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호 특강취재: 연세대학교와 함께하는 인문아카데미, <문자, 매체, 예술>] 종교와 함께해온 알파벳의 발명과 확산

서울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에서는 HK사업의 일환으로 인문학적인 지식을 널리 확산하기 위해 2010년부터 교도소 등 다양한 기관에서 인문학 관련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시민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진행되는 이번 강연은 <문자, 매체, 예술>을 주제로 하며, 총 8번의 수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업은 11월 2일부터 12월 21일까지 서울시 서대문 도서관에서 매주 목요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진행된다. 본보는 지난 11월 16일에 있었던 최경은(연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강연자의 첫 수업 주제인 ‘문자의 확산, 알파벳의 발명에서 확산까지’를 다루고자 한다. 강연자는 이번 수업의 주제인 ‘알파벳’ 의 좁은 의미로서의 정의에 대한 설명으로 강연을 시작했다. 알파벳의 의미와 탄생 좁은 정의의 알파벳이란 영어뿐만 아니라 독일어, 스페인어, 프랑스어에 쓰이는 ‘라틴 알파벳’을 의미한다. 본 강연은 ‘라틴 알파벳’에 관한 이야기이다. 라틴 알파벳을 사용하는 국가의 비율은 지구상에서 거의 70%에...

[225호 리뷰: 이길래 조각가 오픈스튜디오] 철필로 하늘에 그림을 그리는 조각가

작가의 예술적 삶을 담고 있는 생활공간이자 창작을 위한 고뇌와 작품 제작 과정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예술가의 작업실은 작품만큼이나 흥미로운 공간이다. 작가의 내밀한 공간인 만큼 일반인들이 접하기 어려워 더욱 신비로운 공간이기도 하다. 최근 대중과 예술의 친밀도를 높이기 위해 작가의 작업실을 일반에게 공개하는 오픈스튜디오 프로그램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 11월 본교 동문인 이길래 작가가 뉴욕 오페라 갤러리에서 초대전을 진행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와 개인적으로 작업실 방문 요청을 하여 오픈스튜디오를 진행하였다. 이길래 작가가 뉴욕으로 출국하기 하루 전에 방문한 작업실은 경기도 여주시 운치 있는 향촌에 위치해 있었다. 작가의 작업실은 자연석으로 쌓아올려진 성벽과같은 외벽의 건물 안에 작업공간과 수장고, 전시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작업실 앞마당에는 소박한 정원 하나 없었지만, 작가의 대표 작품인 <나무> 시리즈의 청동 소나무 조각 작품이 있어...

[225호 테마서평: 인류와 축제] 축제의 문명사적 변화와 동서양 축제

[1]『축제와 문명』(장 뒤비뇨 저, 류정아 역, 한길사, 1998) [2]『용과 여성, 달의 축제』(한양명 저, 민속원, 2006) [3]『축제의 역동성과 현대일본사회』(김양주 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축제의 의미 축제(祝祭)는 한자어가 보여주듯이 신에 의존하며 신을 모시고 노는 것이다. 자신이 믿는 신을 즐겁게 하는 놀이는 본인 스스로에게도 커다란 희열을 준다. 원래 한국에서는 축제와 놀이가 큰 의미 차이 없이 쓰였고, 축제라는 말보다 놀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 별산대놀이, 탈놀이, 굿놀이 등에서 보듯‘놀이’도 축제와 마찬가지로 신을 모시고 노는 것을 의미했다. 영어 ‘Festival’은 라틴어의 성일(聖日, festivalis)에서 유래한 말이다. 동서양 모두 축제는 신을 모시고 의례를 행하고 신나게 노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축제와 놀이의 뜻이 분화되기 시작했다. 축제라는 단어가 신의 측면이 강조되는 신성한 잔치라면, 놀이 라는 단어는 신성성이...

[224호 문화비평: 징검다리로서의 인문학] 피카소와 인문학

1. ‘황소머리’ 1978년 경희대학에 입학했던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장소는 원형 도서관이었다. 거기서 책을 읽노라면 정말 대학생이 된 듯했다. 무시로 드나들었다. 서가에 비치된 화집들을 뒤적이다가 파블로 피카소의 <황소머리>(1943)라는 오브제 작품도 거기서 만났다. 농촌에서 성장한 나로선 금방 작품의 이름을 알아맞힐 수 있었다. 이것은 소의 대가리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상하고 난해한 화가로 알았던 피카소의 작품 이름을 곧바로 알아 맞혔으니 으쓱하는 느낌도 들었다. 한국의 시골 출신 대학생과 저 먼 스페인 출신 유명작가가 번역 없이 서로 통했다는 감회에 흐뭇했다. 우쭐거리는 마음이 놀라움으로 바뀐 것은 작품의 소재 때문이었다. 시골에서 자전거로 통학을 했던 터라 이 또한 금방 알아맞힐 수 있었다. 위로 솟은 쇠뿔은 자전거 핸들이요, 소 대가리는 자전거 안장에서 가져와 짜 맞춘 것임을. 낡은 자전거 안장과...

[224호 영화비평: <지난 여름 갑자기 Suddenly, Last Summer>(1959) 1950년대 할리우드에서 동성애에 대해 말하지 않기

미국 현대사에서 1950년대는 아마도 가장 보수적인 시기였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 난 후 세계 자본주의의 유례 없는 호황과 번영 속에서 미국은 본격적인 소비 자본주의로 나아 가고 있었고, 중산층의 교외화(suburbanization)와 TV 소유, 십대들의 데이트 성지가 된 드라 이브-인 극장 등이 크게 발흥하고 있었다. 불과 20~30년 전 미국 자본주의를 공포로 몰아넣었 던 대공황의 흔적은 깨끗이 사라졌고, 미소 냉전 체제는 ‘혁명’, ‘공산주의’, ‘소비에트’등의 단어를 금기시하게 만들었다. 아니, 어쩌면 전후 최고의 호황을 겪고 있는 미국 사회에서 그러 한 단어를 입에 올린다는 것은 어딘지 촌스럽고 시대착오적으로 보이는 것이였을 수도 있다. 슬로언 윌슨이 소설『회색 플란넬 양복을 입은 남자 The Man in the Gray Flannel Suit』(1955. 이듬해 영화로 제작)에서 그린 규격화되고 표준화된 중절모의 남자들(1950년대 중반을 배경으로...

[224호 Review: 《덕수궁 야외프로젝트 : 빛·소리·풍경》] 현대와 전통, 덕수궁에서 만나다

덕수궁 120주년을 기념하여 국립현대미술관과 덕수궁관리소가《덕수궁 야외프로젝트 : 빛·소리·풍경》전을 공동 주최했다. 본 전시에는 자신만의 조형적인 작업방식을 구축하고 있는 9명의 예술가가 역사적 공간인 덕수궁을 수개월간 드나들며 영감을 얻은 결과의 산물 9점이 전시되어 있다. 덕수궁 내 전각 및 야외 공간 7곳에 전시된 작품들은 사진, 드로잉뿐만 아니라 설치, 영상, 사운드 등 다양한 표현방법을 사용하여 관람객의 눈과 귀를 기분 좋게 자극한다. 석조전 서쪽 계단, 덕수궁을 해체하다 석조전 서쪽 계단에는 해체를 통해 외피 속에 숨어있는 내부의 기능, 색, 모양 등을 보여주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는 작가 김진희의 <딥 다운—부용>이 전시되어있다. 이 작품에서는 덕수궁에 스며있는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을 해체하여 재구성하였다. 작품은 다양한 방면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는데, 여러 방향에서 바라본 작품은 입체적으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눈을 감고...

[224호 테마서평: 이미지의 폭력성] 공정한 이미지 소비를 위하여

『사진에 관하여』(수잔 손탁 저·이재원 역, 이후, 2005) 『타인의 고통』(수잔 손탁 저·이재원 역, 이후, 2004) 『공정으로서의 정의』(존 롤즈 저·황경식 역, 서광사, 1988)               우리는 주변의 과도한 이미지 홍수 속에 사는 문화적 현상에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대중매체는 우리나라 사회와 아프리카 등을 포함한 저개발 국가에 대해 왜곡된 이미지를 갖도록 부추긴다. 이미지의 편향과 왜곡 현상은 대중들에게 고정관념과 같은 편견을 낳는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안으로 <공정한 이미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 <공정한 이미지>를 통한 편견 없는 사회를 꿈꾸어 본다. 사진의 폭력성 빈곤국가 사람들의 사진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지만, 그 사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면 거기에서 우리는 이중적인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 ‘ 누군가는 반드시 불쌍하고, 힘든 사람은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고통스러운...

[224호 책지성: 폴 라파르그, 『게으를 권리』] 참된 게으름의 의미를 찾아서

      우리는 왜 이렇게 바쁘게 살아가는 것일까? 마치 일 하려고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은 하루 대부분을 일에 투자한다. 잠깐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 바쁜 틈에서 지쳐간다 말하면서도, 쉼 없이 일을 하고 있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 지친 노동자의 입장에서, 이 책은 너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한껏 나태해지고 싶은 마음으로 책을 펼쳤지만, 책은 생각보다 심오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저자인 폴 라파르그는 카를 마르크스의 사위이자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다. 또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유럽을 대표하는 혁명적 지식인이기도 하다. 사회주의 성향 출판사에서 무보수로 일할 만큼 활발하게 행동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심지어 그는 70세에 이르러 더 이상 사회주의운동을 이어나갈 수 없다고 판단하자, 아내와 자살로 생을 마감할 만큼 열정적이었다. 이 책은 그의 여러 글...

[224호 특강취재: 철학아카데미, <기호정신분석과 여성학>] 크리스테바의 ‘주체의 의미화 과정’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위치한 철학아카데미는 지난 15년 동안 “열린 사유의 공간, 사유를 열어가는 광장”이라는 구호 아래 예술, 과학 등 여러 장르에 있는 철학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철학아카데미는 가을 학기를 맞아 시민과 학생을 대상으로 을 개최했다. 본 특강은 총 8개의 강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0월 21일부터 11월 30일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진행된다. 본보는 지난 10월 21일에 진행한 김선하(경북대학교 철학박사)강연자의 ‘프로이트, 라캉 그리고 크리스테바’를 다룬다. 본 특강은 프로이트와 라캉을 비롯한 남근 중심의 정신분석이론이 배제한 타자성의 새로운 윤리와 인간의 사회화 과정에 대한 내용이며, 강연자는 “이번 강연을 준비하면서 크리스테바를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운명적인 느낌을 받았다”며 강연을 시작했다. 라캉과 크리스테바 프랑스의 정신분석가이자 기호학자, 철학자인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1941~)는 타자성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세가지...

[223호 영화비평: <덩케르크 Dunkirk>(2017) <덩케르크>의 전쟁 재현 방식과 의미에 대하여

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 Dunkirk>(2017)는 개봉하기 전부터 전세계적으로 많은 기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2차 세계대전 초기 연합군 최대 규모의 작전이었던 덩케르크 철수를 실사촬영을 선호하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만든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이 영화를 덩케르크 해안에서 촬영했으며 고증을 위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당시의 군함과 전투기를 동원하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이 영화는 전체분량 중 70%가량을 아이맥스로 촬영하여 상업영화 사상 최대 분량의 광활한 화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영화에 대한 국내의 평론도 재현의 방법을 중요하게 평가하고 있다. <덩케르크>는 이전의 영화들과 달리 전장으로 가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으며 그 방법론에서 떠올릴 수 있는 생존이라는 핵심도 곱씹어볼 만하다는 게 많은 평자들의 주장이다. 이들 주장의 근거는 아이맥스로 촬영된 전장의 풍경인데, 이것의 특징은 이전 전쟁영화와 달리 스펙타클한...

[223호 문화비평: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교육] 제발 조 발표와 괄호 넣기를 버려라

※본 지면은 자유 주제 청탁 지면으로 본보의 방향성 및 기획 의도와 다를 수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극복하려는 다수가 없는 위기 인문학의 위기는 어느새 낡은 개념이 되었다. 필자가 학부생이었던 1990년대 후반에도 대학 안팎에서 인문학이 위기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20여 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도 인문학은 여전히 위기라지만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정부주도의 지원정책밖에 없다. 이상하지 않은가. 인문학을 전공한 수십만 명의 학생들이 사회로 나갔지만 이들이 인문학의 고사를 막겠다고 발벗고 함께 나서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인문학 교육이 살려야 할 가치와 의미를 지닌 경험으로 기억되지 않기 때문이다. 학부에서 국문학과 영문학을 전공한 필자 역시 졸업을 위해 수강했던 수십 개의 과목들 중 영혼을 뒤흔들었던 강의를 기억하지 못한다. 교수나 강사가 교재 내용을 그대로 가르치거나 조 발표로...

[223호 특강취재: 한양대학교·성동문화재단, <시민대학, 인문학에서 길을 찾다>] 행복한 Win-Win 뒤에 가려진 진실

한양대학교는 인문학 진흥을 목적으로 교육부에서 추진한 ‘인문역량 강화사업(CORE사업)’대상 학교로 선발되어, 성동문화재단과 함께 시민과 학생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연 <시민대학, 인문학에서 길을 찾다>를 개최한다. 본 강연은 8월 3일부터 9월 격주 목요일 16시부터 18시까지 한양대학교 인문관 303호에서 진행된다. 총 5개의 특강이 준비되어있으며 앞으로 진행될 강연으로는 9월 14일 ‘문학에서 사랑을 찾다’, 28일 ‘한국인과 한국문화’가 있다. 본보는 지난 8월 3일에 있었던 서신혜(한양대학교 창의융합교육원 교수) 강연자의 ‘Win-Win 전략이 숨긴 이야기’를 다룬다. 진정한 유교의 나라 만들기 사회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상, 행동, 생활방법을 근본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관념이나 신조의 체계, 즉 이념이 있어야 한다. 고려는 불교를, 조선은 유교를 이념으로 사용했다. 오랫동안 불교 이념에 따라 살던 백성에게 유교적인 생활양식을 강제할 수는 있지만, 자발적으로 따르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백성이...

[223호 책지성: 백종현, 『시대와의 대화, 칸트와 헤겔의 철학』] 시대와 대화하고 뛰어넘기, 칸트와 헤겔

고등학교 수준의 철학 지식밖에 없는 나지만 철학은 너무 멀거나 어렵기만 한 지식이 아니다. 나의 기준에 철학은 존재는 하지만 구체적인 언어로 형상을 갖추지 못하던 내 생각의 구현이며 인식의 벽을 깨는 경험이다. 그만큼 내가 느끼는 철학은 나 자신과 현실에 맞닿아 있었다. 그래서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책을 펴내면서’에서 저자가 가장 먼저 철학이 현실에서 갖는 의의를 설명해 반가웠다. 저자는 “철학이 근본학(根本學, Radical science)으로서 그 시대의 자연, 인간, 사회, 문화 등 현실의 전 영역에 걸친 통일 원리를 반성적으로 탐구하는 지적 활동”이라고 정의한다. 철학이 추상적으로 보이는 것은 현실을 비추되 인간에게 본래적인 것을 응축해 추상적인 형태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만큼 철학자의 반성적 사유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고 시대에 응하는 성격을 가지면서도 후세대들에게 여전히 의미 있게 받아들여질...

[223호 리뷰: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라이프(LIFE) 사진전>] 한 걸음 떨어지니 더 잘 보이는 세상

  ‘보는 것을 즐거워하자, 보고 또 놀라자, 보고 또 배우자’ 헨리 루스의 <라이프(LIFE)>지 창간사로 시작하는 이번 전시는 전설적인 포토매거진 <라이프(LIFE)>지의 사진과 영상 132점을 전시하고 있다. 사진 잡지의 정점에 있는 <라이프(LIFE)>지에서도 최고의 사진만을 실은 본 전시는, 20세기 현대사의 터닝 포인트를 엿볼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엄선한 사진만 전시하는 만큼, 전시된 것들은 단순한 사진 한 장이 아니라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작품을 보면서 그 순간을 찍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던 사진작가들의 직업의식도 느껴진다.   우리의 21세기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FACE, 네 가지 테마로 구성되어 있는 전시의 시작은 ‘기억해야 할 얼굴’이다. 켈리 그레이스, 슈바이처, 마더 테레사, 제임스 딘 등 여러 분야의 역사적 인물들과 시대의 아이콘들을 가벼운 발걸음으로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 테마에서는...

[223호 테마서평: 조금 더, 게을러도 괜찮아] 좀 게을러도 괜찮아, ‘생각하는 게으름’이 중요해!

[1] 「게으를 권리」(폴 라파르그 저 · 차영준 역, 필맥, 2009) [2] 「게으름에 대한 찬양」(버트런드 러셀 저 · 송은경 역, 사회평론, 2005) [3] 「피로사회」(한병철 저 · 김태환 역, 문학과지성사, 2012)                   “신성한 노동” 앞에 게으름 찬양이라니?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노동의 의미는 결코 신성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만 해도 노동은 노예나 천민의 일이었다. 노동을 뜻하는 독일어 ‘ Arbeit’의 어원의 뿌리에도, 고아가 겪는 고통이 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노동은 고역이다. 따라서 가능한 한 적게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좋다. 폴 라파르그(Paul Lafargue)도 “ 자신의 노동을 제공하고 돈을 받는 시민은 노예와 마찬가지고, 수년 간 감옥에 갇혀야 할 죄인”이었다고 했다[1]. 부정적 의미를 갖고 있던...

[222호 영화비평: <겟 아웃 Get Out>(2017)] 트럼프 시대에 흑인으로 살아남기?

* 약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 흑인 청년이 어두컴컴하고 한적한 교외에서 전화통화를 하며 걷고 있다. 그는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잘못 와서 헤매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상대방에게 투덜댄다. 그의 옆으로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간다. 무엇인가 위협적인 분위기를 감지하지만 이내 지나가버린다. 그는 안심한다. 그러나 자동차가 멀지 않은 곳에 서고 영화는 뭔가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를 창출해 낸다. 그리고 어김없이 무슨 일이 일어난다. 흑인 청년은 일순간 가격을 당하고 맥없이 쓰러진다. 그리고 차가 있는 곳으로 무력하게 질질 끌려간다.                                                                  ...

[222호 특강취재: 경의선 책거리, <청춘과 함께하는 고전, 인문, 문화산책1>] 소설, 나의 버려졌던 감정을 되찾게 해주다

마포구와 한국출판협동조합에서 주관하는 경의선 책거리는 5월 18일부터 7월 25일까지 ‘청춘과 함께 하는 고전, 인문, 문화산책1’이라는 제목으로 5차례의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 2차례의 강연이 진행됐으며 앞으로 3차례의 강연이 남았다. 경의선 책거리는 작년 10월에 조성된 복합문화공간으로, 경의선 홍대입구역 6번 출구에 있다. 본 강연은 지난 5월 20일에 진행된 것으로, 김영하 작가가 ‘우리는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진행했다. 좁혀지지 않는 거리 소설을 읽기란 쉽지가 않다. 소설을 읽으려고 하면 우선 눈에 글자가 보여야 한다. 글자는 하나하나 읽어야 하며 집중을 해야 보인다. 100년 전만 해도 글자를 읽는 것은 굉장히 고급화된 기능으로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렇게 글을 읽을 수 있 는 사람이 소수였던 시대와 달리 지금은 문명의 시대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222호 책지성: 조나단 월드먼, 『녹‘RUST’』] 도처에 널린 위험

      『녹‘RUST’』은 작가 조나단 월드먼이 30년 된 요트를 구입하고‘녹(綠)’을 발견하게 되면서 영감을 얻어 탄생됐다. 누구든 일상생활에서 녹을 발견했을 때 크게 개의치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은 녹을‘소리 없이 인류의 문명을 위협하는 붉은 재앙’이라고 설명한다. 녹은 다리를 무너뜨리고, 핵발전소의 반응기를 잠식하며, 핵폐기물 용기에 구멍을 내는 등 부지불식간에 우리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다. 또 녹은 군대에도 침투해 F-16 전투기와 헬리콥터가 공중에서 충돌하게 만들었고, 상업용 비행기가 비행 도중 공중분해되는 사고도 녹 때문에 일어났다고 한다. 또한 녹은 비행기 못지않게 자동차를 괴롭히는데“한밤중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자동차가 녹스는 소리가 들린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자동차는 녹 때문에 1년에 약 3.5kg 가벼워진다는 속설이 있다. 녹과의 사투는 화려하거나 멋있는 주제는 아니지만 이 책에는 묵묵히 부식을...

[222호 문화비평: SF 디스토피아의 철학적 기초] 과학기술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다

최근 4차 산업혁명에 관한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학계나 언론계는 물론이고 지난 대선 후보들의 토론에서도 주요 정책 의제로 떠오른 것을 보면, 현실 담론의 큰 흐름임에 분명하다. 4차 산업혁명이란 초연결성(Hyper-Connected), 초지능(Hyper-Intelligent)을 구현한 기술, 곧 사물인터넷(IoT), 클라우드 같은 정보통신기술(ICT), 빅데이터, 인공지능 등의 과학기술을 통해 야기된 대규모의 사회변혁을 일컫는다. 과학기술에 의해 인간 삶의 구조가 ‘혁명적으로’ 뒤바뀐다는 것이 당연시되는 것을 볼 때마다, ‘정말 그럴까?’라는 의문은 남는다. 예컨대 사랑의 통신기술이 편지, 삐삐, 휴대폰, 스마트폰으로 변한다고해서 미숙한 사랑이 성숙해지느냔 말이다. 그럼에도 과학기술에 의해 혁명적 변화가 초래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기술 개념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통념상, 기술이란 인간의 특정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 수단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기술은 결코 그런 것일 수 없다. 한갓 도구나 수단에 불과한 것에서...

[222호 리뷰: 연극 <보도지침>] 판단과 선택은 우리의 몫

연극 <보도지침>은 1986년 전두환 정권의‘보도지침’을 폭로한 김주언 한국일보 기자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법정연극이다. A: 판사, 변호사, 검사, 피고 사회부 기자 김주혁, 피고 잡지 편집장 김정배도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법정에서 악의는 논리로 탈바꿈되고, 선의는 색깔의 망령을 덮어쓴다. 핑퐁처럼 오가는 대사의 호흡을 정신없이 따라가다가도 어느 순간에 숨을 멈추게 된다. 두 번의 침묵 앞에서 나는 숨을 멈췄다. “지침이십니까? 부탁이십니까?”라는 물음 앞에서의 침묵. “앞으로 넌 어떻게 살 거니? 어디로 갈 거니?”라는 물음 앞에서의 침묵. 침묵은 무궁무진하다. 회피이자 의지의 표현이다. 질문에 따라서 긍정일 수도 부정일 수도 있다. <보도지침>에서 마주하는 침묵은 전자이며 후자이다. 차마 입을 떼지 못할 물음, 입을 뗄 필요도 없는 물음 앞에서 연극은 침묵을 택한다. 나는 그들의 침묵에서 고슴도치같이 가시를 세운...

[222호 테마서평: 의료윤리] 어떤 의사들의 반성

『환자가 된 의사들』(로버트 클리츠먼 저 · 강명신 역, 동녘, 2016) 『신의 호텔』(빅토리아 스위트 저 · 김성훈 역, 와이즈베리, 2014) 『위대한 참견』(히노 오키오 저 · 김윤희 역, 인플루엔셜, 2016)   요 근래 ‘안아키’라는 단어가 포털에 오르내리며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안아키가 뭔가 했더니 ‘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안아키 카페는 아이들을 키울 때 예방접종과 항생제를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이들이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를 가리킨다. 이들은 현대 의학을 불신하며, 예방접종 및 항생제가 제약회사와 의사들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현대 의학을 거부하고 그 대신 택한 것은 무엇일까. 그들이 택한 대안은 검증되지 않은 치료법이다. 이를테면 이들은 아이에게 숯가루를 먹이거나 화상 부위에 뜨거운 물을 붓는다. 면역력을 키워준다면서 수두에 걸린 아이와 멀쩡한 아이를 한데...

[221호 특강취재: 화성문예아카데미, <우리에게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를 보는 세 가지 물음

경기도 화성시 노작로에 위치한 화성문예아카데미는 4월 12일부터 5월 17일까지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에 <우리에게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총 5차례 특강을 진행한다. 화성시문화재단에서 진행하는 본 강연은 종교를 신앙의 대상이 아닌 탐구의 대상으로 접근하기 위해 기획됐다. 지난 4월 12일 구형찬(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강연자가‘종교로 보는 인간의 마음, 인간의 마음으로 보는 종교’를 주제로 첫 번째 강의를 진행했다. 이날 강연은“나에게 아무도 묻지 않았을 때 난 시간이 뭔지 안다. 그러나 누가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소개하며 시작됐다. 강연의 핵심은 모두가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대답하기 어려운‘종교’와‘마음’이었다. 강연자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생각을 확장하며 이 둘을 연결하는 하나의 관점을 설명하고자 노력했다. 강연을 이끈 질문은‘종교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사람들은 왜 종교를 믿을까?’, ‘종교인의 마음은 얼마나 특별한가?(부제)’다. 종교에...

[221호 문화비평: 21세기 세대차이] 21세기 세대의 세상을 허하라

인류 역사에서 20세기는 하나의 기념비적인 분기점의 시대로 기록될 것이다. 바로‘과학기술의 발달’이 일정한 임계점에 다다른, 인류문명의 한 전환점이 되었던 시기로. 우리는인류역사상 글자 그대로 전무후무한 시대를 지나왔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일정한 임계점에 다다랐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과학기술적 세대교체의 속도가 인간의 생물학적 세대교체 속도를 앞지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추월은 지금의 인류문명이 멸망하거나 퇴보하지 않는 한 역사상 단 한 번만 일어날 사건이다. 이 사건, 즉 추월이 어떤 것인지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삼국시대와 조선시대는 시간적으로 수백 년의 차이가 나지만, 각각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구체적인 생활상은 그다지 큰 차이가 없었다. 농사를 짓는 데 가축의 힘을 빌리고, 여행수단은 고작해야 말을 타거나 아니면 그냥 걸어 다니는 식이었다. 수백 년 동안 똑같았다. 그러나 20세기에 태어난 사람들은 수십...

[221호 리뷰: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덕후 프로젝트: 몰입하다]인식의 전환: 수집에서 창작으로

  ‘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덕후’는 일본어 ‘오타쿠’를 한국식으로 발음한 ‘오덕후’의 줄임말이다. 오타쿠는 1970년대 일본에서 등장한 신조어로 원래 집이나 댁이라는 뜻이지만 집 안에 틀어박혀서 취미생활은 하는,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덕후는 일본의 하위문화를 상징하는 ‘오타쿠’라는 단어에서 출발했지만, 최근 ‘학위 없는 전문가’, ‘능력자’ 등으로 불리며 긍정적인 인식을 내포한 문화적 코드로 자리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덕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바탕으로 좋아하는 분야에 깊이 몰입하며 가지게 되는 기질이나 자세, 행동 양식의 의미를 재조명한다. 이제 ‘덕후’는 사회의 다양화로 인해 개인의 취향을 드러내고 공유하며 관심사가 같은 사람들과 정보를 교류하는 하나의 ‘소통 문화’다. 전시는 고성배 작가의 ‘프로젝트 갤러리관’과 나머지 10명의 덕후 작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돼있는 ‘전시실’로 구성된다. 고성배 작가는 ‘본격 덕질 장려’를...

[221호 책지성: 데보라 코웬, 『로지스틱스: 전지구적 물류의 치명적 폭력과 죽음의 삶』]로지스틱스와 퀴어?

글로벌 로지스틱스 로지스틱스와 매개하지 않는 삶을 상상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요즘, 데보라 코웬(Deborah Cowen)의『로지스틱스: 전지구적 물류의 치명적 폭력과 죽음의 삶』은 로지스틱스를 중요한 정치적 투쟁의 장소로 바라볼 필요성을 적절하게 제시한다. 저자는 로지스틱스가 보안, 노동, 도시, 시민권, 국가 등의 내용에 중대한 변화를 야기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복잡한 로지스틱스 지형을 상세하게 드러냄으로써 로지스틱스의 과거와 현재, 효과와 문제, 문제와 해결의 방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퀴어적 개입을 통해 다른 정치의 가능성을 마련한다. 전쟁 물자를 공급하는데 핵심이었던 로지스틱스 기술은 비즈니스 로지스틱스에도 적용되었다(로지스틱스는 애초에 물류 말고도 병참, 군수의 뜻도 가지고 있다. 역자는 두 의미의 얽힘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로지스틱스를 번역하지 않고 원어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기업들은 로지스틱스 기술을 바탕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뤄낼 수 있었기 때문에 이를 어떻게...

[221호 테마서평: 전통여성의 재발견

『주체적 삶, 전통여성』(이화형, 푸른사상, 2017) 『강직한 지식인, 인수대비』(이화형, 푸른사상, 2017) 『융합적 인재, 신사임당』(이화형, 푸른사상, 2017) 전통여성’이라는 단어를 들으면‘현모양처’, ‘일부종사’, ‘삼종지도’, ‘여필종부’, ‘칠거지악’등이 떠오른다. 남편의 말을 하늘과 같이 떠받들고, 남편이 첩을 들여도 감내하지만 자신이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쫓겨나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이며 묵묵히 살아가는 여성들의 수동적인 모습이 연상된다.   ▲이화형(1955~ ) 전통여성을 새롭게 조명하다 그런데 우리 역사 속의 여성들이 과 수동적인 모습으로만 살았을까? 본교 이화형 교수(한국어학과)의『주체적 삶, 전통여성』,『 강직한 지식인, 인수대비』,『 융합적 인재, 신사임당』에서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전통여성상을 확인하게 된다. 전통여성의 이미지와는 상반된 모습의 여성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고정관념이 깨지는 신선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이화형 교수는 이 땅의 여성들의 삶과 위상에 대한 관심을 갖고 오랫동안 연구를 해왔다. 그 과정에서『한국근대여성의 일상문화』(2004,...

[221호 영화비평: <어느날>(2016)] 죽을 권리를 외치는 영화의 수상한 화법

 <어느날>(이윤기, 2016)은 사랑하는 아내 선화(임화영)를 잃고 실의에 빠져 있는 보험회사 과장 강수(김남길)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는 집안 곳곳에 산적해 있는 선화의 물건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으며, 장모님이 가져다 준 김치를 한 입 베어 먹으며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지냈던 시간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런 강수가 회사로 복귀하자 팀장은 그에게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미소(천우희)와 대리인을 만나보라고 지시한다. 시각장애인에다가 고아인 미소에게 지급되는 보험금을 중단할 꼬투리를 찾기 위해서다. 병원에 도착한 강수는 병상에 누워있는 미소를 보고 병마와 힘겹게 씨름하던 자신의 아내를 순간적으로 떠올리는데, 바로 그 순간 그의 눈앞에 또 다른 미소가 등장한다. 식물인간 상태인 몸에서 빠져나온 미소의 혼(魂)이다. 병상에 누워 있는 몸에서 빠져나온 또 다른 미소는 강수의 눈에만 보이며, 평생 안고 있었던 시각장애도 사라진 상태이다....

[220호 리뷰: 아르코미술관, <용적률 게임: 창의성을 촉발하는 제약> 과밀도시, 서울을 논하다

      서울을 비롯한 도시건축을 ‘용적률(FAR·Floor Area Ratio)’로 풀어보는 전시가 개최됐다. 용적률은 필지면적에 대한 건물 바닥면적의 비율을 말한다. 주거지역의 종류에 따라 건물을 몇 층 올릴 수 있는지를 정하는 이 규율은 재건축은 물론 상가, 리모델링 시장에서도 알아야 하는 기초 중의 기초다. 일반인에게는 생소하고 멀게 느껴지는 용어지만, 실제로는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서울은 세계적으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도시 중 하나다. 서울 인구는 빠른 경제성장에 힘입어 급속도로 증가했고, 그에 따라 서울 내 주거공간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으나 주택 공급량은 이를 따라갈 수 없었다. 건축주는 제한된 토지에서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최대한의 공간을 차지하려 하지만 공적 규제인 용적률은 이를 막고 있다. 건축가는 규제의 빈틈을 이용하면서 건축주의 욕망을 충족시켜야 하기에 기발한 아이디어로 용적률의 빈틈을 비집고...

[220호 특강취재: 열린연단,〈세계화, 다문화 시대의 윤리〉] 공존하는 법 생각하기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은 작년 3월 5일부터 ‘윤리와 인간의 삶’이라는 윤리강연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프로그램은 네이버문화재단이 지원하는 ‘문화의 안과 밖’ 강연기획 중 세 번째 강연 시리즈로, 7가지 소주제로 총 50회가 진행됐다. 본 강연은 그 마지막 순서이며 지난 3월 11일 안국동 안국빌딩에서 김우창 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세계화, 다문화 시대의 윤리’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진행했다. 크고 작은 테두리들 ‘세계화’는 오늘날 너무도 익숙한 단어이다. 자원과 물질, 재료와 상품과 사람들의 이동으로 나타나는 세계화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 의해 더욱 가속화되어 소득 불평등 같은 여러 가지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인류 전체를 포괄하는 보편적 이념을 확산시킨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러한 아이러니 속에, 다 함께 공존해야 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삶의 조건이 된다. 이를 위해 모두가 노력해야...

[220호 문화비평: 한류란 우리에게 무엇일까?] 한류, 사드, 블랙리스트의 정치경제

과거 군사독재 시절 한국의 문화는 척박했다. 검열과 금지가 일상화되고 정부의 3S(섹스, 스포츠, 스크린)정책이 문화를 규제하는 사회에서 문화가 다양하고 풍부해지는 건 불가능했다. 외부에 알릴 문화라는 건 기껏해야 전통으로 치장된 과거의 것이고 현재의 문화는 정부의 허가나 검열을 거쳐야 외부와 소통할 수 있었다. 비민주적인 정권에서 문화의 쇄국정책은 불가피했다. 민주화와 상업화, 한류의 문을 열다 1987년 6월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문화의 숨통이 좀 트였지만 독재에서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시민들에게만 기회를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정권이 통제하던(또는 정권과 거래를 일삼던) 대기업들도 더 많은 자율성을 누리게 되었고, 문화는 기업들의 이윤추구수단이 되기 시작했다. 상업(민영)방송과 케이블 TV 등은 문화산업의 파이를 키웠고 채널들을 채울 많은 문화 콘텐츠들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위축된 문화가 갑자기 다양해질 수는 없기에 외국의 문화 콘텐츠들이 수입되고 모방되며 실험되기...

[220호 영화비평: <패왕별희 覇王別姬>(1993)] 기의를 잃은 기표, 그리고 장국영이라는 아름다움의 묘비명

몇 년 전부터인가 재개봉 영화들이 관객들의 지속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대부분 작은 규모의 멜로드라마나 예술영화가 주종을 이루고 있지만 때로 개봉했을 때보다 더 나은 흥행 성적을 기록한다고 한다. 개봉 10주년을 기념하여 2015년 재개봉한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2004)이 대표적이다. 범죄, 액션, 스릴러가 지배하는 최근 한국 영화계에서 감성적인 멜로드라마를 구경한 게 언제인지 아득해지는 걸 보면, 대부분의 재개봉 작이 왜 멜로드라마인지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이터널 선샤인>처럼 주로 개봉한지 10년 내외의 영화들이 대부분이지만 <시네마 천국 Cinema Paradiso>(1988)처럼 사반세기만에 재개봉(2013년)한 영화도 더러 있다. 첸카이거(陳凱歌) 감독의 <패왕별희 覇王別姬>(1993)도 24년 만에 재개봉하는 영화다. 또한 이번 4월 1일은 이 영화에서 잊을 수 없는 연기를 보여준 장국영(張國榮)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지 꼭 14년이 된다. <패왕별희>와 장국영을...

[220호 책지성: 율라 비스, 『면역에 관하여』]율라 비스의 정원

율라 비스의 정원 이 책의 저자 율라 비스의 아들이 태어나기 전날은 그 봄 들어 처음 푸근해진 날이다. 그날 그녀는 미시간 호에 뜬 부 빙에 반사된 아침 햇살을 느낀다. 진통이 시작된다. 햇살이 가득했던 그 순간에 뒤이은 긴 진통 끝에, 그녀에게 거의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이어졌다. 그녀는 호수를 헤엄치고 있다고 상상했다. 호수는 그녀 의지와는 달리 어둠의 호수로 바뀌었고, 그다음에는 불의 호수가 되었으며, 그다음에는 수평선 없이 무한히 펼쳐진 호수가 되었다. 드디어 아들이 태어 났다. 그러나 출산 후 그녀에게 좀처럼 보기 드문 병이 찾아왔다. 자궁내번증이었다. 자궁이 뒤집혀 자궁 바닥이 자궁강으로 내려오는 병이었는데 이 병은 생명을 위협하는 위태로 운 병이었다. 이후 그녀는 불안감과 편집증에 시달렸다. 한편 그해 봄에는 새로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공식적인 범유행병이...

[220호 테마서평: 트라우마와 치유] 사회적 트라우마와 문학의 물음

『마지막 테우리』(현기영, 창비, 1994) 『소년이 온다』(한강, 창비, 2014) 『거짓말이다』(김탁환, 북스피어, 2016)   2014년 4월 16일 침몰한 세월호가 1,073일 만에 첫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의 흐름을 짐작케 하듯 녹슬고 낡은 거대한 선체를 보며 사람들은 이 참혹한 사건이 일상의 시간에 남긴 파장을 되새긴다. 세월호를 바라보며 대부분의 평범한 시민들은 그동안 이 사건을 잊은 적이 없음을, 또한 진상규명에 대한 요구 역시 늦춰진 적이 없음을 실감한다. 진은영의 전언대로 참사 이후 3년여의 시간은 희생자 가족과 선량한 시민들이 “본 것과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며 참사의 진실을 검토하고 밝히려” 노력했던 시간인 동시에 “진상규명을 원하는 모든 이들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의 상태에 감금하려는” 온갖 정치적인 시도가 횡행했던 시간이었다.(진은영, 「무능력의 정치학을 넘어서」, 『한겨레신문』2017년 3월 28일자) 삼 년이나 연기되었던...

219호 책지성: 닉 수재니스,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

  생각을 언플래트닝 하라! 만화로 된 철학책 어린아이는 물론이고 성인까지 만화를 한 번도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생각해보면 우리는 일상 속에서 웹툰, 만화책, 신문, 광고 등 다양하게 만화를 접하고 있다.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는 ‘컬럼비아 대학 최초로 논문 심사를 통과한 만화’, ‘하버드 대학이 출간한 최초의 만화 철학책’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책이다. 보통의 경우 어린이를 위한 책들이 만화로 된 걸 감안한다면 상당히 특이한 책이다. 이 책에선 철학이라는 결코 단순하지 않은 소재를 만화라는 매우 익숙한 장르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한마디로 만화로 된 철학책인 것이다. 언어와 상호작용하는 시각적 이미지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에서 만화는 단순히 내용을 이끌어가는 수단이 아니다. 만화를 통해 저자의 철학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언어는 인간의 사유를 도와주는 매우 중요한...

[219호 리뷰: 예술의 전당, <르 코르뷔지에 展>] 4평의 기적 – 작은 위대함 결국 본질만 남는다

“슬퍼하지 말게 언젠가 우린 또 다시 만나게 되는 거니까. 죽음은 우리 각자에게 출구와도 같다네. 나는 왜 사람들이 죽음 앞에 불행해하는지 모르겠네. 그것은 수직에 대한 수평일세, 보완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지.”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감미로운 멜로디에 감성이 흠뻑 젖었다. 1965년 9월 1일, 르 코르뷔지에의 장례식은 앙드레 말로에 의해 루브르 궁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전시장 곳곳에서 감미롭게 울려 퍼지던 배경 음악은 르 코르뷔지에가 직접 자신의 장례식을 위하여 선곡한 것으로 실제 장례식 때 사용된 곡이었다. 어찌 자신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감미로운 음악을 선사할 수 있을까. “삶은 현기증이 일 정도로 빨리 지나가 버렸고 최후가 다가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의 업적만 보아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부단한 노력을 하며 살아왔는지. “만약 누군가 내 건축 작품에 있어 장점을...

[219호 테마서평 특별호: 2017 지방 신춘문예 당선작]중심과 주변, 중앙과 지방의 이분법적 시각의 극복

『켄의 세계』(최은, 《경인일보》신춘문예 당선작: 소설부문) 『끝없는 밤』(김선희, 《한라일보》신춘문예 당선작: 소설부문) 『과녁』(이서안, 《경상일보》신춘문예 당선작: 소설부문) 필자가 사는 곳은 경남 양산이다. 서울에 사는 지인들과 통화를 할 때면 나도 모르게 서울은 ‘올라가는 곳’이 되고 양산은‘내려가는 곳’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미 일상의 언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서울의 ‘대표성과 중심성’은 권력과 자본의 집중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속에는 문화적인 우월성이 더 많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보통 ‘신춘문예’하면 경향일보, 조선일보 등 주요 신문사를 떠올린다. 그러나 지방에 있는 신문사들도 매년 신춘문예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2017 지방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우수한 작품 들이 각종 언론을 통해 대거 소개됐다. 그 중 공통적인 주제로 소설, 시 등 다양한 장르에서 수 상한 작품들이 있다. ‘최은, 「켄의 세계」(《경인일보》신춘문예 당선작)’ , ‘김선희, 「끝없는...

[219호 영화비평: <컨택트 Arrival>(2016)] 경계를 허물고 나아가는 것에 대하여

이전의 작품들을 통해 증명되었듯이, 드니 빌뇌브는 서사 정보를 조절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감독이다. <그을린 사랑 Incendies>(2010)이 제한된 서사 정보를 하나씩 공개하는 것으로 전체 그림을 완성하는 일종의 퍼즐과도 같은 영화였으며, <프리즈너스 Prisoners>(2013)는 하나의 사건을 추적하는 두 인물에게 각기 다른 정보를 제공해 사건에서 계속 미끄러지는 주인공들을 보여주었던 작품이었다. <컨택트 Arrival>(2016)는 관객에게 전달되는 서사적 정보를 조절하는 감독의 능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동시에 정확히 구성된 편집의 능력까지 더해진 작품이다. 요컨대 드니 빌뇌브는 배우와 가까운 거리에 카메라를 설치하여 캐릭터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이나 미장센을 활용하는 방법보다 플롯의 구성력을 더 신뢰하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가 주로 롱쇼트를 사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숨어 있다. 관객에게 서사 정보를 전달하거나 숨기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이전까지...

[219호 특강취재: 다중지성의 정원, <자크 랑시에르와 영화- 이후의 시간과 이미지>] 랑시에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영화: 우화로서 영화

다중지성의 정원은 지난 1월부터 3월까지 총 8주에 걸쳐 <자크 랑시에르와 영화- 이후의 시간과 이미지> 특강을 개최하고 있다. 이 특강은 영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 1940~ )의 사유와 저작을 되새기려는 취지에서 기획됐다. 랑시에르는 그의 저서 『영화 우화』의 프롤로그에서 드러나듯 영화감독 장 엡스탱(Jean Epstein)이 거짓으로 치부한 우화(fable)로서 영화를 상정했다. 더 정확히 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하는 시학을 넘어 영화를두 시학이 엇갈리게 얽힌 우화로 간주했다. 신은실(인디다큐페스티벌 집행위원) 강연자는 지난 2월 23일에 열린 네 번째 강의에서 “‘우화’의 영화 2”라는 주제로 우화의 감독들로 분류되는 프리츠 랑(Fritz Lang, 1890~1976)과 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 1906~1977), 두 영화감독의 작품들을, 작품들에 대한 랑시에르의 관점과 함께 소개했다. 허구로서의 기억   강연자는 이전 강연의 내용을 다시 환기하면서 강연을 시작했다. 진리로 여겨지는...

[219호 문화비평: 컴퓨터 게임 <댓 드래곤, 캔서>(2016)] 만질 수 있는 타인의 고통

    <댓 드래곤, 캔서>(2016)라는 매우 사적인 컴퓨터 게임이 있다. 이 게임은 게임 개발자 라이언 그린이 암에 걸린 자신의 아들 조엘의 투병 과정을 소재로 만든 게임이다. 통상의 미션수행 과정이나 퍼즐, 목표가 이 게임에는 없다. 다만 게이머는 아픈 조엘을 달래주고, 부모의 고통에 공감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즉 조엘을 살려낼 수는 없지만 토닥일 수는 있다. 상호작용을 극대화한 컴퓨터 게임이라면 살려내는 일(혹은 그 반대의 일)까지 가능해야 하지 않겠나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게임이 디자인한 상호작용은 ‘위로할 수 있는 자유’다. 이렇게 자유가 제한된 이유는 실제 모델인 조엘이 게임 제작과정에서 사망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게임으로 구현된 거짓 희망보다는 그 이상의 경험을 게이머와 공유하고 싶다는 제작자의 의도가 담겨 있기도 하다. 상호작용 디자인은 창작자의 의도가 없는 디자인이...

[218호 책지성: 칼 세이건, 『코스모스』] ‘코스모스’는 계속된다

『코스모스』만큼 유명한 과학책도 드물 것이다. 유명할 뿐 아니라 1980년에 나온 책인데도 35년이 넘도록 여전히 베스트셀러 대열에서 그 위력을 떨치고 있다. 몇백 년의 세월을 견뎌온 소설도 많은데 35년 세월이 뭐 그렇게 대단하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 과학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 지를 생각한다면 과학책이 세월의 속도를 견뎌내기 힘들다는 것을 바로 이해할 것이다. 교과서마저도 몇 년 사이에 핵심적인 내용이 변하는 것이 과학의 현실이다. 『코스모스』도 물론 그 기간 동안의 과학의 새로운 발견 앞에 낡은 책이 되어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시 우주의 나이와 현재 과학계에서 받아들여지는 우주의 나이의 값은 달라졌지만 이에 대한 보편적 통찰이 살아있기에『코스모스』는 현재에도 건재한 것 같다. 당시에는 태양계 밖에서 외계행성이 발견된 적이 없었지만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

[218호 리뷰: 음악문화공간, <스트라디움>] 음악을 보고, 듣고, 말하는 시간

    모니터의 전원을 껐다. 한 주 내내 글자들과 마주 앉아 있었다. 공부와 일과 관련된 문서를 만들고 메일을 쓰는 동안 수많은 말들이 소리 없이 오고 갔다. 밤을 새우고 취재를 위해 집을 나서기가 무섭게 스마트폰이 울린다. 각종 SNS의 알림 소식과 메시지들이 확인을 기다리고 있다. 지하철을 타러 가며 습관적으로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재생버튼을 누르고 눈을 감는다. 어떤 곡이라도 괜찮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으면, 노래의 가사를 곱씹고 있는 순간만큼은, 아무도 내게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대답하지 않아도, 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작은 위로를 음악에서 얻는다. 한강진역 1번 출구를 빠져나와 이태원 방향으로 조금만 걸으면 스피커를 연상케 만드는 검은색 건물, ‘스트라디움’이 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에 와 닿는 일요일 오전의 거리는 평소보다 더 고요하지만, 속이...

[218호 테마서평: 파스칼 키냐르의 시간] 시간의 섬광, 시간의 황홀경

『심연들』(파스칼 키냐르 저·류재화 역, 문학과지성사, 2010) 『옛날에 대하여』(파스칼 키냐르 저·송의경 역, 문학과지성사, 2010) 『떠도는 그림자들』(파스칼 키냐르 저·송의경 역, 문학과지성사, 2003) 무언가에 고통스럽게 쫓길 때마다 주문처럼 외웠던 말, 나에게는 신비한 약효, “페스티나 렌테(Festina lente)”. 이 말을 그대로 풀이하면 “빨리 천천히”이다. 이 역설적인 비문(非文)은 나에게 일종의 비문(秘文)이 되었다. 파스칼 키냐르의 전언에 따르면, 페스티나 렌테는 고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허리춤에 늘 지니고 다니던 사냥칼에 쓰인 문구이다. 빨리 하되 천천히. 이 말을 ‘빨리 한 후에 천천히, 천천히 한 후에 빨리’라는 시간의 순차성에 따른 인과적 연차 행위로 이해하기보다, 거의 측정 불가능한 극미한 최소 시간 단위 속에 벌어지는 전이, 이동으로 이해할 때 그 의미는 더욱 감미롭고 알싸하다. 다시 말해, 그것은 ‘거의 동시에’이다. 같은 길이로, 같은...

[218호 문화비평: 문화전쟁] 문화전쟁의 시대?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은 전 세계인을 깜짝 놀라게 했다. 거침없는 언행과 대중주의적 수사로 유권자들을 현혹하는 난세의 기인 정도로 평가받는 인물이 아니던가. 그가 공화당의 보수주의자들에게 얼마간의 인기를 끌지언정, 미국의 대통령직에 오를 수 있으리라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더욱이 선거 막판 트럼프는 인종차별적 발언에 더해 성추행 논란에 휘말리기까지 했다. 그러니 지난 대선에서 흑인 대통령 오바마를 당선시켰던 미국인들이 어째서 이번엔 함량미달의 극우 정치인을 선택했는지 많은 이들이 혼란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아가 트럼프의 미국이 예고하는 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혐오의 정치에 대해 벌써부터 공포감을 표출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트럼프의 당선 요인을 두고 많은 논평자들이 그가 내세운 미국우선주의와 이민자 배제정책이 경제적 곤궁에 빠진 백인 노동자계급을 효과적으로 공략했다는 진단을 내놓고 있다. 소위‘러스트 벨트’라 불리는...

[218호 영화비평: <4등>(2015)] 경쟁구조에 갇힌 이들에게 던지는 작은 물음표

  정지우 감독의 <4등>(2015)은 1998년 박세리 선수가 LPGA에서 우승한 소식을 전하는 흑백의 뉴스 장면으로 시작한다. 거기서 박세리 선수는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쥔 수많은 선수 중의 한 명이 아니라 IMF 시대를 관통하는 국민에게 희망을 전한 스포츠 영웅으로 호명된다. <4등>은 그런 박세리 선수의 모습 위에 전도유망한 국가대표 수영선수인 어린 광수(정가람)를 포개놓는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있던 그는 연습 때마다 한국 신기록을 갈아 치우더니 급기야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 아시아 신기록으로 우승까지 하게 된다. 이제 광수에게 남은 것은 아시안 게임에서 우승해 박세리 선수처럼 유명한 스포츠 스타가 되는 길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실력을 과신한 채 고향에서 선배들과 노름을 하느라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 소집에 무단으로 불응하게 된다. 뒤늦게 태릉선수촌으로 향한 광수를 맞이한 것은 “이게 다 너를 위한 거다....

[218호 특강취재: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 <아시아학교-인도의 과거, 인도의 오늘>] ‘인도’는 ‘인도’다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는 11월 9일부터 12월 7일까지 매주 수요일마다 서울시 통인동에 위치한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에서 2016 가을 인문학교 ‘아시아학교-인도의 과거, 인도의 오늘’이란 제목으로 특강을 개최한다. 본 강연은 1강 ‘인도는 가난한 오리엔트인가’, 2강 ‘역사와 강을 따라 인더스 문명에서 21세기까지’, 3강 ‘힌두와 카스트는 불변인가’, 4강 ‘간디를 통해 본 인도의 저항운동’, 5강 ‘인도의 민주주의는 왜 역동적인가’로 구성됐다. 이옥순(인도문화연구원장, 연세대학교 연구교수) 강연자는 지난 11월 9일 첫 강의에서 식민지 인도와 사회, 문화, 정치 등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도에 대한 인식을 재조명했다. 인도에 대한 편견 문학이론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adie Said)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을 “동양과 서양 간의 인식론적 구분을 창조하고 확인하는 데 기여한, 서양의 동양에 대한 연구와 서양에 의해 재현되고 지지된 어떤 이념적 관점”이라고 말한다. 즉,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217호 특강취재: 수유너머N, 토요인문학 <장소성의 정치철학>] 블랑쇼와 장소성, 나의 바깥에 선다는 것

수유너머N은 9월 3일부터 11월 12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 3시부터 5시 30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위치한 수유너머N 건물 대강당에서 <장소성의 정치철학> 강의를 진행한다. 총 열 차례에 걸쳐 진행되는 이번 특강은 ‘장소성’을 화두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랑시에르까지 여러 정치 철학자들의 사유를 우리 삶의 구체적인 사례들과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자리다. 심아정(수유너머N 연구원) 강연자는 지난 9월 24일에 열린 세 번째 강의에서 ‘바깥/외부’를 주제로 ‘블랑쇼, 나의 바깥에 선다는 것’을 통해 블랑쇼의 사상과 철학을 조명했다. 40여 석의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높은 참여율을 보이며 시작된 강의는 예정된 강의 시간을 넘어서까지 이어졌다. 강의 내내 심아정 강연자와 수강자는 질의응답을 통해 블랑쇼의 생애와 ‘장소성’의 의미를 되짚으며 진정성 있는 담론을 나눴다.     장소와 장소성의 의미 ‘장소(place)’는 누군가가 속해 있는...

[217호 책지성: 모옌, 『인생은 고달파(生死疲勞』] 죽어도, 다시 살아도 고달픈 여섯 번의 生

  1955년 중국 산둥성 까오미 현에서 태어난 관모예(管謨業)는 “말 대신 글로 표현 하겠다”는 의지로 ‘모옌(莫言)’이라는 필명을 사용한다. 1978년 군 복무 도중에 첫 소설을 쓰기 시작한 그는 1981년 단편 「봄밤에 내리는 소나기」를 통해 중국 문단에 등단했다. 1987년 발표한 장편 『홍까오량 가족 』은 장이모우(張藝謀) 감독의 각색을 통해 「붉은 수수밭」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제작되어 1988년 베를린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이는 모옌의 소설이 전 세계 20여 개국으로 번역 출간되는 계기가 된다. 중국어권 작가 중 가장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던 모옌은 201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묵언(默言)하고, 막언(幕言)하다 2006년 발표, 2008년 국내에 번역되어 상·하 권으로 나뉘어 출간된 장편 인생은 고달파는 2012년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에서 “환상적인 리얼리즘을 민간의 구전문학과 역사, 그리고 동시대에 잘...

[217호 테마서평: 황순원, 소설 속 공간] 6·25 전후(戰後) 공간의 의미 -황순원의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곡예사」 (『황순원 전집 2』, 문학과 지성사, 1992) 「참외」 (『황순원 전집 3』, 문학과 지성사, 1992) 「모든 영광은」 (『황순원 전집 4』, 문학과 지성사, 1992) 작가 황순원은 1915년 평양 대동군에서 출생하여 104편 가량의 시와 단편 104편, 중편 1편, 장편 7편을 창작하고 2000년 작고하셨다. 1946년 5월, 황순원 일가는 토지개혁이 시행되던 평양을 떠나 38선을 넘어 남한에 정착하게 된다. 고향을 등지고 자유를 찾아 내려온 월남민의 고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치러야만 했던 6·25전쟁체험은 작가로 하여금 역사와 현실,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감당해야만 했던 정신적 갈등과 절망감을 그의 문학 속으로 끌어들이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황순원에게 있어서 6·25의 전쟁체험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커다란 억압관념으로 자리 잡게 되고, 그의 문학세계에서 뚜렷한 분기점을 이루게 된다. 6·25 전후 공간의...

[217호 리뷰: 북티크 심야서점] 금요일을 보내는 아주 평범한 방법

    버거웠던 한 주가 가면 금요일 밤이 남는다. 내일이 토요일이라는 기쁨과 그 다음날은 일요일이라는 안도감 때문인지 그 어떤 밤보다 길게 남겨두고 싶다. 금요일 밤을 보내는 방법은 많다. 친구들을 만나거나 집에서 밀린 예능을 보거나 무엇이든 ‘불금’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가끔씩 그 무엇도 내키지 않는 날이 있다. 소음도 고독도 내 것이 아닌 날, 그런 날이면 마음먹고 집을 나서도 정작 발길 닿을 곳이 없다. 그날도 꼭 그런 기분이었다. 몰아치는 일정을 꾸역꾸역 끝내고서 찾아온 유쾌하지 않은 금요일, 그냥 쉴 수도 없는 기분에 ‘심야서점’으로 향했다. 서교동 부근 번화한 거리를 지나면 한적한 혹은 적막한 거리가 나온다. 그 거리에는 새벽 2시에도 홀로 환한 심야서점이 있다. 새벽이 되면 문을 연다는 일본 만화 속 심야식당처럼 금요일...

[217호 영화비평: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2016)] 진정한 보수주의의 가치를 생각하다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Sully)>(이하 <설리>)의 초반부에서 체슬리 ‘설리’ 설렌버거(톰 행크스)는 자신이 조종하는 여객기가 뉴욕 도심의 숲을 가로질러 빌딩과 충돌하는 악몽을 꾼다. 이 이미지는 즉각적으로 우리의 기억을 15년 전 뉴욕으로 이끈다. 9·11은 자신의 영토에서 외부로부터 공격 당해본 적 없는 미국인들에게 심대한 트라우마를 야기했으며, 부시 정권은 상처받은 미국인들의 자존심을 복수심으로 치환시켜 악무한의 폭력으로 치달은 ‘테러와의 전쟁’을 벌였다. 우리는 그 참담함의 끝을 기억한다. 거기에는 ‘나의 국민이 이런 일을 당했으니 내가 책임진다’는 국가적 리더의 어떤 결연함이 있다. 물론 그 결연함이 그릇된 사고방식과 잘못된 방향으로 치달을 때 어마어마한 비극도 있다는 것 또한 우리는 안다. 그것은 책임 있는 자가 자신의 책임을 광적으로 완수하고자 할 때, 역설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무책임의 극치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리고...

[217호 문화비평: 반지성주의] 반지성주의와 타자 혐오

  멀게는 미국에서 부는 트럼프 열풍과 유럽 각국에서 극우정당들의 득세, 가깝게는 여성혐오와 지역혐오를 거리낌 없이 표출하는 ‘일베’ 유저들을 보며 ‘반(反)지성주의’의 폐해를 경고하는 목소리들이 거세다. 그뿐이랴. 하루가 멀다하고 반복되는 정치인들의 폭언과 망언,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천명하는 종교단체들, 21세기에 되살아난 ‘빨갱이’ 사냥과 극우 민족주의까지, 자유민주주의의 역사적 승리를 통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줄 알았던 광폭한 열정이 미디어를 타고 전 세계에 흘러넘치고 있다. 오늘날 시민들은 동료 구성원들에게서 응당 기대하는 책임감과 덕성을 발견하지 못해 좌절감에 휩싸여 있으며, 지식인들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새로이 부상한 대중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탐색하고 있다. 극우 근본주의, 배타적인 민족주의,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 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각각 상이한 맥락을 갖는 이데올로기이지만, 그 근저에 공통적으로 ‘반지성주의’적열정이 깔려 있다는 데에 많은 지식인들이 합의를 이루고...

[216호 문화비평: 올림픽] 올림픽의 정치학

  기록적인 무더위와 함께 여름밤을 수놓았던 전 세계인의 스포츠 축제, 리우 하계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이번 올림픽은남미에서 최초로 개최된 올림픽이자, 최초로 난민 팀이 출전함으로써 지구촌 화합의 뜻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은 종합 8위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나, 예년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졌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4년여를 준비한 선수들의 땀과 열정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닐 터이다. 어쨌거나 지구 반대편에서 펼쳐진 한여름 밤의 축제는 기나긴 열대야를 그나마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리우 하계올림픽을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올림픽이 더 이상 맹렬한 민족주의적 감정이 동원되는 국가대항전이 아니라, 문화적 축제로서의 성격이 강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미디어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올림픽 경기와 관련 뉴스로 도배되었지만, 시민들이 느끼는 올림픽의 무게감은 예전 같지 않은 듯하다. 대체로 종합순위나...

[216호 테마서평: 한여름 밤의 스티븐 킹] 스티븐 킹과 은유로서의 호러

『캐리』(스티븐 킹 저·한기찬 역, 황금가지, 2003) 『샤이닝』상, 하 (스티븐 킹 저·이나경 역, 황금가지, 2003) 『스탠 바이 미(사계)』(스티븐 킹 저·임영선 역, 영언문화사, 1993) 인간 내부의 얼룩 나는 인간의 내부에는 누구나 얼룩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얼룩은 크고 어떤 얼룩은 작다. 어떤 얼룩은 발목 정도 차오르는 얕은 곳에 있고 어떤 얼룩은 마리아나 해구처럼 영혼의 심해에 침잠해 있다. 어떤 얼룩은 성능 좋은 세정제로 닦일 수 있지만 어떤 얼룩은 지워지기는커녕 건드릴수록 더 심하게 영혼을 더럽히는 것도 있다. 광기와 악의, 혐오와 타자화는 이러한 얼룩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다. 인간이 자기 내부에 있는 얼룩에 개성적인 이름을 붙여주기 시작한 것은 근세기 이후의 일이다. 이를테면 프리드리히 니체나 지그문트 프로이트 같은 이가 얼룩을 재발견하고 라벨을 붙이기 시작했다. 이제야 비로소 인간의 얼룩은 고유한 이름을...

[215호 리뷰: 서울시립미술관 덕수궁관, <이중섭, 백년의 신화>展] 끝없는 사랑의 표현

  “나만의 소중하고 또 소중하고 고귀하고 끝없이 상냥하며 우주에서 유일한 사람 나의 빛, 나의 태양, 나의 사랑 모든 것의 주인, 나만의 천사, 사랑하는 현처 남덕씨, 건강하신가요” -제3전시실, 5부 ‘편지화’ 中에서 말이 참 곱다. 무척 아름답다고 느끼면서도, 요즘 세상에 이렇게 편지를 쓰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 어른’이 아닌, 감수성 풍부한 사춘기 문학소년 같다. 저렇게 솔직하면서 애틋한 표현은 오랜만이라서 낯이 뜨거워진다. 만약 저런 내용의 편지를 받는다면 간지러워서 다 읽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 앞으로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토록 순수한 편지를 써 볼 수나 있을까. 일본에 있는 아내에게 이중섭이 보낸 편지다. 이번 전시에서 실제 편지와 그 내용을 번역한 글들이 한 파트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7월경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내고 홀로 남았다....

[216호 특강취재: 철학아카데미, <정치철학 고전강좌2: 근대 이후>] 정의(正義)의 철학자,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

서울 통의동에 위치한 철학아카데미는 7월 14일부터 9월 29일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7시에 <정치철학 고전강좌 2: 근대 이후>를 진행한다. 본 특강은 칼 슈미트부터 에티엔 발리바르까지 총 10명의 20세기 주요 정치 철학가들의 사상을 살펴보고, 오늘날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짚어본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지난 8월 11일 김은희(건국대 교양대학 교수) 강연자가 ‘존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주제로 네 번째 강의를 진행했다. 이날 강연은 존 롤스(John Rawls, 1921~2002)의 가장 유명한 저서 『정의론』(1971)에서 시작됐다. 롤스가 정의론 이후 받은 비판을 토대로 새로이 고민해 만든 결과물이 『정치적 자유주의』(1993)이기 때문이다. 김은희 강연자는 『정의론』과 『정치적 자유주의』, 두 권의 책을 동시 상영하듯 풀어내며 롤스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다. 롤스의 정의론은 많은 이들을 감화시키며 20세기 미국 철학계의 주류를 이루었다. 서구 민주주의 가치를 바탕으로...

[216호 영화비평: <부산행>(2016)] 부산행 열차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영화 <부산행>(연상호, 2016)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동시대 한국 사회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반영했다는 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우리 사회가 점점 계층화되고 경쟁이 심화하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슬픔을 표현한 영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과연 그것을 제대로 구현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많은 이들이 언급한 것처럼 <부산행>이 가지고 있는 재난의 풍경은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 이후의 현실을 반영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사실 그런 식의 해석을 가능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영화 곳곳에 배치되어 있긴 하다. 그런데 이 요소들은 영화 내러티브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요소라기보다 표층적인 차원에서 움직이고 있어 사회적인 조건과 쉽게 결합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부산행>을 대사회적 의미가 있는 영화라고 말하는 작업은 영화 그 자체의 내적 완결구조보다 영화가 풍기는 분위기에 편승한 것처럼 보인다. <부산행>은...

[216호 책지성: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언제까지나 아름다운 봄이기를

  지난 8월, 우리는 유난히 더운 여름을 보냈다. 연일 열대야가 지속되었고 남부지방의 체감온도는 40도를 웃돌았다. 지금까지 알던 여름과는 달랐다. 이렇게 더운 여름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다음 해 그리고 그 다음 해에 올해와 같은 여름이 반복된다면, 우리는 ‘여름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원래의 여름에 대한 기억은 곧 희미해질 것이다. ‘봄’ 역시 마찬가지다. 본디 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과수원은 푸르고, 철새 무리들이 떼를 지어 날아간다. 울새, 산비둘기 등 새들의 합창이 울려 퍼지고, 꿀벌이 윙윙거리며 꽃 사이를 옮겨 다닌다” 그러나 실제 우리가 보내는 봄은 그렇지 않다. 추운 겨울과 더운 여름의 사이에서 짧게 스치고 지나갈 뿐이다. 이제는 희미해져 버린 봄을 위해 쓰인 글이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 1907~1964)의 『침묵의 봄(Silent Spring)』이다. 침묵의 봄은 생태학...

[215호 영화비평: <곡성 哭聲>(2016)] 미끼, 그 의도된 뻔뻔스러움

*다량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곡성 哭聲>이 개봉한 지 20여 일이 지났지만 이 영화에 대한 인터넷상의 논쟁(?)은 식을 줄 모른다. 대체로 기자나 평론가들은 걸작이 나왔다고 극찬하는 쪽이다. 아니 적어도 시종일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몰입하게 만드는 극적 흡인력에 찬사를 보낸다. 여기에 나도 동의한다. 적어도 긴장감 있는 리듬으로 서사를 전개시키는 나홍진 감독의 재능은 칭찬해 줘 마땅하다. 관객들의 반응은 명확하게 호불호가 나뉜다. 어떤 이들은 풀리지 않는 퍼즐을 맞추는 데 열광하고, 어떤 이들은 서사의 허점을 비난한다. 사실, 기자, 평론가들도 역작이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찜찜한 구석을 무시하지 못한다. 나는 그런 찜찜한 구석을 일거에 날려버릴 어떤 명쾌한 해석을 할 생각도, 의도도, 능력도 없다. 애초부터 그런 건 존재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글은...

[215호 문화비평: 여성혐오] 여성혐오의 범죄화와 감정의 정치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혐오’라는 기표를 사회적으로 안착시키면서 다양한 사회적 반응을 낳고 있다. 이미 지난해부터 ‘나는 페미니스트다’선언이나 ‘메갈리아’등을 통해 터져 나오던 반-여성혐오 운동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질적인 단절을 겪은 듯 보인다. 여성을 비하하는 남성들에게 혐오표현을 고스란히 되돌려주고, 마음껏 ‘설치고 말하고 떠들자’던 자부심과 발랄함은 일순간 공포와 두려움으로 전환되었다. 여성혐오에 대한 투쟁이 여성을 차별하고 멸시하는 사회구조에 맞선 ‘문화전쟁’이 아니라, 실질적인 살해 위협에 맞선 ‘생존투쟁’으로 전환된 것이다. 잔혹한 사건 현장이 이내 거대한 추모 현장으로 변모한 현실은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던 공포와 두려움이 얼마나 심원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일상생활에서 24시간 내내 폭력과 추행, 멸시와 관음증적 시선의 위협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여성들의 응어리진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강남역 추모게시판에 붙은 ‘살女주세요’라는 다섯 글자는 여성들의 절박함 심경과 그들이...

[215호 책지성: 아서 단토, 『예술의 종말 이후』] 예술의 종말, 현대미술의 부활

‘모방의 시대’→‘이데올로기의 시대’→‘탈역사적시대’, 이렇게 예술의 역사를 요약할 수 있을까? 다원주의자로써 아서 단토(Arthur C. Danto, 1924~2013)는 위대한 예술은 매우 다양한 형식으로 언제나 가능하다고 믿었다. 미국 뉴욕의 미술평론가로서 그는 미술이론이 아니라 미술에 대한 (주로 뉴욕의) 직접적 체험으로서 자신의 비평을 형성한다. (이러한 사실은 미학과 미술비평 그리고 미술 실천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되는 칸트, 헤겔, 그리고 하이데거 등과는 경우가 매우 다르다. 그들은 실제 작품과 대면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고 더욱이 예술계와 직접적인 교류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의 철학적 체계와는 전혀 다른 비평적 판단을 하는 것이다. (반면에 예술철학은 일반적이어야 한다.) 그의 미술비평은 그가 이룩한 예술철학으로부터 권위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철학과 미술비평은 본질적으로 다른 계열이다. 미술비평은 평론가가 관람객이 보는 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작업하는 수사학의 형식이다. 현대 철학은 다르다. 실재하는 것으로서 세계를 묘사하는 심화된...

[215호 리뷰: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기증 작품 특별전: 시대의 선각자, 나혜석을 만나다] 현실에서 괴리된 삶을 살아내기

  “사남매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신생활에 들면서>, 『삼천리』, 1935.2   어느 수업 중 한 교수님이 우리에게 물었다. 만약 다시 태어나 살아갈 시대를 선택할 수 있다면 언제가 좋겠느냐고. 대부분의 원생들이 이대로 다시 태어나 현재를 살고 싶다고 답했다. 리셋, 인생을 초기로 되돌려 다시 시작하기를 바라고들 있었다. 하지만 나는 1920년대, 혼돈의 시대에 태어나서 무언가를 하고 그로써 역사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수업이 끝난 나른한 어느 금요일 오후, 나는 나혜석을 만나러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으로 향했다. 전통과 혁신, 신구의 갈등과 분열이 휘몰아치던 시대에 태어나 저항하며 살다간 나혜석을 만나러가는 발걸음이 왠지 모르게 무거웠다. 시대의 선각자, 신여성이라 불린 ‘센 언니’의 정체를 알고 싶기도,...

[215호 테마서평: 밀란 쿤데라] 밀란 쿤데라와 키치

『소설의 기술』(밀란 쿤데라 저 · 권오룡 역, 민음사, 2008)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 저 · 이재룡 역, 민음사, 2009) 『불멸』(밀란 쿤데라 저 · 김병욱 역, 민음사, 2010) 소설은 인식의 도구 체코의 브루노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망명한 소설가 밀란 쿤데라의 창작 여정은 흔히 세 사이클로 나뉜다. 첫 번째는 『농담』(1967)에서『삶은 다른 곳에』(1973)로 이어지는 ‘체코 사이클’이다. 작품 소재를 주로 체코라는 ‘국가적’ 틀 안에서 찾은 시기다. 두 번째는『웃음과 망각의 책』(1978),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 『소설의 기술』(1896), 『불멸』 (1990)로 이어지는 ‘중간 사이클’이다. 망명 작가 쿤데라가 국가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신의 소설적 탐구의 정체성을 유럽이라는 대(大)맥락에서 찾는 시기다. 이 시기까지 그의 작품들은 모두 체코어로 씌어져 불역되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느림』(1995), 『정체성』(1997), 『향수』(2000)로 이어지는 ‘프랑스 사이클’이다. 우리가 살펴볼...

[215호 특강취재: 학술단체협의회 봄 기획특강 <가능성의 글쓰기>] ‘몸’과 접촉하는 열림의 공간, 글쓰기

경희대학교 일반대학원 학술단체협의회는 4월 27일부터 5월 25일까지 매주 수요일(5월 18일 개교기념일로 휴강)에 2016학년도 봄 기획특강을 개최했다. 이번 기획특강은 <가능성의 글쓰기>라는 제목으로 총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본 강연은 1강 ‘프로이트의 ‘다른’유산-사후적 글쓰기’, 2강 ‘로넬의 어리석음-백치의 글쓰기’, 3강 ‘낭시의 몸-몸을 쓰기 또는 몸을 향하여 쓰기’, 4강 ‘데리다의 텔레파시-남아 저항하는 편지들’로 구성됐다. 민승기(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강연자는 지난 5월 11일과 5월 25일 두 강의에 걸쳐 낭시의 몸에 대한 사유에 대해 설명하고 그 의미를 재조명했다. 몸을 쓰다 우리는 때때로 나의 몸이 내 몸 같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나의 몸이 무겁게 느껴질 때도 있고, 때로는 가볍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의 몸은 매일, 매시간 시시각각 다르게 다가온다. 글을 쓰고 있을 때 느껴지는 나의 손가락, 컴퓨터...

[214호 리뷰: 일민미술관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 그래픽 디자인의 풍경

    수많은 시각정보들을 마주치며 하루를 보낸다. 길거리의 포스터, 커피숍의 로고, 서점의 책표지들을 훑는 우리의 눈은 바쁘다. SNS와 인터넷에는 업데이트가 끊이지 않는다. 화면 위로 쏟아지는 시각정보를 손가락으로 밀어내며 새로운 자극을 찾곤 한다. 전시 서문은 “시각 매체에 텍스트와 이미지를 배치해 내용을 전달하는 기술과 실천”으로 그래픽 디자인을 소개한다. 일상적으로 길에서 마주하는 시각정보인 광고, 홍보물, 로고 등을 포괄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시장에 들어서면 그 익숙한 일상 속 이미지들은 보이지 않는다. 전시는 지난 10년 동안 서울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 스튜디오’의 그래픽 디자인을 회고한다. 소규모 스튜디오는 문화 영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소수·개인 디자이너들로 이루어져 저예산 문화 영역 작업을 주로 맡았다. 그들의 작업은 2005년 무렵부터 적극적 의미를 띠며 디자인계와 문화 예술계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이들 소규모 스튜디오는 대규모로 향해가는 과정으로서의 소규모가 아닌,...

[214호 테마서평: 청계천 헌책방 ‘설레어함’] 왜 작가들은 죽음이라는 물음을 놓지 못할까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문학동네, 2007) 『슬픈 예감』(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민음사, 2007) 『이반 일리치의 죽음』(레프 톨스토이 지음, 고일 옮김, 작가정신, 2014)     서평을 쓰는 일은 단순히 책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는 것과 다르다. 책의 내용뿐 아니라 저자에 대해서도 파악해야 하고, 그 글이 생산된 시기의 사회적 맥락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 ‘설레어함’이라는 수수께끼 상자를 받아 그것에서 튀어나온 세 권의 책으로 서평을 쓰는 일은 때문에 난해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이와 같은 주제로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무작위로 받은 세 권의 책이 공통된 무언가를 말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각기 다른 국가, 다른 시대의 작가들이 가장 궁금해 하고 집중하는 주제가 있다면 무엇일까. 오히려 무작위로...

[214호 문화비평: 사회적 투자와 민주주의] 금융과 ‘사회적인 것’, 민주주의의 위기

최근 서울시는 아시아 최초로 ‘사회 성과 연계 채권(Social Impact Bond, 이하 SIB)’ 1호 사업을 개시한다고 밝혔다. 이름도 생소한 SIB사업은 민간투자로 공공정책 사업을 시행한 후, 성과 목표를 달성하면 정부가 사업비에 이자를 더해 민간투자자에게 지급하는 제도이다. 일반적인 공공복지사업이 사전에 정부가 예산을 집행하고 사업결과에 대해 정부가 책임을 지는 반면, SIB사업은 사업성과에 따라 사후적으로 예산을 집행하고 사업결과에 대한 리스크는 민간 투자자들에게 분산된다. 정부는 성공한 사업에만 예산을 집행하게 되어 예산 낭비를 줄일 수 있고, 투자자는 사회공헌과 투자 사업을 동시에 실행할 수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SIB를 통해 성과 중심 행정으로 예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민간과 공공이 협력하여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며 높은기대를 드러냈다. SIB사업은 최근 각광받는‘사회적 투자’의 한 사례이다. 20세기 후반 들어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과 빈곤, 환경오염...

[214호 영화비평: <사울의 아들(Son of Saul)>(2015)] 재현의 딜레마와 그 고민의 흔적들

라즐로 네메스 감독의 <사울의 아들>(2015)은 영화가 아우슈비츠 학살 장면을 재현하는 것에 대한 논쟁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 논쟁은 이탈리아 영화감독인 질로 폰테코르보의 <카포>(1959)에 대한 프랑스 영화감독이자 비평가인 자크 리베트의 <천함에 대하여>라는 짧은 비평에서 시작되었다. <카포>는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한 소녀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크 리베트는 이 영화를 천함(abjection)이라는 단어 하나로 규정하는데 그 이유는 영화 중반부에 등장하는 한 장면 때문이다. 수용소 생활 속에서 하루하루 비참해지는 자신의 존재를 비관한 테레즈(엠마누엘 리바)가 전기 철조망에 몸을 던지는 장면이 바로 그것인데, 카메라는 이 장면에서 철조망에 걸린 죽은 테레즈의 몸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자크 리베트는 이 장면에서의 카메라 기법, 즉 테레즈의 죽음을 트래블링 쇼트(traveling shot)로 포착한 것은 카메라의 관음증에 불과하다며 이러한 재현은 관객들을 점차 참혹한 것에...

[214호 특강취재: 서울시민대학 대학연계 강좌(경희대) <동양철학, 그 불멸의 지혜를 읽는다>] 우언으로 열리는 없음의 세계, 장자

서울시에서는 우리 대학과의 대학연계 시민대학 운영으로, 3월 24일부터 6월 9일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4시부터 두 시간씩, <동양철학, 그 불멸의 지혜를 읽는다> 강의를 진행한다. 강연은 우리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전호근 교수가 맡아 진행하며, 서울교정 호텔관광대학 본관 703호에서 이루어진다. 서울시민대학은 서울시민이 인문학 교육을 통해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서울시가 운영하는 배움의 장이다. 2013년부터 시민청 및 3개 연계대학에서 인문학적 성찰·시민민주주의·삶의 터전·예술적 감성 등을 주제로 다양한 인문강좌를 진행해왔으며, 2016년에는 18개소, 총 230개 강좌로 확대·운영되고 있다. 이 중 ‘대학연계 시민대학’은 우리 학교를 포함한 14개 대학이 서울시와 협력 운영해 보다 다양한 인문 전문강좌를 기획해오고 있는 중이다. 그 일환으로 구성된 본 강좌는 동양철학의 주요사상가 10명(공자, 맹자, 노자, 장자, 묵자, 순자, 상앙, 한비자, 손자, 사마천)의 생애와 사상을 매주...

[214호 책지성: 서경식, 『 언어의 감옥에서』] 계속되는 식민주의를 바라보는 재일조선인의 눈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을 맞은 지 어느덧 7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한국인이 일본으로부터 느끼는 심리적 저항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는 패전과 함께 끝이 났지만, 식민지배에 대한 식민국의 사과와 반성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계속되는 일본의 식민주의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재일조선인의 눈으로 언어 내셔널리즘 문제와 ‘계속되는 식민주의’의 청산을 막는 위험으로서 일본 리버럴 세력에 대해 다루고 있는 서경식의 『언어의 감옥에서』(2012)가 어쩌면 그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사회가 계속되는 식민주의를 극복하고 다시금 우리 사회와 화해할 수 있는지 여부를 가늠하는 성찰의 기회를 재일조선인이라는 소수자의 입장에서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서는 매우 의미 있다고 하겠다.   언어의 감옥에 갇힌 경계인   1945년 일본은 패전했고, 조선은...

[213호 문화비평: 예의바른 관계] ‘예의바른 관계’의 지옥

일본 츠쿠바대학에서 인간관계를 가르치는 도이 다카요시 교수는 현대 일본 젊은이들의 관계맺음 형태를 ‘친절한 관계’라고 묘사한다. 그가 말하는 친절함은 타인과 적극적으로 관계 맺고 배려하는 통상적인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적극적인 관계맺음이 상대에게 부담을 줄까봐, 나아가 자신이 상처를 받을까봐 두려워 서로 주의 깊게 처신하는 데서 오는 친절함을 일컫는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 신중하게 인간 관계를 추구하고, 상호 간의 차이를 적극적으로 확인하려 들지 않으며, 조심스레 상대방의 눈치를 살펴 말과 행동을 가린다. 그리하여 친절한 이들이 모인 공간에는 살얼음을 밟듯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상호 간의 암묵적인 합의하에 형성된 ‘분위기’가 그 장소의 인간관계를 좌우한다. 이 관계는 서로 선을 넘지 않는 ‘예의바른’관계인 동시에, 끊임없이 타인의 눈치를 보는 숨 막히는 관계이기도 하다. 일본의 어느 중학생은 교실에서의 이런 관계를...

[213호 영화비평: <동주>(2015)] 행동과 성찰은 같이 갈 수 없는 걸까?

영화 <동주>(이준익, 2015)의 첫 장면은 1935년 북간도 용정에서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를 공산당이 운영하는 인민학교로 내 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벌이는 언쟁이다. 마을 어른 한 명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이 마을이 기독교 신앙으로 하나가 된 곳임을 강조한다. 이에 질세라 세계인민의 평등을 주창하며 당돌하게 인민학교로의 전환을 설파하는 한 젊은이가 나선다. 송몽규(박정민)다. 그는 언변과 패기로 마을 어른들의 말문을 막히게 한다. 그는 영화의 타이틀 롤인 윤동주(강하늘)의 사촌이자 평생을 같이 한 친구이다. 영화의 시작을 주인공이 아닌 캐릭터에게 강한 인상이 남게 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영화 전편에 걸쳐서 몽규는 적어도 행동으로는 동주를 압도한다. 동주는 그러한 몽규의 행동력 앞에서 항상 머뭇거린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 <동주>는 독립운동이든 무엇이든 과감하게 앞에 나서지 못했던 한 청년의...

[213호 책지성: 로타 폰 팔켄하우젠, 『고고학 증거로 본 공자시대 중국사회』] 인문학으로서의 고고학과 고대 중국 연구

  최근 한국의 인문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대학의 구조조정과 맞물려 유행처럼 퍼져가고 있는 말이 있다. 바로 ‘인문학의 위기’라고 하는 것이다. 아카데미 사회의 구조조정 정책과 방향성은 학문 분과의 융합과 통폐합 경향을 가속화시키고 있으며, 실제로 인문학 강의 개설의 축소와 지양으로 인문학 연구자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가중되고 있는 이러한 인문학에 대한 연구자들의 시중 인식과는 다르게 오히려 각종 매체와 대중문화교육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인문학 강의와 교육은 일반 대중들에게 그 접근성과 기회가 훨씬 향상된 것처럼 보인다. TV나 인터넷을 통한 인문학 강연뿐만 아니라 여러 문화센터에서 제공하는 고전에 대한 강독과 강의는 인문학에 대한 위기의식의 고양과 더불어, 역으로 인문학 부흥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최근 이러한 인문학에 대한 위기의식으로 출발한 인문학 고양에 대한 각성과 노력의...

[213호 리뷰: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 우리문화재를 지키다>] 역사를 더듬는 장인정신

  세상의 모든 물건에는 육하원칙이 있다. 저마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왜, 어떻게’에 대한, 눈에 보이지 않는 내용들을 머금고 있다. 그런데 흙 속에, 무덤 속에, 누군가의 창고에 너무 오래있던 나머지 자신이 무엇이었는지 잊어가던 물건들이 있었다. 두꺼운 먼지와 녹으로 덮여 형체를 알 수 없거나 수백 조각으로 흩어져 단지 ‘낡은 물건’이 되어버린 것들의 육하원칙을 밝혀 그들을 ‘문화재’로 만들어내는 것이 보존과학이다. 현대과학기술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전시에서는 전보다 정밀해진 보존과학이 문화재의 정확한 원재료, 제작기술, 성분을 밝히면서 새로운 사실을 찾아낼 수 있게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고리자루큰칼의 칼집장식에서는 녹슬어 가려져있던 ‘이사지왕(尒斯智王)’이라는 글자가 보존처리 중 발견되었다. 이는 지금까지 확인된 고대 신라의 명문 중 왕과 관련된 최초의 것이며 신라사와 고대 문자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보존처리...

[213호 테마서평 : 프리모 레비의 증언문학] 증언 문학의 거장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 저, 이현경 역, 돌베게, 2007) 『휴전』 (프리모 레비 저, 이소영 역, 돌베게, 2010)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프리모 레비 저, 이소영 역, 돌베게, 2014) 나치즘과 홀로코스트라는 20세기 역사의 질곡에서 탄생한 증언문학의 대표 작가 프리모 레비는 1919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출생했다. 그는 1943년 반파시즘 레지스탕스 운동 조직인 “정의와 자유(Giustiziae Libertà)”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었다. 요즘 발사믹 식초로 우리에게도 유명한 모데나 근처의 포솔리 임시집결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다가 1944년 2월 아우슈비츠로 강제 이송되는 무시무시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된 것은 그의 나이 24세, 청춘의 한가운데에서였다. 그 ‘죽음의 수용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레비는 1947년, 첫 작품『이것이 인간인가』를 출간하고, 이후 『휴전』(1963), 『 주기율표』(1975), 『 지금 아니면 언제?』(1982),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1986) 등 증언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작품들을 출간했다. 이들 작품 외에도 다수의 단편...

[213호 특강취재: 푸른역사아카데미 기획 강연<뮤직비디오와 현대미술>] 소리를 화면에 담다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는 <뮤직비디오와 현대미술>이란 주제로 3월 16일부터 5월 18일(4월 6일, 4월 13일 휴강)까지 매주 수요일 오후 2시부터 강연을 진행한다. 음악과 미술, 영상이 합쳐진 뮤직비디오가 생겨난 이후로 뮤직비디오는 전방위적 행보를 보이며 현대 예술의 확고한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 본 강연은 뮤직비디오를 보며 역사, 정치, 음악과 예술 등을 전반적으로 살펴보고자 기획됐다. 총 8강으로 진행되며, 세부적으로 1강 ‘백남준 혹은 엠티비의 도래’, 2강 ‘뮤직비디오 시장의 폭발’, 3강 ‘데이비드 보위/브라이언 이노’, 4강 ‘피터 게이브리얼’, 5강 ‘크라프트베르크’, 6강 ‘데이비드 실리언’, 7강 ‘그 외(글램록, 펑크, 랩, 힙합, 일렉트로)’, 8강 ‘류이치 사카모토와 친구들’로 구성됐다. 허경(철학박사, 음악평론가) 강연자는 지난 3월 23일에 열린 두 번째 강의에서 ‘뮤직비디오 시장의 폭발’이라는 주제로 비디오 아트와 뮤직비디오 탄생, 뮤직비디오 속에 담긴 시대적...

[212호 문화비평: <프로듀스 101>] <프로듀스 101>, 자본과 대중의 공모극

▲“당신의 한 표가 소녀들의 운명을 결정한다.”<프로듀스 101> ⓒ www.huffingtonpost.kr 엠넷의 <프로듀스 101>이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아이돌 연습생 101명을 모아 최종적으로 11명의 아이돌 걸그룹 후보를 선발하는 이 프로그램은 기존 오디션 프로그램이 머뭇거리던 지점에서 과감히 한 발 더 나아간다. 101명의 소녀들이 영업을 개시한 마트의 직원들처럼 일제히 허리 굽혀 “국민프로듀서님,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인사하고, 대형무대에서 “Pick Me, Pick Me”를 노래하며 군무를 추는 영상은 가히 인상적인 스펙터클을 제시한다. 교복풍의 유니폼을 입고 자신을 뽑아달라며 눈웃음을 건네는 101명의 “소녀”들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눈길을 돌리기엔 늦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프로듀스 101>의 취지는 중소 기획사에 소속되어 몇 년간 하염없이 데뷔만을 기다리는 101명의 연습생들에게 “국가대표 걸그룹”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212호 영화비평: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2015)] 권력의 내부를 파헤치는 시선의 실체

우민호 감독의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이하, <내부자들>)은 영화 그 자체보다 스크린 밖의 세상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영화이다. 이것은 이 작품에 대한 비평보다 <내부자들>이 불러일으킨 기시감에 방점을 두고 영화를 사회 환원적으로 해석하려는 태도가 더 많았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징후는 감독의 인터뷰에서도 감지할 수 있다. 우민호 감독은 <내부자들>의 개봉 직후 한 영화 주간지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현실은 씁쓸할지언정 관객이 극장 안에서 통쾌한 낭만을 느꼈으면 한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 이 말은 스크린 밖의 세상이 변화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스크린에 펼쳐진 세상에서 대리만족을 느껴보라는 의미이다. 물론 영화가 감독의 의도를 오롯이 담아낼 수는 없으며 관객 또한 영화를 보면서 감독의 의도를 전부 파악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발언을 언급한 이유는 그것이...

[212호 리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육명심>] 그날, 거기와 여기

       ▲<육명심> 사진을 보고 있는 어느 가족, 부부, 연인의 모습이다. 그날은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대공원역 4번 출구에서 국립현대미술관으로 향하는 셔틀버스를 탔다. 굽이굽이 산길을 달리던 버스는 미술관 앞에서 멈춰 섰다. 내려서 처음 마주한 광경은 산이었다. 수증기로 인한 짙은 안개가 산을 굽이굽이 휘감고 있었다. 그 속에 미술관이 자리했고 단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내 켜켜이 빗방울이 굵어졌고 사람들은 서둘러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필자도 서둘러 <육명심> 전시장으로 향했다. 육명심(1932~ )은 “한국적인 정서와 정체성을 탐구해온 한국 사진의 선구적 작가”라고 알려져 있다. 이번 <육명심>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한국현대미술작가시리즈”의 사진 부문 첫 전시다. 지난 12월 11일부터 시작된 전시는 오는 6월 6일까지 무료로 계속된다. 평소 사진전엔 그리 큰 흥미가 없던 터라 이번 취재는 단지 리뷰를 위한 목적뿐이었다. 그렇게 전시장...

[212호 특강취재: 다중지성의 정원 <현대를 진단하는 사회인문학 - 아프니까 공부한다>] 구분을 넘어서

다중지성의 정원은 1월 15일부터 3월 4일까지 매주 금요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현대를 진단하는 사회인문학 – 아프니까 공부한다>를 진행한다. 총 여덟 차례에 걸쳐 진행되는 본 강좌는 ‘아픔’이 우리 모두의 공통 주제라는 점을 바탕으로, 수강자들에게 다양한 책을 통해 혼자만의 고통에서 벗어나 삶을 헤쳐 나가는 용기와 세상에 대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인(작가) 강연자는 지난 2월 5일에 열린 네 번째 강연에서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의 책,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로 ‘여성혐오’ 안에 숨어 있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 그리고 여성혐오의 근거들을 상세하게 파헤치며 문제의식을 전환했다. ‘혐오’라는 단어는‘싫어하고 미워하다’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혐오’라는 단어를 듣는다면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이 아닌 어쩌면 ‘증오’에 가까운 의미로 해석할지도 모르겠다. ‘혐오’라는 단어는 누군가를 천 배쯤 ‘미워하고싫어하’는...

[212호 책지성: 에밀 뒤르켐, 『자살론』] 무엇이 그들을 죽음으로 이끄는가

   ▲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 1858~1917)  ⓒ blog.naver.com/alliswellbop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삶의 무게가 무거워 ‘죽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죽음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평소에 우리는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아”, “배고파서 죽을 것 같아”, “행복해서 죽을 것 같아” 등 기분이 좋거나 슬플 때도 ‘죽고 싶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생각해보면 죽음이란 단어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일상생활에서 많이 사용하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용어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실 이 말은 가볍게 생각해서도, 쉽게 선택하여 사용해서도 안 된다. 죽음이란 단어 속에는 많은 의미들이 내포되어 있으며 누군가가 던지는 ‘죽고 싶다’라는 말, 그 한마디는 그 사람이 우리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자살에 대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대두되고, 이에 대한 연구도...

[212호 테마서평: 빅토르 위고] 빅토르 위고와 그로테스크

『파리의 노트르담』(빅토르 위고 저. 정기수역, 민음사, 2005) 『레 미제라블』(빅토르 위고 저. 정기수 역, 민음사, 2012) 『웃는 남자』(빅토르 위고 저, 이형식 역, 열린 책들, 2009) 빅토르 위고는 프랑스 문학 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사망했을 때 팡테옹에서 국장을 치를 만큼 국민들로부터 존경 받는 작가이다. 우리도 한번쯤은 그 이름을 들어보아 모두가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그에 대한 이해는 유감스럽게도 대단히 부족한 편이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들 중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많지 않아 우리가 쉽게 구해 읽을 수 있는 것은 『레 미제라블』이나 『파리의 노트르담』, 『웃는 남자』 정도이기 때문이다. 위고가 위대한 작가로 평가받고 국민들에게서 존경받는 것은 그가 낭만주의 이론의 완성자인 동시에 자신의 이론을 작품에서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삶에서도 실천한, 인류의 발전을 믿는...

[211호 문화비평: 대학가 선거 파행] 대학가 선거 파행과 민주주의의 미래

올해도 어김없이 대학가의 선거 파행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성균관대는 후보로 나섰던 두 선거운동본부(이하 선본) 모두 선거운동 기간에 경고가 3회 누적돼 자격을 박탈당했고, 중앙대도 두 후보 중 한 선본이 경고 누적으로 선거 하루 전날 자격을 박탈당했다. 부산의 한 대학에서는 특정인의 후보 등록을 막기 위해 무리하게 선거시행 규칙을 바꾸었다는 의혹이 일었고, 결국 피해학생들이 개정 세칙에 관한 효력정지가처분 신청을 해 법원이 이를 받아들였다. 동덕여대에서는 한 학생이 학교 측으로부터 총학생회장 후보 입후보를 제의받았다는 ‘양심선언’이 터져 나왔고, 결국 선거가 무산되었다. 그나마 긍정적인 소식이 들려온 곳은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한 후보자가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된 서울대 정도였다. 매년 11월이면 대학가는 총학생회 선거와 관련된 잡음으로 한차례 진통을 겪는다. 선본들 간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와의 갈등과 마찰, 학교 측의 선거 개입, 투표율...

[211호 영화비평: <검은 사제들>(2015)] 다시 돌아온 그는 소녀를 구할 수 있을까

장재현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인 <검은 사제들>(2015)이 4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베테랑>(류승완, 2015)이후 최고의 흥행작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측과 함께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장르적 특성이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관심의 화살표는 두 방향으로 갈라지는데, 한쪽 길은 오컬트 무비의 계보와 특징 확인하기라는 이정표를 가지고 있다. 그 길을 따라가 보면 <악마의 씨>(로만 폴란스키, 1968)와 <엑소시스트>(윌리엄 프리드킨, 1973)를 호출한 다음, <검은 사제들>과 비교하는 이들을 만날 수 있다. 이들은 개별 영화에 대한 깊은 이야기보다 영화들을 가로지르는 공통적인 특징들에만 관심을 보인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다른 화살표는‘한국형 오컬트 무비 찾기’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화살표는 <너 또한 별이 되어>(이장호, 1975)를 시원으로 삼은 다음, <퇴마록>(박광춘, 1998)을 거쳐 <퇴마 : 무녀굴>(김휘, 2015)에 도착하는 여정을 가지고 있다. 요컨대...

[211호 특강취재 : 푸른역사아카데미 기획 강좌 <한국 미술사>] 화려미의 시대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 위치한 푸른역사아카데미는 지난 11월 6일부터 오는 12월 18일까지 매주 금요일, <한국 미술사> 기획 강좌를 진행한다 총 6주에 걸쳐 진행되는 본 강좌는 고려시대부터 19세기까지 한국 미술의 전개를 통시적으로 살펴볼 뿐만 아니라 공시적 상호관계 등과 같이 국가를 넘나드는 교류와 영향을 다루고 있어, 복합적인 미술사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도록 기획됐다. 류승민(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강연자는 지난 11월 6일과 20일에 열린 첫 번째와 두 번째 강의에서 ‘보편문명 속 특수미의 발현’이라는 주제로 고려미술을 개괄하였다. 미술의 중심은 서화이다. 그러나 고려시대는 회화작품이 거의 남아있지 않고, 조각이나 불화와 같은 공예의 일부를 가지고 살펴봐야 하기 때문에 고려의 미술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화려한 승탑과 탑비 승탑은 부도탑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고승이 열반에 들고, 다비를 한 후에 수습한 사리를 모아서...

[211호 테마서평: 일본 문학 속 섹슈얼리티, 『노부코』, 『一本の花(한 송이 꽃)』, 『乳房(유방)』] 미야모토 유리코의 몸, 그리고 언어- 경계를 그리는 섹슈얼리티

『노부코』(미야모토 유리코 저. 한일여성문학회 역, 어문학사, 2008) 『一本の花(한 송이 꽃)』(미야모토 유리코, 靑空文庫, 1927) 『乳房(유방)』(미야모토 유리코, 靑空文庫, 1935) 이성애주의에 입각한 로맨틱 러브의 체현자로서, 동성과의 우애적 사랑의 실천자로서, 그리고 만년은 프롤레타리아 여성의 대변자로서, 문자 그대로 불꽃같은 삶은 살다간 신여성 문학자 미야모토 유리코. 그녀가, 1916년 단편『가난한 사람들의 무리』를 발표한 지 1세기가 지나, ‘섹슈얼리티’라는 주제로 지금, 여기에 소환되었다. 근대 로맨틱 러브에 의한 결혼, 6년간의 결혼 생활을 경험한 후에 감행한 이혼, 여자로서 겪은 삶의 편린들을 글로 엮은 장편소설『노부코』, 이혼 후 동성 유아사와의 아름다운 날들을 형상화한『한 송이 꽃』, 그 후 양성애주의를 표방하며 선택한 결혼, 그러나 사상범으로 억류되어 부부로서의 생활이 불가능해 낳는 성을 억압당한 시간들. 프롤레타리아 작가로서 여성 노동자들의 비애를 그린『유방』등은, ‘섹슈얼리티’라는 주제를 이야기하기에 적절한 텍스트이다....

[211호 리뷰: 박노해 인디아 사진전시회 <디레 디레>] 천천히, 여유롭게

세상은 바야흐로 급변하고 있다. 도시에는 눈 깜짝할 새 수십 층의 마천루가 들어서며, 출근길 사람들의 발걸음은 바쁘기만 하다. 들녘을 가득 채우던 농민들의 흥겨운 노랫소리와 골목을 뛰놀던 어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점차 사라진다. 옛 모습을 간직하지 못하고 점차 삭막하게 변해 가는 현대인들에게 선인들이 물려주는 삶의 지혜를 보존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인도는 어떨까? 인도는 세계 GDP 순위 3위를 기록하며 급격한 성장을 보이는 국가이다. 인도 서부의 대도시 뭄바이에는 고층빌딩이 하늘을 찌르고, 첨단 IT산업이 도심에 가득 들어서 있다. 그러나 동시에, 길거리에는 암소가 느릿느릿 걸어가며, 인도 인구의 75%는 여전히 농민으로 구성돼 있다. 민중들은 대지의 노동과 소박한 살림을 그대로 잘 보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한 라 카페 갤러리에서 지난 7월 17일부터 열린 박노해의 인디아...

[211호 책지성:제레미 리프킨 『엔트로피』] 세상에 공짜는 없다!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 1945~) 오늘날 현대 인류는 물질적 풍요를 향유하며 살아간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인류는 ‘생존’을 넘어 ‘생활’이 가능해졌으며, 사람들은 이러한 혜택을 스스로 일구어 낸 자랑스러운 문명의 산물로 여긴다. 하지만 이러한 ‘생활’을 위해 우리는 혹독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많은 관심을 두지만, 이면에 감춰진 혹독한 대가의 실체는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다. 대체 인류는 물질적 풍요와 무엇을 맞바꾼 것일까?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 1945~)은 다양한 저서를 통해 과학기술의 발전이 경제, 노동시장, 사회,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주로 다루어 왔다. 『육식의 종말 (Beyond Beef)』, 『소유의 종말(The Age of Access)』, 『수소혁명(The Hydrogen Economy)』등의 저작을 통해 다양한 과학기술의 출현과 세계 경제 및 환경 변화를 엮었다. 그중『엔트로피(Entropy)』는 열역학 제2법칙의 개념을 이용해 전...

[210호 리뷰: 서울역사박물관 광복 70주년 특별 기획전 <남산의 힘> 展] 남산의 기억

“옛날에 케이블카도 있고 어린이회관도 있고, 우리 때는 유일하게 어린이가 입장권 내고 들어가면 오므라이스가 90원이었고, 맨 위층에 전망 층이 회전을 했었어요.” -1970년 남산의 어린이회관 개관하다(1970년), 김희웅(메모리인 서울 프로젝트)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남산은, N서울타워로 바뀐 지 10년이 다 되었지만 여전히 내 마음속에는 남산타워인, 앞산일 뿐이다. 물론 친구들과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팔각정에서 김밥을 먹은 곳이며,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계단 뽀 뽀 장면을 따라하겠다고 남자친구와 함께 갔던 곳이기도 하고, 유명한 돈가스를 먹어봐야겠다고 꾸역꾸역 올라가기도 한 곳이다. 어쩌면 남산은 서울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비슷한 기억을 선사해 준, 참으로 가까운 곳이 아닐까 싶다. 그런 남산이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다들 놀라지 않을까. 남산은 행정구역상 서울특별시 중구와 용산구의 경계에 걸쳐 있다. 2009년...

[210호 특강취재: 2015학년도 학술단체협의회 하반기 학술특강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현상’으로부터 현상학을 바라보다

▲이은정 강연자가 현상학의 특징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경희대학교 일반대학원 학술단체협의회는 10월 2일부터 11월 13일까지 매주 금요일, 서울교정 본관 401호에서 2015학년도 하반기 학술특강을 개최한다. 철학을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정신 현상학’이라는 말쯤은 들어봤을 법도 하지만‘물질 현상학’은 다소 생소하다. 물질과 현상학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현상학은 과연 무엇이고 현상학이 탐구 과제로 삼는‘물질’이란 어떤 것일지. 본 강의는 <현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총 여섯 차례에 걸쳐 진행된다. 이번 특강은‘고전적’현상학에서 미셸 앙리의 현상학이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하는 데 그 목표를 두고 기획됐다. 지난 10월 2일 열린 첫 번째 강의에서 이은정(동국대학교 다르마칼리지) 강연자는‘후설 현상학의 성립과정’을 주제로 강의했다. 후설 현상학의 성립 미셸 앙리(Michel Henry, 1922~2002)는 현상학에 있어‘최후의 대가’라고 잘 알려져있다. 독일의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에서 시작되고 하이데거 등을 통해 활력을 얻은‘현상학...

[210호 책지성:볼테르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최선의 세상’만을 외칠 것인가

  ▲저서『철학사전』 1843년판에 새겨진 70세의 볼테르(Francois Marie Arouet)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루소, 디드로, 몽테스키외와 더불어 18세기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시인, 극작가, 비평가, 역사가이다. 그는 1718년 비극『오이디푸스』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지만 기성의 제도와 권력으로부터 늘 자유로웠던 그의 글과 말에 대한 논란과 처벌은 끊이질 않았다. 이후 귀족과의 다툼으로 인해 바스티유 감옥에 갇힌 그는 영국으로 추방됐다. 사건은 장차 그의 삶과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영국에서 그는 로크로 대표되는 경험 철학, 뉴턴의 자연 철학, 그리고 입헌주의와 정치적 자유를 접하면서 정치와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어서『철학 서간』을 발표한다. 이후 그의 철학적 작업들은 인간의 오류를 고발하는 데에 집중된다. 오늘날 그는 그가 이름 붙인‘철학적 콩트’라는 소설 장르의 작가로 주로 기억된다. 철학적 콩트는 우화적 소설로서 볼테르 자신의 철학적...

[210호 문화비평: TV 속 군대 문화 다시보기] <진짜 사나이>의 위험한 흥행

MBC의 리얼 예능 프로그램 <진짜 사나이>가 처음 방영될 때만 해도 의구심이 앞섰었다. 웃음기와는 거리가 먼 군대가 예능프로그램의 소재가 되나 하는 의아함과 더불어 군대 생활이 과연‘리얼하게’재현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었다. 그러나 <진짜 사나이>는 MBC의 일요일 간판예능프로그램으로 부상했고, 숱한 화제를 낳으며 몇몇 연예인을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특히 여자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여군 특집’은 기존의 주 관람층이던 여성들에 더해 남성들마저 포섭하면서 <진짜 사나이>의 흥행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남성의 입장에서 여성들이 군대 생활에 적응하며 좌충우돌하는 모습은 꽤나 재미있는 볼거리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거기엔 가학적이고 관음증적인 시각적 쾌감에 더해 여성이나 미필자들에게 군생활의 경험을 으스대며 ‘가르칠’때의 만족감마저 더해진다. 한편 전통적으로 일반인들에게 군대의 실상을 알리는 데 부정적이었던 군대가 내무반을 비롯해 군 시설, 무기, 훈련 모습...

[210호 영화비평: <마션(The Martian)>(2015)] 미래를 현실로 만드는 영화적 전략

리들리 스코트가 만든 영화 <마션(The Martian)>(2015)은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가 화성에서 홀로 남아 고군분투하는 영화다. 나사(NASA)의 화상탐사계획의 일환으로 화성에서 탐사 중인 아레스 3(Ares III) 대원들은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 모래 폭풍을 만나게 된다. 이 와중에 마크가 모래 폭풍에 휩쓸려 실종되자 그가 죽었다고 판단한 다른 동료들은 화성을 서둘러 탈출하게 된다. 그러나 마크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통신시설이 마비된 탓에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남은 식량을 아낀다 해도 한 달 정도 밖에 버티지 못할 것 같다. 남은 방법은 구조대를 기다리는 것뿐. 하지만 지구에서 화성까지는 무려 4년이라는 시간적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다. 마크는 여기서 죽을 수 없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남은 장비들을 살펴보기 시작한다. 어떤 이들은 우주에 홀로 남은 주인공을 다룬다는 이유로 이 영화를...

[210호 테마서평: 쿳시의 소설 세계, 『야만인을 기다리며』, 『마이클 K』, 『철의 시대』] 쿳시와 타자의 문제- 타자의 인질이 되다

『야만인을 기다리며』(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들녘, 2003) 『마이클 K』(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들녘, 2004) 『철의 시대』(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들녘, 2004) 작가는 진공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 속으로 태어나 그것을 자양분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작가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태어나 살았느냐 하는 것이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2003년도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J.M. 쿳시도 예외일 수 없다. 그는 1940년, 남아프리카 남단에 위치한 케이프타운에서 태어났다. 인종적으로는 아프리카너(Afrikaner), 즉 네덜란드계 백인이었고 언어적으로는 아프리칸스(Afrikaans, 네덜란드어에 뿌리를 둔 아프리카너의 언어)를 구사했다. 달리 말해, 그는 흑인들과는 다른 언어를 쓰는 네덜란드계 백인식민주의자들 속으로 태어났다. 이것은 그가 어떤 피부를 가졌느냐에 따라 사회적인 위계가 자동적으로 결정되는 인종차별적인 공간에서 태어났다는 말이다. 그래서 쿳시는...

[209호 문화비평: 신조어에 비친 우리 사회] 헬조선에서 죽창을 들라?

‘헬조선’, ‘금수저’, ‘죽창’.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십대들이 한국사회를 묘사하며 즐겨 쓰는 어휘들이라고 한다. 헬조선과 금수저는 신문지상에도 종종 등장하는 표현이지만, 죽창은 웬만해선 그 코드를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마침 <신동아> 8월호에 실린“이 지옥 같은 나라 내게 죽창을 달라!”(유설희 기고)는 기사가 이 새로운 세태의 맥락을 잘 정리하고 있으니 따라가 보도록 하자. 헬조선은 말 그대로 지옥 같은 한국사회를 비유한 말이다. 유사한 용어로‘불지옥반도’도 있는데, <디아블로>라는 온라인 게임에 등장하는 최고난이도의 ‘불지옥’단계와 ‘한반도’를 합성한 말이다. 당대의 이십대에게 한국사회란 온갖 악마와 몬스터가 우글대는 지하 감옥(dungeon)과도 같은 셈이다. 헬조선을 특징짓는 것은 철저한 계급사회라는 점인데, 이는‘금수저’와‘똥수저’의 대비를 통해 표현된다. “유치원 시절 금수저는 영어유치원을 다니지만, 똥수저는 어린이집에서 교사에게 폭행당한다. 초·중·고교 시절 금수저는 어학연수를 떠나지만, 똥수저는 PC방에서 게임을 한다. 대학 시절...

[209호 영화비평: <베테랑>(2015)] 장르의 불완전 연소가 가져온 무기력증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통쾌함으로 수렴된다. 그것은 아마도 비판의 대상을 정확히 보여주고 징벌하기 위해 노력하는 주인공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베테랑>은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안하무인 성격의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를 베테랑 형사 서도철(황정민)이 법의 이름으로 처단하려 노력할 때 발생하는 희열을 무기로 삼고 있다. 여기에 감독 특유의 액션 연출과 웃음을 유발하는 대사 등이 관객의 감정이입을 입체적으로 도와준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미 많은 이들이 “집단 욕망을 대리충족해 주는 스크린”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즉,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법한 재벌 단죄를 영화가 대신해서 충족시켜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답은 <베테랑>의 자리에 다른 장르 영화가 들어서도 완성된다는 허점을 가지고 있다. 사실 <베테랑>은 통쾌함보다 현실에 대한 회피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 영화이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우선 <베테랑>이 가지고...

[209호 리뷰: 광복 70주년 기념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 展] 역사를 기억하다, 그리고 느끼다

역사의 한 줄에는 엄청나게 많은 삶들이 있다. 우리는 광복 이후 우리의 근현대사를 크게 한국전쟁,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 등의 키워드로 묶어 설명하고 기억하곤 했다. 키워드가 되는 단어 안에 그 시대를 이루는 사람들, 사건들 그리고 그 것들이 만들어내는 시대감성이 압축되어 담기는 것이다. 그로써 우리는 그 엄청난 삶들을 편리하게 이야기하고 쉽게 기억할 수 있었다. 이 전시는 그 단어들로 묶여있던 시대의 삶들을 풀어헤쳐 놓은 듯하다. 또한 한국전쟁,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 등을 다루지만, 그 단어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과거를 불러온다. 전시장 안에 헤쳐진 다양한 삶들은 우리의 근현대를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전시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1부는 전쟁으로 인해 분단된 조국, 떠나온 고향과 헤어진 가족을 그리워하는 전후의 삶을 다룬다. 2부는 1960~80년대, 단기간에 이루어진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부정된 근대성을 극복하려는 민주화를 주제로 한다. 마지막으로...

[209호 책지성: 루소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실속 없는 시대, 순수함을 찾아서

▲르모니에, <조프랭 부인 살롱에서 볼테르의『중국의 고아』낭독회>, 1812. 18세기 프랑스 제1급 지식인과 교양인의 구심점이었던 조프랭 부인의 살롱. 조각상의 왼쪽으로 다섯 번째가 루소다.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는 말한다. “학문과 예술이 발전을 거듭함에 따라 우리의 영혼은 타락했다.” 인간의 이성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던 계몽주의 시대에 자신 또한 학자였던 루소의 이러한 주장은 아이러니해 보인다. 루소는「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이런 생각을 세상에 펼쳐냈다. 1749년 ‘학문과 예술의 부흥은 풍속을 순화하는 데 기여했는가?’라는 주제의 프랑스 디종 아카데미 논문공모에 응모하여 대상을 받은「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는 발표 당시 지식인들의 큰 반박을 불러일으켰던 논문이었다. 당돌한 이 논문은 루소에게 유명세를 안겨주었다. 루소가 비난하는 것은 절대로 학문이 아니다. 오히려 “학문은 재능과 이성의 걸작”이라며 학문을 칭송한다. 그는 자신이 미덕을 옹호할 뿐이라고 밝힌다. 즉, 미덕 없는 학문을 비난하는 것이다....

[209호 사진으로 말하기] 제주, 상실(喪失)과 망각(忘却)

18,000여 신들이 인간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제주를 처음으로 방문했던 날을 기억한다. 눈길 가는 모든 곳에, 어쩌면, 신이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태양이 없이도 눈부신 하늘과 우유거품 같은 구름 속에 존재하는 신들이 천혜의 제주를 지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평생 이곳에서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친구의 어머니 댁인 서촌에서 며칠을 묵었다. 친구의 동생이 말했다. “제주 사람들은 4·3 때문에 육지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4·3이라니. 서울에서 찾아온 여행객은 4·3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잊어버렸다. 인터뷰 준비로 임흥순 작가의 <비념>을 봐야 했다. 제주 4·3에 관한 이야기였다. 영화는 4·3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육지 사람들에 의해 제주의 여러 곳에서 많은 민간인이 학살되었고 경험자들은 아직도 그 당시를 회상하기 힘든 사건”이라고. 지난 2007년 5월 18일, 제주도 강정마을 주민은 미군해군기지 반대 투쟁을 시작했다. 그동안 673명이...

[209호 특강취재: 2015학년도 학술단체협의회 여름 기획특강 <슈퍼히어로 영화, 다르게 보기!>] 영웅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영화적 ‘눈’쓰기

▲김수 강연자가 슈퍼히어로 영화의 사회·문화적 의미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경희대학교 일반대학원 학술단체협의회(이하 학단협)는 지난 8월 6일부터 21일까지 매주 목, 금(오후 3시~6시), 서울교정 오비스홀 251호에서 여름 기획특강을 개최했다. 대중영화의 영역에서 어느덧 슈퍼히어로 프랜차이즈를 빼놓고서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논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대중들에게, 그리고 일부 식자층들에게 슈퍼히어로 프랜차이즈는 그저 화려한 스펙터클로 무장된 단순한 블록버스터로만 여겨지는 듯하다. 본 강연을 맡은 김수 영화평론가(씨네 21)는 이러한 일반 대중과 엘리트적 시선의 한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미국의 결핍된 신화로서, 변화된 영웅상을 반영하는 거울로서 슈퍼히어로 프랜차이즈를 바라볼 수는 없는가. <슈퍼히어로 영화, 다르게 보기>라는 주제로 구성된 본 특강은 세부적으로 1강 ‘슈퍼히어로의 역사와 사전지식’, 2강 ‘현대 신화로서의 슈퍼히어로 – <슈퍼맨>’외, 3강 ‘미국신화적 영웅의 붕괴 –...

[209호 테마서평: 고미숙의 근대성 3부작, 『계몽의 시대』, 『연애의 시대』, 『위생의 시대』] 근대를 바라보는 세 개의 시선

『계몽의 시대 : 근대적 시공간과 민족의 탄생』(고미숙, 북드라망, 2014) 『연애의 시대 : 근대적 여성성과 사랑의 탄생』(고미숙, 북드라망, 2014) 『위생의 시대 : 병리학과 근대적 신체의 탄생』(고미숙, 북드라망, 2014) 메르스 코로나바이러스. 올 상반기 우리 사회를 가장 뜨겁게 달궜던 말이다. 메르스 발발과 함께 질병관리 주체인 국가권력은 메르스 환자들의 인격과 개성을 숫자 아래로 밀어내고 사망률 낮추기에 열을 올렸다. 권력이 죽음이 아닌 사망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임상의학에 의해 죽음을 전체적·일반적·통계적 수준에서 장악하면서부터이다. 푸코가 근대 국가와 규율 사회의 등장을 감옥, 임상병원, 정신병동과 같은 폐쇄공간의 공포관리로 설명한 바 있듯 메르스사태는 우리가 근대에 기획된 공간 안에서 안주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계몽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근대는 서구에서 유입된 ‘modern’의 번역어로, 서구에서는 대략 16세기 말에서 19세기 중엽까지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