아름다운 날들을 형상화한『한 송이 꽃』, 그 후 양성애주의를 표방하며 선택한 결혼, 그러나 사상범으로 억류되어 부부로서의 생활이 불가능해 낳는 성을 억압당한 시간들. 프롤레타리아 작가로서 여성 노동자들의 비애를 그린『유방』등은, ‘섹슈얼리티’라는 주제를 이야기하기에 적절한 텍스트이다....

[211호 리뷰: 박노해 인디아 사진전시회 <디레 디레>] 천천히, 여유롭게

세상은 바야흐로 급변하고 있다. 도시에는 눈 깜짝할 새 수십 층의 마천루가 들어서며, 출근길 사람들의 발걸음은 바쁘기만 하다. 들녘을 가득 채우던 농민들의 흥겨운 노랫소리와 골목을 뛰놀던 어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점차 사라진다. 옛 모습을 간직하지 못하고 점차 삭막하게 변해 가는 현대인들에게 선인들이 물려주는 삶의 지혜를 보존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인도는 어떨까? 인도는 세계 GDP 순위 3위를 기록하며 급격한 성장을 보이는 국가이다. 인도 서부의 대도시 뭄바이에는 고층빌딩이 하늘을 찌르고, 첨단 IT산업이 도심에 가득 들어서 있다. 그러나 동시에, 길거리에는 암소가 느릿느릿 걸어가며, 인도 인구의 75%는 여전히 농민으로 구성돼 있다. 민중들은 대지의 노동과 소박한 살림을 그대로 잘 보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한 라 카페 갤러리에서 지난 7월 17일부터 열린 박노해의 인디아...

[211호 책지성:제레미 리프킨 『엔트로피』] 세상에 공짜는 없다!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 1945~) 오늘날 현대 인류는 물질적 풍요를 향유하며 살아간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인류는 ‘생존’을 넘어 ‘생활’이 가능해졌으며, 사람들은 이러한 혜택을 스스로 일구어 낸 자랑스러운 문명의 산물로 여긴다. 하지만 이러한 ‘생활’을 위해 우리는 혹독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많은 관심을 두지만, 이면에 감춰진 혹독한 대가의 실체는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다. 대체 인류는 물질적 풍요와 무엇을 맞바꾼 것일까?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 1945~)은 다양한 저서를 통해 과학기술의 발전이 경제, 노동시장, 사회,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주로 다루어 왔다. 『육식의 종말 (Beyond Beef)』, 『소유의 종말(The Age of Access)』, 『수소혁명(The Hydrogen Economy)』등의 저작을 통해 다양한 과학기술의 출현과 세계 경제 및 환경 변화를 엮었다. 그중『엔트로피(Entropy)』는 열역학 제2법칙의 개념을 이용해 전...

[210호 리뷰: 서울역사박물관 광복 70주년 특별 기획전 <남산의 힘> 展] 남산의 기억

“옛날에 케이블카도 있고 어린이회관도 있고, 우리 때는 유일하게 어린이가 입장권 내고 들어가면 오므라이스가 90원이었고, 맨 위층에 전망 층이 회전을 했었어요.” -1970년 남산의 어린이회관 개관하다(1970년), 김희웅(메모리인 서울 프로젝트)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남산은, N서울타워로 바뀐 지 10년이 다 되었지만 여전히 내 마음속에는 남산타워인, 앞산일 뿐이다. 물론 친구들과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팔각정에서 김밥을 먹은 곳이며,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계단 뽀 뽀 장면을 따라하겠다고 남자친구와 함께 갔던 곳이기도 하고, 유명한 돈가스를 먹어봐야겠다고 꾸역꾸역 올라가기도 한 곳이다. 어쩌면 남산은 서울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비슷한 기억을 선사해 준, 참으로 가까운 곳이 아닐까 싶다. 그런 남산이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다들 놀라지 않을까. 남산은 행정구역상 서울특별시 중구와 용산구의 경계에 걸쳐 있다. 2009년...

[210호 특강취재: 2015학년도 학술단체협의회 하반기 학술특강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현상’으로부터 현상학을 바라보다

▲이은정 강연자가 현상학의 특징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경희대학교 일반대학원 학술단체협의회는 10월 2일부터 11월 13일까지 매주 금요일, 서울교정 본관 401호에서 2015학년도 하반기 학술특강을 개최한다. 철학을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정신 현상학’이라는 말쯤은 들어봤을 법도 하지만‘물질 현상학’은 다소 생소하다. 물질과 현상학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현상학은 과연 무엇이고 현상학이 탐구 과제로 삼는‘물질’이란 어떤 것일지. 본 강의는 <현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총 여섯 차례에 걸쳐 진행된다. 이번 특강은‘고전적’현상학에서 미셸 앙리의 현상학이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하는 데 그 목표를 두고 기획됐다. 지난 10월 2일 열린 첫 번째 강의에서 이은정(동국대학교 다르마칼리지) 강연자는‘후설 현상학의 성립과정’을 주제로 강의했다. 후설 현상학의 성립 미셸 앙리(Michel Henry, 1922~2002)는 현상학에 있어‘최후의 대가’라고 잘 알려져있다. 독일의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에서 시작되고 하이데거 등을 통해 활력을 얻은‘현상학...

[210호 책지성:볼테르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최선의 세상’만을 외칠 것인가

  ▲저서『철학사전』 1843년판에 새겨진 70세의 볼테르(Francois Marie Arouet)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루소, 디드로, 몽테스키외와 더불어 18세기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시인, 극작가, 비평가, 역사가이다. 그는 1718년 비극『오이디푸스』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지만 기성의 제도와 권력으로부터 늘 자유로웠던 그의 글과 말에 대한 논란과 처벌은 끊이질 않았다. 이후 귀족과의 다툼으로 인해 바스티유 감옥에 갇힌 그는 영국으로 추방됐다. 사건은 장차 그의 삶과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영국에서 그는 로크로 대표되는 경험 철학, 뉴턴의 자연 철학, 그리고 입헌주의와 정치적 자유를 접하면서 정치와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어서『철학 서간』을 발표한다. 이후 그의 철학적 작업들은 인간의 오류를 고발하는 데에 집중된다. 오늘날 그는 그가 이름 붙인‘철학적 콩트’라는 소설 장르의 작가로 주로 기억된다. 철학적 콩트는 우화적 소설로서 볼테르 자신의 철학적...

[210호 문화비평: TV 속 군대 문화 다시보기] <진짜 사나이>의 위험한 흥행

MBC의 리얼 예능 프로그램 <진짜 사나이>가 처음 방영될 때만 해도 의구심이 앞섰었다. 웃음기와는 거리가 먼 군대가 예능프로그램의 소재가 되나 하는 의아함과 더불어 군대 생활이 과연‘리얼하게’재현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었다. 그러나 <진짜 사나이>는 MBC의 일요일 간판예능프로그램으로 부상했고, 숱한 화제를 낳으며 몇몇 연예인을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특히 여자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여군 특집’은 기존의 주 관람층이던 여성들에 더해 남성들마저 포섭하면서 <진짜 사나이>의 흥행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남성의 입장에서 여성들이 군대 생활에 적응하며 좌충우돌하는 모습은 꽤나 재미있는 볼거리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거기엔 가학적이고 관음증적인 시각적 쾌감에 더해 여성이나 미필자들에게 군생활의 경험을 으스대며 ‘가르칠’때의 만족감마저 더해진다. 한편 전통적으로 일반인들에게 군대의 실상을 알리는 데 부정적이었던 군대가 내무반을 비롯해 군 시설, 무기, 훈련 모습...

[210호 영화비평: <마션(The Martian)>(2015)] 미래를 현실로 만드는 영화적 전략

리들리 스코트가 만든 영화 <마션(The Martian)>(2015)은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가 화성에서 홀로 남아 고군분투하는 영화다. 나사(NASA)의 화상탐사계획의 일환으로 화성에서 탐사 중인 아레스 3(Ares III) 대원들은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 모래 폭풍을 만나게 된다. 이 와중에 마크가 모래 폭풍에 휩쓸려 실종되자 그가 죽었다고 판단한 다른 동료들은 화성을 서둘러 탈출하게 된다. 그러나 마크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통신시설이 마비된 탓에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남은 식량을 아낀다 해도 한 달 정도 밖에 버티지 못할 것 같다. 남은 방법은 구조대를 기다리는 것뿐. 하지만 지구에서 화성까지는 무려 4년이라는 시간적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다. 마크는 여기서 죽을 수 없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남은 장비들을 살펴보기 시작한다. 어떤 이들은 우주에 홀로 남은 주인공을 다룬다는 이유로 이 영화를...

[210호 테마서평: 쿳시의 소설 세계, 『야만인을 기다리며』, 『마이클 K』, 『철의 시대』] 쿳시와 타자의 문제- 타자의 인질이 되다

『야만인을 기다리며』(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들녘, 2003) 『마이클 K』(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들녘, 2004) 『철의 시대』(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들녘, 2004) 작가는 진공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 속으로 태어나 그것을 자양분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작가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태어나 살았느냐 하는 것이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2003년도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J.M. 쿳시도 예외일 수 없다. 그는 1940년, 남아프리카 남단에 위치한 케이프타운에서 태어났다. 인종적으로는 아프리카너(Afrikaner), 즉 네덜란드계 백인이었고 언어적으로는 아프리칸스(Afrikaans, 네덜란드어에 뿌리를 둔 아프리카너의 언어)를 구사했다. 달리 말해, 그는 흑인들과는 다른 언어를 쓰는 네덜란드계 백인식민주의자들 속으로 태어났다. 이것은 그가 어떤 피부를 가졌느냐에 따라 사회적인 위계가 자동적으로 결정되는 인종차별적인 공간에서 태어났다는 말이다. 그래서 쿳시는...

[209호 문화비평: 신조어에 비친 우리 사회] 헬조선에서 죽창을 들라?

‘헬조선’, ‘금수저’, ‘죽창’.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십대들이 한국사회를 묘사하며 즐겨 쓰는 어휘들이라고 한다. 헬조선과 금수저는 신문지상에도 종종 등장하는 표현이지만, 죽창은 웬만해선 그 코드를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마침 <신동아> 8월호에 실린“이 지옥 같은 나라 내게 죽창을 달라!”(유설희 기고)는 기사가 이 새로운 세태의 맥락을 잘 정리하고 있으니 따라가 보도록 하자. 헬조선은 말 그대로 지옥 같은 한국사회를 비유한 말이다. 유사한 용어로‘불지옥반도’도 있는데, <디아블로>라는 온라인 게임에 등장하는 최고난이도의 ‘불지옥’단계와 ‘한반도’를 합성한 말이다. 당대의 이십대에게 한국사회란 온갖 악마와 몬스터가 우글대는 지하 감옥(dungeon)과도 같은 셈이다. 헬조선을 특징짓는 것은 철저한 계급사회라는 점인데, 이는‘금수저’와‘똥수저’의 대비를 통해 표현된다. “유치원 시절 금수저는 영어유치원을 다니지만, 똥수저는 어린이집에서 교사에게 폭행당한다. 초·중·고교 시절 금수저는 어학연수를 떠나지만, 똥수저는 PC방에서 게임을 한다. 대학 시절...

[209호 영화비평: <베테랑>(2015)] 장르의 불완전 연소가 가져온 무기력증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통쾌함으로 수렴된다. 그것은 아마도 비판의 대상을 정확히 보여주고 징벌하기 위해 노력하는 주인공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베테랑>은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안하무인 성격의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를 베테랑 형사 서도철(황정민)이 법의 이름으로 처단하려 노력할 때 발생하는 희열을 무기로 삼고 있다. 여기에 감독 특유의 액션 연출과 웃음을 유발하는 대사 등이 관객의 감정이입을 입체적으로 도와준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미 많은 이들이 “집단 욕망을 대리충족해 주는 스크린”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즉,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법한 재벌 단죄를 영화가 대신해서 충족시켜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답은 <베테랑>의 자리에 다른 장르 영화가 들어서도 완성된다는 허점을 가지고 있다. 사실 <베테랑>은 통쾌함보다 현실에 대한 회피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 영화이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우선 <베테랑>이 가지고...

[209호 리뷰: 광복 70주년 기념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 展] 역사를 기억하다, 그리고 느끼다

역사의 한 줄에는 엄청나게 많은 삶들이 있다. 우리는 광복 이후 우리의 근현대사를 크게 한국전쟁,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 등의 키워드로 묶어 설명하고 기억하곤 했다. 키워드가 되는 단어 안에 그 시대를 이루는 사람들, 사건들 그리고 그 것들이 만들어내는 시대감성이 압축되어 담기는 것이다. 그로써 우리는 그 엄청난 삶들을 편리하게 이야기하고 쉽게 기억할 수 있었다. 이 전시는 그 단어들로 묶여있던 시대의 삶들을 풀어헤쳐 놓은 듯하다. 또한 한국전쟁,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 등을 다루지만, 그 단어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과거를 불러온다. 전시장 안에 헤쳐진 다양한 삶들은 우리의 근현대를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전시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1부는 전쟁으로 인해 분단된 조국, 떠나온 고향과 헤어진 가족을 그리워하는 전후의 삶을 다룬다. 2부는 1960~80년대, 단기간에 이루어진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부정된 근대성을 극복하려는 민주화를 주제로 한다. 마지막으로...

[209호 책지성: 루소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실속 없는 시대, 순수함을 찾아서

▲르모니에, <조프랭 부인 살롱에서 볼테르의『중국의 고아』낭독회>, 1812. 18세기 프랑스 제1급 지식인과 교양인의 구심점이었던 조프랭 부인의 살롱. 조각상의 왼쪽으로 다섯 번째가 루소다.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는 말한다. “학문과 예술이 발전을 거듭함에 따라 우리의 영혼은 타락했다.” 인간의 이성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던 계몽주의 시대에 자신 또한 학자였던 루소의 이러한 주장은 아이러니해 보인다. 루소는「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이런 생각을 세상에 펼쳐냈다. 1749년 ‘학문과 예술의 부흥은 풍속을 순화하는 데 기여했는가?’라는 주제의 프랑스 디종 아카데미 논문공모에 응모하여 대상을 받은「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는 발표 당시 지식인들의 큰 반박을 불러일으켰던 논문이었다. 당돌한 이 논문은 루소에게 유명세를 안겨주었다. 루소가 비난하는 것은 절대로 학문이 아니다. 오히려 “학문은 재능과 이성의 걸작”이라며 학문을 칭송한다. 그는 자신이 미덕을 옹호할 뿐이라고 밝힌다. 즉, 미덕 없는 학문을 비난하는 것이다....

[209호 사진으로 말하기] 제주, 상실(喪失)과 망각(忘却)

18,000여 신들이 인간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제주를 처음으로 방문했던 날을 기억한다. 눈길 가는 모든 곳에, 어쩌면, 신이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태양이 없이도 눈부신 하늘과 우유거품 같은 구름 속에 존재하는 신들이 천혜의 제주를 지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평생 이곳에서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친구의 어머니 댁인 서촌에서 며칠을 묵었다. 친구의 동생이 말했다. “제주 사람들은 4·3 때문에 육지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4·3이라니. 서울에서 찾아온 여행객은 4·3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잊어버렸다. 인터뷰 준비로 임흥순 작가의 <비념>을 봐야 했다. 제주 4·3에 관한 이야기였다. 영화는 4·3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육지 사람들에 의해 제주의 여러 곳에서 많은 민간인이 학살되었고 경험자들은 아직도 그 당시를 회상하기 힘든 사건”이라고. 지난 2007년 5월 18일, 제주도 강정마을 주민은 미군해군기지 반대 투쟁을 시작했다. 그동안 673명이...

[209호 특강취재: 2015학년도 학술단체협의회 여름 기획특강 <슈퍼히어로 영화, 다르게 보기!>] 영웅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영화적 ‘눈’쓰기

▲김수 강연자가 슈퍼히어로 영화의 사회·문화적 의미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경희대학교 일반대학원 학술단체협의회(이하 학단협)는 지난 8월 6일부터 21일까지 매주 목, 금(오후 3시~6시), 서울교정 오비스홀 251호에서 여름 기획특강을 개최했다. 대중영화의 영역에서 어느덧 슈퍼히어로 프랜차이즈를 빼놓고서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논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대중들에게, 그리고 일부 식자층들에게 슈퍼히어로 프랜차이즈는 그저 화려한 스펙터클로 무장된 단순한 블록버스터로만 여겨지는 듯하다. 본 강연을 맡은 김수 영화평론가(씨네 21)는 이러한 일반 대중과 엘리트적 시선의 한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미국의 결핍된 신화로서, 변화된 영웅상을 반영하는 거울로서 슈퍼히어로 프랜차이즈를 바라볼 수는 없는가. <슈퍼히어로 영화, 다르게 보기>라는 주제로 구성된 본 특강은 세부적으로 1강 ‘슈퍼히어로의 역사와 사전지식’, 2강 ‘현대 신화로서의 슈퍼히어로 – <슈퍼맨>’외, 3강 ‘미국신화적 영웅의 붕괴 –...

[209호 테마서평: 고미숙의 근대성 3부작, 『계몽의 시대』, 『연애의 시대』, 『위생의 시대』] 근대를 바라보는 세 개의 시선

『계몽의 시대 : 근대적 시공간과 민족의 탄생』(고미숙, 북드라망, 2014) 『연애의 시대 : 근대적 여성성과 사랑의 탄생』(고미숙, 북드라망, 2014) 『위생의 시대 : 병리학과 근대적 신체의 탄생』(고미숙, 북드라망, 2014) 메르스 코로나바이러스. 올 상반기 우리 사회를 가장 뜨겁게 달궜던 말이다. 메르스 발발과 함께 질병관리 주체인 국가권력은 메르스 환자들의 인격과 개성을 숫자 아래로 밀어내고 사망률 낮추기에 열을 올렸다. 권력이 죽음이 아닌 사망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임상의학에 의해 죽음을 전체적·일반적·통계적 수준에서 장악하면서부터이다. 푸코가 근대 국가와 규율 사회의 등장을 감옥, 임상병원, 정신병동과 같은 폐쇄공간의 공포관리로 설명한 바 있듯 메르스사태는 우리가 근대에 기획된 공간 안에서 안주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계몽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근대는 서구에서 유입된 ‘modern’의 번역어로, 서구에서는 대략 16세기 말에서 19세기 중엽까지를 가리킨다....

[208호 Review: 아르코미술관 남화연 개인전 <시간의 기술(Time Mechanics)>] 시간을 기술하는 시간여행자

스쳐 지나가는 시간은 도통 막을 길이 없다. 시간을 거스르는 것? 그 역시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의 일상은 너무 바쁘다. 아니, 바쁘다기보다는 살면서 자신 앞에 닥친 여러 가지 것들을 정신없이 좇다보면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지나버렸나 하는 깨달음이 뒤늦게 찾아온다. 진짜 그렇다. 이 와중에도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고 있으니까. 지난 4월 10일부터 열린 남화연의 개인전 <시간의 기술>은 그러한 시간의 속성에 관해 다루고 있다. 다소 어두운 전시실을 들어서면 희미하게 괴이한 소리가 들려온다. 이것은 사람이 흉내 내는 새소리, <필드 레코딩(2015)>이다. 영상 속 퍼포머는 작가가 선별한 다양한 새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흉내 낸다. 관람자는 그 과정을 지켜본다. 더 깊숙이 안으로 들어간다. 커다란 세 개의 스크린이 죽 늘어져 있고 세 편의 비디오가 상영 중이다. 그 중 <코레앙...

[208호 특강취재: 2015학년도 학술단체협의회 봄 기획특강 <관계로 읽는 '현대미술'> 작품의 ‘겉’에 숨은 ‘안’의 의미

  일반대학원 학술단체협의회(이하 학단협)는 5월 4일(월)부터 11일(월)까지 오후 7시에 서울교정 본관 401호와 오비스홀 256호에서 봄 기획특강을 개최했다. <관계로 읽는 ‘현대미술’>은 비전통적인 요소와 1970년대 이후 창작된 작품 및 거대 경매회사(소더비, 크리스피)에서 현대미술로 분류되는 ‘동시대 미술’의 미학적 특징과 대표 작가를 살펴봄으로써 현대미술의 의미와 가치를 되짚어보는 취지에서 기획됐다. 현대미술은 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작품을 총칭하는‘전후 미술’로 알려져 있지만, ‘현시대’의 예술로서 현대미술(modern art)은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을 의미한다. 본 특강은 세부적으로 1~2강 ‘현대미술, 환대와 미적경험의 공간으로’, 3강 ‘현대미술의 안과 겉’, 4강 ‘동시대 미술의 안과 겉’, 5강 ‘관계로 읽는 현대미술’로 구성됐다. 이로써 현대미술의 난해함에 대한 심층적 이해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간다. 지난 5월 8일에 열린 네 번째 강의를 담당한 정형탁(독립 큐레이터) 강연자는‘동시대 미술의 안과 겉’을 주제로...

[208호 문화비평: 신자유주의와 노동] 〈무한도전〉과 신자유주의적 노동의 풍경

ⓒ www.imbc.com 지난 5월 30일 방영된 MBC의 간판 예능프로그램〈무한도전〉에서는 ‘해외 극한 알바’를 주제로 멤버들이 해외 각국으로 흩어져 ‘극한’알바를 체험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무한도전〉10주년 기념 포상휴가라며 태국 방콕으로 향했지만 알고 보니 해외 극한 알바 미션을 먼저 수행해야만 했고, 멤버들은 또 다시 제작진의 농간에 놀아났다며 허탈함과 분노를 표시했다. 그러나 멤버들은 예의 그렇듯이 이내 운명(?)에 순응하고 둘씩 짝을 지어 중국, 인도, 케냐로 또 다시 멀고 먼 비행길에 올랐다. 하하와 정형돈은 중국 왕우산으로 잔도공 알바를, 유재석과 광희는 인도 뭄바이로 전통 손빨래를, 박명수와 정준하는 케냐의 나이로비로 코끼리 사육을 하러 떠났다. 멤버들의 무모한 도전과 제작진과의 두뇌싸움은〈무한도전〉의 고유한 코드였으나 이번엔 그 스케일이 한층 커졌고, 몰래카메라에 익숙해진 멤버들을 새삼 당황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방송분은 이후 극심한...

[208호 영화비평: <클래스(The Class)>(2005)] 관계 속에 숨어 있는 잠재태

교사와 학생을 전면에 내세운 점을 비롯해 핸드헬드 기법의 지배적인 사용, 그리고 인공조명을 줄이고 자연광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방식으로 인해 영화 <클래스(The Class, Entre Les Murs)>(2008, 로랑 캉테)는 종종 학교의 실상 혹은 교사와 학생들 사이의 갈등을 담아낸 다큐멘터리적인 텍스트로 독해되곤 한다. 이러한 해석이 등장한 이유는 <클래스>에서 가장 쉽게 파악할 수 있는 형식인 핸드헬드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즉‘대상을 쫓아가며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상황을 순수하게 포착’한다는 핸드헬드의 일반적인 의미의 자장 안에서 영화가 다루는 교사와 갈등을 바라보면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은 <클래스>의 의미를 단일한 것으로 고정한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클래스>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내용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영화의 카메라는 교실 안 인물과 인물이 처한 상황을 따라가면서 포착하는 게 아니라 엄격한...

[208호 테마서평: 카프카 3부작, 『 소송』, 『 성』, 「 단식예술가」] 카프카와 웃음 -독서 체험의 무게 다시 재어보기

『소송』(프란츠 카프카 저, 이주동 역, 솔) 『성』(프란츠 카프카 저, 권혁준 역, 창비) 「단식예술가」(*『 변신』(카프카전집1)에「어느단식광대」란제목으로수록, 프란츠카프카저, 이주동역, 솔)   프란츠 카프카(1883~1924)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였던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유대계 작가인 그는 독일계 김나지움(인문계 고등학교)을 졸업하고,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노동자산재보험공사에 근무하며 집필활동을 하였다. 카프카의 작품에서 사람들은 대개 고독과 절망, 인간 존재의 부조리함, 출구 부재, 미로, 악몽 같은 세계를 떠올린다. 그의 이름에서 유래하여 일상어가 된 ‘카프카에스크’는 미로 같고 불명확한 세계,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위협, 미지의 힘에 맞닥뜨린 주인공의 두려움, 섬뜩함 등을 의미한다. 하지만 카프카의 오랜 친구인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의 본질적인 모습과 다르다며 ‘카프카에스크’라는 용어의 사용을 거부하였다. 카프카 전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한다. “카프카가 직접 읽을 때 이러한 유머가 유독 분명해졌다. 예를...

[208호 책지성: 오에 겐자부로, 『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누가 감히 아름다운 애너벨 리를 죽였는가

  ▲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 (大江健三郞, 1935~ ) ⓒimage.aladin.co.kr/community   어린아이들에겐 그해 여름이 생애의 모든 것일 수 있다. 지금 느끼는 떨림과 아픔이 인생의모든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너무도 태연히 오늘과 같은 감정들이 그들 남은 인생에도 영원히 이어지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아무리 성공적인 피터팬 콤플렉스를 지녔다 할지라도, 감정은 아주 조금씩 정확히 마모되어 간다. 품었던 열정과 동경,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건넨 떨림은 어느 순간 사라져버리고, 대신 그 자리엔 냉정하고 합리적이며 몸을 사리는 낯선 어른이 앉아 있게 된다. 소년은 그렇게 어른이, 그리고 노년이 되어 간다. 어떤 사건에도 상처입지 않을 수 있는 무심함과 둔감함은 그들 세계를 보호하는 투명한 보호막이 된다. 그 보호막 속에서 걷고 있는 두 부자가 있다. 여전히 혼자서는 제대로...

[207호 영화비평: <용서받지 못한 자>(2005)] 공모와 이탈의 사이에서

  군대 내 자살이라는 특별한 사건을 제외한다면, <용서받지 못한 자>(2005)는 군대의 일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특별한 것이 없는 그 일상이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속에 조용히 움직이고 있는 폭력의 전이과정 때문이다. 영화는 군대에 적응하기 위해 폭력을 대물림해야만 했던 인물을 통해 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을 보여준다. 영화는 바로 그 순간을 펼쳐 놓으면서 그것이 단지 군대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과 더 나아가 구조적 폭력과 모순에 취할 자세에 대한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고 있다.   잊고 있었던 기억의 재림 지하철에서 졸고 있던 태정(하정우)은 휴가 나온 군대 후임인 승영(서장원)에게 전화를 받는다. 승영은 할 말이 있다며 그를 꼭 만나자고 하지만 태정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그와의 만남을 피한다. 여기서 카메라는...

[207호 책지성: 곽희 『임천고치(林泉高致)』] 임천(林泉)을 ‘그리다’

▲곽희, <조춘도(早春圖)>, 비단에 수묵담채, 108.1 x 158.3cm, 국립고궁박물원   ⓒwikipedia.org 바야흐로 봄이다. 꽃이 피고 진 자리에 푸른 잎사귀가 돋아나 온 세상이 파릇하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의 풍광이 새롭다. 생동하는 봄의 기운이 반갑다. 예부터 동양에서는 산수(山水), 즉 자연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높은 산과 깊은 숲, 아득한 강과 드넓은 바다, 깎아지르는 절벽과 괴기한 암석 등이 그려진 그림을 심신 정화의 수단으로, 때로는 감정이입의 대상으로 삼아 노래하기도 했다. 산수화(山水畵)는 왜, 어떻게 그려졌으며,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오늘날 중국 산수화론의 가장 종합적인 고전으로 평가받는 곽희의 『임천고치(林泉高致)』를 통해 잠시나마 ‘아름다운 산수[林泉]의 높은 운치[高致]’를 와유(臥遊)해 보자. 곽희의 『임천고치』 『임천고치』는 북송(겗宋)시대 산수화의 대가 곽희(郭熙, 11C 초~11C 말)와 그의 아들 곽사(郭思, 11C 중~12C 초)가 저술한 회화 이론서다. 청(淸)의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여섯 편으로 나뉘어 실려 있는데,...

[207호 특강취재 : 2015학년도 학술단체협의회 상반기 학술특강 <동양철학, '현대성'에 도전하다!>] 사회적 스트레스의 치유책, 『장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다

경희대학교 일반대학원 학술단체협의회(이하 학단협)는 4월 26일부터 5월 4일까지 6일간 본관 404호에서 <동양철학, ‘현대성’에 도전하다!>라는 제목으로 2015학년도 상반기 학술특강을 개최한다. 이번 특강은 동양철학이 삶의 현실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을 제공할수 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기획됐다. 지난 4월 28일에 열린 두 번째 강의에서 김시천(인천대 윤리교육과 강사) 강연자는 ‘『장자』와  유(游),  스트레스 받지 않을 자유’라는 주제로 강의했다. ▲김시천 강연자가 장자철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노장사상에 대해 사람들은 신선, 무위자연(無爲自然), 귀거래 등을 연상하며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자연에서 사는 것을 떠올린다. 그러나 강연자는 “사람은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채 자연에서 사는 것이 힘들다”며 “몸이 편하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말했다.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나 중국 명대의 <귀거래도> 모두 세상과의 완전한 단절을 표현한 것은 아니었다. <계상정거도>의 나룻배와 <귀거래도>의 다리는 자연과...

[207호 Review: 쁘띠첼 씨어터 – 뮤지컬 <마마, 돈 크라이(Mama, don't cry)>] 욕망 속에서 피어나는 꽃, 뱀파이어의 유혹을 만나다

많은 사람들이 ‘뱀파이어’에 대한 판타지를 갖고 있다. 아름답지만 잔인한 존재로, 두렵지만 결코 시선을 뗄 수 없는 존재로. 유한함이 존재의 본질인 인간은 그들이 절대로 향유할 수 없는 것들을 갈망한다. 영원히 늙지 않고 영원히 아름다운 존재, 뱀파이어에 대한 판타지는 그래서 인간의 욕망을 함축한다. 뮤지컬 <마마, 돈 크라이>는 2010년 1인극으로 초연을 펼친 뒤 2인극으로 재구성 돼 올 해 새로운 연출과 새로운 음악으로 다시 관객을 찾았다. 뱀파이어라는 흥미로운 소재와 중독성 강하고 완성도 높은 음악, 화려한 조명, 그리고 미로형의 독특한 무대 장치 등 <마마, 돈 크라이>는 자칫 지루해지고 평면적이 될 수 있는 2인극의 한계를 깨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관객의 몰입도를 높인다. 특히 이번 공연은 두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중심을 두었다. 프로페서V는 촉망 받는 천재 물리학자지만,...

[207호 테마서평: 문학과 사랑] 조르주 바타유, 마르그리트 뒤라스, 파스칼 키냐르에 빠지는 일이 고통스러운 이유

  『불가능(L’Impossible)』, 조르주 바타유 저, 성귀수 역, 워크룸프레스 『모데라토 칸타빌레(moderato cantabile)』, 마르그리트 뒤라스 저, 정희경 역, 문학과지성사 『섹스와 공포(Le sexe et l’effroi)』, 파스칼 키냐르 저, 송의경 역, 문학과지성사 실상을 보아버린 데서 오는 급격한 무기력. 언어화 하지 않고 두개골 속에 떠오르는 것, 즉 이미지가 곧 언어라 믿고 그 믿음을 공유하는 자와만 소통되는 급격한 폐쇄감. 새로운 교단. 외현(外現)주의가 통상 교역 언어라면 이 유통 교역 수단을 쓰지 않는 바타유, 키냐르, 뒤라스 식의 유통체계를 굳이 유통시키고 싶지 않다는 알 수 없는 신경질, 화. 장사할 마음 없음. 문학적 언어는 화폐처럼 쉽게 통용되기를 거부한다. 어린 개체가 앓는 실어증과 자폐증에는 늘 떠벌이는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심각함과 숭고함이 있다. 하여 특히, 결코 언어화해서는 안 되는...

[206호 Review: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 케테 콜비츠 展] 케테 콜비츠, 시대와 삶의 흔적을 그려낸 휴머니스트

 매일매일 사람들이 싸우는 풍경을 상상해보자. 사방에서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고 위협하며 고통을 호소한다. 늘 불행한 사람들이 넘쳐난다. 거기에 나를 둘러싼 소중한 사람들의 죽음이 연이어 일어난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실제로 이와 유사한 삶을 살았던 독일의 화가이자 판화가인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 1867~1945)는 사회 참여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을 통해 자기 체험적인 고백과 시대를 담은 예술을 펼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살았던 시대의 분위기를 떠올린다면 확실히 그녀가 택한 표현 양식과 주제에 있어 망설임이나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미술사가 콜비츠를 어떠한 사조로도 속박하지 않는 이유는 정치·사회·예술 등을 막론하고 어떠한 분야에도 쉽게 휩쓸리지 않으며 자신의 방식에 매진하던 확고한 신념과 의지에 있을지 모른다.  이번 전시에서는 콜비츠의 작품을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을 기점으로 전쟁 이전과 전쟁...

[206호 사진으로말해요] 지금은 본관놀이 중

 따사로운 햇살, 얼굴을 간지럽히는 기분 좋은 바람. 꽃이 피고 낮이 밤보다 길어질 때쯤이면 캠퍼스는 당장이라도 달려나가 다가오는 봄을 만끽해야만 할 것 같은기운이 곳곳에 묻어난다. 그 중 유독 분주해지고 활기를 띠는 본관 앞은 지금 ‘본관놀이’ 중이다.  이제 막 캠퍼스 낭만을 펼치기 시작한 새내기들이 재잘대고, 인생의 봄을 맞이한 연인들이 꽁알댄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본관놀이를 구경한다. 이내 소란스러워진다. 왁자지껄 타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눈살을 찌푸리며 놀이를 중단한다. 모두가 떠난 자리엔 잔여물만 잔디 위를 뒹굴며 다시 ‘본관놀이’ 중이다.  예의와 격식이 갖추어진 본관놀이를 기대한다. 영화 <킹스맨>의 명대사처럼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계절의 아름다움만큼 본관놀이가 낭만적인 것은 충분히 알지만 부디 ‘매너 있게’ 즐기는, 성숙한 경희인의 자세를 기대한다. 김내영 |...

[206호 테마서평 : 알베르 카뮈] 알베르 카뮈가 남긴 것

『이방인』(알베르 카뮈 저, 김화영 역, 책세상, 2012) 『페스트』(알베르 카뮈 저, 김화영 역, 책세상, 1998) 『전락』(알베르 카뮈 저, 김화영 역, 책세상, 2012)         1960년 1월,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프랑스의 한 작가가 세상을 떠났다. 47세의 짧은 생애였지만 20세기 문학의 신화가 되기에는 충분한 나이였다.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다. 연극배우이자 기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지만 작가로서는 무명이나 다름없었던 그가 저명한 출판사 갈리마르에서『이방인』을 출간한 것이 1942년, 그의 나이 29세 때의 일이다. 그로부터 15년 뒤인 1957년에 그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세계적인 작가로 문학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오늘날에도 그의 이름은 20세기 프랑스 문학의 성좌에서 가장 빛나는 이름 가운데 하나다. 그는 무엇을 쓴 것이고 어떻게 전설이 되었나.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                 ...

[206호 특강취재 : 예술의전당 인문&힐링 아카데미 2015 봄 목요강좌, <내 안의 나-정신분석과 예술>] 무의식의 향연(饗宴)에 초대받다

예술의전당 아카데미는 3월 5일부터 6월 11일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30분에 예술의전당 음악당 지하 음악아카데미홀에서 인문&힐링 아카데미 2015 봄 목요강좌를 개최하고 있다. <내 안의 나-정신분석과 예술>을 주제로 총 15주간 진행되는 이번 강좌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칼 구스타브 융, 자크 라캉, 멜라니 클라인, 슬라보예 지젝을 짚으며 정신분석학의 주요 이론과 논쟁의 흐름을 살펴보고자 기획됐다. 지난 3월 5일에 열린 첫 번째 강의에서 이창재(프로이트연구소 소장) 강연자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해 전반적으로 소개했다. 이날 강의실을 꽉 메울 정도로 많은 수강생이 참석해 다시 한번 정신분석학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보여줬다. ▲이창재 강연자가 ‘무의식과 정신분석학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프로이트 이전, 무의식에 대한 통념 이창재 강연자는 “저와 여러분 사이에 접점(接點)이 있어야‘무의식’이 무엇인지 잘 전달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의식의 언어로 명료하게 설명되었다...

[206호 문화비평: 위기의 대학] 신자유주의 리얼리즘과 위기의 대학

최근 몇 년간 캐나다와 칠레, 영국과 유럽 등지에서 등록금 인상과 학과통폐합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투쟁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 2015년 한국의 대학가도 중앙대와 건국대가 앞장서 취업률이 낮은 인문예술계열 학과를 통폐합하려는 시도를 보이면서, 학교본부와 교수·학생들 간 대립이 격화되고 있다. 이는 구조조정 성과에 따라 지원금을 차등 지급하는 교육부의 방침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지난 20여 년간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대학개편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사회적 서비스를 상품화함으로써 사회적 권리를 개인적인 구매를 통해 해결하게 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항구적인 위기의 온상으로 곧잘 지목되는 것이 연금 서비스와 대학이다. 국가의 재정지출을 줄이고, 자본을 위해 민간보험과 사교육 시장을 활성화시키는 한편, 신자유주의적 자기책 임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영역들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공무원연금법개혁과 대학구조개혁이라는 명목으로 이 두 가지 절차가 동시에...

[206호 영화비평: <체이스(The Chase)>(1966)] 1960년대 미국의 묵시록에 대한 우화

아서 펜(Arthur Penn) 감독의 <체이스(The Chase)>(1966)는 상투적인 도식을 비트는 것으로 미국 사회를 지탱하던 이데올로기적 체계의 붕괴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여기서 말하는 상투적인 도식이란 서부극에서 발달한 고전 미국 영화의 서사적 관습을 가리킨다. 평화로운 마을이나 사회가 있으면 그곳을 위협하는 악당이 등장하고, 정의의 주인공이 그를 제거하여 다시 사회 질서를 회복하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체이스>는 이전의 미국 영화들이 반복적으로 사용한 도식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어떤 변화가 숨어 있으며, 그 지점들은 이 영화에 대한 특별한 사유를 요구한다. <체이스>가 보여준 도식이 기존 영화와 다르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영화의 서사를 파악하는 작업이다. 영화는 미국 텍사스의 어느 마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조용한 이 마을에 그곳 출신인 바버 로저스(로버트...

[206호 책지성: 루쉰 『아Q정전』] 나도 사실 아Q가 아닐까

루쉰은 중국 민중이 쇠로 만들어진 방에 깊이 잠들어 있을 때 고함을 지른 소설가이다(『납함(呐喊)』자서(自序)). 『아Q정전』이 1921년 당시《신보부간(晨報副刊)》에 연재되기 시작하자, 그것을 읽은 대부분의 독자들은 아Q의 모델이 혹시 자신이 아닐까 생각하며 전율과 공포에 사로잡혔다는 일화가 있다. 루쉰은『아Q정전』을 통해 중국 민중을 깨워 그들 스스로가 자기성찰과 자기반성을 하게 만들었다. 아Q는 어디 출신인지, 성(姓)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며, 가족이나 재산 또한 없어 마을의 서낭당에서 사는 날품팔이꾼이다. 별 볼 일 없는 그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정신승리법이다. 정신승리법은 현실에서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상상으로 도피함으로써 자신감을 회복하려는 자기 기만의 한 방식이다. 예를 들면 건달에게 맞을 때 자식이 아버지를 때렸다고 상상하거나 자신을 벌레로 비하하는 것이다. 그의 정신승리법을 사람들이 비웃든 말든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상상으로 도피하기 위해서라면 신체적 아픔 정도는 감수한다. 마을 축제의 놀음판에서 거액을 땄으나 난장이 일어나 돈을...

[205호 책지성: 사르트르『구토』] 존재의 비극,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파리에서 태어난 사르트르는 20세기 프랑스 최고 지성으로 평가받는 철학자이자 소설가이다. 그는 철학과 문학을 넘나들며 수많은 작품들을 만들어냈고, 그것들을 관통하는 것은 단 하나의 문제의식이었다. 바로 ‘존재란 무엇이냐’에 대한 탐구와 검증이다. 아주 어렸을 적에 죽음을 무서워했던 적이 있었다. ‘죽음’이란 모티브는 누구에게나 공포의 대상이지만 이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사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기엔 우리의 삶은 너무나 바쁘고 화려한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유아기억상실증(infantile amnesia)이 막 소실점에 이르렀을 때, 우리의 삶이란 것이 아주 단순하고 더듬어볼 기억이란 것들도 미미했을 때, 우리는 처음으로 삶과 죽음에 대해서 배우고 이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왜 ‘있는’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차츰 삶에 의미 부여하는 법을 배우고 실존적 고민들을 잊어가지만,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의식의...

[205호 특강취재:아트앤스터디 인문·숲 <디지털 이미지의 미학>] 가상과 현실 사이, 앞(pro)으로 던져(ject) 실현하는 대안적 세계

아트앤스터디는 2월 6일부터 3월 6일까지 서울 마포구 동교동에 위치한 오프라인 배움터 인문·숲에서 <디지털 이미지의 미학>을 진행한다. 4주 간 총 여덟 차례에 걸쳐 진행되는 본 강의는 이미지의 역사를 되짚으며 오늘날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낸 미학적 패러다임의 변화 양상을 이해하고, 인간의 정신을 기술적 매체와의 관계 속에서 탐구한다. 지난 2월 9일에 열린 두 번째 강의에서는 진중권(미학자, 동양대교수) 강연자가 ‘리얼 버추얼 액추얼’이라는 제목으로 디지털 테크놀로지로 인한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약화되는 현상에 관해 조명했다. 그림에서 문자로, 문자에서 다시 그림으로 인류의 역사 속엔 세계와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인 미디어(media)가 존재한다. 강연자는 이러한 미디어를 시대에 따라 인류가 어떻게 취해왔는지 그 맥락을 설명하며 강의를 시작했다. 과거 선사시대(pre-history)에는 사람들이 풍만한 여인의 조각을 만들고 동굴에 그림을 그려 종족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했다....

[205호 테마서평: 노벨문학상 수상작품] 잃어버린 순수한 나를 찾아가는 향수의 글쓰기

『슬픈 빌라』(파트릭 모디아노, 신현숙 옮김, 책세상, 2001) 『행복한 그림자의 춤』(앨리스 먼로, 곽명단 옮김, 뿔, 2013) 『달빛을 베다』(모옌, 임홍빈 옮김, 문학동네, 2008)   헤라클레이토스는 ‘우리는 같은 강에 발을 담그지만 흐르는 물은 늘 다르다’고 한다. 라파엘로가 그린 바티칸 궁전 ‘서명의 방’에 걸린 <아테네 학당> 그림에는 종이 위에 글을 쓰다가 한쪽 턱을 괸 채 뭔가 깊은 사색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헤라클레이토스이다. 자신의 내면을 탐색하며 로고스를 발견한 사람인데 내성적 성찰을 통해 자아를 발견하는 소설가도 그와 흡사하다. 인간은 유한한 시간에서 한없이 덧없는 존재일 따름이다. 그 덧없음이야말로 아름다움의 속성일 것이다. 이를 재현하고자 애쓰는 사람은 과거를 기억하고 이야기를 쓴다.   잃어버린 사랑의 기억 『슬픈 빌라』(Villa Triste)는 프랑스 작가 파트릭 모디아노(Patrick Modiano, 1945~ )에게...

[205호 문화비평: 빈곤산업] 임금 없는 삶과 빈곤산업

  인력시장을 떠도는 불법 체류자, 폐지 줍는 노인, 알바 겸 취업준비생, 도심의 노점상, 성매매 여성들, 예술가 지망생들, 간단히 말해 공식적인 일자리로부터 배제된 자들. 실업자, 빈민, 룸펜프롤레타리아트, 호모 사케르, 잉여 인간, 프레카리아트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이들 인구집단은 오늘날 제3세계는 물론이거니와 선진국에서도 점차 다수를 차지해가고 있다. 마이클 데닝은「임금 없는 삶」에서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임금 없는 삶’이야말로 지배적이고 중심적인 상태이며, ‘임금노동’은 임금 없는 삶의 유령을 추방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임을 지적한다. 자본주의는 일의 제공이 아니라, 토지 및 생산수단으로부터의 박탈과 생계 수단을 벌어야한다는 강제적 명령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미 자본축적의 동학 자체가 끊임없이 자본의 가치실현에 비해 상대적으로 과잉된 인구를 만들어낸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이들은 노동계급의 가장 밑바닥에 놓여 간헐적으로 일거리를 얻는 ‘산업예비군’ 또는...

[205호 영화비평: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 불멸의 사랑과 절명의 사이에서

  진모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가 불러일으킨 관심과 달리 이 작품에 대한 비평적 접근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듯하다. 물론 이 작품에 대한 논의 자체가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그 대부분이 영화가 보여준 감 화력에 방점을 두면서 작품의 성격을‘애틋한 사랑’으로 환원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이러한 논의들은 다큐멘터리가 포착한 이미지는 현실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즉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는 다큐멘터리의 장르적 관습을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영화가 포착한 노부부의 아름다운 모습은 꾸미지 않은 실제 그들의 삶이기때문에 그것 자체로 감동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논의될 필요가 있는 이 영화의 다른 특징들이 사랑이라는 무게감에 눌려 침묵의 영역으로 가라앉아 버린 것만 같다.   다큐멘터리의 약속 사실 편집과 사운드 효과, 현장 연출이 전혀...

[205호 Review: <로마제국의 도시문화와 폼페이>] ‘시간이 멈춰버린 도시’, 잠에서 깨어나다

  서기 79년 8월 24일 정오.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연안에 솟아 있던 베수비오 화산이 돌연 폭발했다. 화산은 엄청난 양의 화산재를 쏟아내며 인근 도시를 뒤덮었다. 나폴리 남동부에 자리하던 폼페이도 도시 전체가 완전히 묻혀버렸다. 폼페이는 당시 로마화가 진행된 도시였으며, 현재 휴양지로 유명한 것처럼, 당시도 로마 상류계층의 별장이늘어선 곳이기도 했다. ‘ 타락한 도시에 대한 신의 벌’. 부지불식간에 발생한 이 재앙은 모순되게도 현대인에게 로마 문명의 화려함을 생생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 중인 <로마제국의 도시문화와 폼페이(Pompeii)>는 ‘시간이 멈춰버린 도시’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기획특별전은 고대 로마제국의 화려한 도시문화를 그대로 간직한 폼페이 유적을 조명하는 전시다. 이번 전시는 폼페이에서 출토된 조각품, 장신구, 벽화, 캐스트(화석이 차지하던 공간에 다른 퇴적물이 채워져 원래 화석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것) 등 298점의...

[204호 영화비평] <카트>(2014) 스크린을 넘나드는 연대의 목소리

부지영 감독의 <카트>(2014)는 2007년 홈에버 사태를 서사의 바탕으로 삼아 우리 사회에 만연한 비정규직 문제를 담아낸 작품이다. <카트>와 유사한 영화들, 그러니까 사회성이 강한 영화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 중 하나는 관객에게 주제의식을 강요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강요는 대부분 반동으로 작동하기 마련이다. 거기에 이해와 설득 혹은 합의가 일어날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트>는 이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관객들에게 들려준다. 자본에 맞서는 방법은 강경투쟁이라는 방법만 있는 게 아니라 노동자들의 연대도 있다고 말이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장점인 이 영화는 관객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사회적인 문제를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여기서 방점은 부드러운 목소리에 찍혀야 한다. 이것은 <카트>의 내용과 형식을 따져보자는 의미다. 어떤 이들은 <카트>가 발화하는 사회 쟁점의 문제를 지지하되 그것을 전달하는 카메라가 관찰자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은...

[204호 문화비평] ‘이자스민’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대상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를 통해“이자스민의 미친 법 발의를 막자”는 선동이 횡행하고 있다. 새누리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서 다문화가정의 복지 및 아동 보호를 위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자스민은 그 자체 우리사회의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다문화주의 이데올로기가 집중되고 각축을 벌이는 민감한‘정치적 장소’가 되었다. 다문화가정의 복지에 관한 법률과 제도를 제정하려 할 때마다 그녀가‘원흉’으로 지목되곤 하는 것이다. 이번에 발의된‘아동복지법 일부 개정법률안’은 실제로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정청래 의원이 대표 발의하고, 발의에 동참한 다른 9명의 의원도 모두 새정치 민주연합 소속이다. 그러니 이자스민 의원이 발의했다는 것부터가 그릇된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자스민이 소환된 것은 이 의원이 비슷한 취지에서 이주아동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법안의 발의를 꾸준히 준비해왔기 때문이다. 이 의원은 지난 4월‘이주아동권리보장법’제정을 위한 공청회에서 미등 록 이주아동의 출생등록과 건강 및 교육권 보장을 위한...

[204호 특강취재: KT&G 상상마당 아카데미 <당신이 몰랐던 몽타주, 당신이 알게 될 시네마>] 인생은 영화다

KT&G 상상마당 아카데미는 11월 5일부터 12월 24일까지 매주 수요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KT&G 상상마당 건물에서 6기 <당신이 몰랐던 몽타주, 당신이 알게 될 시네마>를 진행한다. 총 여덟 차례에 걸쳐 진행되는 본 강좌는 영화 편집의 기본 문법을 파악하고, 나아가 감독의 연출의도까지 헤아려 봄으로써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영화를 다채롭게 해석하고 심도 있게 읽어볼 수 있는 기회를, 영화를 직접 만들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연출과 편집에 대해 고민하고 직접 응용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정승구(영화감독) 강연자는 지난 11월 5일부터 26일까지 네 번에 걸친 강의에서 ‘영화 연출과 편집의 기본문법’, ‘서사’, ‘서스펜스’등에 관한 주제로 영화를 넓고 깊이 있게 볼 수 있는 길잡이를 제시했다.   영화 연출과 편집의 기본 문법: 쇼트(Shot)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204호 책지성: 메리 셸리『프랑켄슈타인』] 아담에서 사탄이 된 이름 없는 괴물

흔히 프랑켄슈타인이라고 하면 2미터가 넘는 거구에 꿰매어진 이마, 초록색 몸뚱아리, 이마나 목에 한두 개의 나사와 못이 박혀 있는 모습을 상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원작 소설『프랑켄슈타인』(1918)에서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은 괴물의 이름이 아니라 괴물을 창조한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이름이다. 이 이름이 1931년 제임스 웨일 감독의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포스터에 괴물의 얼굴과 함께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프랑켄슈타인’을 괴물의 이름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제임스 웨일 감독의 영화에서 괴물 역할을 맡은 ‘보리스 칼로프(Boris Karloff)’의 모습이 괴물의 전형이 되어 현재의 프랑켄슈타인의 이미지가 굳어지게 되었다. 메리 셸리의 소설『프랑켄슈타인』은 영화가 유명한 데 비해 소설이 그리 많이 읽히지 않기로 유명하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소설을 어린이용 공포 소설 정도로만 여긴다. 그러나『프랑켄슈타인』은 과학의 위협을 의식하게 해주는 상징으로서, 윌리엄 고드윈과 존 로크, 볼테르와 장 자크 루소 같은 여러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의 사상을 담고...

[204호 테마서평: 소년과 성장] 미성년과 비성년의 변증법, 소년성

『비성년열전』, (신해욱, 현대문학, 2012) 『호밀밭의 파수꾼』, (J.D. Salinger, 공경희 역, 민음사, 2001) 『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문학동네, 2012)       소년이라는 단어를 발음해본다. 소년성이라고도 해본다. 왠지 낯설어진다. 세상에 소년이라는 것이 과연 있을까싶다. 소년이라는 단어에 깊이 달라붙어 있는 미숙함 역시 불투명하다. 한편으로는 ‘미(未)’성숙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非)’성숙처럼 보이기도 한다. 신해욱은『비성년열전』에서 미(未)성년과 비(非)성년을 구분한다. 인간의 세계에 성공적으로 진입하여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이행하게 된 이들을 성년이라 부를 수 있다면, 미성년은 ‘아직’ 그렇게 되지 못했으되 이제 곧 그렇게 될 이들이다. 그들은 성년의 축복을 기다리고 있는 ‘대기’ 중인 존재들이다. 반면, 비성년은 ‘이미’ 그렇게 되지 않은 까닭에‘열외’의 존재가 된다. 미성년과 비성년은 이렇듯 명쾌히 구분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비성년이란 존재는 ‘소년’내지 ‘소년성’과는 어딘가 이질적인 무엇으로 다가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해욱이 그 깊은...

[203호 문화비평: 감정관리 사회] 감정관리 사회

‘극혐’이란 단어를 들어보았는지 모르겠다. 온라인상에서 주로 사용되는 말로 ‘극단적 혐오’의 준말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혐오란 단어도 이미 꽤 부정적인 표현인데, 거기에‘극’을 붙여 의미를 더욱 극대화하고 있다. 그러나 어휘 자체에서 풍기는 극단성과 달리 실제로는 일상적이고 사사로운 분노를 표현하는 데 곧잘 사용된다. 연예인이 맘에 안 드는 태도를 보였다거나, 누군가 공공장소에서 무례한 행태를 보일 때 주로 쓰는 말이다. 이십대 후배들을 보면 그 외에도 “빡친다”거나 “짱짱이다”등과 같이 감정표현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온라인상에서의 경박한 언어습관 정도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한 ‘감정을 담은 표상’들은 온라인상에 유포되면서 특정한 문화적 효과들을 양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간단히 ‘일베’를 비롯해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생산되고 유포되는 각종 혐오와 비난, 조롱과 멸시의 정서들을 쉽게 떠올릴...

[203호 영화비평: <족구왕>(2013)] 낭만적 거짓과 현실의 비천함

우문기 감독의 <족구왕>(2013)을 보자 이용승 감독의 <10분>(2013)이 떠올랐다. 이는 단지 <족구왕>과 <10분>이 독립 영화 진영에서 호평을 받은 이유와 두 영화의 주인공 모두가 20대 청춘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족구왕>이 내게 불러일으킨 기시감은 이 작품의 주인공인 만섭(안재홍)의 모습이 <10분>의 주인공인 호찬(백종환)의 모습과는 정 반대의 인상에 기인한다. 물론 두 영화의 스타일과 서사는 전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족구왕>은 영화 곳곳에 만화 같은 연출이 숨어 있는 스포츠 영화이고, <10분>의 쇼트는 대부분 핸드 헬드(Hand-held)로 촬영되어 있으며 장르의 관습과는 거리가 먼 영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두 영화를 비교하려는 이유는, 두 영화가 주인공을 그려낸 바탕에 어떤 공통적인 정서구조가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두 영화는 같은 정서가 잉태한 이란성 쌍둥이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현실을...

[203호 리뷰: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2014 展] 괴력난신(怪力亂神)의 시대를 향해

  공자가 어지러운 세상을 질서 있게 만들기 위해서 한 일이 있다. 바로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 말하지 말라. 즉, 기괴하고 초인적인 현상들, 합리적인 이성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존재는 언급 자체를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2014년 지금 여기, 우리는 어떠한 시대에 살고 있는가? 올해로 8회째를 맞이하는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4는 서울시립미술관이 주최하는 국내 유일의 미디어아트 비엔날레이다. 빠르게 변모하는 서울의 특성을 미디어로써 반영하고 서울시립미술관에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발족된 이 행사는 2000년부터 ‘미디어_시티 서울’이라는 명칭으로 개막해 2년마다 꾸준히 열려왔다. 이에 올해는 17개국 42명(팀)의 국내외 작가들이 전시에 참여하였으며, ‘귀신 간첩 할머니(Ghosts, Spies, and Grandmothers)’라는 제목으로 ‘아시아’라는 공통적인 주제를 다룬다.   이번 전시 주제인 ‘귀신 간첩 할머니’에서 귀신은 아시아의 누락된 역사와 전통을, 간첩은 식민과 냉전으로 아시아가 함께 겪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