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호 책지성: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왜 인간은 사는가?

빅터 프랭클(Viktor Emil Frankl, 1905~1997) 누구나 잘 사는 것을 꿈꾼다. 그러나 느닷없이 찾아오는 삶의 공허함에 우리는 묻는다.‘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인가?’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성취에 집착하거나 술, 도박, 마약 등의 일시적인 자극에 빠지기도 하지만 공허함은 해결되지 않는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에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결론은 존재할 수 없다. 삶이란 막연한 것이 아닌,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시련을 겪는다면, 그 시련은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다. 그 시련을 겪는 사람은 세상에서 유일한 한 사람이며 누구도 그 시련에서 구해줄 수 없고, 시련을 대신 짊어져 줄 수 없다. 이 시련은 삶이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그 방식을 결정하는 본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다. 강제수용소와 일시적인 삶 제2차...

[239호 영화비평: <벌새>(2019)] 1994년 서울에서 찾은 나의 이야기

연말이 되면 각종 시상식이 열린다. 매년 저런 시상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반문하면서도 결국에는 수상결과를 확인하게 된다. 이것이 상의 힘인 것 같다. 그 영화의 가치를 결정짓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그 영화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것. 이 글을 쓰는 11월 중에도 두 개의 한국 영화상에서 수상작을 발표했다. 작품상과 감독상은 모두 <기생충>(2019)에게 돌아갔다. 추측컨대 이후로도 <기생충>은 중요한 상을 받게 될 것이다. 물론 <기생충>의 크레딧에 영원히 소개될 타이틀은 ‘PALME D’OR (황금종려상)’이 유일하겠지만 말이다. 한국영화 100년이 되는 2019년에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이라는, 영화처럼 드라마틱한 사건을 기어이 이루어낸 것만으로도 <기생충>은 한국영화사에 반드시 언급되는 영화로 남을 것이다. <기생충>의 해라고 불릴만한 2019년, ‘수상’이라는 사건과 관련해서 <기생충>만큼이나 주목해야 할 한국영화가 한 편 더 있다. ‘전 세계...

[239호 학술대회취재 : 2019 지리학대회] 세상을 공간적으로 해석하기

과거 인류가 지구상에 있는 모든 대륙에 도달하고 마침내 그것을 하나의 지도 위에 나타낼 수 있게 되었을 때, 지리학자들은 “지리학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탐험을 통한 지식 축적과 지역에 대한 백과사전식 서술에서 벗어나, 지난 수십 년간 정치·경제·사회·문화·역사·관광·GIS·빅데이터 등 다양한 연구들은 근본적으로 위의 물음에 답을 하기 위한 시도 였다. 지난달 22일(금)과 23일(토), <2019 지리학대회 : 세계화 4.0시대 의 사회통합과 포용, 지리학의 접근>이 서울시립대학교에서 개최됐다. 지리학대회는 국내 지리학 관련 학술단체와 국공립 연구기관 들이 참여하는 학술대회다. 크게 인문·자연·GIS·사진 등의 분과로 나뉘며 다양한 학술단체와 연구자, 학생들이 모여 발표하고 토론하며 의견을 나눈다. 본 지면에서는 지리학대회에서 논의되었던 발표 내용을 중심으로 지리학의 ‘세상을 공간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세계화 4.0시대, 지리학 ‘세계화 4.0시대’라고들 한다....

[239호 테마비평 : 이상과 이상문학상] 이상이라는 신화 다시 쓰기 – 「서울의 달빛 0장」에서「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까지 –

이상(1910~1937) 우리 문학의 신화, 이상 우리는 모두 신화를 원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신화를 가지고 있다. 현대의 신화는 현실의 부정성을 반영한다. 현실이 어둡고 고통스러울수록, 신화의 빛은 찬란해진다. 신화는 현실을 넘본다. 신화를 통해 현실 그 너머를 엿보며, 현실로부터의 탈주를 꿈꾼다. 때로 신화는 그 길의 한 모퉁이를 드러내 보여주기도 한다. 얼핏 드러나는, 한순간 빛났다가 사라지는 그길 때문에 신화는 살아남고 전해진다. 그러나 신화는 현실을 완전히 넘어설 수는 없다. 완전히 넘어서버린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신화가 아니라, 그냥 이야기일 뿐이다. 그래서 신화는 현실에 붙들려 있다. 매번 신화는 다시 쓰여지거나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신화가 다시 쓰일 때, 반복되지만 똑같이 반복되는 것이 아닌 방식으로 신화가 다시 쓰일 때, 그 신화는 여전히 현실성을 갖는다. 그 신화가 현실성을 잃는다면, 현실이...

[239호 리뷰: 국립현대미술관, 〈김순기 : 게으른 구름〉] 시공간 속에 존재하는 예술

▲ 김순기 「조형상황 III – 보르도의 10월」 1973 ⓒ 국립현대미술관 하나의 원이 시공간 속에 존재할 때, 보는 이는 원 속에 존재하는 다른 차원의 시공간을 엿볼 수 있다. 순간적으로 저 세상을 들여다본 관찰자는 그제야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고 환희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하나의 크고 멋진 원을 구현하기 위해 예술가들은 매 순간 더 상위의, 더 적절한 생명력을 꽃 피우려 매일의 수행을 마다하지 않는다. 국립현대미술관(MMCA)에서 진행 중인 〈김순기 : 게으른 구름〉의 작가 김순기(1946~) 역시 40여 년의 시간 동안 꾸준한 수행을 지속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일찍부터 철학과 예술, 테크놀로지가 결합된 퍼포먼스와 비디오, 글쓰기 작업 등 다양한 영역의 교류와 실험에 관심을 두었던 그녀의 예술관을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다. 순간을 그려내는 행위, 다시는 없을 시적인...

[239호 문화비평: 독립출판 문예지] ‘영향력’ 만들기

최근 독립출판과 독립 문예지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기존 소수권력 중심의 문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주된 이유를 바탕 으로 문화·경제적 여건 및 출판·유통 시스템의 변화 덕분이다. 그러나 과연 독립출판 문예지는 얼마만큼의 지속가능성 을 가지는 것일까? 이에 본보는 독립문예지《영향력》의 발행인 은미향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지금의 문학 생태계의 이야기를 담아보았다. ▲ 독립출판 문예지 《영향력》 〈문학주간 2019 : 문예지 100주년 공동 심포지엄 〉에서 문예커뮤니케이션학회(공병훈 학회장)가 최초의 문예지 《창간》 발간 100주년을 맞아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문예지 독자 의 92.9%가 창작자이고 일반 독자는 7.1% 정도라고 한다. 사실 ‘문예지가 문인들만의 책’이라는 자조 섞인 평을 들어온 건 한두 해 만의 일은 아니다. 그런데, 문예지를 읽는 사람 열 중 아홉 이 창작자라는 사실이 정말 문제인 걸까. 독립출판 문예지들의...

[238호 영화비평: <조커>(Joker, 2019)] 조커의 광기는 왜 고담 시민의 분노와 뒤섞일 수 없는가?

영화 <조커>(Joker)가 개봉 열흘 만에 320만 관객을 넘어섰다고 한다(10월 12일 현재).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이 320만을 넘어섰다니 놀라운 일이다. 이 말은 역으로 DC 코믹스와 워너 브러더스가 창조한 대중영화가 어떻게 세계 3대 국제영화제(도대체 이런 건 누가 정하는 걸까?)에서 최고상을 받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더러 ‘할리우드’ 메인스트림이 아닌 ‘미국’ 인디영화가 칸, 베니스, 베를린 등에서 최고상을 받는 경우는 있다. 그러나 주류 중의 주류인 할리우드 영화, 그것도 슈퍼히어로 영화의 외전 격인 영화가 상을 받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물론 3대 국제영화제는 언제나 할리우드에 러브콜 해왔다. 블록버스터급 영화들이 개막작이나 폐막작으로 상영된 적은 부지기수다.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할리우드만한 것은 없다. 출연 스타들의 레드카펫이 없는 축제가 무슨 축제이겠는가? 따라서 할리우드는 축제를 빛내 줄 들러리로서...

[238호 테마비평] 영화 속 이미지와 음악의 내러티브 전달 방식 차이

▲ 영화 <E.T.>에서 주인공 일행이 하늘을 나는 장면과 그 장면에서 사용된 현악기 고음 파트 악보. 영화 이미지와 영화 음악 영화는 작가의 상상이나 현실의 일부분에 의미를 더하여 만들어진 창작물로, 철학·과학·인문 등이 내포된 총체적 예술이다. 영화는 단순히 즐거움을 향유하는 것에서 나아가 인간의 정신세계, 심리상태, 사회현상을 표현하는 매체로서 적합하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미장센이나 사운드에 의미를 부여하여 영화를 구성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여러 학자들은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분류하고 의미를 찾아 여러 관점에서 영화를 분석하고 연구하여 그 역할과 기능을 분석한다. 영화는 크게 이미지와 사운드로 분류되며 각 요소의 역할과 내포된 의미를 밝히는 것으로 작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먼저 이미지의 분석은 주로 카메라 무빙, 조명 및 색채의 구성, 공간의 배치, 사건, 사물, 등장인물의 특징(성격, 배경, 의상...

[238호 리뷰] 전태일 기념관 : 아들과 어머니의 꿈

“여러분 오늘날 여러분께서 안정된 기반 위에서 경제 번영을 이룬 것은 과연 어떤 층의 공로가 가장 컸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여러분의 애써 이루신 상업 기술의 결과라고 생각하시겠습니다만은 여기에는 숨은 희생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즉 여러분들의 자녀들의 힘이 큰 것입니다. 성장해가는 여러분의 어린 자녀들은 하루 15시간의 고된 작업으로 경제 발전을 위한 생산계통에서 밑거름이 되어 왔습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둘러싸인 전태일 기념관 입구에 걸려 있는 근로진정서의 한 조각이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내가 밟고 있는 지금 이 땅이 누구 위에 세워진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심 이것이 위험한 생각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동반하면서. 나는 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말 괴롭다는 것은……” 전태일 열사는 대구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잦은 사업 실패로 이사를 많이 다녔다고 한다. 그러던 중...

[238호 특강취재] 세종예술아카데미 <이야기가 있는 서양미술사> : 종합적 큐비즘으로 나아간 피카소의 질문

세종예술아카데미는 2019년 가을학기를 맞아 <이야기가 있는 서양미술사> 특강을 개최했다. 강의를 맡은 이현 미술사가는 홍익대학교 미술사학 석사와 파리 1대학 미술사학 박사를 취득한 미술사의 석학이다. 현재는 프랑스에서의 미술관 옆 도서관의 경험을 살려 도서관옆신호등이라는 도서관의 대표로 활동 중이다. 이 특강은 9월 5일 시작하여 12월 26일까지 하는 14주차 수업 이다. 필자는 10월 10일에 진행된‘공간혁명이야기’를 수강하였으며, 이에 따라 큐비즘의 역사를 쓴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와 그에 얽힌 미술사를 소개해주고자 한다. 1901-1904 : 청색 시대 피카소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림과는 차이가 있는 특이한 작품을 탄생시킨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세계가 새로이 출발하는 지점이자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히는 <아비 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 1907)만 보아도 상당히 난해한 느낌을 받는다. 피카소의 작품을 살펴보면서 필자는 만일 그가 문학가였다면 한국의...

[238호 문화비평: 반려동물과 동물권] 동물권에 대한 인식과 현 동물보호법의 현황과 한계

ⓒ 연합뉴스 ▲ 2015년 부산에서는 600마리가 넘는 길고양이를 뜨거운 물에 담가 죽인 동물 학대 사건이 있었다. 법원은 기소된 A씨가 동종 전과가 없다는 이유로 집행유예 처분을 내렸다. 많은 동물 학대 사건은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학대 사실을 증명하기도 쉽지 않지만, 증명을 해도 법원에서 가벼운 처벌을 받는 형편이다. 2018년 농림축산검역본부가 실시한‘동물보호에 대한 국민의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개, 고양이 등 반려동물 양육 가구 수는 약 511만 가구로 전체 가구의 23.7%로 조사되었다. 4가구 중 한 가구는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구가 증가한 것과 비례하여 동물에 대한 인식도 예전과는 많은 부분에서 달리 변화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현재 동물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으며 반려동물을 넘어 동물권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현...

[237호 책지성: 미셸 슈나이더,『 슈만, 내면의 풍경』] 황혼 속에서 고통을 노래하다

▲미셸 슈나이더(Michel Schneider) ⓒ auditorium.kr 시린 비가 흩날리던 2월의 뒤셀도르프, 군데군데 얼어있는 라인강에 그는 몸을 던진다. 상실한 의지를 공표하듯 뻣뻣한 몸이 울렁이는 물살을 받아내고 있다. 어부들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젖은 몸에서 떨어지는 물이 ‘뚝뚝’작은 신음을 내고 있었다.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은 그렇게 삶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날의 자살 시도는 실패였지만 그의 영혼은 그날 죽었다. 독일의 낭만주의자들은 말한다. 고통을 위로하고 싶다고, 고통의 사기(邪氣)를 빼앗아버리고 싶다고, 그 악랄한 고통을 침묵시키자고. 그리고 그것은 음악이 할 수 있는 일이라 한다. 하지만 슈만에게 음악은 달랐다. 음악이 곧 고통의 극단이었다. ‘Humor(후모어)’ 그를 검게 감싸고 있는 고통과 죽음은 그의 음악에서 어떤 형태로 드러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왠지 솔직해 보이는 장조(Major)보다는 음침한 단조(Minor)의 조성일 것...

[237호 리뷰] 서촌 이상의 집, 이상을 추억하는 국내 유일의 공간

▲ 이상의 집 작품 아카이브에 보관된 이상의 소설『날개』 기억은 추상적이고 불안정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군가를 떠올리기 위해 장소를 찾곤 한다. ‘그 장소’에 간다면 내가 생각하는‘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안고서. 물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다 할지라도 모두가 같은 감정을 느끼진 않는다. 각자가 가진 기억이 다르기 때문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이상의 집은 딱 그런 공간이다. 서촌 이상의 집은 자신만의 이상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상 소설가 이상(李箱, 1910~1937)의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으로, 어렸을 때 서울 큰아 버지 집에 양자로 들어가 고등학교 졸업 이후 조선총독부 건축기사로 일했다. 하지만 이상은 오랫동안 예술가의 삶을 꿈꿔왔다. 그의 필명‘이상’에 대해서 여러 설이 존재하나 그와 절친했던 서양 화가 구본웅이 선물한 화구상자에서 따왔다는...

[237호 영화비평: <악질경찰>, <생일>(2019)] 폭력의 기억을 재현하는 방식

2019년 상반기에 개봉한 한국영화 중에서 인상적인 작품을 꼽는다면 <악질경찰>(이정범)과 <생일>(이종언)을 언급할 수 있다. 물론 이 두 작품뿐만 아니라 여성서사를 전면에 내세운 <걸캅스>(정다원), 한국영화 최초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기생충>(봉준호) 등도 주목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질경찰>과 <생일>을 언급한 이유는 이 두 작품이 세월호를 직접 언급한 첫 상업영화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세월호는 한국사회에 커다란 상흔을 남긴 사건으로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침묵과 망각이 강요되고 있으며 그것이 상업성에 연결되는 것은 금기시 되는 분위기이다. 그렇게 구축된 진공에 자리 잡은 것은 살아남은 이들의 슬픔과 미디어를 통해 재난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이들의 죄책감이다. <악질경찰>과 <생일>은 바로 이 지점, 다시 말해 의미를 부여받지 못해 감정만 남은 기억에 관한 영화로 재난의 기억을 사건 외부에 있는 이들과의 공유를 시도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237호 테마비평] 사적(Private) 흔적에서 공적(Public) 기억으로 “<오발탄>과 <장마> 다시 보기”

고전영화를 다시 보노라면 시간여행을 하듯 영화와 현실의 관계를 절감하게 된다. 유사하게 지속되는 관습적 일상 속에선 느끼지 못했던 시간의 흐름, 또는 그 파장을 타고 무심히 지나쳐온 현재진행형인 현상들 속에 스며든 과거 흔적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거의 반세기 전에 만들어진 두 편의 한국영화, 유현목 감독 연출의 <오발탄>(1961)과 <장마>(1979)를 이어서 보노라면 반세기 전 분단의 아픔과 이데올로기, 전쟁이 낳은 고달픈 삶의 풍경이 그 시절 이야기로만 끝난 것이 아니란 점을 깨닫게 된다. 물론 두 편의 영화 모두 소설을 각색한 허구이지만, 오히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역사적 상징기호처럼 작동하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맥락 속에서 모든 인간이 동일한 현재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나 각자가 저마다의 시대 속에 존재함을 가리키는 블로흐 (Bloch Ernst, 1885~1977)의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란...

[237호 특강취재: 다중지성의 정원, <레윈 코넬 - 주도권을 잡은 남성성>] 헤게모니 남성성의 해체와 새로운 남성성

다중지성의 정원은 지난 7월 9일부터 총 8주 동안 특강 <꽃보다 남자 : 남성과 남성성에 대한 8가지 생각>을 진행하고 있다. 특강은 여성과 변별되는 남성의 특징을 이해하고자 기획됐다. 강연을 맡은 이인 작가는“특강을 통해 남성과 여성에 대한 논의가 수면 아래에서 오해와 분노에 뒤엉킨 채 들끓을 게 아닌, 수면 위에서 건강하게 논의되는 사회를 바란다”고 했다. 지난 7월 30일에는 <래윈 코넬 – 주도권을 잡은 남성성>이라는 주제로 네 번째 강연을 진행했다. 헤게모니 남성성과 공모하는 남자들 강연자는 헤게모니 남성성을 설명하기 전에 90년대 초 서구 마르크스주의(marxism) 형성에 기여한 이탈리아 정치 이론가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를 통해 강의를 열었다. 그람시는 옥중에서‘왜 이탈리아에서는 계급 중 가장 하층민인 노동자와 농민이 독재를 더 지지했고, 왜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가?’라고...

[237호 문화비평] 육류 소비의 이면과 국내 채식시장의 성장

최근 비욘드 미트라는 고기 유사 채식식품을 만드는 회사가 25달러로 상장된 지 채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주가가 7배 올랐다는 소식이 큰 이슈가 되었다. 또한, 국제 표준화 기구(ISO)인증의 새로운 기준으로 “채식인증”이 준비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다. 정부 기관인 한국식품연구원에서 ISO 채식인증 자 문단 요청이 왔기 때문인데, 이미 올해 4월부터는 정부가 해외에 채식식품수출을 위해 필요한 채식인증비용의 70%를 지원하기 시작한 상태이다. 이처럼 국내외로 ‘채식’ 키워드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본 지면을 통해 채식시장의 변화 원인을 둘러싼 갖가지 현상들을 짚어보려고 한다. 이러한 변화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 이 변화는 바람직한가? 채식시장의 성장 속도와 지속성, 영향력 등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육류소비 증가의 원인과 부작용 세계인구는 2,000년 전 1억 명에서 1900년대 17억 명을 돌파하여 2000년대에는 70억...

[236호 책지성: 셔먼 알렉시,『 얼굴』(Face)] 연결과 저항의 시학: 셔먼 알렉시의 시집『얼굴』

셔먼 알렉시(Sherman Alexie, 1966~)ⓒ www.nytimes.com 셔먼 알렉시(Sherman Alexie, 1966~)는 우리나라에서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다. 그는 아메리칸 원주민 작가로서 원주민의 역사와 아픔의 정서를 소설, 시, 영화 등 의 여러 수단으로 표현하여 저변을 넓혔다. 물론 그의 작품이 활발히 논의되던 시점 이전에도 많은 아메리칸 원주민 작가들이 활동했지만, 그중에서도 알렉시의 작품은 대중성과 작품성 모두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보호구역 밖의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한다. 그의 작품은 원주민의 정체성, 문화, 역사, 언어, 정확하게는 가난, 알코올 중독, 절망, 가족, 보호구역 안과 밖의 삶과 그가 사랑하는 것을 주제로 삼는다. 우리는 그의 시를 읽으며 슬픔과 공감의 정서에 빠지 기 쉽지만 알렉시 특유의 해학과 재치 또한 돋보임을 알...

[236호 리뷰] 앤드루 조지 사진전, <있는 것은 아름답다>

조세피나의 모습 ⓒAndrew George 누군가는‘살아간다’혹은‘살아낸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살아있다’라고 말한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견딤과 꿈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꿈이 있어야 견딤이 있다고 믿는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자주 ‘잘 살아야지’와‘잘 있니?’를 함께 말할 때, 그것은‘너의 꿈을 잘 견디고 있니?’라고 들린다. 앞선 사람, 자신의 꿈을 견뎠던 사람, 그러니까‘살아가며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삶에 대한 안부를 물을 때,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어쩌면 그 해답을 앤드루 조지(Andrew George, 1980~)의 사진전 <있는 것은 아름답다>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린,“ 70살이되어보고싶어요” 내가 당신의 나이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곁에서 나를 지켜줄 사랑스러운 아내와 자식들, 자식들의 소중한 연인들, 그 밑에서 꼬물거리는 아기들을 상상한다. 하지만 금세 머릿속이 하얘졌다. 69년을 산 당신에게 70년이 되도록 간직한 꿈이 있다는 그...

[236호 문화비평: 이미지의 중요성] 이미지가 재현하는 사실과 진실

-미래 시민사회가 테크놀로지와 이미지 시대에 대응해야 ⓒwxyz.com ⓒ youtube.com 이미지는 거짓말을 한다 우리는 사진 속의 이미지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흔히 이야기한다. 사진은 현상의 정직 한 복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사진이 적정 수준 이상의 해상도를 갖는다면 사진 속의 피사체는 현 상과 일치할 것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마셜 맥루언(Marshall McLuhan, 1911~1980)의 핫 미디어(핫 미디엄)과 쿨 미디어(쿨 미디엄) 은유에 의하면 사진은 대표적인 핫 미 디어이다. 사진은 대표적인 고해상도(higher definition) 미디어이고, 사진을 보는 우리 수용자는 해독과정에 소극적으로 참여(lower participation)한다. 이 점에서 사진은 쿨 미디어인 그림과 대 비되는 핫 미디어이다. 그러나 사진 속의 사실도 그 자체가 진실은 아니다. 사진은 사진작가의 관점에서 바로 본, 현 상의 한 단면의 묘사일 뿐이다. 사진작가의 관점은 프레임에 의해...

[236호 특강취재: 다중지성의 정원, <질 들뢰즈의 영화 철학과 포스트 시네마의 시간>] 디지털 시대의 리얼리즘

매체의 변화는 세계의 변화이다.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의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 A Space Odeyssey> (1968)에서 유인원이 공중으로 던진 뼈가 다음 순간 우주선으로 변하는 장면은 매체 변화의 형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매체의 변화는 뼈에서 우주선으로의 변화처럼 순간적이고 전복적이다. 이번 특강취재는 디지털 영화의 시간성을 주제로 한 장미화 강사의 <질 들뢰즈의 영화 철학과 포스트 시네마의 시간> 강좌를 매개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구어에서 문자로, 그 후 인쇄를 거쳐 사진, 영화까지, 새로운 매체의 등장은 시대의 급진적 사유변화를 이끌었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다. 디지털, 매체인가 디지털은 그것을 하나의 매체로 인정할 것인지의 논의부터 시작해야 할 만큼 전복적이다. 인쇄물, 회화, 사진, 필름영화는 모두 인간의 시각적 경험을 모방하여, 빛의 분산이라는 자연법칙에 따라 탄생한 결과물이다. 회화에서 사진으로 매체의...

[236호 테마서평: 매체이론] 매체와 인간: 매체에 대한 또는 매체에 의한 사유

『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사진의 작은 역사 외』 (발터 벤야민, 길, 2007) 『기록시스템 1800 1900』 (프리드리히 키틀러, 문학동네, 2015) 『 20세기의 매체철학』 (심혜련, 그린비, 2012) 디지털 원주민의 등장 얼마 전 수업시간에 ‘매체와 사유의 변화’라는 주제로 학생들이 발표하고, 그 내용을 중심으로 토론을 한 적이 있다. 이들은 미셸 세르(Michel Serres)의 말처럼, 머리를 손에 들고 다니는 새로운 세대인 것이다. 이들에게 디지털 매체는 더 이상 새로운 매체가 아니다. 그저 매체일 뿐이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디지털 매체에 익숙하다. 디지털 공간에서 자료를 검색하고, 이를 토대로 사유하는 세대다. 한 마디로 말해서 ‘디지털 시대의 이주민’이 아니라, ‘원주민’인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원주민 안에서도 또 구별이 진행된다는 점이다. 이들은 수업시간에 자신과 ‘요즘 아이들’을 구별한다. 그들에 따르면, 자신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235호 책지성] 심보선,『 그을린 예술』- “적어도 그렇게”살아나는 예술

▲ 르모니에의 <지오프랭 부인의 살롱에서 볼테르의 비극‘중국의 고아’낭독회> ⓒ google.co.kr 현대사회에서 예술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오늘날 예술적 행위들은 그것이 전문적이든 비전문적이든 공동체적 성격을 가지고 발현된다. 가령 분야를 가리지 않고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것, 낭독회와 북콘서트를 주관하는 것, 독서모임 또는 예술 동호회를 만드는 것? 사실 이러한‘모임’의 구성원들은‘예술을 한다’ 라는 취지로 모였을지 몰라도, 진짜 목적은 진지한 예술 활동이나 심미적인 가치 찾기 등에 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구성원 간에 친목도모, 예술의 진지성 깨부수기, 미학적 엘리트주의 타파하기 등에 주안점을 둔다. 이러한 현상은 큰 틀에서 보면 일종의 부조리극 같다. 그렇다면 그것은 충분히 정치적 의미를 갖지 않는가? 여기서 정치란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지켜주는 식의 치안으로서 정치가 아니다. 랑시에르(Jacques Ranciére, 1940~)에 따르면 그것은 문학을 통해 경계를 허물고...

[235호 특강취재: 예술의 전당 아카데미, <송원진의 클래식 아다지오 - 불멸의 사랑>] 사랑에 빠질 수만 있다면

▲2005년 빈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사랑의 묘약》공연 중인 빌라손과 네트렙코 ⓒwww.nyculturebeat.com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으로 인류에게 보편화된 ‘사랑’이라는 감정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과 재능을 불어 넣어주며, 불멸 의 작품들을 후세에 남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오고 있다. 지 난 4월 11일, 예술의 전당 아카데미는 송원진 강사(바이올리니 스트,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의 <도니제티 오페라 ‘사랑의 묘약’> 강의를 통해 오페라라는 음악의 장르와 가에타노 도니제티(Domenico Gaetano Maria Donizetti, 1797~1848)의 작품《사랑의 묘약 L’elisir d’amore》에 대해 연구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는 3월 7일부터 진행한 <송원진의 클래식 아다지오 – 불멸의 사랑> 강연 중 여섯 번째로, 음악 형식 속에 불멸의 사랑을 어떻게 담아냈는지, 그 표현의 방법을 작품 감상을 통해 직접 느껴보며 그들이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해석해보는 것을 목표로 했다. 2주 만에 탄생한...

[235호 문화비평: 국민청원] 국민청원은 무엇인가

▲국민과 함께 만드는 ‘국민청원’의 슬로건 ⓒwww.president.go.kr 국민청원은 한국에 있는 독특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학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국민청원은 ‘미숙한’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을 보여주는 방증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국민청원은 대통령 직선제라는 1987년 이후 한국 민주주의 체제에서 기인하는 증상이다. 증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 장치 자체는 쾌락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알베르토 토스카노(Alberto Toscano, 1977~)가 언급한 ‘광신’의 문제를 여기에서 환기할 수 있다. 토스카노가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를 인용하면서 지적하듯이, 광신은 ‘재현된 실재를 의심하는 것’에 따른 결과이다. 왜냐하면 재현은 언제나 이미 실재를 놓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현은 실재의 닮은꼴이지 결코 실재 자체는 아니다. 이런 까닭에 국민청원은 자유민주주의라는 제도를 통해 포섭할 수 없는 정치 욕망의 현신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일본...

[235호 테마서평: 토니 모리슨 소설의 서사적 윤리] “말할 수 없고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기”

『빌러비드』 (토니 모리슨 저, 문학동네, 1987) 『재즈』 (토니 모리슨 저, 문학동네, 1992) 『파라다이스』 (토니 모리슨 저, 들녘, 2001) 1996년, 흑인 여성 비평가 앤 두실은 흑인 여성에게 쏠린 비평적 관심을 언급하며 이런 지적을 한 바 있다. “오늘날 흑인 여성은 너무도 극진한 관심을 받고 있어서 나는 종종 나 자신이 신성한 텍스트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이런 비평적 관심은 한 개인으로서의 내가 아니라 ‘흑인 여성’으로서, ‘타자’로서 나에게 보이는 관심이다. 현재 미국학계에서 성적 · 인종적 타자성은 ‘핫한’ 상품이 되었고, 흑인 여성은 이 상품의 주요 기표가 되었다.” 두실의 진단에 따르자면, 미국 학계에서 흑인 여성은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지적으로 인기가 있으며, 상업적으로도 돈이 되는 ‘이상화된 타자’가 되었다. 1970년 첫 소설을 펴낸 후 유수의 문학상을...

[234호 테마서평: 문학으로 다시 바라본 페미니즘]가장 아름다운 자본 앞에서 가부장제의 支柱로서 ‘노라’? 

『인형의 집』(헨릭입센 저, 민음사, 2010)『안데르센 교수의 밤』(다그 솔스타 저, 문학동네, 2016)『노라가 남편을 떠난 후 일어난 일 또는 사회의 지주』(엘프리데 옐리네크 저,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3) 문학의 밤으로의 여정에서‘노라’의 의미는? 『안데르센 교수의 밤』에서 독신인 폴 안데르센은 50대 중반으로 입센(Henrik Ibsen)을 전공한 문학 교수다. 그는 크리스마스이브에 혼자 성찬을 즐긴다. 그러다가 맞은편 집 창문에 비치는 남녀의 모습을 보게 된다. 남자가 여자를 뒤에서 포옹하고 있는 낭만적인 장면이다. 그러나 한순간 낭만은 경악으로 바뀐다. 남자가 여자를 포옹하듯 목을 졸라 죽인다. 그런데도 안데 르센은 경찰에 신고조차 하지 못한다. 온갖 핑계를 대면서 주저한다. 신고는커녕 범인과 레스 토랑에서 마주치지만 서로의 세련된 취향에 관해 경쟁하듯 이야기한다. 일본 문화를 즐길 줄아는 범인은 아시아로 떠날 것이라고 말하고, 여자는 소멸된 채 소설은 끝난다. 그리고...

[234호 특강취재: 철학아카데미, <그리스 음주문화와 동성애>] 그리스 음주 문화 : 디오니소스부터 동성애까지

그리스 문화의 본질은 흔히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대비된다고 한다. 지난 3월 14일, 철학아카데미는 김진성 강사(정암학당 연구원, 철학아카데미 운영위원)의‘그리스 음주문화와 동성애’특강을 통해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적 문화를 탐구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는 3월 7일부터 진행하는 <그리스 문화 – 이성과 감성의 뿌리> 강연 중 두 번째로, 당대의 예술작품을 통해 그리스의 문화에 대해 알아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음주를 즐긴 이유 포도주의 신으로 알려져 있는 디오니소스는 올림포스 12신 중 하나이다. 그는 신 제우스와 인간 세멜레의 아들로, 연애·도취·연극·정열과 자유로운 감성을 대표한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Platon) 그의 저서『크라튈로스』에서 “디오뉘소스(Dionysos)는 포도주(oinos)를 주는 자(didous)로, 디도이뉘소스(Didoinysos)라고 장난스럽게 부를 수 있을 걸세”라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오늘날 많은 그리스의 유물에서 향락을 즐기는 디오니소스와 그를 따르는 정령 마이나데스(Maenades)가 피리를 불거나 북을 치면서 격렬한...

[234호 문화비평 : 이야기 읽는 시대] 이야기 읽는 시대 :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기

이야기 읽기에 관한 새로운 문화 조류들 최근 들어‘이야기 읽기’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화 조류가 감지된다. 먼저 인프라 구축에 있어 독특한 개성을 가진 작은 책방과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독립 출판사의 도전이 눈에 뜨인다. 서울시는 여러 책방과 연계해 장서 12만권 규모의 공공 헌책방 사업인‘서울책보고’개장을 준비하고 있기도 하다. 온·오프라인을 매개로 구성된 독서 모임도 흔해졌다. 이들은 문화적 욕구만으로‘비생산’적인 활동을 자율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출판 시장의 소비 경향도 바뀌는 추세다. 2000년대 이후 오랫동안 출판 시장을 휩쓸었던 자기경영 중심의 자기계발서 열풍은 하락세로 보인다. 요즘은 경쟁을 위한 책보다는 개인의 평안을 추구하고 지적 호기심을 채우는 책들이 더 소구력을 발휘하고 있다. 일련의 문화적 흐름을 추수해보면, 지속적인 경제 불황과 신자유주의 논리에 매몰되었던 현대인의 피로 누적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독자들의...

[234호 리뷰: 디뮤지엄 “I draw : 그리는 것보다 멋진 건 없어”] ‘그리는 것’의 특별한 가치

▲ Oamul Lu, <chliean desert> , (2015) ‘그리는 것’의 특별한 가치 디뮤지엄(D MUSEUM)은 2019년 2월 14일부터 9월 1일까지 대규모 기획 전시 를 개최한다. 이 전시에서는 드로잉, 일러스트레이션, 오브제, 애니메이션, 설치 등 세계적인 아티스트 16인의 약 350여 점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또한 각 작가의 세계관을 세심하게 연출하고자 시노그라피(scenography), 향(scent), 사운드(sound)를 접목한 옴니버스식 공간으로 기획됐다. 이번 전시는 작가들의 공감 가는 일상 이야기와 눈과 카메라가 포착하지 못하는 섬세한 감정을 담아내는 도구로써 ‘그리는 것’의 가치를 재조명한다. 오아물 루 – 자연과 함께하는 따뜻한 그림 피에르 르탕(Pierre Le-Tan)의 창문을 지나 오아물 루(Oamul Lu)의 공간에 다다른다. 그의 작품을 마주하니, 마치 내가 그의 작품 속 인물이 된 듯하다. 벚꽃 나무 아래를 거닐며 아직 오지 않은 봄을...

[234호 책지성:코샤 주베르트·레일라 드레거,『 세계 생태마을 네트워크』] 서로 배우고 연대하며 그리는 아름다운 생태발자국

▲ 변화의 시나리오 인큐베이팅 지원사업 활동 사진 ⓒ 넥스트젠 에듀케이션 서로 배우고 연대하며 그리는 아름다운 생태발자국 “우리는 기후 변화에 대비할 마지막 세대입니다. 우리에겐 행동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우리는 우리에게 편리한 삶을 제공해주는 다양한 물건들 속에 살아가고 있다. 오늘 아침 사용한 세면도구부터 온종일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스마트폰까지, 24시간 내내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는 물건들에 둘러 쌓여있다. 이 넘쳐나는 물건 속에서 우리는 가끔 막연한 외로움과 무언가의 결핍을 느끼곤 한다. 풍족함 안에서 느껴지는 외로움과 결핍이라니 이상하지않을 수 없다. 대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걸까? 자신의 내면을 채우고 외면을 가꾸어도,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고 해도 왜 우리는 공허함을 느끼는 걸까?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세계 곳곳에서 지구를 위해 실천하며...

[233호 책지성: 조앤 샤프, 『 포스트식민주의의 지리』] 광복 이후 74년, 우리는 정말 독립했는가?

Jean-Leon Gerome, 무희의 춤 (Dance of the Almeh), 1863.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면서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 해방된 지 74주년이 되는 해이다. 공식적으로 우리가 일제의 강제 점령 하에 있었던 36년의 두 배가 넘는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렇지만 과연 우리가 정말 과거로부터‘독립’했는지는 의문이다. 『포스트식민주의의 지리』의 저자 조앤 샤프(Joanne P. Sharp)는 이에 대해 “전통적인 정치적·경제적 식민주의는 끝났을지 몰라도 정신의 탈식민화는 여전히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말한다. 이 책은‘식민주의’와‘포스트-식민주의’, 그리고‘포스트식민주의’의 세 부분으로 나눠 과거에서부터 오늘날까지 곳곳에 숨어 있는 식민주의의상흔을 노골적으로 짚어 준다.‘ 포스트-식민주의’는식민지배의 권력으로부터 독립했다는 제도적 의미의 단절을, ‘포스트식민주의’는 단지 식민주의가 아닐 뿐 오늘날의 문화·담론 등이 여전히 그 영향 아래에 있음을 의미한다. 책에서 언급되는 사례는 전통적인 식민지배국가인 유럽위주이나, 바로 그러한 점에서 독자들은 한국적 맥락에서는...

[233호 테마서평: 필립 로스의 문학세계] 단독적 파국의 윤리

『전락』(필립 로스 저, 문학동네, 2014) 『에브리맨』(필립 로스 저, 문학동네, 2009) 『울분』(필립 로스 저, 문학동네, 2011 파국은 늘 갑자기 찾아온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평온하던 세계가 느닷없이 무너져 내리고 그 밑에 도사리던 시커먼 어둠이 뜻하지 않은 불행이 되어 자신을 찾아왔다고. 이 정체불명의 손님은 진실로 자신과 무관한 존재이며, 자신은 다만 결백할 따름이고 아주 작은 부주의 하나로 귀찮은 일에 연루된 거라 생각한다. 아주 조금만 더 견디면 지나가줄 거라고 지금껏 잘 해냈던 것처럼 이 불편한 계절도 곧 떠나가 줄 거라 믿는다. 그러나 필립 로스(Philip Milton Roth)에 따르면 파국은 애초부터 우리가 함께 태어나 우리의 표정과 자세를 결정하고 시간과 삶과 기억을 씹어 삼키며 무서운 속도로 살을 불려간다. 마치 삶의 모든 지점이 오직 단 하나의...

[233호 리뷰: <행복을 그리는 화가, 에바 알머슨 展>] Welcome To My Home!

▲사랑하는 가족들이 따뜻한 음식과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그린 작품, <저녁식사> 특별함은 매일의 매 순간에 숨어있다. ‘삶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자 할 때 거창한 수식과 원대한 꿈을 떠올리지만 우리가 매일을 살아가는 그 자체인 일상생활이야말로 삶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꿰어 비추는 거울이 아닐까? 어제와 오늘의 사소한 행동들이 모여 삶을 구성하고, 소소한 생활 속에서 꿈과 미래가 만들어진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3층에서 진행 중인 <행복을 그리는 화가, 에바 알머슨 展>에서도 소소한 일상 속에서 특별함을 찾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작가의 의도를 느낄 수 있다. 총 8개의 방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유화부터 벽화, 도자기, 조각에 이르기까지 에바 알머슨의 작품 150여 점이 준비된 세계 최대 규모이다. 서울을 주제로 한 신작들과 함께 제주 해녀를 소재로 한 해녀 프로젝트방에서...

[233호 문화비평 : <백종원의 골목식당>과 회기동 골목] 골목상권 이슈화의 그림자

외식산업, 커뮤니케이션,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은 관광·외식산업의 필수적 요소이다. 소비자들은 새롭고 익숙하지 않은 지역과 식당을 방문하면서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활동이 필요한데, 그 종류로는 관광지·외 식상품 공급자 그리고 그 지역 주민과 소통하는 개인 간 커뮤니케이션의 과정(interpersonal communication), 그 지역의 음식과 생활양식, 문화와 전통을 체험하는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 과정(intercultural communication), 여행을 통해 자신에 대한 성찰 또는 음식을 통한 심미적인 성취 및 만족을 얻는 자아 커뮤니케이션 과정(intrapersonal communication)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언론과 각종 미디어를 통하여 관광지와 외식업체에 대한 정보를 얻는 커뮤니케이션 활동은 잠재 소비자들에게는 필수이며, 소셜미디어의 발전은 상품 제공자로부터의 정보뿐만 아니라, 소비자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활성화하여 상품의 성공여부를 좌우하고 있다. 이렇게 소비자들이 관광·외식상품 선택에 있어 여러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필요로 하고 미디어에 의존하게 되는 이유는 이들...

[233호 영화비평: <스윙키즈>(2018)] 이데올로기적 중립이라는 판타지

강형철 감독의 <스윙키즈>(2018)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포로들이 북송을 원하는 이들과 전향을 원하는 이들로 갈라져 또 다른 전선이 형성되었다는 내용의 뉴스릴로 시작한다. 이어지는 것은 이 뉴스를 심각하게 바라보는 수용소장(로스 케틀)의 모습이다. 그는 전쟁의 후반부는 이데올로기가 지배한다면서 북송 포로보다 자유송환 포로가 더 많아야 승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 그는 반공 포로들로 구성된 댄스단이 자유세계의 춤을 추는 모습을 기자들 앞에 전시할 계획을 세운다. 이처럼 <스윙키즈>는 전쟁의 스펙타클을 전시하기보다는 전쟁 속에서 인간이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활용되는 지점을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표면적으로 볼 때, <스윙키즈>는 여기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 다른 배경과 이념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초월해 예술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이념이 개인의 삶을 비극으로 이끌고 있는지가 주인공인 잭슨(자레드 그라임스)과 기수(도경수) 등을 통해 진술되기...

[232호 리뷰: 아시아나 국제단편영화제, ] 단편영화의 매력

단편영화의 매력은 짧다는 것이다. 하나의 짧은 이야기를 보고 나서 남는 여운은 영화의 상영시간보다 길게 이어진다. 11월 1일부터 6일까지 씨네큐브 광화문과 CGV 피카디리 1958에서 제16회 아시아나 국제단편영화제가 개최되었다. 독립영화에 속하는 단편영화는 배급 시장이 체계적으로 마련되어 있지 못해 영화제 내에서만 한정적으로 상영되는 경우가 많다. 아시아나 국제단편영화제는 단편영화에만 집중하는 몇 안 되는 영화제 중 하나로, 이번 영화제에선 총 91편의 작품이 상영되었다. 총 6개의 섹션으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은 경쟁 섹션으로 국제경쟁, 국내경쟁, ‘뉴 필름 메이커’, 특별 섹션으로 ‘시네마 올드 앤 뉴’, ‘숏쇼츠필름페스티벌 & 아시아 컬렉션’, ‘㈜인디스토리 20주년 특별전’이 마련되었다. 그 중 올해 새롭게 신설된 ‘뉴 필름 메이커’ 부문에선 신인 감독들의 첫 연출작 중 우수한 작품을 선정하여 총 다섯 작품을 상영했다.   작은 이야기, 사이의...

[232호 특강취재: 열린연단,〈시(인)의 사회적 위치와 기능〉] 시(인)의 가능성

강연의 제목인‘시(인)의 사회적 위치와 기능’에서 시와 시인은 동시에 나타나면서 온전히 붙어있지 못한다. 시와 시인은 괄호와 함께 시(인)으로 맺어져 있다. 강연자 진은영 시인은 시와 시인을 따로 분리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시와 시인’으로 떨어지는 간격만큼도 강연자는 아쉬워한다. ‘시와 시인’을‘시(인)’으로 붙여놓으며 강연자는 삶을 시로 만드는‘만인의 시인되기’에 관해 이야기한다. 시를 쓰는 사람이 시인이라면 시에 거주하는 사람은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인간은 시적으로 거주한다’고 말하며 신성(神聖)과 시를 연결하고, 인간 실존을 신성의 차원에‘거주함’으로 설명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하늘과 땅 사이에 미만해 있는 신성을 척도로 삼아 제 삶을 측정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거주의 본질이다. 하이데거에게 시를 짓는 일은 자신의 삶을 측정하는 하나의 척도를 세우는 일이다. 따라서 시를 짓는 일은 시인에게만 주어진 역할이 아니다. 각자의 차원에 거주하는...

[232호 영화비평:<보헤미안 랩소디>(2018), God Save Freddie Mercury!]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해 보자. 나이를 밝히게 되는 게 좀 꺼려지지만, 1985년 7월 13일 영국 런던의 웸블리 경기장과 미국 필라델피아의 존 F. 케네디 경기장에서 동시에 열린 역사적인 라이브 에이드(Live Aid) 콘서트가 MBC TV에서 녹화방송 됐을 때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팝과 록은 라디오만 켜면 쉽게 들을 수 있었다. 김광한, 이종환, 김기덕 같은 유명 DJ들은 매주 빌보드 차트 수위의 곡들을 소개해줬고, 나는 좋은 팝송만 나오면 카세트테이프(아, 옛날사람!)에 녹음하곤 했다. 조용필, 전영록, 이선희 같은 가수가 인기였지만 왠지 국내 가요는 시시해 보였다. 그런 나에게 라이브 에이드가 녹화방송 된다는 것은 꿈만 같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 해는 벽두부터 아프리카 난민들을 돕기 위한 팝 뮤지션들의 노래, 즉 Band Aid의「Do They Know It’s...

[232호 책지성: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 『 브리야 사바랭의 미식예찬』] 미식의 시대, 미식의 고전이 주는 가치

  2018년의 대한민국은 미식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TV에서는 연일 음식과 관련된 새로운 방송들이 쏟아지고, 현재 방영 중인 프로그램 수만 해도 십여 개가 넘는다. 또한, 관찰 예능 프로그램인 <전지적 관찰 시점>에서는 방송인 ‘이영자’의 영자미식회가 나오고, 낚시 예능 프로그램인 <도시어부, 나만 믿고 따라 와>에서도 생선을 이용한 요리를 선보이는 등 음식 프로그램 외의 관찰, 낚시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미식 콘텐츠를 넣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인터넷 방송으로 가면 더욱 선명해진다. 먹는 방송을 뜻하는 ‘먹방’이란 단어는 이미 ‘Mukbang’이란 한국의 미식 콘텐츠로 세계화가 진행 중이다. ‘Mukbang’을 검색하면 한국의 ‘먹방’을 따라 하는 해외의 인터넷 방송들을 여럿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미식 콘텐츠는 지금 시대만의 트렌드일까? 미식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고대인들이...

[232호 문화비평: 요약형 정보] 현대사회와 요약형 정보

  우리는 누구나 인터넷 포털 검색 서비스를 이용하면 엄청난 정보를 일거에 획득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자기가 필요로 하는 정보는 그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범람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적확한 정보를 가려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외국어로 된 책이나 영화 등을 접했을 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거나 시간이 부족한 경우도 종종 있다. 제목과 내용이 유사한 책 중에서 어느 것을 골라 읽을까가 고민될 때도 있다. 그 경우, 누가 그 내용을 정리하여 알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대중의 욕구를 반영한 ‘요약형 정보’ 서비스가 인기다. 요약형 정보는 ‘텍스트의 줄거리만 추린 정보’로 정의할 수 있다. 그 형태로는 서평과 영화평 등 내용 요약과 평가를 한 데 버무린 고전적...

[232호 테마서평: 디아스포라 문학] 디아스포라, 근대 이후의 존재 형식

『디아스포라 이즈is』(케빈 케니 저, 최영석 역, 앨피, 2016) 『디아스포라 기행-추방당한 자의 시선』(서경식 저, 돌베개, 2005) 『Native Speaker』(이창래 저, RiverheadBooks, 1995) 디아스포라(diaspora)는 그리스어 전치사 ‘dia’(~를 넘어서)와 동사 ‘speiro’(뿌리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산’(離散)을 뜻하는 말이다. 역사적으로는 보통 대문자 ‘Diaspora’를 써서‘팔레스타인 또는 근대 이스라엘 밖에 거주하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용어였으나, 최근 디아스포라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유대인의 경험뿐 아니라 다른 민족들의 국제 이주, 망명, 난민, 이주노동자, 민족공동체, 문화적 차이, 정체성 등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개념”1)으로 확장되어 쓰이고 있다. 용어의 유래에서 알 수 있듯, 민족 이산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유대인의 경우뿐 아니라 유사 이래 지속된 인간의 이동과 이주는 끊임없이 세계 대륙의 지정학적 경계를 바꾸면서 그 흔적을 남겨왔다. 우리 역사의 경우만 보더라도, 가깝게는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경제유민, 일본과...

[231호 테마서평: 1인 미디어와 정치] 1인 미디어의 이중성

『몸짓들』(빌렘 플루서 저, 워크룸프레스, 2018) 『생명관리정치의 탄생』(미셸 푸코 저, 난장, 2012) 『우애의 미디올로지』(임태훈 저, 갈무리, 2012)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로장발롱(Pierre Rosanvallon)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감시’개념을 근대의 보편성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판옵티콘(Panopticon)’의 기능이 개인의 차원으로 확대된 ‘권력에 대한 사회적 감시’를 근대 정치라고 부른다. 1인 미디어가 무엇인지 질문하고 그 답을 구하고자 한다면, 이런‘사회적 감시’의 개념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1인 미디어야말로 판옵티콘의 일반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사회적 감시 개념과 판옵티콘 푸코의 판옵티콘 개념은 제레미 벤덤(Jeremy Bentham)에게 빌려온 것이다. 영국의 공리주의자인 벤덤에게 판옵티콘은 개인을 훈련시키는 규율 형식이었다. 벤덤은 범죄자를 구제하기 위한 ‘경제적인 방법’으로 원형 감시 건축물을 만들 것을 제안하는 서신을 작성했다. 벤덤은 자신의 건축물을 ‘교정의 집(the house of correction)’이라고 불렀는데, 판옵티콘의...

[230호 영화비평:<리틀포레스트>(2018), 나만의 작은 숲을 위하여

 임순례 감독이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만화를 한국의 정서와 풍토에 맞게 제작한 <리틀 포레스트>는 주인공 혜원(김태리)이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달리며 3개월 전 자신이 고향으로 돌아온 시점을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대학을 진학하면서 서울에 상경한 혜원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우리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동시대 청춘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취업도 연애도 학업도 마음대로 되지않는다. 영화는 그런 혜원이 눈 덮인 시골길을 걸어 집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이어 붙인다. 반겨주는 가족 하나 없는 그곳, 미성리 집에 도착한 혜원은 시린 손을 비벼가며 눈 속에 묻혀 있던 배추와 파를 캐내 배춧국을 끓여 먹는다. 그렇게 혜원은 그동안 방치되어 있던 집에 온기를 불어넣기 시작한다. 하지만 혜원은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곁에는 고향을 떠나지 않고 농협직원이...

[231호 리뷰: 2018광주비엔날레 : 상상된 경계들] 광주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GB커미션, 과거와 현재의 공존 을씨년스러움이 느껴지는, 폐허처럼 남겨진 낮은 2층 건물이 보인다. 깨진 유리창 사이 바람에 흩날리는 하얀 커튼, 병동이라 적힌 낡은 안내판. 무너진 건물 사이 조그만 입구에 들어서는 것부터가 관람의 시작이다. 널브러진 유리 조각이 발에 밟히고 그 발걸음마저 전시가 되는 곳, 국군광주병원이다. 민주정신의 지속가능한 역사와 이를 둘러싼 담론의 시각화를 위해 기획된 2018광주비엔날레 신작프로젝트‘GB커미션’은 개막 전부터 참여 작가들에게 광주의 역사성이 담긴 여러 장소를 소개했다. 그리고 3명의 작가 카데르 아티아(Kader Attia), 마이크 넬슨(MikeNelson), 아피찻퐁 위라세타쿤(Apichatpong Weerasethakul)이 선택한 국군광주병원은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사에 연행돼 심문하는 과정에서 고문과 폭행으로 부상당한 시민들이 치료받던 장소이다.안전한 관람을 위해 준비된 마스크를 쓰고 도슨트를 따라가다 보면,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둑한 복도를 거닐게 된다. GB커미션 참여 작가들은 ‘건물...

[231호 책지성: 프란츠 카프카, 『변신』] 인문학적 사고, 우리는 진정 사회적 동물인가

“그는 장갑차처럼 딱딱한 등을 대고 벌렁 누워 있었는데, 고개를 약간 들자, 활 모양의 각질(角質)로 나뉘어진 불룩한 갈색 배가 보였고, 그 위에 이불이 금방 미끄러져 떨어질 듯 간신히 걸려 있었다. 그의 다른 부분의 크기와 비교해 볼 때 형편없이 가느다란 여러 개의 다리가 눈앞에 맥없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프란츠카프카,『변신』中) 만약 당신이 자고 일어났더니 위와 같은 상황이라면 어떠하겠는가? 그 상황을 상상해보자.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자신이 흉측한 모습의 벌레가 되어있다는 상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괴롭고 소름이 끼치게 만든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변신』은 방금 우리가 꺼리던 그 상상을 밖으로 꺼내왔다. 그는 소설 속 주인공을 하루 아침에 벌레로 만들면서 주인공이 겪는 소외감을 이야기한다. 그는 왜 하필 주인공을‘벌레’로 변신시켰을까? 그레고르 잠자는 인간인가?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벌레가...

[231호 특강취재: TED×KyungHee-나와 세상의 연결] 청춘에게 보내는 메시지

본교 미래문명원은 지난 9월 14일’TED×KyungHee-나와 세상의 연결’특강을 주최했다. ‘TED×KyungHee’는 의미 있는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싶은 경희대학교 학생들이 진행하는 행사이다. 이번 특강 기획단은 경희대학교‘문화 세계의 창조’라는 철학 정신과 TED의 신조인‘Idea Worth Spreading’을 융합하여 이 특강을 선보였다. 기획단이 선정한‘나와 세상의 연결’주제는 나와 세상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리고 내가 이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날 열린 특강은 오후 6시 30분부터 9시 30분까지 약 3시간 동안 본교 서울교정 크라운관에서 진행되었으며, 연사마다 각 30분씩 강의를 맡은 뒤 45분가량 Q&A 시간을 가졌다. 이날 특강에 참여한 연사는 안재희(정치외교학과 졸업생), 김태우(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학생), 송채원(행정학과 학생), 장영은(국제통상금융투자학과 학생) 총 4명이었다. 김칫국을 먼저 마셔보자 ‘김칫국 마시고 있네’라는 속담을 들어본 적 있는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지레짐작하고 일을 벌이는 것을 지양하고자 만든 옛말이다....

[230호 책지성: 캐런 메싱, 『보이지 않는 고통』] 보이지 않는 고통, 정면으로 보기

    내가 하는 일이 나의 건강을 망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곧바로 일을 때려치우고 조용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건강을 돌볼 수 있을까?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지면서 어느 순간 건강은 더 이상 자신에게 우선순위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누구보다 이런 노동자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노동자와 그 가족의 생계를 손에 쥐고 쉽게‘갑’의 자리로 올라서고 노동자는 ‘을’의 위치에서 저항력을 상실한다. 노동자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거대한 힘 앞에서 ‘을’들은 점차 구조에 순응하게 되고 그들의 고통은 계속해서 희미해진다.   자본이 은폐하는 노동자의 고통   온종일 허리를 굽혀 청소하면서 만성적 허리통증을 갖게 된 청소노동자나 장시간 서서 일하면서 하체 질환을 갖게 된 마트...

[230호 영화비평:<공작>(2018), 신냉전의 시대, 햇볓정책 토대로서의 1990년대

신냉전의 시대, 햇볕정책 토대로서의 1990년대     * 다소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국영화에서 분단을 소재로 한 첩보영화의 전통은 꽤 오래다. 이 장르의 기원은 한국전쟁 직후에 제작된 <운명의 손>(1954)이다. 국군 방첩대 장교와 북한 여간첩의 로맨스를 서브플롯으로 전개되는 이 반공첩보영화의 서사 구조는 냉전반공시대의 한복판에서 만들어진 <죽은 자와 산 자>(1966)나 탈냉전 시대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포문을 연 <쉬리>(1999)에서도 발견된다. 남한의 첩보원이나 정보장교가 나오고 북한의 여간첩(<운명의 손>, <쉬리>), 혹은 좌익에서 전향하여 남한의 간첩 노릇을 하는 여성(<죽은 자와 산자>)이 등장한다. 여기서 이 미모의 여간첩들은 어김없이 남한 첩보원의 남성적 매력에 이끌리고, 이념을 초월한 순애보적인 사랑은 비정하고 냉혹한 분단현실에서 흡사 치정 멜로드라마처럼 예외 없이 여간첩의 죽음으로 귀결된다. 지난 10년 사이에 제작된 <의형제>(2009)나 <공조>(2016)가 보여주듯 이제 남남북녀의...

[230호 특강취재: 서울자유시민대학, <마중물 - 삶과 배움을 나누고 싶은 시민을 위한 맞춤형 강좌>] 서울, 다시 바라보기

서울, 다시 바라보기   서울자유시민대학은 8월 13일부터 9월 10일까지 ‘마중물 – 삶과 배움을 나누고 싶은 시민을 위한 맞춤형 강좌’라는 릴레이 특강을 선보인다. 특강은 ‘도시, 4차 산업혁명, 통일, 기후변화, 독도’의 주제로 다섯번에 걸쳐 진행된다. 이번 강의는 시민대학을 처음 접하는 시민을 대상으로 하며,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획된 무료 강좌이다. 지난 8월 13일에는 이병태(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조교수) 강연자가 <도시: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전언(傳言)>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진행했다. 특강에서는 거대 도시 서울의 주거 형태 변천사를 통해 서울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거대 도시의 탄생 우리가 알고 있는‘서울’은 어떤 도시인가?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인구 천만의 거대 도시다. 그렇다면 서울은 언제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도시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일까?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230호 Review: 국립현대미술관 <예술과 기술의 실험(E.A.T.): 또 다른 시작>] 융합의 시대, 협업의 시대에서 배우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예술과 기술의 실험(E.A.T.): 또 다른 시작>을 5월 26일(토)부터 9월 16일(일)까지 삼청로에 위치한 서울관에서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1960년대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했던 예술가와 공학자의 협업체 ‘E.A.T.(Experiments in Art and Technology)’의 주요 활동을 조명하면서 4차 산업혁명시대 융복합 예술의 가능성을 성찰하는 자리다. 한국에서 처음 선보이는 이번 대규모 회고전에는 예술과 과학기술의 만남을 주도한 33점의 작품과 E.A.T.의 활동과 작업 등을 담은 아카이브 100여 점이 소개된다.   1960년대, 협업의 시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망명하기 시작하면서 예술의 주도권도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가게 된다. 이때 유럽을 기점으로 시작된 장르 간 경계를 허무는 실험적인 흐름 역시 미국으로 전이된다. 1960년대는 TV와 라디오가 대중에게 보급되면서 과학기술이 일상의 영역으로 보편화되었고, 그 어느 때보다 예술가들이 활발히 협업하고 교류한...

[230호 문화비평: 추리게임의 현재와 미래] 우리는 어떤 추리의 시대에 살고 있는가?

  바야흐로 추리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다 할 추리문화라 할 것이 없었던 대한민국에도, 이제는 남녀노소 쉽게 즐길 수 있는 추리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게임, TV프로그램 등 다양한 콘텐츠를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 지적인 매력을 뇌가 섹시하다고 표현한 것에서 비롯한 ‘뇌섹남’, ‘ 뇌섹녀’라는 단어는 이미 신조어라 부르기에도 너무 오래된 표현으로 느껴질 정도다. 추리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꺼내면 탐정이 실제로 있는 직업인지를 묻는 사람부터, <명탐정 코난>과 같은 추리 만화를 좋아한다는 사람, 어렸을 적 <셜록홈즈> 전집을 한 권쯤은 읽어보았다는 사람, <더 지니어스>, <크라임씬>, <문제적 남자>, <대탈출>, <셜록> 등 예능 프로그램이나 드라마를 즐겨보았거나 보고 있다는 애청자들까지 만나볼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방탈출 카페>를 방문하여 탈출에 성공하거나 아쉽게 실패했다며 추리와...

[230호 테마서평: 인간다움과 과학기술의 역행] 과학기술의 발전과 인간다운 소통방식 탐색

『내 인생의 의미 있는 사물들』(셰리 터클 저· 정나리아, 이은경 역, 예담, 2010) 『외로워지는 사람들: 테크놀로지가 인간관계를 조정한다』(셰리 터클 저·이은주 역, 청림출판, 2012) 『대화를 잃어버린 사람들: 온라인 시대에 혁신적 마인드를 기르는 대화의 힘』(셰리 터클 저·황소연 역, 민음사, 2018)                       셰리 터클(Sherry Turkle, 1948~) MIT대 교수는 인간과 기계(혹은 테크놀로지) 간에 발생하는 심리적 인터랙션 연구 분야의 1세대라 할 수 있다. 1980년대부터 테크놀로지가 더 이상 단순한 도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 사회 심리적으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시작한 기술심리 분야 선구자다. 그는 기술이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 뿐만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와도 관련 있음을 주장하면서, 기술의 위험성과 유용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로봇 같은 관계...

[229호 영화비평:<염력>(2018), 순수한 피해자라는 강박이 만들어낸 풍경

영화 <염력>(2018)의 후반부에서 루미(심은경)와 주민들은 재개발을 이유로 들이닥친 철거용역들을 피해 건물 옥상으로 대피한다. 이때 경찰 특공대를 실은 컨테이너 박스가 크레인에 매달려 루미와 주민들이 있는 옥상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장면은 관객들로 하여금 9년 전 용산에서 벌어진 사건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른바 ‘용산참사’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용산 4구역 재개발 보상대책에 반발한 철거민과 전국철거민 연합회 회원들이 남일당 건물에서 경찰과 대치하다 발생한 화재로,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 대원 1명이 사망하고 24명이 부상당한 사건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사건은 경찰이 법으로 보장된 힘을 무책임하게 행사하면 비극이 발생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뿐아니라 사건이 초래한 고통을 비극의 현장에서 있었던 철거민과 경찰 구성원들에게 떠넘기는 무책임한 공권력의 모습도 보여주었다(<염력>보다 1주일 먼저 개봉한 <공동정범>(2018)은 그렇게 조성된 삭막한 지형도에 관한 영화이다). <부산행>(2016)으로 천만 관객을 동원했던...

[229호 특강취재: 정암학당, <플라톤은 왜 대화편을 썼는가?> ] 플라톤, 대화를 통해 진리를 탐구하다

정암학당은 2000년부터 그리스 · 로마 원전을 연구하는 학술단체이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에 위치한 정암학당에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매달 ‘교양강좌’를 진행하며, 현대 철학의 시선에서 고전기 그리스와 로마 사상을 재조명하고 있다. 지난 5월 26일 진행된 본 특강은 <플라톤은 왜 대화편을 썼는가?>라는 제목으로 정준영(정암학당 학당장) 강사가 플라톤이 철학적 사유를 제시하는 대화의 형식에 대하여 탐구하고자 기획됐다. 정암학당의 ‘교양강좌’는 12월까지 매달 진행되며, 6월에는 <고전과 현대의 대화(3) – 스피노자‘감정론’>을 김은주 강연자가 강의할 예정이다.   철학을 전달하는 적절한 방식은 무엇인가? 철학은 진리를 추구한다. 철학적 진리를 제시하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논증 또는 논변(argument)의 형식이 있다. 강연자는 “왜 철학적 진리는 논증 형식을 통해 제시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하며, 논증 이외의 방식을 사용해 철학적 사유를 전달한 철학자들을 말한다.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시(詩)를 통해 철학적 논증을 제시하였으며,...

[229호 테마서평: 포스트휴머니즘] 포스트휴머니즘, ‘인간’에 대해 질문하다

『포스트휴먼』(로지 브라이도티 저·이경란 역, 아카넷, 2015)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캐서린 헤일스 저·허진 역, 플래닛, 2013) 『Staying with the Trouble』(Donna Haraway 저, Duke Univ. Press, 2016)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SF영화의 거장으로 불리는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감독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1982)를 관통하는 주제는‘인간보다 더 인간다운(more human than human)’이다. 영화에서 2019년 지구는 핵전쟁과 환경오염으로 더 이상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는 디스토피아적 공간으로해체되고 인류는 우주 식민지 사업을 통해 지구를 뒤로한 채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한다. 우주행성 개발에는 타이렐 기업이 만든 최신 복제인간 리플리칸트(replicants)가 이용되는데 이때 타이렐 기업의 모토는‘인간보다 더 인간다운’으로, 인간의 신체뿐 아니라 행동, 감정 나아가 기억까지 완벽히모방하여 인간과의 구별이 불가능한 복제인간 제작을...

[229호 책지성: 하지현, 『도시심리학』] 심리학으로 바라보는 도시인의 삶

    24시간, 도시의 어딘가는 항상 깨어있다. 잠들지 못하는 도시에서 내일의 일과삶을 위해 잠들어야만 하는 우리는 늘 피곤할 수밖에 없다. 도시라는 같은 공간안에서 비록 제각기 삶의 무게는 다르지만, ‘행복’이란 지향점마저 다르다할 수 있을까?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도시인의 피곤함’에 대한 이유를 심리학으로 접근하며, 소소하게 지나치던 우리의 행동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같은 공간에 자리하고있는 모두의 심리를 듣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공감하고 치유받을 수 있을까. 소통방식의 변화, 촘촘해지는 연결망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기술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변화와 학습을 요구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전화로 얘기하면 될 일을 문자메시지 같은인스턴트 메시지로 해결하게 되었으며, 사회라는 큰 틀에 도태되지 않기위해 부지런히 적응하고 있다. 그 중 핸드폰의 등장은 시공간적 제약을뛰어넘어 언제든지 소통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 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229호 문화비평: 비평이란 무엇인가?] 민주적 시민이 비평가다

  필자는 십여 년간 비평 전문지의 편집위원과 편집주간으로 일했고 꽤 오랫동안 대학에서 비평론을 강의했으며 지금까지 두 권의 비평집을 출간했다. 이런 수행성의 경험에도 불구하고‘비평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그 당당한 질의 앞에서 나는 언제나 머뭇거리는 사람일 뿐이다. 어쩌면 비평은 어떤 것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산뜻한 정의(定義)의 사역이 아니라, 바로 그 어떤 것 앞에서의 괴로운 머뭇거림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비평가는 텍스트 앞에서 당당한 사람이 아니라 그 앞에서의 곤혹스러움으로 스스로를 분열시키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미분하는 비평과 적분하는 비평 비평가는 만나는 사람이고 나누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비평은 텍스트와의 만남을 통해 자기를 파열시키는 일이다. 비평의 밀도는 그 만남이 어떠한 것이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그것은 자기의 나태와 안일을 깨뜨리는 충격이 되어야 한다. 좋은 비평은 충돌이라 할 만한...

[229호 Review: 화정박물관, <중국의 춘화>] 춘화, 그 솔직함에 대하여

평창동에 위치한 화정박물관은 2017년 11월 1일 춘화 전시실을 새롭게 단장한 이후, ‘춘화(春畵) 컬렉션’ 두 번째 전시인 <중국의 춘화>를 개최했다. 춘화 전시실은 화정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에로틱 고미술 소장품을 상설 전시하는 곳으로, 주제에 맞추어 전시 작품을 교체한다. 춘화 컬렉션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작품을 중심으로 아시아와 유럽의 그림과 공예품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회는 명나라부터 민국시대의 회화 31점, 공예 7점, 총 38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중국의 춘화에 심도 있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감출 수 없는 본능의 표현 춘화는 남녀의 직접적인 성 풍속 장면을 소재로 한 풍속화다. 춘궁(春宮) 혹은 비희도 (秘戱圖)라고도 불렸는데, 이 그림이 봄날 밤 궁궐에서 벌어진 일을 묘사하는 데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나라 때부터 이러한 회화가 존재했다고 기록에 남아있으며, 이후 당나라의 주방(周昉),...

[228호 영화비평:<곤지암>(2018), 관음증/노출증 시대의 파운드 푸티지 영화

 ‘가지 말라는 곳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곤지암>(2018)의 포스터 카피는 공포영화 장르의 핵심을 정확하게 전달한다. 공포영화는 알려진(known) 세계를 초월하려는 욕망이 응징 받아야 할 것으로 그려지는 장르다.“ 너무 많이 알려고 하면 다쳐!”가 이 장 르의 세계관이다. <곤지암>은 이 공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인터넷 방송‘호러 타임즈’의 BJ 하준을 비롯한 7명의 젊은이들이 지금은 폐허가 된 곤지암 정신병원에 공포체험을 떠난다. 1961년 5월 16일 개원한 이 병원은 환자 42명의 집단자살과 병원장의 실종으로 1979년 10월 26일 문을 닫은 이후 수십 년 간 흉가처럼 방치되었다(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해 10·26 사태로 붕괴한 박정희 정권에 대한 장난스러운 은유. 병원장은 올림 머리를 한 박영애인데, ‘영애’란 대통령의 딸을 높여부르는 말). 곤지암 병원에서의 공포체험을 실시간으로 방송하는 7명의 멤버들은 절대 들어가선 안 된다는 402호에...

[228호 테마서평: 인류의 미래] 인류 스스로의 미래를 논하다

[1] 『사피엔스: 인류 약사』(유발 하라리 저, 2015) [2] 『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유발 하라리 저, 2017) [3] 『사피엔스의 미래』(알랭 드 보통·말콤 글래드웰·스티븐 핑커·매트 리들리 저, 2016)                     인류가 4차 산업혁명기에 들어가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류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다루는 ‘인류 미래 담론’ 서적들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유발 하라리(Yuval Harari)가 시리즈로 내놓은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 캐나다에서 진행된 토론회 <멍크 디베이트 Munk Debates>의 결과물인 『사피엔스의 미래』가 특히 돋보인다.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의 중핵과목교재 『우리가 사는 세계』에 의하면, 전통문명들과 달리 현대문명이 제시한 새로운 솔루션은 ①과학, ②계몽사상, ③민주정치, ④시장경제, ⑤개인에 대한 존중이었다. 이 다섯 가지는 사피엔스의 오랜 여정에서 전대미문의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인류문명의...

[228호 책지성: 강남순, 『용서에 대하여』] 용서, 그 다양성에 대하여

  당신은 누군가를 죽도록 미워한 적 있는가? 혹은 원망한 적 있는가? 그렇다면 상대방을 용서할 수 있는가? 세상의 크고 작은 관계 속에서 다양한 폭력과 상처, 증오는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인간은 삶을 살아가며 때로는 가해자가, 때로는 피해자가 되어 다양한 양태의 용서와 얽힐 수밖에 없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만약 용서할만한 것만 용서하겠다고 한다면, 용서라는 바로 그 개념 자체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용서는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했던 것은 용서가 아닌 것일까? ‘용서’란 무엇일까?아이러니하게도 『용서에 대하여』에서는 이 질문에 대해 절대적 답도 최종 결론도 찾을 수 없다. 저자는 “용서에 대한 특정한 결론이나 해답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언제나 잠정적이고, 정황적이며, 부분적일 뿐이다”라고 답한다. 저자는 단순하게 생각했던 용서의...

[228호 특강취재: 두산아트센터, <두산인문극장 2018: 이타주의자 Altruist> ] 이타주의 재고의 필요성

두산아트센터는 4월 9일부터 7월 7일까지 <두산인문극장 2018: 이타주의자 Altruist>를 선보인다. 본 기획은 강의, 전시, 공연으로 구성되었으며, 강의는 ‘오늘날 이타주의를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를 시작으로 총 8회에 걸쳐 진행된다. 4월 9일에는 최정규(경북대학교 경제통상학부) 교수가 이타주의와 경제에 대해 강의했다. 이기주의만으로 사회 전체를 설명할 수 없다 현대 사회는 대규모의 협력체제로 이루어져 있으며 도덕적 자기희생이 필요하지 않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사회는 필요와 공급을 조절하며 원활하게 돌아간다. 이러한 경제학적 사유의 발전과정에서 도덕적 심리인 이타주의를 불필요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이타주의 없이 개인의 이기심만으로도 사회가 원활히 돌아간다는 믿음이 형성되었다. 즉, 경제학에서 현재 주류 담론은 개인의 욕구와 이기주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대부분의 경제학 이론은 순수한 의도에서 사회 구성원의 ‘협력’이 일어나지 않으며, 개인의 욕구와 이기심으로...

[228호 Review: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아드만 애니메이션 : 월레스&그로밋과 친구들>] 아드만이 고집하는 아날로그와 변혁

  <월레스와 그로밋 Wallace & Gromit>(1989), <치킨런 Chicken Run>(2000) 등을 통해 우리에게 클레이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를 익숙하게 해 주었던 아드만 스튜디오의 전시가 7월 12일까지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디자인전시관에서 진행된다. 372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아드만 스튜디오의 초창기 작품부터 애니메이션 제작을 위한 드로잉, 스케치, 클레이 인형, 촬영세트 등을 한자리에 모았다. 아드만 스튜디오의 시작 12살부터 놀이로 영상을 제작하던 데이비드와 피터는 1976년에 아드만 스튜디오를창설했고, 어른들을 위한 스톱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1985년 영입한 닉 파크가 감독한 <동물원 인터뷰 Creature Comforts>(1989)가 1990년 오스카 최우수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받으면서 아드만 스튜디오는 클레이 애니메이션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였다.전시장에 들어가면 바로 아드만 스튜디오 세 주역의 사진과 <동물원 인터뷰>에 등장한 세 마리의 곰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사진은 한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아드만 스튜디오의 대표...

[227호 Review: SeMA벙커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 국가와 이데올로기, 희생된 개인의 역사

  서울특별시는 SeMA 벙커에서 평화디딤돌, 동아시아 시민네트워크와 함께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이라는 주제로 사진전을 개최했다. 이번 전시는 일제 강점기의 아픈 역사 속에 희생된 강제이주민들을 추모한다. 전시회는 140여 점에 이르는 손승현 작가의 사진 작품들과 두 편의 다큐멘터리 상영으로 구성되어 있다.   70년 만의 귀향 일제강점기, 수많은 조선인은 제국주의의 강압에 각지로 흩어졌고, 그들은 고향을 떠나 머나먼 이국땅에서 살아남아야만 했다. 일본의 제국주의가 패망한 지 70년, 강제이주자들은 한반도 역사에서 소멸된 것만 같았다. 조국이 그들을 잊은 사이 여러 시민 단체와 유족, 그리고 제국주의를 반성하는 일부의 일본인들에 의해 그들은 다시 기억되었다. 사진전은 역사의 비극을 관통하는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을 제목으로 삼았다. 사진 작품을 통해 강제노역에 동원된 이주자들의 유해 송환 과정을 여러 장소에서 만날 수 있다. 사진을 전시...

[227호 책지성: 이중톈, 『이중톈의 미학강의』] 미학을 정의할 수 있을까?

미학이 존재해온 이유 ‘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는 영원히 정답이 없을 것만 같다. ‘미학(美學)’이라고 이야기 한다면 먼저‘미에 대해 설명’하는 학문이라는 두루뭉술한 대답을 떠올리게된다. 그렇다면 ‘미(美), Beauty’라는 것은 무엇인가? 의미 그대로 아름다움은 무엇인지에 대해 사람들은 각기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가령 누군가가 어떤 조각상을 보며 아름답다고 하는 동시에 그것에 대해 아름답지 않다고 하는 사람이 등장한다면, 그 둘의 논쟁은 매듭지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이 끝나지 않을 논쟁처럼 ‘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 내릴 수 없다. 그렇다면 미학은 허무맹랑한 학문인 것인가? 미학을아무리 공부해도 아름다움을 정의내릴 수 없다면, 그 학문은 쓸모없는 것이지 않은가. 어떤 의미에서 ‘미학이 쓸모없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예술작품이 아름다울지언정 그것이 실제로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학을 공부한다고...

[227호 특강취재: 푸른역사아카데미, <로쟈와 일본 근대문학 읽기>] 나쓰메 소세키와 만나는 일본 근대문학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위치한 푸른역사아카데미는 3월 5일부터 4월 23일까지 매주 월요일 저녁 7시 30분에 <로쟈와 일본 근대문학 읽기>라는 제목으로 총 8차례 특강을 진행한다. 본 특강은 일본 근대문학의 대표 작가들을 살펴보며, 모리 오가이(森鸥外),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등 강의마다 다른 작가의 저서를 통해 일본 문학을 심층적으로 탐구하고자 기획됐다. 강사는 로쟈라는 필명으로 알려진 이현우 문화비평가이며, 3월 19일 진행된 세 번째 강의에서는 나쓰메 소세키 작가의『갱부』를 다루었다.   일본 근대문학의 배경탐구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시대부터 현재까지를 근대 또는 근현대로 구분한다. 여기서 다시 메이지(明治)와 다이쇼(大正)시대를 근대로, 쇼와(昭和)와 헤이세이(平成)시대를 현대로 나누는 것이 보통이다. 메이지 정부는 오랜 쇄국정책에 따른 폐단을 없애기 위해 서둘러 서구 문명을 받아들였다. 신분제도 폐지와 개정된 학제 도입, 양력 사용 등 새로운 체재를...

[227호 문화비평: 시간의 고향] 미디어가 재현하는‘추억’이 여전히 인기 있는 이유

지난 3월 31일, 13년의 대장정을 마친 MBC <무한도전>은 2월 설연휴 특집으로 <토토가3- H.O.T.>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 시즌3를 선보였다. 이 기획은 왜 <무한도전>이 그렇게 오랫동안 예능프로그램으로서 인기를 끌었는지를 다시 한번 수긍하게 했다. 해체한 지 17년이 된 아이돌 그룹 H.O.T. 멤버들이 재결합해 공연하는 기획을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MBC <무한도전>은 <토토가>라는 기획으로 1990년대 가수들, 젝스키스 특집공연, 그리고 H.O.T. 특집공연 등 세 번의 시즌을 선보이면서 1990년대 대중음악 스타들의 공연을 성사시켰다. 1990년대 청춘이었던 대중의 추억소환에 성공한 프로그램으로 tvN의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도 빠질 수 없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1997년, 1994년, 1988년 당시의 대중문화와 서민들의 삶의 모습을 현실감있게 재현했다. 또한 한국사회에서 스포츠, 대중음악 등의 팬덤 문화의 형성과정과 일상생활을 밀도있게 보여주며 드라마 속 재현되는 과거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크게...

[227호 영화비평:<플로리다 프로젝트 The Florida Project>(2017), 타인의 가난과 불행을 관람하는 것에 대하여

    션 베이커 감독의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The Florida Project>(2017)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사람들이 모여서 불타고 있는 집을 구경하는 순간이다. 이 영화는 플로리다 주 올랜도에 위치한 디즈니월드 건너편에 주거 빈민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텔촌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 불타고 있는 집은 모텔촌 근처에 있는 빈 집이다. 디즈니월드를 배경으로 삼았다고 해서 이 영화가 동화 속 이야기와 관련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배경인 모텔촌은 한때 디즈니월드를 찾은 관광객들로 붐비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주 단위로 투숙하는‘숨은 홈리스(Hidden Homeless)’들의 터전으로 활용되고 있다. 6살 아이 무니(브루클린 프린스)와 엄마 핼리(브리아 비나이트)도 이들 중 하나로, 지금 불타는 집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중이다. 무니와 핼리뿐 아니라 모텔촌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곳에 서서 맥주를 들고 “다 태워버려!”라고 외치며 불구경을 하고...

[227호 테마서평: 4월의 제주] 4·3, 70년의 기억, 기억의 힘

[1]『제주4·3을묻는너에게』(허영선저, 서해문집, 2014) [2]『해녀들』(허영선저, 문학동네, 2017) [3]『순이삼촌』(현기영저, 창비, 2015)     트라우마의 섬, 제주도 제주섬은 기억의 땅이다. 4·3의 협곡에서 오랜 세월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사는 섬, 동 시대의 역사적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땅이다. 물론 그 기억의 조각은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섬 전체가 ‘거대한 감옥’같은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 기억은 함께 전이된다. 역사적 상흔의 기억처럼 질긴 것은 없기에. 그리고 그 기억은 늙지 않는다. 4·3은 이제 70년의 능선을 넘는다. 사람들은 동백꽃 배지로 4·3을 기억하고 공감한다. 70년 전에 온전히 피어 보지도 못하고 떠난 사람들 이 제주섬엔 10명 중 한 명꼴이었다. 달리다 보 면 하얀 눈 속에서 동백이 애처로운 눈초리로 피어있기도 했고, 눈 덮인 산야에 통으로 뚝뚝 나동그라져 멀리에서는 선혈처럼 보이기도 했다는...

[226호 테마서평: 위화의 눈으로 본 현대중국의 모습] 위화를 읽다, 중국을 읽다

[1] 『허삼관 매혈기』(위화 저·최용만 역, 푸른숲, 2007) [2] 『인생』(위화 저·백원담 역, 푸른숲, 2007) [3]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위화 저·김태성 역, 문학동네, 2012)                     위화(余華)는 중국의 당대 문학 중에서 한국에 가장 널리 읽혀 온 작가라 할 수 있다. 분단 이후 오랜 냉전의 시간 동안 격절되어 왔던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한국의 독자에게 위화의 존재는 각별함이 있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판매된 중국 현대작가’ 집계(2014년의 교보문고 발표)에서는 루쉰(魯迅)이나 모옌(莫言)을 제치고 1위부터 3위까지 위화의 작품『허삼관 매혈기』 ( 『인생』, 『제7일』)이 차지했다. 위화의 소설은 중국과의 국교 수립(1992년) 이후, 그간의 단절이 가져온 양국의 문화적 이질감을 극복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아 준 것이다. 그렇다면 왜...

[226호 문화비평: 예능프로그램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2017)] 자기만족과 인정 투쟁의 사이에서

 MBC 에브리원의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의 인기가 대단하다. 처음 편성될 때는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파일럿 프로그램이었는데, 지금은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할 정도로 방송사의 효자 프로그램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방송에 등장한 코스를 그대로 따라가는 여행상품의 등장과 <서울 메이트>, <친절한 기사단>과 같은 유사 예능프로그램의 등장을 이끄는 등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는 외국인 예능의 트렌드 세터가 되었다. 확실한 스타 대신 한국여행과 TV 출연이 처음인 외국인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이 이렇게까지 인기를 얻을 줄은 그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이렇게 인기를 얻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평자들은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가 가지고 있는 특징, 즉 한국문화와 음식을 처음 경험하게 된 외국인을 내세웠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접하는 것들에 대한...

[226호 영화비평:<더 포스트 The Post>(2017) 스필버그, 정치적 자유주의, 여성 리더십의 문제

 한국 영화에서 믿고 보는 배우가 송강호라면 할리우드 영화에서 믿고 보는 감독 중 하나는 스티븐 스필버그다. 1970~80년대 그는 블록버스터의 효시라 불리는 <죠스 Jaws>(1975), 동시대 액션 어드벤처의 전설이 된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등으로“영화는 심오한 예술이기 이전에 오락이며, 재미있는 영화란 이런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모든 감독이 흥행을 추구함과 동시에 예술가로서의 명성과 명예를 함께 누리고 싶어 하듯이 스필버그도 오락적인 영화를 만듦과 동시에 소위 ‘작품성 있는’ 영화를 간간이 연출했다. <컬러 퍼플 The Color Purple>(1985), <태양의 제국 Empire of the Sun>(1987)등이 그러한 영화였다. 어쩌면 오락성과는 거리가 먼 무거운 영화들 때문에 혹자들은 그가 아카데미상을 타고 싶어 안달이 난 감독이라 평하기도 했다. 그런 평가가 맞는 것이라면 1994년 아카데미 작품, 감독, 각색, 촬영 등 주요 7개 부문을...

[226호 Review: <알베르토 자코메티 한국특별展>] 가장 비싼 현대 조각가 자코메티, 그와 생각의 가치를 마주하다

  거장 피카소가 시기한 알베르토 자코메티, 그는 누구인가 엄청난 성공을 하고 사회적으로 유명인사였던 피카소에게도 삶에 미련은 있었다. 그는 삶 마지막, 장 클라우드 노엘(피카소 생애 마지막 자서전 저자)에게 놀라운 고백을 한다. “나에게 단 한 번의 행운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단 한 번이라도 보고 싶은 두 사람이 있어요. 바로 앙드레 말로와 알베르토 자코메티요 ” – 파블로 피카소(1881-1973)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미학적 신념을 권위 있게 표현할 수 있었던 자코메티는 자신만의 탁월한 능력으로 피카소가 결코 넘지 못할 사유의 세계를 만들었다. 또한 사람의 성공과 인격을 별개로 여겨 누구에게도 주눅 들거나 압도당하지 않았고, 피카소 작품의 미흡한 점을 지적하며 다른 관점을 제시할 수 있었던 최초이자 마지막 인물이기도 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 1천억 원이 넘는 유일한 조각상...

[226호 책지성: 이명호 외, 『유토피아의 귀환: 폐허의 시대, 희망의 흔적을 찾아서』] 오늘, 유토피아를 상상한다는 것

‘불가능한 것’을 상상한다는 것의 가치 “현실주의자가 되어라. 그리고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모순적으로 들리는 이 문구는 1968년 5월 프랑스 파리의 학생들이 내세운 슬로건 중 하나였다. 학생들은 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현실주의자가 될 것을 요구했을까?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단 말인가? 68혁명은 당시 프랑스에 만연했던 권위주의·자본주의적 폐해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되었고, 단순한 정치변화 뿐 아니라 계급·성별·인종 불평등에 대한 인식으로 확대되며 국제적 반전운동, 반인종차별주의, 여성해방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자본주의와 그 논리를 계승한 신자유주의는 자신들의 체제 바깥을 사유할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 TNA)’고 단언하였지만, 파리의 학생들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비웃던 대안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잉그리트 길혀홀타이(Ingrid Gilcher-Holtey)는 『68혁명, 세계를 뒤흔든 상상력』(1968 Eine zeitreise, 2008)에서 부패한 지배 권력과 사회에 대한 집단행동이었던 68혁명의 원동력을’다른 세상을 꿈꾼 상상력’...

[226호 특강취재: 푸코사상의 파노라마, <자기배려, 실존의 미학과 파레시아>] 전통을 거부하고 새롭게 세상을 바라본 사상가 ‘푸코’

  대안연구공동체는 <푸코사상의 파노라마> 시리즈의 마지막 세션인‘자기배려, 실존의 미학과 파레시아’강의를 개최했다. 강의는 2월 14일부터 4월 4일까지 총 8회에 걸쳐 매주 수요일에 진행된다. 시간은 오후 7시 30분부터 10시까지이며, 오랫동안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저서를 번역해온 심세광 박사가 강의를 맡았다. 첫 강의인 2월 14일에는『담론과 진실-파레시아』의 발간 기념 특강이 진행되었고, 본격적인 푸코사상에 대한 내용은 두 번째 강의부터 시작되었다. 본보에서는 지난 2월 21일에 진행된 두 번째 강의 ‘자기인식과 자기배려’의 내용을 다룬다. 이 날 강연자는 푸코의 후기주의 사상에 대한 강의가 진행되기 전에 앞으로 다룰 내용을 전체적으로 소개하였다. 푸코의 후기주의 사상의 흐름 푸코는 1966년 역사에 대해 언급한『말과 사물』을 출판한 이후 좌파로부터 반인간주의자라는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푸코가 관심을 가진 것은 역사로부터 축적되어온 지식이었으며, 중요하게 생각한...

[225호 책지성: 윤원화, 『문서는 시간을 재/생산할 수 있는가』] 너머의 시간을 향해

  서문과 문서   어릴 적 서문 읽는 시간을 배웠다. 그 시간은 저자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가닿기 위한 진입로 같았다. 그 시간을 통과하면 앎이라는 보물을 숨겨놓은 우거진 숲을 거닐 에너지가 자동적으로 충전돼 있는 줄 알았다. 하나 나이가 들었고 요령도 늘었다. 나이가 들었고 요령도 는 내 주위의 어른들이 흔히 하는 농이 느닷없이 진지하게 다가왔다. ‘서문序文을 읽었으니 다 읽은 셈이군.’ 어쩌면 이는 서문을 읽는 시간에 대한 가장 예리한 해석일지 모른다. 서문은 전부이면서도 전부가 아닌 것이다. 어찌되었든 서문은 전부에 걸쳐 있다. 저자의 의지에 따라 서문의 전개와 모습은 달라지나 대개 서문 안에서 저자는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살면서 가장 공을 들인 시간을 거쳐 지금에 다다랐다고 토로한다. 물론 “그 순간”의 중요성은 다음 책에 놓일 서문의 시간 속에서...

[225호 문화비평: 고양이와 정치학] 고양이는 진보다? – 인간, 동물 그리고 정치

    전원책의 개와 진중권의 고양이 2016년 5월 어느 금요일, 처음 참석한 문인들의 모임에서 낯설고 어색한 분위기에 눌린 나는 앞에 놓인 맥주만 연거푸 마시고 있었다. 그때 내 앞에 앉아있던 한 유명한 평론가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전원책 변호사의 개와 진중권 교수의 고양이가 새벽 산책에서 가끔 만난다는 이야기와 함께 “우파는 좌파보다 개를 좋아하고 좌파는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진중권 교수의 농담을 전하면서 자신은 고양이를 키우고 있노라 했다. 자신이 고양이를 키운다는 그 짧은 문장은 자신은‘보수’가 아니며 진돗개에 열광하는 50대 중장년의 자기 또래들과는 다르다는, 숨겨진 그러나 명백한 기의를 담고 있었다. 분위기는 자연스레 키우고 있는 반려동물이 있는지를 서로 묻고 대답하면서 정치성향에 대한 농담을 이어갔다. 내 차례가 왔다. 나의 대답은 이랬다. “저는 개와 고양이를 같이 키우고...

[225호 영화비평: <범죄도시>(2017) 순수한 공동체를 향한 배제의 방식

영화 <범죄도시>(강윤성, 2017)가 670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하반기에 개봉한 한국영화 중 최고의 흥행작으로 올라섰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라는 제약과 굵직한 흥행 배우 하나 없어 시장에서의 열패가 점쳐졌던 이 영화는 어떻게 최후의 승자가 되었을까? 황진미 영화평론가는 이 영화의 인기 요인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 번째 요인은 이 영화가 ‘2004년 금천경찰서의 조선족 조직 폭력배 소탕작전’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청년경찰>(김주환, 2017)이 빠졌던 중국 동포 재현 논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그는 설명한다. 두 번째는 외국인과 한국인의 구도를 단순한 선악의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았다는 점, 세 번째는 중국 동포가 저지른 범죄의 희생자가 여성으로만 한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이러한 지점이 주인공을 맡은 마동석 배우의 스타 이미지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범죄도시>가 최근...

[225호 특강취재: 연세대학교와 함께하는 인문아카데미, <문자, 매체, 예술>] 종교와 함께해온 알파벳의 발명과 확산

서울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에서는 HK사업의 일환으로 인문학적인 지식을 널리 확산하기 위해 2010년부터 교도소 등 다양한 기관에서 인문학 관련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시민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진행되는 이번 강연은 <문자, 매체, 예술>을 주제로 하며, 총 8번의 수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업은 11월 2일부터 12월 21일까지 서울시 서대문 도서관에서 매주 목요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진행된다. 본보는 지난 11월 16일에 있었던 최경은(연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강연자의 첫 수업 주제인 ‘문자의 확산, 알파벳의 발명에서 확산까지’를 다루고자 한다. 강연자는 이번 수업의 주제인 ‘알파벳’ 의 좁은 의미로서의 정의에 대한 설명으로 강연을 시작했다. 알파벳의 의미와 탄생 좁은 정의의 알파벳이란 영어뿐만 아니라 독일어, 스페인어, 프랑스어에 쓰이는 ‘라틴 알파벳’을 의미한다. 본 강연은 ‘라틴 알파벳’에 관한 이야기이다. 라틴 알파벳을 사용하는 국가의 비율은 지구상에서 거의 70%에...

[225호 리뷰: 이길래 조각가 오픈스튜디오] 철필로 하늘에 그림을 그리는 조각가

작가의 예술적 삶을 담고 있는 생활공간이자 창작을 위한 고뇌와 작품 제작 과정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예술가의 작업실은 작품만큼이나 흥미로운 공간이다. 작가의 내밀한 공간인 만큼 일반인들이 접하기 어려워 더욱 신비로운 공간이기도 하다. 최근 대중과 예술의 친밀도를 높이기 위해 작가의 작업실을 일반에게 공개하는 오픈스튜디오 프로그램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 11월 본교 동문인 이길래 작가가 뉴욕 오페라 갤러리에서 초대전을 진행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와 개인적으로 작업실 방문 요청을 하여 오픈스튜디오를 진행하였다. 이길래 작가가 뉴욕으로 출국하기 하루 전에 방문한 작업실은 경기도 여주시 운치 있는 향촌에 위치해 있었다. 작가의 작업실은 자연석으로 쌓아올려진 성벽과같은 외벽의 건물 안에 작업공간과 수장고, 전시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작업실 앞마당에는 소박한 정원 하나 없었지만, 작가의 대표 작품인 <나무> 시리즈의 청동 소나무 조각 작품이 있어...

[225호 테마서평: 인류와 축제] 축제의 문명사적 변화와 동서양 축제

[1]『축제와 문명』(장 뒤비뇨 저, 류정아 역, 한길사, 1998) [2]『용과 여성, 달의 축제』(한양명 저, 민속원, 2006) [3]『축제의 역동성과 현대일본사회』(김양주 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축제의 의미 축제(祝祭)는 한자어가 보여주듯이 신에 의존하며 신을 모시고 노는 것이다. 자신이 믿는 신을 즐겁게 하는 놀이는 본인 스스로에게도 커다란 희열을 준다. 원래 한국에서는 축제와 놀이가 큰 의미 차이 없이 쓰였고, 축제라는 말보다 놀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 별산대놀이, 탈놀이, 굿놀이 등에서 보듯‘놀이’도 축제와 마찬가지로 신을 모시고 노는 것을 의미했다. 영어 ‘Festival’은 라틴어의 성일(聖日, festivalis)에서 유래한 말이다. 동서양 모두 축제는 신을 모시고 의례를 행하고 신나게 노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축제와 놀이의 뜻이 분화되기 시작했다. 축제라는 단어가 신의 측면이 강조되는 신성한 잔치라면, 놀이 라는 단어는 신성성이...

[224호 문화비평: 징검다리로서의 인문학] 피카소와 인문학

1. ‘황소머리’ 1978년 경희대학에 입학했던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장소는 원형 도서관이었다. 거기서 책을 읽노라면 정말 대학생이 된 듯했다. 무시로 드나들었다. 서가에 비치된 화집들을 뒤적이다가 파블로 피카소의 <황소머리>(1943)라는 오브제 작품도 거기서 만났다. 농촌에서 성장한 나로선 금방 작품의 이름을 알아맞힐 수 있었다. 이것은 소의 대가리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상하고 난해한 화가로 알았던 피카소의 작품 이름을 곧바로 알아 맞혔으니 으쓱하는 느낌도 들었다. 한국의 시골 출신 대학생과 저 먼 스페인 출신 유명작가가 번역 없이 서로 통했다는 감회에 흐뭇했다. 우쭐거리는 마음이 놀라움으로 바뀐 것은 작품의 소재 때문이었다. 시골에서 자전거로 통학을 했던 터라 이 또한 금방 알아맞힐 수 있었다. 위로 솟은 쇠뿔은 자전거 핸들이요, 소 대가리는 자전거 안장에서 가져와 짜 맞춘 것임을. 낡은 자전거 안장과...

[224호 영화비평: <지난 여름 갑자기 Suddenly, Last Summer>(1959) 1950년대 할리우드에서 동성애에 대해 말하지 않기

미국 현대사에서 1950년대는 아마도 가장 보수적인 시기였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 난 후 세계 자본주의의 유례 없는 호황과 번영 속에서 미국은 본격적인 소비 자본주의로 나아 가고 있었고, 중산층의 교외화(suburbanization)와 TV 소유, 십대들의 데이트 성지가 된 드라 이브-인 극장 등이 크게 발흥하고 있었다. 불과 20~30년 전 미국 자본주의를 공포로 몰아넣었 던 대공황의 흔적은 깨끗이 사라졌고, 미소 냉전 체제는 ‘혁명’, ‘공산주의’, ‘소비에트’등의 단어를 금기시하게 만들었다. 아니, 어쩌면 전후 최고의 호황을 겪고 있는 미국 사회에서 그러 한 단어를 입에 올린다는 것은 어딘지 촌스럽고 시대착오적으로 보이는 것이였을 수도 있다. 슬로언 윌슨이 소설『회색 플란넬 양복을 입은 남자 The Man in the Gray Flannel Suit』(1955. 이듬해 영화로 제작)에서 그린 규격화되고 표준화된 중절모의 남자들(1950년대 중반을 배경으로...

[224호 Review: 《덕수궁 야외프로젝트 : 빛·소리·풍경》] 현대와 전통, 덕수궁에서 만나다

덕수궁 120주년을 기념하여 국립현대미술관과 덕수궁관리소가《덕수궁 야외프로젝트 : 빛·소리·풍경》전을 공동 주최했다. 본 전시에는 자신만의 조형적인 작업방식을 구축하고 있는 9명의 예술가가 역사적 공간인 덕수궁을 수개월간 드나들며 영감을 얻은 결과의 산물 9점이 전시되어 있다. 덕수궁 내 전각 및 야외 공간 7곳에 전시된 작품들은 사진, 드로잉뿐만 아니라 설치, 영상, 사운드 등 다양한 표현방법을 사용하여 관람객의 눈과 귀를 기분 좋게 자극한다. 석조전 서쪽 계단, 덕수궁을 해체하다 석조전 서쪽 계단에는 해체를 통해 외피 속에 숨어있는 내부의 기능, 색, 모양 등을 보여주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는 작가 김진희의 <딥 다운—부용>이 전시되어있다. 이 작품에서는 덕수궁에 스며있는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을 해체하여 재구성하였다. 작품은 다양한 방면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는데, 여러 방향에서 바라본 작품은 입체적으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눈을 감고...

[224호 테마서평: 이미지의 폭력성] 공정한 이미지 소비를 위하여

『사진에 관하여』(수잔 손탁 저·이재원 역, 이후, 2005) 『타인의 고통』(수잔 손탁 저·이재원 역, 이후, 2004) 『공정으로서의 정의』(존 롤즈 저·황경식 역, 서광사, 1988)               우리는 주변의 과도한 이미지 홍수 속에 사는 문화적 현상에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대중매체는 우리나라 사회와 아프리카 등을 포함한 저개발 국가에 대해 왜곡된 이미지를 갖도록 부추긴다. 이미지의 편향과 왜곡 현상은 대중들에게 고정관념과 같은 편견을 낳는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안으로 <공정한 이미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 <공정한 이미지>를 통한 편견 없는 사회를 꿈꾸어 본다. 사진의 폭력성 빈곤국가 사람들의 사진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지만, 그 사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면 거기에서 우리는 이중적인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 ‘ 누군가는 반드시 불쌍하고, 힘든 사람은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고통스러운...

[224호 책지성: 폴 라파르그, 『게으를 권리』] 참된 게으름의 의미를 찾아서

      우리는 왜 이렇게 바쁘게 살아가는 것일까? 마치 일 하려고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은 하루 대부분을 일에 투자한다. 잠깐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 바쁜 틈에서 지쳐간다 말하면서도, 쉼 없이 일을 하고 있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 지친 노동자의 입장에서, 이 책은 너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한껏 나태해지고 싶은 마음으로 책을 펼쳤지만, 책은 생각보다 심오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저자인 폴 라파르그는 카를 마르크스의 사위이자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다. 또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유럽을 대표하는 혁명적 지식인이기도 하다. 사회주의 성향 출판사에서 무보수로 일할 만큼 활발하게 행동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심지어 그는 70세에 이르러 더 이상 사회주의운동을 이어나갈 수 없다고 판단하자, 아내와 자살로 생을 마감할 만큼 열정적이었다. 이 책은 그의 여러 글...

[224호 특강취재: 철학아카데미, <기호정신분석과 여성학>] 크리스테바의 ‘주체의 의미화 과정’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위치한 철학아카데미는 지난 15년 동안 “열린 사유의 공간, 사유를 열어가는 광장”이라는 구호 아래 예술, 과학 등 여러 장르에 있는 철학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철학아카데미는 가을 학기를 맞아 시민과 학생을 대상으로 을 개최했다. 본 특강은 총 8개의 강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0월 21일부터 11월 30일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진행된다. 본보는 지난 10월 21일에 진행한 김선하(경북대학교 철학박사)강연자의 ‘프로이트, 라캉 그리고 크리스테바’를 다룬다. 본 특강은 프로이트와 라캉을 비롯한 남근 중심의 정신분석이론이 배제한 타자성의 새로운 윤리와 인간의 사회화 과정에 대한 내용이며, 강연자는 “이번 강연을 준비하면서 크리스테바를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운명적인 느낌을 받았다”며 강연을 시작했다. 라캉과 크리스테바 프랑스의 정신분석가이자 기호학자, 철학자인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1941~)는 타자성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세가지...

[223호 영화비평: <덩케르크 Dunkirk>(2017) <덩케르크>의 전쟁 재현 방식과 의미에 대하여

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 Dunkirk>(2017)는 개봉하기 전부터 전세계적으로 많은 기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2차 세계대전 초기 연합군 최대 규모의 작전이었던 덩케르크 철수를 실사촬영을 선호하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만든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이 영화를 덩케르크 해안에서 촬영했으며 고증을 위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당시의 군함과 전투기를 동원하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이 영화는 전체분량 중 70%가량을 아이맥스로 촬영하여 상업영화 사상 최대 분량의 광활한 화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영화에 대한 국내의 평론도 재현의 방법을 중요하게 평가하고 있다. <덩케르크>는 이전의 영화들과 달리 전장으로 가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으며 그 방법론에서 떠올릴 수 있는 생존이라는 핵심도 곱씹어볼 만하다는 게 많은 평자들의 주장이다. 이들 주장의 근거는 아이맥스로 촬영된 전장의 풍경인데, 이것의 특징은 이전 전쟁영화와 달리 스펙타클한...

[223호 문화비평: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교육] 제발 조 발표와 괄호 넣기를 버려라

※본 지면은 자유 주제 청탁 지면으로 본보의 방향성 및 기획 의도와 다를 수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극복하려는 다수가 없는 위기 인문학의 위기는 어느새 낡은 개념이 되었다. 필자가 학부생이었던 1990년대 후반에도 대학 안팎에서 인문학이 위기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20여 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도 인문학은 여전히 위기라지만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정부주도의 지원정책밖에 없다. 이상하지 않은가. 인문학을 전공한 수십만 명의 학생들이 사회로 나갔지만 이들이 인문학의 고사를 막겠다고 발벗고 함께 나서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인문학 교육이 살려야 할 가치와 의미를 지닌 경험으로 기억되지 않기 때문이다. 학부에서 국문학과 영문학을 전공한 필자 역시 졸업을 위해 수강했던 수십 개의 과목들 중 영혼을 뒤흔들었던 강의를 기억하지 못한다. 교수나 강사가 교재 내용을 그대로 가르치거나 조 발표로...

[223호 특강취재: 한양대학교·성동문화재단, <시민대학, 인문학에서 길을 찾다>] 행복한 Win-Win 뒤에 가려진 진실

한양대학교는 인문학 진흥을 목적으로 교육부에서 추진한 ‘인문역량 강화사업(CORE사업)’대상 학교로 선발되어, 성동문화재단과 함께 시민과 학생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연 <시민대학, 인문학에서 길을 찾다>를 개최한다. 본 강연은 8월 3일부터 9월 격주 목요일 16시부터 18시까지 한양대학교 인문관 303호에서 진행된다. 총 5개의 특강이 준비되어있으며 앞으로 진행될 강연으로는 9월 14일 ‘문학에서 사랑을 찾다’, 28일 ‘한국인과 한국문화’가 있다. 본보는 지난 8월 3일에 있었던 서신혜(한양대학교 창의융합교육원 교수) 강연자의 ‘Win-Win 전략이 숨긴 이야기’를 다룬다. 진정한 유교의 나라 만들기 사회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상, 행동, 생활방법을 근본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관념이나 신조의 체계, 즉 이념이 있어야 한다. 고려는 불교를, 조선은 유교를 이념으로 사용했다. 오랫동안 불교 이념에 따라 살던 백성에게 유교적인 생활양식을 강제할 수는 있지만, 자발적으로 따르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백성이...

[223호 책지성: 백종현, 『시대와의 대화, 칸트와 헤겔의 철학』] 시대와 대화하고 뛰어넘기, 칸트와 헤겔

고등학교 수준의 철학 지식밖에 없는 나지만 철학은 너무 멀거나 어렵기만 한 지식이 아니다. 나의 기준에 철학은 존재는 하지만 구체적인 언어로 형상을 갖추지 못하던 내 생각의 구현이며 인식의 벽을 깨는 경험이다. 그만큼 내가 느끼는 철학은 나 자신과 현실에 맞닿아 있었다. 그래서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책을 펴내면서’에서 저자가 가장 먼저 철학이 현실에서 갖는 의의를 설명해 반가웠다. 저자는 “철학이 근본학(根本學, Radical science)으로서 그 시대의 자연, 인간, 사회, 문화 등 현실의 전 영역에 걸친 통일 원리를 반성적으로 탐구하는 지적 활동”이라고 정의한다. 철학이 추상적으로 보이는 것은 현실을 비추되 인간에게 본래적인 것을 응축해 추상적인 형태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만큼 철학자의 반성적 사유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고 시대에 응하는 성격을 가지면서도 후세대들에게 여전히 의미 있게 받아들여질...

[223호 리뷰: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라이프(LIFE) 사진전>] 한 걸음 떨어지니 더 잘 보이는 세상

  ‘보는 것을 즐거워하자, 보고 또 놀라자, 보고 또 배우자’ 헨리 루스의 <라이프(LIFE)>지 창간사로 시작하는 이번 전시는 전설적인 포토매거진 <라이프(LIFE)>지의 사진과 영상 132점을 전시하고 있다. 사진 잡지의 정점에 있는 <라이프(LIFE)>지에서도 최고의 사진만을 실은 본 전시는, 20세기 현대사의 터닝 포인트를 엿볼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엄선한 사진만 전시하는 만큼, 전시된 것들은 단순한 사진 한 장이 아니라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작품을 보면서 그 순간을 찍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던 사진작가들의 직업의식도 느껴진다.   우리의 21세기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FACE, 네 가지 테마로 구성되어 있는 전시의 시작은 ‘기억해야 할 얼굴’이다. 켈리 그레이스, 슈바이처, 마더 테레사, 제임스 딘 등 여러 분야의 역사적 인물들과 시대의 아이콘들을 가벼운 발걸음으로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 테마에서는...

[223호 테마서평: 조금 더, 게을러도 괜찮아] 좀 게을러도 괜찮아, ‘생각하는 게으름’이 중요해!

[1] 「게으를 권리」(폴 라파르그 저 · 차영준 역, 필맥, 2009) [2] 「게으름에 대한 찬양」(버트런드 러셀 저 · 송은경 역, 사회평론, 2005) [3] 「피로사회」(한병철 저 · 김태환 역, 문학과지성사, 2012)                   “신성한 노동” 앞에 게으름 찬양이라니?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노동의 의미는 결코 신성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만 해도 노동은 노예나 천민의 일이었다. 노동을 뜻하는 독일어 ‘ Arbeit’의 어원의 뿌리에도, 고아가 겪는 고통이 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노동은 고역이다. 따라서 가능한 한 적게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좋다. 폴 라파르그(Paul Lafargue)도 “ 자신의 노동을 제공하고 돈을 받는 시민은 노예와 마찬가지고, 수년 간 감옥에 갇혀야 할 죄인”이었다고 했다[1]. 부정적 의미를 갖고 있던...

[222호 영화비평: <겟 아웃 Get Out>(2017)] 트럼프 시대에 흑인으로 살아남기?

* 약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 흑인 청년이 어두컴컴하고 한적한 교외에서 전화통화를 하며 걷고 있다. 그는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잘못 와서 헤매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상대방에게 투덜댄다. 그의 옆으로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간다. 무엇인가 위협적인 분위기를 감지하지만 이내 지나가버린다. 그는 안심한다. 그러나 자동차가 멀지 않은 곳에 서고 영화는 뭔가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를 창출해 낸다. 그리고 어김없이 무슨 일이 일어난다. 흑인 청년은 일순간 가격을 당하고 맥없이 쓰러진다. 그리고 차가 있는 곳으로 무력하게 질질 끌려간다.                                                                  ...

[222호 특강취재: 경의선 책거리, <청춘과 함께하는 고전, 인문, 문화산책1>] 소설, 나의 버려졌던 감정을 되찾게 해주다

마포구와 한국출판협동조합에서 주관하는 경의선 책거리는 5월 18일부터 7월 25일까지 ‘청춘과 함께 하는 고전, 인문, 문화산책1’이라는 제목으로 5차례의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 2차례의 강연이 진행됐으며 앞으로 3차례의 강연이 남았다. 경의선 책거리는 작년 10월에 조성된 복합문화공간으로, 경의선 홍대입구역 6번 출구에 있다. 본 강연은 지난 5월 20일에 진행된 것으로, 김영하 작가가 ‘우리는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진행했다. 좁혀지지 않는 거리 소설을 읽기란 쉽지가 않다. 소설을 읽으려고 하면 우선 눈에 글자가 보여야 한다. 글자는 하나하나 읽어야 하며 집중을 해야 보인다. 100년 전만 해도 글자를 읽는 것은 굉장히 고급화된 기능으로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렇게 글을 읽을 수 있 는 사람이 소수였던 시대와 달리 지금은 문명의 시대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222호 책지성: 조나단 월드먼, 『녹‘RUST’』] 도처에 널린 위험

      『녹‘RUST’』은 작가 조나단 월드먼이 30년 된 요트를 구입하고‘녹(綠)’을 발견하게 되면서 영감을 얻어 탄생됐다. 누구든 일상생활에서 녹을 발견했을 때 크게 개의치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은 녹을‘소리 없이 인류의 문명을 위협하는 붉은 재앙’이라고 설명한다. 녹은 다리를 무너뜨리고, 핵발전소의 반응기를 잠식하며, 핵폐기물 용기에 구멍을 내는 등 부지불식간에 우리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다. 또 녹은 군대에도 침투해 F-16 전투기와 헬리콥터가 공중에서 충돌하게 만들었고, 상업용 비행기가 비행 도중 공중분해되는 사고도 녹 때문에 일어났다고 한다. 또한 녹은 비행기 못지않게 자동차를 괴롭히는데“한밤중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자동차가 녹스는 소리가 들린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자동차는 녹 때문에 1년에 약 3.5kg 가벼워진다는 속설이 있다. 녹과의 사투는 화려하거나 멋있는 주제는 아니지만 이 책에는 묵묵히 부식을...

[222호 문화비평: SF 디스토피아의 철학적 기초] 과학기술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다

최근 4차 산업혁명에 관한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학계나 언론계는 물론이고 지난 대선 후보들의 토론에서도 주요 정책 의제로 떠오른 것을 보면, 현실 담론의 큰 흐름임에 분명하다. 4차 산업혁명이란 초연결성(Hyper-Connected), 초지능(Hyper-Intelligent)을 구현한 기술, 곧 사물인터넷(IoT), 클라우드 같은 정보통신기술(ICT), 빅데이터, 인공지능 등의 과학기술을 통해 야기된 대규모의 사회변혁을 일컫는다. 과학기술에 의해 인간 삶의 구조가 ‘혁명적으로’ 뒤바뀐다는 것이 당연시되는 것을 볼 때마다, ‘정말 그럴까?’라는 의문은 남는다. 예컨대 사랑의 통신기술이 편지, 삐삐, 휴대폰, 스마트폰으로 변한다고해서 미숙한 사랑이 성숙해지느냔 말이다. 그럼에도 과학기술에 의해 혁명적 변화가 초래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기술 개념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통념상, 기술이란 인간의 특정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 수단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기술은 결코 그런 것일 수 없다. 한갓 도구나 수단에 불과한 것에서...

[222호 리뷰: 연극 <보도지침>] 판단과 선택은 우리의 몫

연극 <보도지침>은 1986년 전두환 정권의‘보도지침’을 폭로한 김주언 한국일보 기자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법정연극이다. A: 판사, 변호사, 검사, 피고 사회부 기자 김주혁, 피고 잡지 편집장 김정배도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법정에서 악의는 논리로 탈바꿈되고, 선의는 색깔의 망령을 덮어쓴다. 핑퐁처럼 오가는 대사의 호흡을 정신없이 따라가다가도 어느 순간에 숨을 멈추게 된다. 두 번의 침묵 앞에서 나는 숨을 멈췄다. “지침이십니까? 부탁이십니까?”라는 물음 앞에서의 침묵. “앞으로 넌 어떻게 살 거니? 어디로 갈 거니?”라는 물음 앞에서의 침묵. 침묵은 무궁무진하다. 회피이자 의지의 표현이다. 질문에 따라서 긍정일 수도 부정일 수도 있다. <보도지침>에서 마주하는 침묵은 전자이며 후자이다. 차마 입을 떼지 못할 물음, 입을 뗄 필요도 없는 물음 앞에서 연극은 침묵을 택한다. 나는 그들의 침묵에서 고슴도치같이 가시를 세운...

[222호 테마서평: 의료윤리] 어떤 의사들의 반성

『환자가 된 의사들』(로버트 클리츠먼 저 · 강명신 역, 동녘, 2016) 『신의 호텔』(빅토리아 스위트 저 · 김성훈 역, 와이즈베리, 2014) 『위대한 참견』(히노 오키오 저 · 김윤희 역, 인플루엔셜, 2016)   요 근래 ‘안아키’라는 단어가 포털에 오르내리며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안아키가 뭔가 했더니 ‘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안아키 카페는 아이들을 키울 때 예방접종과 항생제를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이들이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를 가리킨다. 이들은 현대 의학을 불신하며, 예방접종 및 항생제가 제약회사와 의사들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현대 의학을 거부하고 그 대신 택한 것은 무엇일까. 그들이 택한 대안은 검증되지 않은 치료법이다. 이를테면 이들은 아이에게 숯가루를 먹이거나 화상 부위에 뜨거운 물을 붓는다. 면역력을 키워준다면서 수두에 걸린 아이와 멀쩡한 아이를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