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호 테마서평: 1인 미디어와 정치] 1인 미디어의 이중성

『몸짓들』(빌렘 플루서 저, 워크룸프레스, 2018) 『생명관리정치의 탄생』(미셸 푸코 저, 난장, 2012) 『우애의 미디올로지』(임태훈 저, 갈무리, 2012)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로장발롱(Pierre Rosanvallon)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감시’개념을 근대의 보편성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판옵티콘(Panopticon)’의 기능이 개인의 차원으로 확대된 ‘권력에 대한 사회적 감시’를 근대 정치라고 부른다. 1인 미디어가 무엇인지 질문하고 그 답을 구하고자 한다면, 이런‘사회적 감시’의 개념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1인 미디어야말로 판옵티콘의 일반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사회적 감시 개념과 판옵티콘 푸코의 판옵티콘 개념은 제레미 벤덤(Jeremy Bentham)에게 빌려온 것이다. 영국의 공리주의자인 벤덤에게 판옵티콘은 개인을 훈련시키는 규율 형식이었다. 벤덤은 범죄자를 구제하기 위한 ‘경제적인 방법’으로 원형 감시 건축물을 만들 것을 제안하는 서신을 작성했다. 벤덤은 자신의 건축물을 ‘교정의 집(the house of correction)’이라고 불렀는데, 판옵티콘의...

[230호 영화비평:<리틀포레스트>(2018), 나만의 작은 숲을 위하여

 임순례 감독이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만화를 한국의 정서와 풍토에 맞게 제작한 <리틀 포레스트>는 주인공 혜원(김태리)이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달리며 3개월 전 자신이 고향으로 돌아온 시점을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대학을 진학하면서 서울에 상경한 혜원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우리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동시대 청춘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취업도 연애도 학업도 마음대로 되지않는다. 영화는 그런 혜원이 눈 덮인 시골길을 걸어 집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이어 붙인다. 반겨주는 가족 하나 없는 그곳, 미성리 집에 도착한 혜원은 시린 손을 비벼가며 눈 속에 묻혀 있던 배추와 파를 캐내 배춧국을 끓여 먹는다. 그렇게 혜원은 그동안 방치되어 있던 집에 온기를 불어넣기 시작한다. 하지만 혜원은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곁에는 고향을 떠나지 않고 농협직원이...

[231호 리뷰: 2018광주비엔날레 : 상상된 경계들] 광주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GB커미션, 과거와 현재의 공존 을씨년스러움이 느껴지는, 폐허처럼 남겨진 낮은 2층 건물이 보인다. 깨진 유리창 사이 바람에 흩날리는 하얀 커튼, 병동이라 적힌 낡은 안내판. 무너진 건물 사이 조그만 입구에 들어서는 것부터가 관람의 시작이다. 널브러진 유리 조각이 발에 밟히고 그 발걸음마저 전시가 되는 곳, 국군광주병원이다. 민주정신의 지속가능한 역사와 이를 둘러싼 담론의 시각화를 위해 기획된 2018광주비엔날레 신작프로젝트‘GB커미션’은 개막 전부터 참여 작가들에게 광주의 역사성이 담긴 여러 장소를 소개했다. 그리고 3명의 작가 카데르 아티아(Kader Attia), 마이크 넬슨(MikeNelson), 아피찻퐁 위라세타쿤(Apichatpong Weerasethakul)이 선택한 국군광주병원은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사에 연행돼 심문하는 과정에서 고문과 폭행으로 부상당한 시민들이 치료받던 장소이다.안전한 관람을 위해 준비된 마스크를 쓰고 도슨트를 따라가다 보면,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둑한 복도를 거닐게 된다. GB커미션 참여 작가들은 ‘건물...

[231호 책지성: 프란츠 카프카, 『변신』] 인문학적 사고, 우리는 진정 사회적 동물인가

“그는 장갑차처럼 딱딱한 등을 대고 벌렁 누워 있었는데, 고개를 약간 들자, 활 모양의 각질(角質)로 나뉘어진 불룩한 갈색 배가 보였고, 그 위에 이불이 금방 미끄러져 떨어질 듯 간신히 걸려 있었다. 그의 다른 부분의 크기와 비교해 볼 때 형편없이 가느다란 여러 개의 다리가 눈앞에 맥없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프란츠카프카,『변신』中) 만약 당신이 자고 일어났더니 위와 같은 상황이라면 어떠하겠는가? 그 상황을 상상해보자.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자신이 흉측한 모습의 벌레가 되어있다는 상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괴롭고 소름이 끼치게 만든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변신』은 방금 우리가 꺼리던 그 상상을 밖으로 꺼내왔다. 그는 소설 속 주인공을 하루 아침에 벌레로 만들면서 주인공이 겪는 소외감을 이야기한다. 그는 왜 하필 주인공을‘벌레’로 변신시켰을까? 그레고르 잠자는 인간인가?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벌레가...

[231호 특강취재: TED×KyungHee-나와 세상의 연결] 청춘에게 보내는 메시지

본교 미래문명원은 지난 9월 14일’TED×KyungHee-나와 세상의 연결’특강을 주최했다. ‘TED×KyungHee’는 의미 있는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싶은 경희대학교 학생들이 진행하는 행사이다. 이번 특강 기획단은 경희대학교‘문화 세계의 창조’라는 철학 정신과 TED의 신조인‘Idea Worth Spreading’을 융합하여 이 특강을 선보였다. 기획단이 선정한‘나와 세상의 연결’주제는 나와 세상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리고 내가 이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날 열린 특강은 오후 6시 30분부터 9시 30분까지 약 3시간 동안 본교 서울교정 크라운관에서 진행되었으며, 연사마다 각 30분씩 강의를 맡은 뒤 45분가량 Q&A 시간을 가졌다. 이날 특강에 참여한 연사는 안재희(정치외교학과 졸업생), 김태우(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학생), 송채원(행정학과 학생), 장영은(국제통상금융투자학과 학생) 총 4명이었다. 김칫국을 먼저 마셔보자 ‘김칫국 마시고 있네’라는 속담을 들어본 적 있는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지레짐작하고 일을 벌이는 것을 지양하고자 만든 옛말이다....

[230호 책지성: 캐런 메싱, 『보이지 않는 고통』] 보이지 않는 고통, 정면으로 보기

    내가 하는 일이 나의 건강을 망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곧바로 일을 때려치우고 조용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건강을 돌볼 수 있을까?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지면서 어느 순간 건강은 더 이상 자신에게 우선순위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누구보다 이런 노동자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노동자와 그 가족의 생계를 손에 쥐고 쉽게‘갑’의 자리로 올라서고 노동자는 ‘을’의 위치에서 저항력을 상실한다. 노동자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거대한 힘 앞에서 ‘을’들은 점차 구조에 순응하게 되고 그들의 고통은 계속해서 희미해진다.   자본이 은폐하는 노동자의 고통   온종일 허리를 굽혀 청소하면서 만성적 허리통증을 갖게 된 청소노동자나 장시간 서서 일하면서 하체 질환을 갖게 된 마트...

[230호 영화비평:<공작>(2018), 신냉전의 시대, 햇볓정책 토대로서의 1990년대

신냉전의 시대, 햇볕정책 토대로서의 1990년대     * 다소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국영화에서 분단을 소재로 한 첩보영화의 전통은 꽤 오래다. 이 장르의 기원은 한국전쟁 직후에 제작된 <운명의 손>(1954)이다. 국군 방첩대 장교와 북한 여간첩의 로맨스를 서브플롯으로 전개되는 이 반공첩보영화의 서사 구조는 냉전반공시대의 한복판에서 만들어진 <죽은 자와 산 자>(1966)나 탈냉전 시대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포문을 연 <쉬리>(1999)에서도 발견된다. 남한의 첩보원이나 정보장교가 나오고 북한의 여간첩(<운명의 손>, <쉬리>), 혹은 좌익에서 전향하여 남한의 간첩 노릇을 하는 여성(<죽은 자와 산자>)이 등장한다. 여기서 이 미모의 여간첩들은 어김없이 남한 첩보원의 남성적 매력에 이끌리고, 이념을 초월한 순애보적인 사랑은 비정하고 냉혹한 분단현실에서 흡사 치정 멜로드라마처럼 예외 없이 여간첩의 죽음으로 귀결된다. 지난 10년 사이에 제작된 <의형제>(2009)나 <공조>(2016)가 보여주듯 이제 남남북녀의...

[230호 특강취재: 서울자유시민대학, <마중물 - 삶과 배움을 나누고 싶은 시민을 위한 맞춤형 강좌>] 서울, 다시 바라보기

서울, 다시 바라보기   서울자유시민대학은 8월 13일부터 9월 10일까지 ‘마중물 – 삶과 배움을 나누고 싶은 시민을 위한 맞춤형 강좌’라는 릴레이 특강을 선보인다. 특강은 ‘도시, 4차 산업혁명, 통일, 기후변화, 독도’의 주제로 다섯번에 걸쳐 진행된다. 이번 강의는 시민대학을 처음 접하는 시민을 대상으로 하며,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획된 무료 강좌이다. 지난 8월 13일에는 이병태(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조교수) 강연자가 <도시: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전언(傳言)>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진행했다. 특강에서는 거대 도시 서울의 주거 형태 변천사를 통해 서울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거대 도시의 탄생 우리가 알고 있는‘서울’은 어떤 도시인가?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인구 천만의 거대 도시다. 그렇다면 서울은 언제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도시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일까?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230호 Review: 국립현대미술관 <예술과 기술의 실험(E.A.T.): 또 다른 시작>] 융합의 시대, 협업의 시대에서 배우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예술과 기술의 실험(E.A.T.): 또 다른 시작>을 5월 26일(토)부터 9월 16일(일)까지 삼청로에 위치한 서울관에서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1960년대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했던 예술가와 공학자의 협업체 ‘E.A.T.(Experiments in Art and Technology)’의 주요 활동을 조명하면서 4차 산업혁명시대 융복합 예술의 가능성을 성찰하는 자리다. 한국에서 처음 선보이는 이번 대규모 회고전에는 예술과 과학기술의 만남을 주도한 33점의 작품과 E.A.T.의 활동과 작업 등을 담은 아카이브 100여 점이 소개된다.   1960년대, 협업의 시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망명하기 시작하면서 예술의 주도권도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가게 된다. 이때 유럽을 기점으로 시작된 장르 간 경계를 허무는 실험적인 흐름 역시 미국으로 전이된다. 1960년대는 TV와 라디오가 대중에게 보급되면서 과학기술이 일상의 영역으로 보편화되었고, 그 어느 때보다 예술가들이 활발히 협업하고 교류한...

[230호 문화비평: 추리게임의 현재와 미래] 우리는 어떤 추리의 시대에 살고 있는가?

  바야흐로 추리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다 할 추리문화라 할 것이 없었던 대한민국에도, 이제는 남녀노소 쉽게 즐길 수 있는 추리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게임, TV프로그램 등 다양한 콘텐츠를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 지적인 매력을 뇌가 섹시하다고 표현한 것에서 비롯한 ‘뇌섹남’, ‘ 뇌섹녀’라는 단어는 이미 신조어라 부르기에도 너무 오래된 표현으로 느껴질 정도다. 추리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꺼내면 탐정이 실제로 있는 직업인지를 묻는 사람부터, <명탐정 코난>과 같은 추리 만화를 좋아한다는 사람, 어렸을 적 <셜록홈즈> 전집을 한 권쯤은 읽어보았다는 사람, <더 지니어스>, <크라임씬>, <문제적 남자>, <대탈출>, <셜록> 등 예능 프로그램이나 드라마를 즐겨보았거나 보고 있다는 애청자들까지 만나볼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방탈출 카페>를 방문하여 탈출에 성공하거나 아쉽게 실패했다며 추리와...

[230호 테마서평: 인간다움과 과학기술의 역행] 과학기술의 발전과 인간다운 소통방식 탐색

『내 인생의 의미 있는 사물들』(셰리 터클 저· 정나리아, 이은경 역, 예담, 2010) 『외로워지는 사람들: 테크놀로지가 인간관계를 조정한다』(셰리 터클 저·이은주 역, 청림출판, 2012) 『대화를 잃어버린 사람들: 온라인 시대에 혁신적 마인드를 기르는 대화의 힘』(셰리 터클 저·황소연 역, 민음사, 2018)                       셰리 터클(Sherry Turkle, 1948~) MIT대 교수는 인간과 기계(혹은 테크놀로지) 간에 발생하는 심리적 인터랙션 연구 분야의 1세대라 할 수 있다. 1980년대부터 테크놀로지가 더 이상 단순한 도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 사회 심리적으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시작한 기술심리 분야 선구자다. 그는 기술이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 뿐만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와도 관련 있음을 주장하면서, 기술의 위험성과 유용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로봇 같은 관계...

[229호 영화비평:<염력>(2018), 순수한 피해자라는 강박이 만들어낸 풍경

영화 <염력>(2018)의 후반부에서 루미(심은경)와 주민들은 재개발을 이유로 들이닥친 철거용역들을 피해 건물 옥상으로 대피한다. 이때 경찰 특공대를 실은 컨테이너 박스가 크레인에 매달려 루미와 주민들이 있는 옥상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장면은 관객들로 하여금 9년 전 용산에서 벌어진 사건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른바 ‘용산참사’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용산 4구역 재개발 보상대책에 반발한 철거민과 전국철거민 연합회 회원들이 남일당 건물에서 경찰과 대치하다 발생한 화재로,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 대원 1명이 사망하고 24명이 부상당한 사건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사건은 경찰이 법으로 보장된 힘을 무책임하게 행사하면 비극이 발생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뿐아니라 사건이 초래한 고통을 비극의 현장에서 있었던 철거민과 경찰 구성원들에게 떠넘기는 무책임한 공권력의 모습도 보여주었다(<염력>보다 1주일 먼저 개봉한 <공동정범>(2018)은 그렇게 조성된 삭막한 지형도에 관한 영화이다). <부산행>(2016)으로 천만 관객을 동원했던...

[229호 특강취재: 정암학당, <플라톤은 왜 대화편을 썼는가?> ] 플라톤, 대화를 통해 진리를 탐구하다

정암학당은 2000년부터 그리스 · 로마 원전을 연구하는 학술단체이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에 위치한 정암학당에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매달 ‘교양강좌’를 진행하며, 현대 철학의 시선에서 고전기 그리스와 로마 사상을 재조명하고 있다. 지난 5월 26일 진행된 본 특강은 <플라톤은 왜 대화편을 썼는가?>라는 제목으로 정준영(정암학당 학당장) 강사가 플라톤이 철학적 사유를 제시하는 대화의 형식에 대하여 탐구하고자 기획됐다. 정암학당의 ‘교양강좌’는 12월까지 매달 진행되며, 6월에는 <고전과 현대의 대화(3) – 스피노자‘감정론’>을 김은주 강연자가 강의할 예정이다.   철학을 전달하는 적절한 방식은 무엇인가? 철학은 진리를 추구한다. 철학적 진리를 제시하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논증 또는 논변(argument)의 형식이 있다. 강연자는 “왜 철학적 진리는 논증 형식을 통해 제시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하며, 논증 이외의 방식을 사용해 철학적 사유를 전달한 철학자들을 말한다.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시(詩)를 통해 철학적 논증을 제시하였으며,...

[229호 테마서평: 포스트휴머니즘] 포스트휴머니즘, ‘인간’에 대해 질문하다

『포스트휴먼』(로지 브라이도티 저·이경란 역, 아카넷, 2015)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캐서린 헤일스 저·허진 역, 플래닛, 2013) 『Staying with the Trouble』(Donna Haraway 저, Duke Univ. Press, 2016)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SF영화의 거장으로 불리는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감독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1982)를 관통하는 주제는‘인간보다 더 인간다운(more human than human)’이다. 영화에서 2019년 지구는 핵전쟁과 환경오염으로 더 이상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는 디스토피아적 공간으로해체되고 인류는 우주 식민지 사업을 통해 지구를 뒤로한 채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한다. 우주행성 개발에는 타이렐 기업이 만든 최신 복제인간 리플리칸트(replicants)가 이용되는데 이때 타이렐 기업의 모토는‘인간보다 더 인간다운’으로, 인간의 신체뿐 아니라 행동, 감정 나아가 기억까지 완벽히모방하여 인간과의 구별이 불가능한 복제인간 제작을...

[229호 책지성: 하지현, 『도시심리학』] 심리학으로 바라보는 도시인의 삶

    24시간, 도시의 어딘가는 항상 깨어있다. 잠들지 못하는 도시에서 내일의 일과삶을 위해 잠들어야만 하는 우리는 늘 피곤할 수밖에 없다. 도시라는 같은 공간안에서 비록 제각기 삶의 무게는 다르지만, ‘행복’이란 지향점마저 다르다할 수 있을까?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도시인의 피곤함’에 대한 이유를 심리학으로 접근하며, 소소하게 지나치던 우리의 행동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같은 공간에 자리하고있는 모두의 심리를 듣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공감하고 치유받을 수 있을까. 소통방식의 변화, 촘촘해지는 연결망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기술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변화와 학습을 요구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전화로 얘기하면 될 일을 문자메시지 같은인스턴트 메시지로 해결하게 되었으며, 사회라는 큰 틀에 도태되지 않기위해 부지런히 적응하고 있다. 그 중 핸드폰의 등장은 시공간적 제약을뛰어넘어 언제든지 소통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 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229호 문화비평: 비평이란 무엇인가?] 민주적 시민이 비평가다

  필자는 십여 년간 비평 전문지의 편집위원과 편집주간으로 일했고 꽤 오랫동안 대학에서 비평론을 강의했으며 지금까지 두 권의 비평집을 출간했다. 이런 수행성의 경험에도 불구하고‘비평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그 당당한 질의 앞에서 나는 언제나 머뭇거리는 사람일 뿐이다. 어쩌면 비평은 어떤 것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산뜻한 정의(定義)의 사역이 아니라, 바로 그 어떤 것 앞에서의 괴로운 머뭇거림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비평가는 텍스트 앞에서 당당한 사람이 아니라 그 앞에서의 곤혹스러움으로 스스로를 분열시키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미분하는 비평과 적분하는 비평 비평가는 만나는 사람이고 나누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비평은 텍스트와의 만남을 통해 자기를 파열시키는 일이다. 비평의 밀도는 그 만남이 어떠한 것이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그것은 자기의 나태와 안일을 깨뜨리는 충격이 되어야 한다. 좋은 비평은 충돌이라 할 만한...

[229호 Review: 화정박물관, <중국의 춘화>] 춘화, 그 솔직함에 대하여

평창동에 위치한 화정박물관은 2017년 11월 1일 춘화 전시실을 새롭게 단장한 이후, ‘춘화(春畵) 컬렉션’ 두 번째 전시인 <중국의 춘화>를 개최했다. 춘화 전시실은 화정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에로틱 고미술 소장품을 상설 전시하는 곳으로, 주제에 맞추어 전시 작품을 교체한다. 춘화 컬렉션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작품을 중심으로 아시아와 유럽의 그림과 공예품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회는 명나라부터 민국시대의 회화 31점, 공예 7점, 총 38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중국의 춘화에 심도 있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감출 수 없는 본능의 표현 춘화는 남녀의 직접적인 성 풍속 장면을 소재로 한 풍속화다. 춘궁(春宮) 혹은 비희도 (秘戱圖)라고도 불렸는데, 이 그림이 봄날 밤 궁궐에서 벌어진 일을 묘사하는 데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나라 때부터 이러한 회화가 존재했다고 기록에 남아있으며, 이후 당나라의 주방(周昉),...

[228호 영화비평:<곤지암>(2018), 관음증/노출증 시대의 파운드 푸티지 영화

 ‘가지 말라는 곳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곤지암>(2018)의 포스터 카피는 공포영화 장르의 핵심을 정확하게 전달한다. 공포영화는 알려진(known) 세계를 초월하려는 욕망이 응징 받아야 할 것으로 그려지는 장르다.“ 너무 많이 알려고 하면 다쳐!”가 이 장 르의 세계관이다. <곤지암>은 이 공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인터넷 방송‘호러 타임즈’의 BJ 하준을 비롯한 7명의 젊은이들이 지금은 폐허가 된 곤지암 정신병원에 공포체험을 떠난다. 1961년 5월 16일 개원한 이 병원은 환자 42명의 집단자살과 병원장의 실종으로 1979년 10월 26일 문을 닫은 이후 수십 년 간 흉가처럼 방치되었다(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해 10·26 사태로 붕괴한 박정희 정권에 대한 장난스러운 은유. 병원장은 올림 머리를 한 박영애인데, ‘영애’란 대통령의 딸을 높여부르는 말). 곤지암 병원에서의 공포체험을 실시간으로 방송하는 7명의 멤버들은 절대 들어가선 안 된다는 402호에...

[228호 테마서평: 인류의 미래] 인류 스스로의 미래를 논하다

[1] 『사피엔스: 인류 약사』(유발 하라리 저, 2015) [2] 『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유발 하라리 저, 2017) [3] 『사피엔스의 미래』(알랭 드 보통·말콤 글래드웰·스티븐 핑커·매트 리들리 저, 2016)                     인류가 4차 산업혁명기에 들어가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류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다루는 ‘인류 미래 담론’ 서적들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유발 하라리(Yuval Harari)가 시리즈로 내놓은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 캐나다에서 진행된 토론회 <멍크 디베이트 Munk Debates>의 결과물인 『사피엔스의 미래』가 특히 돋보인다.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의 중핵과목교재 『우리가 사는 세계』에 의하면, 전통문명들과 달리 현대문명이 제시한 새로운 솔루션은 ①과학, ②계몽사상, ③민주정치, ④시장경제, ⑤개인에 대한 존중이었다. 이 다섯 가지는 사피엔스의 오랜 여정에서 전대미문의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인류문명의...

[228호 책지성: 강남순, 『용서에 대하여』] 용서, 그 다양성에 대하여

  당신은 누군가를 죽도록 미워한 적 있는가? 혹은 원망한 적 있는가? 그렇다면 상대방을 용서할 수 있는가? 세상의 크고 작은 관계 속에서 다양한 폭력과 상처, 증오는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인간은 삶을 살아가며 때로는 가해자가, 때로는 피해자가 되어 다양한 양태의 용서와 얽힐 수밖에 없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만약 용서할만한 것만 용서하겠다고 한다면, 용서라는 바로 그 개념 자체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용서는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했던 것은 용서가 아닌 것일까? ‘용서’란 무엇일까?아이러니하게도 『용서에 대하여』에서는 이 질문에 대해 절대적 답도 최종 결론도 찾을 수 없다. 저자는 “용서에 대한 특정한 결론이나 해답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언제나 잠정적이고, 정황적이며, 부분적일 뿐이다”라고 답한다. 저자는 단순하게 생각했던 용서의...

[228호 특강취재: 두산아트센터, <두산인문극장 2018: 이타주의자 Altruist> ] 이타주의 재고의 필요성

두산아트센터는 4월 9일부터 7월 7일까지 <두산인문극장 2018: 이타주의자 Altruist>를 선보인다. 본 기획은 강의, 전시, 공연으로 구성되었으며, 강의는 ‘오늘날 이타주의를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를 시작으로 총 8회에 걸쳐 진행된다. 4월 9일에는 최정규(경북대학교 경제통상학부) 교수가 이타주의와 경제에 대해 강의했다. 이기주의만으로 사회 전체를 설명할 수 없다 현대 사회는 대규모의 협력체제로 이루어져 있으며 도덕적 자기희생이 필요하지 않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사회는 필요와 공급을 조절하며 원활하게 돌아간다. 이러한 경제학적 사유의 발전과정에서 도덕적 심리인 이타주의를 불필요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이타주의 없이 개인의 이기심만으로도 사회가 원활히 돌아간다는 믿음이 형성되었다. 즉, 경제학에서 현재 주류 담론은 개인의 욕구와 이기주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대부분의 경제학 이론은 순수한 의도에서 사회 구성원의 ‘협력’이 일어나지 않으며, 개인의 욕구와 이기심으로...

[228호 Review: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아드만 애니메이션 : 월레스&그로밋과 친구들>] 아드만이 고집하는 아날로그와 변혁

  <월레스와 그로밋 Wallace & Gromit>(1989), <치킨런 Chicken Run>(2000) 등을 통해 우리에게 클레이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를 익숙하게 해 주었던 아드만 스튜디오의 전시가 7월 12일까지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디자인전시관에서 진행된다. 372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아드만 스튜디오의 초창기 작품부터 애니메이션 제작을 위한 드로잉, 스케치, 클레이 인형, 촬영세트 등을 한자리에 모았다. 아드만 스튜디오의 시작 12살부터 놀이로 영상을 제작하던 데이비드와 피터는 1976년에 아드만 스튜디오를창설했고, 어른들을 위한 스톱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1985년 영입한 닉 파크가 감독한 <동물원 인터뷰 Creature Comforts>(1989)가 1990년 오스카 최우수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받으면서 아드만 스튜디오는 클레이 애니메이션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였다.전시장에 들어가면 바로 아드만 스튜디오 세 주역의 사진과 <동물원 인터뷰>에 등장한 세 마리의 곰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사진은 한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아드만 스튜디오의 대표...

[228호 문화비평: 미투 운동과 반지성주의] 필요불가결한 순간들 #미투 운동과 반지성주의

    페미니즘의 당위와 이론의 운명 나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여긴다. 페미니스트 비평가 벨 훅스(Bell hooks)가 말하듯, 페미니즘은 모든 종류의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을 지칭한다. 페미니즘의 결은 다양하고, 이념적 가치관과 시각 차이에 따라 페미니즘의 갈래도여럿이지만, 그 어떤 페미니즘도 결국은 성적 차이에 기반을 둔 차별을 반대한다는 점에서는 목소리를 같이 한다. 철저히 가부장적인 가치와 질서가 표준적‘인간’의 가치와 질서였던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여성의 목소리와 시각은 배제됐다. 오직 페미니즘적 운동과 이론이삶과 지식의 영역에서 젠더적 차이라는 프리즘을 제시하며, 남성(지배자) 중심적인 가치와질서의 불완전성과 모순과 폭력성을 지적한 이후에야 비로소 인간은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성차별 반대에는 여성과 남성의 구분이 필요치 않다. 우리 시대에 제대로 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페미니스트가 아닐 수는...

[227호 Review: SeMA벙커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 국가와 이데올로기, 희생된 개인의 역사

  서울특별시는 SeMA 벙커에서 평화디딤돌, 동아시아 시민네트워크와 함께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이라는 주제로 사진전을 개최했다. 이번 전시는 일제 강점기의 아픈 역사 속에 희생된 강제이주민들을 추모한다. 전시회는 140여 점에 이르는 손승현 작가의 사진 작품들과 두 편의 다큐멘터리 상영으로 구성되어 있다.   70년 만의 귀향 일제강점기, 수많은 조선인은 제국주의의 강압에 각지로 흩어졌고, 그들은 고향을 떠나 머나먼 이국땅에서 살아남아야만 했다. 일본의 제국주의가 패망한 지 70년, 강제이주자들은 한반도 역사에서 소멸된 것만 같았다. 조국이 그들을 잊은 사이 여러 시민 단체와 유족, 그리고 제국주의를 반성하는 일부의 일본인들에 의해 그들은 다시 기억되었다. 사진전은 역사의 비극을 관통하는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을 제목으로 삼았다. 사진 작품을 통해 강제노역에 동원된 이주자들의 유해 송환 과정을 여러 장소에서 만날 수 있다. 사진을 전시...

[227호 책지성: 이중톈, 『이중톈의 미학강의』] 미학을 정의할 수 있을까?

미학이 존재해온 이유 ‘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는 영원히 정답이 없을 것만 같다. ‘미학(美學)’이라고 이야기 한다면 먼저‘미에 대해 설명’하는 학문이라는 두루뭉술한 대답을 떠올리게된다. 그렇다면 ‘미(美), Beauty’라는 것은 무엇인가? 의미 그대로 아름다움은 무엇인지에 대해 사람들은 각기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가령 누군가가 어떤 조각상을 보며 아름답다고 하는 동시에 그것에 대해 아름답지 않다고 하는 사람이 등장한다면, 그 둘의 논쟁은 매듭지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이 끝나지 않을 논쟁처럼 ‘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 내릴 수 없다. 그렇다면 미학은 허무맹랑한 학문인 것인가? 미학을아무리 공부해도 아름다움을 정의내릴 수 없다면, 그 학문은 쓸모없는 것이지 않은가. 어떤 의미에서 ‘미학이 쓸모없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예술작품이 아름다울지언정 그것이 실제로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학을 공부한다고...

[227호 특강취재: 푸른역사아카데미, <로쟈와 일본 근대문학 읽기>] 나쓰메 소세키와 만나는 일본 근대문학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위치한 푸른역사아카데미는 3월 5일부터 4월 23일까지 매주 월요일 저녁 7시 30분에 <로쟈와 일본 근대문학 읽기>라는 제목으로 총 8차례 특강을 진행한다. 본 특강은 일본 근대문학의 대표 작가들을 살펴보며, 모리 오가이(森鸥外),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등 강의마다 다른 작가의 저서를 통해 일본 문학을 심층적으로 탐구하고자 기획됐다. 강사는 로쟈라는 필명으로 알려진 이현우 문화비평가이며, 3월 19일 진행된 세 번째 강의에서는 나쓰메 소세키 작가의『갱부』를 다루었다.   일본 근대문학의 배경탐구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시대부터 현재까지를 근대 또는 근현대로 구분한다. 여기서 다시 메이지(明治)와 다이쇼(大正)시대를 근대로, 쇼와(昭和)와 헤이세이(平成)시대를 현대로 나누는 것이 보통이다. 메이지 정부는 오랜 쇄국정책에 따른 폐단을 없애기 위해 서둘러 서구 문명을 받아들였다. 신분제도 폐지와 개정된 학제 도입, 양력 사용 등 새로운 체재를...

[227호 문화비평: 시간의 고향] 미디어가 재현하는‘추억’이 여전히 인기 있는 이유

지난 3월 31일, 13년의 대장정을 마친 MBC <무한도전>은 2월 설연휴 특집으로 <토토가3- H.O.T.>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 시즌3를 선보였다. 이 기획은 왜 <무한도전>이 그렇게 오랫동안 예능프로그램으로서 인기를 끌었는지를 다시 한번 수긍하게 했다. 해체한 지 17년이 된 아이돌 그룹 H.O.T. 멤버들이 재결합해 공연하는 기획을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MBC <무한도전>은 <토토가>라는 기획으로 1990년대 가수들, 젝스키스 특집공연, 그리고 H.O.T. 특집공연 등 세 번의 시즌을 선보이면서 1990년대 대중음악 스타들의 공연을 성사시켰다. 1990년대 청춘이었던 대중의 추억소환에 성공한 프로그램으로 tvN의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도 빠질 수 없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1997년, 1994년, 1988년 당시의 대중문화와 서민들의 삶의 모습을 현실감있게 재현했다. 또한 한국사회에서 스포츠, 대중음악 등의 팬덤 문화의 형성과정과 일상생활을 밀도있게 보여주며 드라마 속 재현되는 과거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크게...

[227호 영화비평:<플로리다 프로젝트 The Florida Project>(2017), 타인의 가난과 불행을 관람하는 것에 대하여

    션 베이커 감독의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The Florida Project>(2017)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사람들이 모여서 불타고 있는 집을 구경하는 순간이다. 이 영화는 플로리다 주 올랜도에 위치한 디즈니월드 건너편에 주거 빈민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텔촌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 불타고 있는 집은 모텔촌 근처에 있는 빈 집이다. 디즈니월드를 배경으로 삼았다고 해서 이 영화가 동화 속 이야기와 관련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배경인 모텔촌은 한때 디즈니월드를 찾은 관광객들로 붐비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주 단위로 투숙하는‘숨은 홈리스(Hidden Homeless)’들의 터전으로 활용되고 있다. 6살 아이 무니(브루클린 프린스)와 엄마 핼리(브리아 비나이트)도 이들 중 하나로, 지금 불타는 집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중이다. 무니와 핼리뿐 아니라 모텔촌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곳에 서서 맥주를 들고 “다 태워버려!”라고 외치며 불구경을 하고...

[227호 테마서평: 4월의 제주] 4·3, 70년의 기억, 기억의 힘

[1]『제주4·3을묻는너에게』(허영선저, 서해문집, 2014) [2]『해녀들』(허영선저, 문학동네, 2017) [3]『순이삼촌』(현기영저, 창비, 2015)     트라우마의 섬, 제주도 제주섬은 기억의 땅이다. 4·3의 협곡에서 오랜 세월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사는 섬, 동 시대의 역사적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땅이다. 물론 그 기억의 조각은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섬 전체가 ‘거대한 감옥’같은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 기억은 함께 전이된다. 역사적 상흔의 기억처럼 질긴 것은 없기에. 그리고 그 기억은 늙지 않는다. 4·3은 이제 70년의 능선을 넘는다. 사람들은 동백꽃 배지로 4·3을 기억하고 공감한다. 70년 전에 온전히 피어 보지도 못하고 떠난 사람들 이 제주섬엔 10명 중 한 명꼴이었다. 달리다 보 면 하얀 눈 속에서 동백이 애처로운 눈초리로 피어있기도 했고, 눈 덮인 산야에 통으로 뚝뚝 나동그라져 멀리에서는 선혈처럼 보이기도 했다는...

[226호 테마서평: 위화의 눈으로 본 현대중국의 모습] 위화를 읽다, 중국을 읽다

[1] 『허삼관 매혈기』(위화 저·최용만 역, 푸른숲, 2007) [2] 『인생』(위화 저·백원담 역, 푸른숲, 2007) [3]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위화 저·김태성 역, 문학동네, 2012)                     위화(余華)는 중국의 당대 문학 중에서 한국에 가장 널리 읽혀 온 작가라 할 수 있다. 분단 이후 오랜 냉전의 시간 동안 격절되어 왔던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한국의 독자에게 위화의 존재는 각별함이 있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판매된 중국 현대작가’ 집계(2014년의 교보문고 발표)에서는 루쉰(魯迅)이나 모옌(莫言)을 제치고 1위부터 3위까지 위화의 작품『허삼관 매혈기』 ( 『인생』, 『제7일』)이 차지했다. 위화의 소설은 중국과의 국교 수립(1992년) 이후, 그간의 단절이 가져온 양국의 문화적 이질감을 극복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아 준 것이다. 그렇다면 왜...

[226호 문화비평: 예능프로그램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2017)] 자기만족과 인정 투쟁의 사이에서

 MBC 에브리원의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의 인기가 대단하다. 처음 편성될 때는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파일럿 프로그램이었는데, 지금은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할 정도로 방송사의 효자 프로그램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방송에 등장한 코스를 그대로 따라가는 여행상품의 등장과 <서울 메이트>, <친절한 기사단>과 같은 유사 예능프로그램의 등장을 이끄는 등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는 외국인 예능의 트렌드 세터가 되었다. 확실한 스타 대신 한국여행과 TV 출연이 처음인 외국인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이 이렇게까지 인기를 얻을 줄은 그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이렇게 인기를 얻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평자들은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가 가지고 있는 특징, 즉 한국문화와 음식을 처음 경험하게 된 외국인을 내세웠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접하는 것들에 대한...

[226호 영화비평:<더 포스트 The Post>(2017) 스필버그, 정치적 자유주의, 여성 리더십의 문제

 한국 영화에서 믿고 보는 배우가 송강호라면 할리우드 영화에서 믿고 보는 감독 중 하나는 스티븐 스필버그다. 1970~80년대 그는 블록버스터의 효시라 불리는 <죠스 Jaws>(1975), 동시대 액션 어드벤처의 전설이 된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등으로“영화는 심오한 예술이기 이전에 오락이며, 재미있는 영화란 이런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모든 감독이 흥행을 추구함과 동시에 예술가로서의 명성과 명예를 함께 누리고 싶어 하듯이 스필버그도 오락적인 영화를 만듦과 동시에 소위 ‘작품성 있는’ 영화를 간간이 연출했다. <컬러 퍼플 The Color Purple>(1985), <태양의 제국 Empire of the Sun>(1987)등이 그러한 영화였다. 어쩌면 오락성과는 거리가 먼 무거운 영화들 때문에 혹자들은 그가 아카데미상을 타고 싶어 안달이 난 감독이라 평하기도 했다. 그런 평가가 맞는 것이라면 1994년 아카데미 작품, 감독, 각색, 촬영 등 주요 7개 부문을...

[226호 Review: <알베르토 자코메티 한국특별展>] 가장 비싼 현대 조각가 자코메티, 그와 생각의 가치를 마주하다

  거장 피카소가 시기한 알베르토 자코메티, 그는 누구인가 엄청난 성공을 하고 사회적으로 유명인사였던 피카소에게도 삶에 미련은 있었다. 그는 삶 마지막, 장 클라우드 노엘(피카소 생애 마지막 자서전 저자)에게 놀라운 고백을 한다. “나에게 단 한 번의 행운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단 한 번이라도 보고 싶은 두 사람이 있어요. 바로 앙드레 말로와 알베르토 자코메티요 ” – 파블로 피카소(1881-1973)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미학적 신념을 권위 있게 표현할 수 있었던 자코메티는 자신만의 탁월한 능력으로 피카소가 결코 넘지 못할 사유의 세계를 만들었다. 또한 사람의 성공과 인격을 별개로 여겨 누구에게도 주눅 들거나 압도당하지 않았고, 피카소 작품의 미흡한 점을 지적하며 다른 관점을 제시할 수 있었던 최초이자 마지막 인물이기도 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 1천억 원이 넘는 유일한 조각상...

[226호 책지성: 이명호 외, 『유토피아의 귀환: 폐허의 시대, 희망의 흔적을 찾아서』] 오늘, 유토피아를 상상한다는 것

‘불가능한 것’을 상상한다는 것의 가치 “현실주의자가 되어라. 그리고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모순적으로 들리는 이 문구는 1968년 5월 프랑스 파리의 학생들이 내세운 슬로건 중 하나였다. 학생들은 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현실주의자가 될 것을 요구했을까?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단 말인가? 68혁명은 당시 프랑스에 만연했던 권위주의·자본주의적 폐해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되었고, 단순한 정치변화 뿐 아니라 계급·성별·인종 불평등에 대한 인식으로 확대되며 국제적 반전운동, 반인종차별주의, 여성해방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자본주의와 그 논리를 계승한 신자유주의는 자신들의 체제 바깥을 사유할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 TNA)’고 단언하였지만, 파리의 학생들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비웃던 대안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잉그리트 길혀홀타이(Ingrid Gilcher-Holtey)는 『68혁명, 세계를 뒤흔든 상상력』(1968 Eine zeitreise, 2008)에서 부패한 지배 권력과 사회에 대한 집단행동이었던 68혁명의 원동력을’다른 세상을 꿈꾼 상상력’...

[226호 특강취재: 푸코사상의 파노라마, <자기배려, 실존의 미학과 파레시아>] 전통을 거부하고 새롭게 세상을 바라본 사상가 ‘푸코’

  대안연구공동체는 <푸코사상의 파노라마> 시리즈의 마지막 세션인‘자기배려, 실존의 미학과 파레시아’강의를 개최했다. 강의는 2월 14일부터 4월 4일까지 총 8회에 걸쳐 매주 수요일에 진행된다. 시간은 오후 7시 30분부터 10시까지이며, 오랫동안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저서를 번역해온 심세광 박사가 강의를 맡았다. 첫 강의인 2월 14일에는『담론과 진실-파레시아』의 발간 기념 특강이 진행되었고, 본격적인 푸코사상에 대한 내용은 두 번째 강의부터 시작되었다. 본보에서는 지난 2월 21일에 진행된 두 번째 강의 ‘자기인식과 자기배려’의 내용을 다룬다. 이 날 강연자는 푸코의 후기주의 사상에 대한 강의가 진행되기 전에 앞으로 다룰 내용을 전체적으로 소개하였다. 푸코의 후기주의 사상의 흐름 푸코는 1966년 역사에 대해 언급한『말과 사물』을 출판한 이후 좌파로부터 반인간주의자라는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푸코가 관심을 가진 것은 역사로부터 축적되어온 지식이었으며, 중요하게 생각한...

[225호 책지성: 윤원화, 『문서는 시간을 재/생산할 수 있는가』] 너머의 시간을 향해

  서문과 문서   어릴 적 서문 읽는 시간을 배웠다. 그 시간은 저자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가닿기 위한 진입로 같았다. 그 시간을 통과하면 앎이라는 보물을 숨겨놓은 우거진 숲을 거닐 에너지가 자동적으로 충전돼 있는 줄 알았다. 하나 나이가 들었고 요령도 늘었다. 나이가 들었고 요령도 는 내 주위의 어른들이 흔히 하는 농이 느닷없이 진지하게 다가왔다. ‘서문序文을 읽었으니 다 읽은 셈이군.’ 어쩌면 이는 서문을 읽는 시간에 대한 가장 예리한 해석일지 모른다. 서문은 전부이면서도 전부가 아닌 것이다. 어찌되었든 서문은 전부에 걸쳐 있다. 저자의 의지에 따라 서문의 전개와 모습은 달라지나 대개 서문 안에서 저자는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살면서 가장 공을 들인 시간을 거쳐 지금에 다다랐다고 토로한다. 물론 “그 순간”의 중요성은 다음 책에 놓일 서문의 시간 속에서...

[225호 문화비평: 고양이와 정치학] 고양이는 진보다? – 인간, 동물 그리고 정치

    전원책의 개와 진중권의 고양이 2016년 5월 어느 금요일, 처음 참석한 문인들의 모임에서 낯설고 어색한 분위기에 눌린 나는 앞에 놓인 맥주만 연거푸 마시고 있었다. 그때 내 앞에 앉아있던 한 유명한 평론가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전원책 변호사의 개와 진중권 교수의 고양이가 새벽 산책에서 가끔 만난다는 이야기와 함께 “우파는 좌파보다 개를 좋아하고 좌파는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진중권 교수의 농담을 전하면서 자신은 고양이를 키우고 있노라 했다. 자신이 고양이를 키운다는 그 짧은 문장은 자신은‘보수’가 아니며 진돗개에 열광하는 50대 중장년의 자기 또래들과는 다르다는, 숨겨진 그러나 명백한 기의를 담고 있었다. 분위기는 자연스레 키우고 있는 반려동물이 있는지를 서로 묻고 대답하면서 정치성향에 대한 농담을 이어갔다. 내 차례가 왔다. 나의 대답은 이랬다. “저는 개와 고양이를 같이 키우고...

[225호 영화비평: <범죄도시>(2017) 순수한 공동체를 향한 배제의 방식

영화 <범죄도시>(강윤성, 2017)가 670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하반기에 개봉한 한국영화 중 최고의 흥행작으로 올라섰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라는 제약과 굵직한 흥행 배우 하나 없어 시장에서의 열패가 점쳐졌던 이 영화는 어떻게 최후의 승자가 되었을까? 황진미 영화평론가는 이 영화의 인기 요인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 번째 요인은 이 영화가 ‘2004년 금천경찰서의 조선족 조직 폭력배 소탕작전’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청년경찰>(김주환, 2017)이 빠졌던 중국 동포 재현 논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그는 설명한다. 두 번째는 외국인과 한국인의 구도를 단순한 선악의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았다는 점, 세 번째는 중국 동포가 저지른 범죄의 희생자가 여성으로만 한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이러한 지점이 주인공을 맡은 마동석 배우의 스타 이미지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범죄도시>가 최근...

[225호 특강취재: 연세대학교와 함께하는 인문아카데미, <문자, 매체, 예술>] 종교와 함께해온 알파벳의 발명과 확산

서울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에서는 HK사업의 일환으로 인문학적인 지식을 널리 확산하기 위해 2010년부터 교도소 등 다양한 기관에서 인문학 관련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시민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진행되는 이번 강연은 <문자, 매체, 예술>을 주제로 하며, 총 8번의 수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업은 11월 2일부터 12월 21일까지 서울시 서대문 도서관에서 매주 목요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진행된다. 본보는 지난 11월 16일에 있었던 최경은(연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강연자의 첫 수업 주제인 ‘문자의 확산, 알파벳의 발명에서 확산까지’를 다루고자 한다. 강연자는 이번 수업의 주제인 ‘알파벳’ 의 좁은 의미로서의 정의에 대한 설명으로 강연을 시작했다. 알파벳의 의미와 탄생 좁은 정의의 알파벳이란 영어뿐만 아니라 독일어, 스페인어, 프랑스어에 쓰이는 ‘라틴 알파벳’을 의미한다. 본 강연은 ‘라틴 알파벳’에 관한 이야기이다. 라틴 알파벳을 사용하는 국가의 비율은 지구상에서 거의 70%에...

[225호 리뷰: 이길래 조각가 오픈스튜디오] 철필로 하늘에 그림을 그리는 조각가

작가의 예술적 삶을 담고 있는 생활공간이자 창작을 위한 고뇌와 작품 제작 과정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예술가의 작업실은 작품만큼이나 흥미로운 공간이다. 작가의 내밀한 공간인 만큼 일반인들이 접하기 어려워 더욱 신비로운 공간이기도 하다. 최근 대중과 예술의 친밀도를 높이기 위해 작가의 작업실을 일반에게 공개하는 오픈스튜디오 프로그램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 11월 본교 동문인 이길래 작가가 뉴욕 오페라 갤러리에서 초대전을 진행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와 개인적으로 작업실 방문 요청을 하여 오픈스튜디오를 진행하였다. 이길래 작가가 뉴욕으로 출국하기 하루 전에 방문한 작업실은 경기도 여주시 운치 있는 향촌에 위치해 있었다. 작가의 작업실은 자연석으로 쌓아올려진 성벽과같은 외벽의 건물 안에 작업공간과 수장고, 전시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작업실 앞마당에는 소박한 정원 하나 없었지만, 작가의 대표 작품인 <나무> 시리즈의 청동 소나무 조각 작품이 있어...

[225호 테마서평: 인류와 축제] 축제의 문명사적 변화와 동서양 축제

[1]『축제와 문명』(장 뒤비뇨 저, 류정아 역, 한길사, 1998) [2]『용과 여성, 달의 축제』(한양명 저, 민속원, 2006) [3]『축제의 역동성과 현대일본사회』(김양주 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축제의 의미 축제(祝祭)는 한자어가 보여주듯이 신에 의존하며 신을 모시고 노는 것이다. 자신이 믿는 신을 즐겁게 하는 놀이는 본인 스스로에게도 커다란 희열을 준다. 원래 한국에서는 축제와 놀이가 큰 의미 차이 없이 쓰였고, 축제라는 말보다 놀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 별산대놀이, 탈놀이, 굿놀이 등에서 보듯‘놀이’도 축제와 마찬가지로 신을 모시고 노는 것을 의미했다. 영어 ‘Festival’은 라틴어의 성일(聖日, festivalis)에서 유래한 말이다. 동서양 모두 축제는 신을 모시고 의례를 행하고 신나게 노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축제와 놀이의 뜻이 분화되기 시작했다. 축제라는 단어가 신의 측면이 강조되는 신성한 잔치라면, 놀이 라는 단어는 신성성이...

[224호 문화비평: 징검다리로서의 인문학] 피카소와 인문학

1. ‘황소머리’ 1978년 경희대학에 입학했던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장소는 원형 도서관이었다. 거기서 책을 읽노라면 정말 대학생이 된 듯했다. 무시로 드나들었다. 서가에 비치된 화집들을 뒤적이다가 파블로 피카소의 <황소머리>(1943)라는 오브제 작품도 거기서 만났다. 농촌에서 성장한 나로선 금방 작품의 이름을 알아맞힐 수 있었다. 이것은 소의 대가리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상하고 난해한 화가로 알았던 피카소의 작품 이름을 곧바로 알아 맞혔으니 으쓱하는 느낌도 들었다. 한국의 시골 출신 대학생과 저 먼 스페인 출신 유명작가가 번역 없이 서로 통했다는 감회에 흐뭇했다. 우쭐거리는 마음이 놀라움으로 바뀐 것은 작품의 소재 때문이었다. 시골에서 자전거로 통학을 했던 터라 이 또한 금방 알아맞힐 수 있었다. 위로 솟은 쇠뿔은 자전거 핸들이요, 소 대가리는 자전거 안장에서 가져와 짜 맞춘 것임을. 낡은 자전거 안장과...

[224호 영화비평: <지난 여름 갑자기 Suddenly, Last Summer>(1959) 1950년대 할리우드에서 동성애에 대해 말하지 않기

미국 현대사에서 1950년대는 아마도 가장 보수적인 시기였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 난 후 세계 자본주의의 유례 없는 호황과 번영 속에서 미국은 본격적인 소비 자본주의로 나아 가고 있었고, 중산층의 교외화(suburbanization)와 TV 소유, 십대들의 데이트 성지가 된 드라 이브-인 극장 등이 크게 발흥하고 있었다. 불과 20~30년 전 미국 자본주의를 공포로 몰아넣었 던 대공황의 흔적은 깨끗이 사라졌고, 미소 냉전 체제는 ‘혁명’, ‘공산주의’, ‘소비에트’등의 단어를 금기시하게 만들었다. 아니, 어쩌면 전후 최고의 호황을 겪고 있는 미국 사회에서 그러 한 단어를 입에 올린다는 것은 어딘지 촌스럽고 시대착오적으로 보이는 것이였을 수도 있다. 슬로언 윌슨이 소설『회색 플란넬 양복을 입은 남자 The Man in the Gray Flannel Suit』(1955. 이듬해 영화로 제작)에서 그린 규격화되고 표준화된 중절모의 남자들(1950년대 중반을 배경으로...

[224호 Review: 《덕수궁 야외프로젝트 : 빛·소리·풍경》] 현대와 전통, 덕수궁에서 만나다

덕수궁 120주년을 기념하여 국립현대미술관과 덕수궁관리소가《덕수궁 야외프로젝트 : 빛·소리·풍경》전을 공동 주최했다. 본 전시에는 자신만의 조형적인 작업방식을 구축하고 있는 9명의 예술가가 역사적 공간인 덕수궁을 수개월간 드나들며 영감을 얻은 결과의 산물 9점이 전시되어 있다. 덕수궁 내 전각 및 야외 공간 7곳에 전시된 작품들은 사진, 드로잉뿐만 아니라 설치, 영상, 사운드 등 다양한 표현방법을 사용하여 관람객의 눈과 귀를 기분 좋게 자극한다. 석조전 서쪽 계단, 덕수궁을 해체하다 석조전 서쪽 계단에는 해체를 통해 외피 속에 숨어있는 내부의 기능, 색, 모양 등을 보여주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는 작가 김진희의 <딥 다운—부용>이 전시되어있다. 이 작품에서는 덕수궁에 스며있는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을 해체하여 재구성하였다. 작품은 다양한 방면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는데, 여러 방향에서 바라본 작품은 입체적으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눈을 감고...

[224호 테마서평: 이미지의 폭력성] 공정한 이미지 소비를 위하여

『사진에 관하여』(수잔 손탁 저·이재원 역, 이후, 2005) 『타인의 고통』(수잔 손탁 저·이재원 역, 이후, 2004) 『공정으로서의 정의』(존 롤즈 저·황경식 역, 서광사, 1988)               우리는 주변의 과도한 이미지 홍수 속에 사는 문화적 현상에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대중매체는 우리나라 사회와 아프리카 등을 포함한 저개발 국가에 대해 왜곡된 이미지를 갖도록 부추긴다. 이미지의 편향과 왜곡 현상은 대중들에게 고정관념과 같은 편견을 낳는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안으로 <공정한 이미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 <공정한 이미지>를 통한 편견 없는 사회를 꿈꾸어 본다. 사진의 폭력성 빈곤국가 사람들의 사진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지만, 그 사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면 거기에서 우리는 이중적인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 ‘ 누군가는 반드시 불쌍하고, 힘든 사람은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고통스러운...

[224호 책지성: 폴 라파르그, 『게으를 권리』] 참된 게으름의 의미를 찾아서

      우리는 왜 이렇게 바쁘게 살아가는 것일까? 마치 일 하려고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은 하루 대부분을 일에 투자한다. 잠깐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 바쁜 틈에서 지쳐간다 말하면서도, 쉼 없이 일을 하고 있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 지친 노동자의 입장에서, 이 책은 너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한껏 나태해지고 싶은 마음으로 책을 펼쳤지만, 책은 생각보다 심오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저자인 폴 라파르그는 카를 마르크스의 사위이자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다. 또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유럽을 대표하는 혁명적 지식인이기도 하다. 사회주의 성향 출판사에서 무보수로 일할 만큼 활발하게 행동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심지어 그는 70세에 이르러 더 이상 사회주의운동을 이어나갈 수 없다고 판단하자, 아내와 자살로 생을 마감할 만큼 열정적이었다. 이 책은 그의 여러 글...

[224호 특강취재: 철학아카데미, <기호정신분석과 여성학>] 크리스테바의 ‘주체의 의미화 과정’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위치한 철학아카데미는 지난 15년 동안 “열린 사유의 공간, 사유를 열어가는 광장”이라는 구호 아래 예술, 과학 등 여러 장르에 있는 철학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철학아카데미는 가을 학기를 맞아 시민과 학생을 대상으로 을 개최했다. 본 특강은 총 8개의 강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0월 21일부터 11월 30일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진행된다. 본보는 지난 10월 21일에 진행한 김선하(경북대학교 철학박사)강연자의 ‘프로이트, 라캉 그리고 크리스테바’를 다룬다. 본 특강은 프로이트와 라캉을 비롯한 남근 중심의 정신분석이론이 배제한 타자성의 새로운 윤리와 인간의 사회화 과정에 대한 내용이며, 강연자는 “이번 강연을 준비하면서 크리스테바를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운명적인 느낌을 받았다”며 강연을 시작했다. 라캉과 크리스테바 프랑스의 정신분석가이자 기호학자, 철학자인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1941~)는 타자성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세가지...

[223호 영화비평: <덩케르크 Dunkirk>(2017) <덩케르크>의 전쟁 재현 방식과 의미에 대하여

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 Dunkirk>(2017)는 개봉하기 전부터 전세계적으로 많은 기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2차 세계대전 초기 연합군 최대 규모의 작전이었던 덩케르크 철수를 실사촬영을 선호하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만든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이 영화를 덩케르크 해안에서 촬영했으며 고증을 위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당시의 군함과 전투기를 동원하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이 영화는 전체분량 중 70%가량을 아이맥스로 촬영하여 상업영화 사상 최대 분량의 광활한 화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영화에 대한 국내의 평론도 재현의 방법을 중요하게 평가하고 있다. <덩케르크>는 이전의 영화들과 달리 전장으로 가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으며 그 방법론에서 떠올릴 수 있는 생존이라는 핵심도 곱씹어볼 만하다는 게 많은 평자들의 주장이다. 이들 주장의 근거는 아이맥스로 촬영된 전장의 풍경인데, 이것의 특징은 이전 전쟁영화와 달리 스펙타클한...

[223호 문화비평: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교육] 제발 조 발표와 괄호 넣기를 버려라

※본 지면은 자유 주제 청탁 지면으로 본보의 방향성 및 기획 의도와 다를 수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극복하려는 다수가 없는 위기 인문학의 위기는 어느새 낡은 개념이 되었다. 필자가 학부생이었던 1990년대 후반에도 대학 안팎에서 인문학이 위기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20여 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도 인문학은 여전히 위기라지만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정부주도의 지원정책밖에 없다. 이상하지 않은가. 인문학을 전공한 수십만 명의 학생들이 사회로 나갔지만 이들이 인문학의 고사를 막겠다고 발벗고 함께 나서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인문학 교육이 살려야 할 가치와 의미를 지닌 경험으로 기억되지 않기 때문이다. 학부에서 국문학과 영문학을 전공한 필자 역시 졸업을 위해 수강했던 수십 개의 과목들 중 영혼을 뒤흔들었던 강의를 기억하지 못한다. 교수나 강사가 교재 내용을 그대로 가르치거나 조 발표로...

[223호 특강취재: 한양대학교·성동문화재단, <시민대학, 인문학에서 길을 찾다>] 행복한 Win-Win 뒤에 가려진 진실

한양대학교는 인문학 진흥을 목적으로 교육부에서 추진한 ‘인문역량 강화사업(CORE사업)’대상 학교로 선발되어, 성동문화재단과 함께 시민과 학생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연 <시민대학, 인문학에서 길을 찾다>를 개최한다. 본 강연은 8월 3일부터 9월 격주 목요일 16시부터 18시까지 한양대학교 인문관 303호에서 진행된다. 총 5개의 특강이 준비되어있으며 앞으로 진행될 강연으로는 9월 14일 ‘문학에서 사랑을 찾다’, 28일 ‘한국인과 한국문화’가 있다. 본보는 지난 8월 3일에 있었던 서신혜(한양대학교 창의융합교육원 교수) 강연자의 ‘Win-Win 전략이 숨긴 이야기’를 다룬다. 진정한 유교의 나라 만들기 사회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상, 행동, 생활방법을 근본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관념이나 신조의 체계, 즉 이념이 있어야 한다. 고려는 불교를, 조선은 유교를 이념으로 사용했다. 오랫동안 불교 이념에 따라 살던 백성에게 유교적인 생활양식을 강제할 수는 있지만, 자발적으로 따르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백성이...

[223호 책지성: 백종현, 『시대와의 대화, 칸트와 헤겔의 철학』] 시대와 대화하고 뛰어넘기, 칸트와 헤겔

고등학교 수준의 철학 지식밖에 없는 나지만 철학은 너무 멀거나 어렵기만 한 지식이 아니다. 나의 기준에 철학은 존재는 하지만 구체적인 언어로 형상을 갖추지 못하던 내 생각의 구현이며 인식의 벽을 깨는 경험이다. 그만큼 내가 느끼는 철학은 나 자신과 현실에 맞닿아 있었다. 그래서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책을 펴내면서’에서 저자가 가장 먼저 철학이 현실에서 갖는 의의를 설명해 반가웠다. 저자는 “철학이 근본학(根本學, Radical science)으로서 그 시대의 자연, 인간, 사회, 문화 등 현실의 전 영역에 걸친 통일 원리를 반성적으로 탐구하는 지적 활동”이라고 정의한다. 철학이 추상적으로 보이는 것은 현실을 비추되 인간에게 본래적인 것을 응축해 추상적인 형태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만큼 철학자의 반성적 사유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고 시대에 응하는 성격을 가지면서도 후세대들에게 여전히 의미 있게 받아들여질...

[223호 리뷰: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라이프(LIFE) 사진전>] 한 걸음 떨어지니 더 잘 보이는 세상

  ‘보는 것을 즐거워하자, 보고 또 놀라자, 보고 또 배우자’ 헨리 루스의 <라이프(LIFE)>지 창간사로 시작하는 이번 전시는 전설적인 포토매거진 <라이프(LIFE)>지의 사진과 영상 132점을 전시하고 있다. 사진 잡지의 정점에 있는 <라이프(LIFE)>지에서도 최고의 사진만을 실은 본 전시는, 20세기 현대사의 터닝 포인트를 엿볼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엄선한 사진만 전시하는 만큼, 전시된 것들은 단순한 사진 한 장이 아니라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작품을 보면서 그 순간을 찍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던 사진작가들의 직업의식도 느껴진다.   우리의 21세기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FACE, 네 가지 테마로 구성되어 있는 전시의 시작은 ‘기억해야 할 얼굴’이다. 켈리 그레이스, 슈바이처, 마더 테레사, 제임스 딘 등 여러 분야의 역사적 인물들과 시대의 아이콘들을 가벼운 발걸음으로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 테마에서는...

[223호 테마서평: 조금 더, 게을러도 괜찮아] 좀 게을러도 괜찮아, ‘생각하는 게으름’이 중요해!

[1] 「게으를 권리」(폴 라파르그 저 · 차영준 역, 필맥, 2009) [2] 「게으름에 대한 찬양」(버트런드 러셀 저 · 송은경 역, 사회평론, 2005) [3] 「피로사회」(한병철 저 · 김태환 역, 문학과지성사, 2012)                   “신성한 노동” 앞에 게으름 찬양이라니?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노동의 의미는 결코 신성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만 해도 노동은 노예나 천민의 일이었다. 노동을 뜻하는 독일어 ‘ Arbeit’의 어원의 뿌리에도, 고아가 겪는 고통이 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노동은 고역이다. 따라서 가능한 한 적게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좋다. 폴 라파르그(Paul Lafargue)도 “ 자신의 노동을 제공하고 돈을 받는 시민은 노예와 마찬가지고, 수년 간 감옥에 갇혀야 할 죄인”이었다고 했다[1]. 부정적 의미를 갖고 있던...

[222호 영화비평: <겟 아웃 Get Out>(2017)] 트럼프 시대에 흑인으로 살아남기?

* 약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 흑인 청년이 어두컴컴하고 한적한 교외에서 전화통화를 하며 걷고 있다. 그는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잘못 와서 헤매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상대방에게 투덜댄다. 그의 옆으로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간다. 무엇인가 위협적인 분위기를 감지하지만 이내 지나가버린다. 그는 안심한다. 그러나 자동차가 멀지 않은 곳에 서고 영화는 뭔가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를 창출해 낸다. 그리고 어김없이 무슨 일이 일어난다. 흑인 청년은 일순간 가격을 당하고 맥없이 쓰러진다. 그리고 차가 있는 곳으로 무력하게 질질 끌려간다.                                                                  ...

[222호 특강취재: 경의선 책거리, <청춘과 함께하는 고전, 인문, 문화산책1>] 소설, 나의 버려졌던 감정을 되찾게 해주다

마포구와 한국출판협동조합에서 주관하는 경의선 책거리는 5월 18일부터 7월 25일까지 ‘청춘과 함께 하는 고전, 인문, 문화산책1’이라는 제목으로 5차례의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 2차례의 강연이 진행됐으며 앞으로 3차례의 강연이 남았다. 경의선 책거리는 작년 10월에 조성된 복합문화공간으로, 경의선 홍대입구역 6번 출구에 있다. 본 강연은 지난 5월 20일에 진행된 것으로, 김영하 작가가 ‘우리는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진행했다. 좁혀지지 않는 거리 소설을 읽기란 쉽지가 않다. 소설을 읽으려고 하면 우선 눈에 글자가 보여야 한다. 글자는 하나하나 읽어야 하며 집중을 해야 보인다. 100년 전만 해도 글자를 읽는 것은 굉장히 고급화된 기능으로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렇게 글을 읽을 수 있 는 사람이 소수였던 시대와 달리 지금은 문명의 시대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222호 책지성: 조나단 월드먼, 『녹‘RUST’』] 도처에 널린 위험

      『녹‘RUST’』은 작가 조나단 월드먼이 30년 된 요트를 구입하고‘녹(綠)’을 발견하게 되면서 영감을 얻어 탄생됐다. 누구든 일상생활에서 녹을 발견했을 때 크게 개의치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은 녹을‘소리 없이 인류의 문명을 위협하는 붉은 재앙’이라고 설명한다. 녹은 다리를 무너뜨리고, 핵발전소의 반응기를 잠식하며, 핵폐기물 용기에 구멍을 내는 등 부지불식간에 우리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다. 또 녹은 군대에도 침투해 F-16 전투기와 헬리콥터가 공중에서 충돌하게 만들었고, 상업용 비행기가 비행 도중 공중분해되는 사고도 녹 때문에 일어났다고 한다. 또한 녹은 비행기 못지않게 자동차를 괴롭히는데“한밤중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자동차가 녹스는 소리가 들린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자동차는 녹 때문에 1년에 약 3.5kg 가벼워진다는 속설이 있다. 녹과의 사투는 화려하거나 멋있는 주제는 아니지만 이 책에는 묵묵히 부식을...

[222호 문화비평: SF 디스토피아의 철학적 기초] 과학기술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다

최근 4차 산업혁명에 관한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학계나 언론계는 물론이고 지난 대선 후보들의 토론에서도 주요 정책 의제로 떠오른 것을 보면, 현실 담론의 큰 흐름임에 분명하다. 4차 산업혁명이란 초연결성(Hyper-Connected), 초지능(Hyper-Intelligent)을 구현한 기술, 곧 사물인터넷(IoT), 클라우드 같은 정보통신기술(ICT), 빅데이터, 인공지능 등의 과학기술을 통해 야기된 대규모의 사회변혁을 일컫는다. 과학기술에 의해 인간 삶의 구조가 ‘혁명적으로’ 뒤바뀐다는 것이 당연시되는 것을 볼 때마다, ‘정말 그럴까?’라는 의문은 남는다. 예컨대 사랑의 통신기술이 편지, 삐삐, 휴대폰, 스마트폰으로 변한다고해서 미숙한 사랑이 성숙해지느냔 말이다. 그럼에도 과학기술에 의해 혁명적 변화가 초래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기술 개념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통념상, 기술이란 인간의 특정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 수단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기술은 결코 그런 것일 수 없다. 한갓 도구나 수단에 불과한 것에서...

[222호 리뷰: 연극 <보도지침>] 판단과 선택은 우리의 몫

연극 <보도지침>은 1986년 전두환 정권의‘보도지침’을 폭로한 김주언 한국일보 기자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법정연극이다. A: 판사, 변호사, 검사, 피고 사회부 기자 김주혁, 피고 잡지 편집장 김정배도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법정에서 악의는 논리로 탈바꿈되고, 선의는 색깔의 망령을 덮어쓴다. 핑퐁처럼 오가는 대사의 호흡을 정신없이 따라가다가도 어느 순간에 숨을 멈추게 된다. 두 번의 침묵 앞에서 나는 숨을 멈췄다. “지침이십니까? 부탁이십니까?”라는 물음 앞에서의 침묵. “앞으로 넌 어떻게 살 거니? 어디로 갈 거니?”라는 물음 앞에서의 침묵. 침묵은 무궁무진하다. 회피이자 의지의 표현이다. 질문에 따라서 긍정일 수도 부정일 수도 있다. <보도지침>에서 마주하는 침묵은 전자이며 후자이다. 차마 입을 떼지 못할 물음, 입을 뗄 필요도 없는 물음 앞에서 연극은 침묵을 택한다. 나는 그들의 침묵에서 고슴도치같이 가시를 세운...

[222호 테마서평: 의료윤리] 어떤 의사들의 반성

『환자가 된 의사들』(로버트 클리츠먼 저 · 강명신 역, 동녘, 2016) 『신의 호텔』(빅토리아 스위트 저 · 김성훈 역, 와이즈베리, 2014) 『위대한 참견』(히노 오키오 저 · 김윤희 역, 인플루엔셜, 2016)   요 근래 ‘안아키’라는 단어가 포털에 오르내리며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안아키가 뭔가 했더니 ‘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안아키 카페는 아이들을 키울 때 예방접종과 항생제를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이들이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를 가리킨다. 이들은 현대 의학을 불신하며, 예방접종 및 항생제가 제약회사와 의사들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현대 의학을 거부하고 그 대신 택한 것은 무엇일까. 그들이 택한 대안은 검증되지 않은 치료법이다. 이를테면 이들은 아이에게 숯가루를 먹이거나 화상 부위에 뜨거운 물을 붓는다. 면역력을 키워준다면서 수두에 걸린 아이와 멀쩡한 아이를 한데...

[221호 특강취재: 화성문예아카데미, <우리에게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를 보는 세 가지 물음

경기도 화성시 노작로에 위치한 화성문예아카데미는 4월 12일부터 5월 17일까지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에 <우리에게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총 5차례 특강을 진행한다. 화성시문화재단에서 진행하는 본 강연은 종교를 신앙의 대상이 아닌 탐구의 대상으로 접근하기 위해 기획됐다. 지난 4월 12일 구형찬(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강연자가‘종교로 보는 인간의 마음, 인간의 마음으로 보는 종교’를 주제로 첫 번째 강의를 진행했다. 이날 강연은“나에게 아무도 묻지 않았을 때 난 시간이 뭔지 안다. 그러나 누가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소개하며 시작됐다. 강연의 핵심은 모두가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대답하기 어려운‘종교’와‘마음’이었다. 강연자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생각을 확장하며 이 둘을 연결하는 하나의 관점을 설명하고자 노력했다. 강연을 이끈 질문은‘종교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사람들은 왜 종교를 믿을까?’, ‘종교인의 마음은 얼마나 특별한가?(부제)’다. 종교에...

[221호 문화비평: 21세기 세대차이] 21세기 세대의 세상을 허하라

인류 역사에서 20세기는 하나의 기념비적인 분기점의 시대로 기록될 것이다. 바로‘과학기술의 발달’이 일정한 임계점에 다다른, 인류문명의 한 전환점이 되었던 시기로. 우리는인류역사상 글자 그대로 전무후무한 시대를 지나왔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일정한 임계점에 다다랐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과학기술적 세대교체의 속도가 인간의 생물학적 세대교체 속도를 앞지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추월은 지금의 인류문명이 멸망하거나 퇴보하지 않는 한 역사상 단 한 번만 일어날 사건이다. 이 사건, 즉 추월이 어떤 것인지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삼국시대와 조선시대는 시간적으로 수백 년의 차이가 나지만, 각각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구체적인 생활상은 그다지 큰 차이가 없었다. 농사를 짓는 데 가축의 힘을 빌리고, 여행수단은 고작해야 말을 타거나 아니면 그냥 걸어 다니는 식이었다. 수백 년 동안 똑같았다. 그러나 20세기에 태어난 사람들은 수십...

[221호 리뷰: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덕후 프로젝트: 몰입하다]인식의 전환: 수집에서 창작으로

  ‘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덕후’는 일본어 ‘오타쿠’를 한국식으로 발음한 ‘오덕후’의 줄임말이다. 오타쿠는 1970년대 일본에서 등장한 신조어로 원래 집이나 댁이라는 뜻이지만 집 안에 틀어박혀서 취미생활은 하는,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덕후는 일본의 하위문화를 상징하는 ‘오타쿠’라는 단어에서 출발했지만, 최근 ‘학위 없는 전문가’, ‘능력자’ 등으로 불리며 긍정적인 인식을 내포한 문화적 코드로 자리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덕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바탕으로 좋아하는 분야에 깊이 몰입하며 가지게 되는 기질이나 자세, 행동 양식의 의미를 재조명한다. 이제 ‘덕후’는 사회의 다양화로 인해 개인의 취향을 드러내고 공유하며 관심사가 같은 사람들과 정보를 교류하는 하나의 ‘소통 문화’다. 전시는 고성배 작가의 ‘프로젝트 갤러리관’과 나머지 10명의 덕후 작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돼있는 ‘전시실’로 구성된다. 고성배 작가는 ‘본격 덕질 장려’를...

[221호 책지성: 데보라 코웬, 『로지스틱스: 전지구적 물류의 치명적 폭력과 죽음의 삶』]로지스틱스와 퀴어?

글로벌 로지스틱스 로지스틱스와 매개하지 않는 삶을 상상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요즘, 데보라 코웬(Deborah Cowen)의『로지스틱스: 전지구적 물류의 치명적 폭력과 죽음의 삶』은 로지스틱스를 중요한 정치적 투쟁의 장소로 바라볼 필요성을 적절하게 제시한다. 저자는 로지스틱스가 보안, 노동, 도시, 시민권, 국가 등의 내용에 중대한 변화를 야기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복잡한 로지스틱스 지형을 상세하게 드러냄으로써 로지스틱스의 과거와 현재, 효과와 문제, 문제와 해결의 방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퀴어적 개입을 통해 다른 정치의 가능성을 마련한다. 전쟁 물자를 공급하는데 핵심이었던 로지스틱스 기술은 비즈니스 로지스틱스에도 적용되었다(로지스틱스는 애초에 물류 말고도 병참, 군수의 뜻도 가지고 있다. 역자는 두 의미의 얽힘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로지스틱스를 번역하지 않고 원어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기업들은 로지스틱스 기술을 바탕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뤄낼 수 있었기 때문에 이를 어떻게...

[221호 테마서평: 전통여성의 재발견

『주체적 삶, 전통여성』(이화형, 푸른사상, 2017) 『강직한 지식인, 인수대비』(이화형, 푸른사상, 2017) 『융합적 인재, 신사임당』(이화형, 푸른사상, 2017) 전통여성’이라는 단어를 들으면‘현모양처’, ‘일부종사’, ‘삼종지도’, ‘여필종부’, ‘칠거지악’등이 떠오른다. 남편의 말을 하늘과 같이 떠받들고, 남편이 첩을 들여도 감내하지만 자신이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쫓겨나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이며 묵묵히 살아가는 여성들의 수동적인 모습이 연상된다.   ▲이화형(1955~ ) 전통여성을 새롭게 조명하다 그런데 우리 역사 속의 여성들이 과 수동적인 모습으로만 살았을까? 본교 이화형 교수(한국어학과)의『주체적 삶, 전통여성』,『 강직한 지식인, 인수대비』,『 융합적 인재, 신사임당』에서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전통여성상을 확인하게 된다. 전통여성의 이미지와는 상반된 모습의 여성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고정관념이 깨지는 신선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이화형 교수는 이 땅의 여성들의 삶과 위상에 대한 관심을 갖고 오랫동안 연구를 해왔다. 그 과정에서『한국근대여성의 일상문화』(2004,...

[221호 영화비평: <어느날>(2016)] 죽을 권리를 외치는 영화의 수상한 화법

 <어느날>(이윤기, 2016)은 사랑하는 아내 선화(임화영)를 잃고 실의에 빠져 있는 보험회사 과장 강수(김남길)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는 집안 곳곳에 산적해 있는 선화의 물건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으며, 장모님이 가져다 준 김치를 한 입 베어 먹으며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지냈던 시간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런 강수가 회사로 복귀하자 팀장은 그에게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미소(천우희)와 대리인을 만나보라고 지시한다. 시각장애인에다가 고아인 미소에게 지급되는 보험금을 중단할 꼬투리를 찾기 위해서다. 병원에 도착한 강수는 병상에 누워있는 미소를 보고 병마와 힘겹게 씨름하던 자신의 아내를 순간적으로 떠올리는데, 바로 그 순간 그의 눈앞에 또 다른 미소가 등장한다. 식물인간 상태인 몸에서 빠져나온 미소의 혼(魂)이다. 병상에 누워 있는 몸에서 빠져나온 또 다른 미소는 강수의 눈에만 보이며, 평생 안고 있었던 시각장애도 사라진 상태이다....

[220호 리뷰: 아르코미술관, <용적률 게임: 창의성을 촉발하는 제약> 과밀도시, 서울을 논하다

      서울을 비롯한 도시건축을 ‘용적률(FAR·Floor Area Ratio)’로 풀어보는 전시가 개최됐다. 용적률은 필지면적에 대한 건물 바닥면적의 비율을 말한다. 주거지역의 종류에 따라 건물을 몇 층 올릴 수 있는지를 정하는 이 규율은 재건축은 물론 상가, 리모델링 시장에서도 알아야 하는 기초 중의 기초다. 일반인에게는 생소하고 멀게 느껴지는 용어지만, 실제로는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서울은 세계적으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도시 중 하나다. 서울 인구는 빠른 경제성장에 힘입어 급속도로 증가했고, 그에 따라 서울 내 주거공간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으나 주택 공급량은 이를 따라갈 수 없었다. 건축주는 제한된 토지에서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최대한의 공간을 차지하려 하지만 공적 규제인 용적률은 이를 막고 있다. 건축가는 규제의 빈틈을 이용하면서 건축주의 욕망을 충족시켜야 하기에 기발한 아이디어로 용적률의 빈틈을 비집고...

[220호 특강취재: 열린연단,〈세계화, 다문화 시대의 윤리〉] 공존하는 법 생각하기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은 작년 3월 5일부터 ‘윤리와 인간의 삶’이라는 윤리강연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프로그램은 네이버문화재단이 지원하는 ‘문화의 안과 밖’ 강연기획 중 세 번째 강연 시리즈로, 7가지 소주제로 총 50회가 진행됐다. 본 강연은 그 마지막 순서이며 지난 3월 11일 안국동 안국빌딩에서 김우창 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세계화, 다문화 시대의 윤리’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진행했다. 크고 작은 테두리들 ‘세계화’는 오늘날 너무도 익숙한 단어이다. 자원과 물질, 재료와 상품과 사람들의 이동으로 나타나는 세계화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 의해 더욱 가속화되어 소득 불평등 같은 여러 가지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인류 전체를 포괄하는 보편적 이념을 확산시킨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러한 아이러니 속에, 다 함께 공존해야 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삶의 조건이 된다. 이를 위해 모두가 노력해야...

[220호 문화비평: 한류란 우리에게 무엇일까?] 한류, 사드, 블랙리스트의 정치경제

과거 군사독재 시절 한국의 문화는 척박했다. 검열과 금지가 일상화되고 정부의 3S(섹스, 스포츠, 스크린)정책이 문화를 규제하는 사회에서 문화가 다양하고 풍부해지는 건 불가능했다. 외부에 알릴 문화라는 건 기껏해야 전통으로 치장된 과거의 것이고 현재의 문화는 정부의 허가나 검열을 거쳐야 외부와 소통할 수 있었다. 비민주적인 정권에서 문화의 쇄국정책은 불가피했다. 민주화와 상업화, 한류의 문을 열다 1987년 6월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문화의 숨통이 좀 트였지만 독재에서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시민들에게만 기회를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정권이 통제하던(또는 정권과 거래를 일삼던) 대기업들도 더 많은 자율성을 누리게 되었고, 문화는 기업들의 이윤추구수단이 되기 시작했다. 상업(민영)방송과 케이블 TV 등은 문화산업의 파이를 키웠고 채널들을 채울 많은 문화 콘텐츠들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위축된 문화가 갑자기 다양해질 수는 없기에 외국의 문화 콘텐츠들이 수입되고 모방되며 실험되기...

[220호 영화비평: <패왕별희 覇王別姬>(1993)] 기의를 잃은 기표, 그리고 장국영이라는 아름다움의 묘비명

몇 년 전부터인가 재개봉 영화들이 관객들의 지속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대부분 작은 규모의 멜로드라마나 예술영화가 주종을 이루고 있지만 때로 개봉했을 때보다 더 나은 흥행 성적을 기록한다고 한다. 개봉 10주년을 기념하여 2015년 재개봉한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2004)이 대표적이다. 범죄, 액션, 스릴러가 지배하는 최근 한국 영화계에서 감성적인 멜로드라마를 구경한 게 언제인지 아득해지는 걸 보면, 대부분의 재개봉 작이 왜 멜로드라마인지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이터널 선샤인>처럼 주로 개봉한지 10년 내외의 영화들이 대부분이지만 <시네마 천국 Cinema Paradiso>(1988)처럼 사반세기만에 재개봉(2013년)한 영화도 더러 있다. 첸카이거(陳凱歌) 감독의 <패왕별희 覇王別姬>(1993)도 24년 만에 재개봉하는 영화다. 또한 이번 4월 1일은 이 영화에서 잊을 수 없는 연기를 보여준 장국영(張國榮)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지 꼭 14년이 된다. <패왕별희>와 장국영을...

[220호 책지성: 율라 비스, 『면역에 관하여』]율라 비스의 정원

율라 비스의 정원 이 책의 저자 율라 비스의 아들이 태어나기 전날은 그 봄 들어 처음 푸근해진 날이다. 그날 그녀는 미시간 호에 뜬 부 빙에 반사된 아침 햇살을 느낀다. 진통이 시작된다. 햇살이 가득했던 그 순간에 뒤이은 긴 진통 끝에, 그녀에게 거의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이어졌다. 그녀는 호수를 헤엄치고 있다고 상상했다. 호수는 그녀 의지와는 달리 어둠의 호수로 바뀌었고, 그다음에는 불의 호수가 되었으며, 그다음에는 수평선 없이 무한히 펼쳐진 호수가 되었다. 드디어 아들이 태어 났다. 그러나 출산 후 그녀에게 좀처럼 보기 드문 병이 찾아왔다. 자궁내번증이었다. 자궁이 뒤집혀 자궁 바닥이 자궁강으로 내려오는 병이었는데 이 병은 생명을 위협하는 위태로 운 병이었다. 이후 그녀는 불안감과 편집증에 시달렸다. 한편 그해 봄에는 새로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공식적인 범유행병이...

[220호 테마서평: 트라우마와 치유] 사회적 트라우마와 문학의 물음

『마지막 테우리』(현기영, 창비, 1994) 『소년이 온다』(한강, 창비, 2014) 『거짓말이다』(김탁환, 북스피어, 2016)   2014년 4월 16일 침몰한 세월호가 1,073일 만에 첫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의 흐름을 짐작케 하듯 녹슬고 낡은 거대한 선체를 보며 사람들은 이 참혹한 사건이 일상의 시간에 남긴 파장을 되새긴다. 세월호를 바라보며 대부분의 평범한 시민들은 그동안 이 사건을 잊은 적이 없음을, 또한 진상규명에 대한 요구 역시 늦춰진 적이 없음을 실감한다. 진은영의 전언대로 참사 이후 3년여의 시간은 희생자 가족과 선량한 시민들이 “본 것과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며 참사의 진실을 검토하고 밝히려” 노력했던 시간인 동시에 “진상규명을 원하는 모든 이들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의 상태에 감금하려는” 온갖 정치적인 시도가 횡행했던 시간이었다.(진은영, 「무능력의 정치학을 넘어서」, 『한겨레신문』2017년 3월 28일자) 삼 년이나 연기되었던...

219호 책지성: 닉 수재니스,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

  생각을 언플래트닝 하라! 만화로 된 철학책 어린아이는 물론이고 성인까지 만화를 한 번도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생각해보면 우리는 일상 속에서 웹툰, 만화책, 신문, 광고 등 다양하게 만화를 접하고 있다.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는 ‘컬럼비아 대학 최초로 논문 심사를 통과한 만화’, ‘하버드 대학이 출간한 최초의 만화 철학책’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책이다. 보통의 경우 어린이를 위한 책들이 만화로 된 걸 감안한다면 상당히 특이한 책이다. 이 책에선 철학이라는 결코 단순하지 않은 소재를 만화라는 매우 익숙한 장르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한마디로 만화로 된 철학책인 것이다. 언어와 상호작용하는 시각적 이미지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에서 만화는 단순히 내용을 이끌어가는 수단이 아니다. 만화를 통해 저자의 철학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언어는 인간의 사유를 도와주는 매우 중요한...

[219호 리뷰: 예술의 전당, <르 코르뷔지에 展>] 4평의 기적 – 작은 위대함 결국 본질만 남는다

“슬퍼하지 말게 언젠가 우린 또 다시 만나게 되는 거니까. 죽음은 우리 각자에게 출구와도 같다네. 나는 왜 사람들이 죽음 앞에 불행해하는지 모르겠네. 그것은 수직에 대한 수평일세, 보완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지.”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감미로운 멜로디에 감성이 흠뻑 젖었다. 1965년 9월 1일, 르 코르뷔지에의 장례식은 앙드레 말로에 의해 루브르 궁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전시장 곳곳에서 감미롭게 울려 퍼지던 배경 음악은 르 코르뷔지에가 직접 자신의 장례식을 위하여 선곡한 것으로 실제 장례식 때 사용된 곡이었다. 어찌 자신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감미로운 음악을 선사할 수 있을까. “삶은 현기증이 일 정도로 빨리 지나가 버렸고 최후가 다가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의 업적만 보아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부단한 노력을 하며 살아왔는지. “만약 누군가 내 건축 작품에 있어 장점을...

[219호 테마서평 특별호: 2017 지방 신춘문예 당선작]중심과 주변, 중앙과 지방의 이분법적 시각의 극복

『켄의 세계』(최은, 《경인일보》신춘문예 당선작: 소설부문) 『끝없는 밤』(김선희, 《한라일보》신춘문예 당선작: 소설부문) 『과녁』(이서안, 《경상일보》신춘문예 당선작: 소설부문) 필자가 사는 곳은 경남 양산이다. 서울에 사는 지인들과 통화를 할 때면 나도 모르게 서울은 ‘올라가는 곳’이 되고 양산은‘내려가는 곳’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미 일상의 언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서울의 ‘대표성과 중심성’은 권력과 자본의 집중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속에는 문화적인 우월성이 더 많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보통 ‘신춘문예’하면 경향일보, 조선일보 등 주요 신문사를 떠올린다. 그러나 지방에 있는 신문사들도 매년 신춘문예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2017 지방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우수한 작품 들이 각종 언론을 통해 대거 소개됐다. 그 중 공통적인 주제로 소설, 시 등 다양한 장르에서 수 상한 작품들이 있다. ‘최은, 「켄의 세계」(《경인일보》신춘문예 당선작)’ , ‘김선희, 「끝없는...

[219호 영화비평: <컨택트 Arrival>(2016)] 경계를 허물고 나아가는 것에 대하여

이전의 작품들을 통해 증명되었듯이, 드니 빌뇌브는 서사 정보를 조절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감독이다. <그을린 사랑 Incendies>(2010)이 제한된 서사 정보를 하나씩 공개하는 것으로 전체 그림을 완성하는 일종의 퍼즐과도 같은 영화였으며, <프리즈너스 Prisoners>(2013)는 하나의 사건을 추적하는 두 인물에게 각기 다른 정보를 제공해 사건에서 계속 미끄러지는 주인공들을 보여주었던 작품이었다. <컨택트 Arrival>(2016)는 관객에게 전달되는 서사적 정보를 조절하는 감독의 능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동시에 정확히 구성된 편집의 능력까지 더해진 작품이다. 요컨대 드니 빌뇌브는 배우와 가까운 거리에 카메라를 설치하여 캐릭터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이나 미장센을 활용하는 방법보다 플롯의 구성력을 더 신뢰하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가 주로 롱쇼트를 사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숨어 있다. 관객에게 서사 정보를 전달하거나 숨기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이전까지...

[219호 특강취재: 다중지성의 정원, <자크 랑시에르와 영화- 이후의 시간과 이미지>] 랑시에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영화: 우화로서 영화

다중지성의 정원은 지난 1월부터 3월까지 총 8주에 걸쳐 <자크 랑시에르와 영화- 이후의 시간과 이미지> 특강을 개최하고 있다. 이 특강은 영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 1940~ )의 사유와 저작을 되새기려는 취지에서 기획됐다. 랑시에르는 그의 저서 『영화 우화』의 프롤로그에서 드러나듯 영화감독 장 엡스탱(Jean Epstein)이 거짓으로 치부한 우화(fable)로서 영화를 상정했다. 더 정확히 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하는 시학을 넘어 영화를두 시학이 엇갈리게 얽힌 우화로 간주했다. 신은실(인디다큐페스티벌 집행위원) 강연자는 지난 2월 23일에 열린 네 번째 강의에서 “‘우화’의 영화 2”라는 주제로 우화의 감독들로 분류되는 프리츠 랑(Fritz Lang, 1890~1976)과 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 1906~1977), 두 영화감독의 작품들을, 작품들에 대한 랑시에르의 관점과 함께 소개했다. 허구로서의 기억   강연자는 이전 강연의 내용을 다시 환기하면서 강연을 시작했다. 진리로 여겨지는...

[219호 문화비평: 컴퓨터 게임 <댓 드래곤, 캔서>(2016)] 만질 수 있는 타인의 고통

    <댓 드래곤, 캔서>(2016)라는 매우 사적인 컴퓨터 게임이 있다. 이 게임은 게임 개발자 라이언 그린이 암에 걸린 자신의 아들 조엘의 투병 과정을 소재로 만든 게임이다. 통상의 미션수행 과정이나 퍼즐, 목표가 이 게임에는 없다. 다만 게이머는 아픈 조엘을 달래주고, 부모의 고통에 공감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즉 조엘을 살려낼 수는 없지만 토닥일 수는 있다. 상호작용을 극대화한 컴퓨터 게임이라면 살려내는 일(혹은 그 반대의 일)까지 가능해야 하지 않겠나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게임이 디자인한 상호작용은 ‘위로할 수 있는 자유’다. 이렇게 자유가 제한된 이유는 실제 모델인 조엘이 게임 제작과정에서 사망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게임으로 구현된 거짓 희망보다는 그 이상의 경험을 게이머와 공유하고 싶다는 제작자의 의도가 담겨 있기도 하다. 상호작용 디자인은 창작자의 의도가 없는 디자인이...

[218호 책지성: 칼 세이건, 『코스모스』] ‘코스모스’는 계속된다

『코스모스』만큼 유명한 과학책도 드물 것이다. 유명할 뿐 아니라 1980년에 나온 책인데도 35년이 넘도록 여전히 베스트셀러 대열에서 그 위력을 떨치고 있다. 몇백 년의 세월을 견뎌온 소설도 많은데 35년 세월이 뭐 그렇게 대단하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 과학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 지를 생각한다면 과학책이 세월의 속도를 견뎌내기 힘들다는 것을 바로 이해할 것이다. 교과서마저도 몇 년 사이에 핵심적인 내용이 변하는 것이 과학의 현실이다. 『코스모스』도 물론 그 기간 동안의 과학의 새로운 발견 앞에 낡은 책이 되어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시 우주의 나이와 현재 과학계에서 받아들여지는 우주의 나이의 값은 달라졌지만 이에 대한 보편적 통찰이 살아있기에『코스모스』는 현재에도 건재한 것 같다. 당시에는 태양계 밖에서 외계행성이 발견된 적이 없었지만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

[218호 리뷰: 음악문화공간, <스트라디움>] 음악을 보고, 듣고, 말하는 시간

    모니터의 전원을 껐다. 한 주 내내 글자들과 마주 앉아 있었다. 공부와 일과 관련된 문서를 만들고 메일을 쓰는 동안 수많은 말들이 소리 없이 오고 갔다. 밤을 새우고 취재를 위해 집을 나서기가 무섭게 스마트폰이 울린다. 각종 SNS의 알림 소식과 메시지들이 확인을 기다리고 있다. 지하철을 타러 가며 습관적으로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재생버튼을 누르고 눈을 감는다. 어떤 곡이라도 괜찮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으면, 노래의 가사를 곱씹고 있는 순간만큼은, 아무도 내게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대답하지 않아도, 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작은 위로를 음악에서 얻는다. 한강진역 1번 출구를 빠져나와 이태원 방향으로 조금만 걸으면 스피커를 연상케 만드는 검은색 건물, ‘스트라디움’이 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에 와 닿는 일요일 오전의 거리는 평소보다 더 고요하지만, 속이...

[218호 테마서평: 파스칼 키냐르의 시간] 시간의 섬광, 시간의 황홀경

『심연들』(파스칼 키냐르 저·류재화 역, 문학과지성사, 2010) 『옛날에 대하여』(파스칼 키냐르 저·송의경 역, 문학과지성사, 2010) 『떠도는 그림자들』(파스칼 키냐르 저·송의경 역, 문학과지성사, 2003) 무언가에 고통스럽게 쫓길 때마다 주문처럼 외웠던 말, 나에게는 신비한 약효, “페스티나 렌테(Festina lente)”. 이 말을 그대로 풀이하면 “빨리 천천히”이다. 이 역설적인 비문(非文)은 나에게 일종의 비문(秘文)이 되었다. 파스칼 키냐르의 전언에 따르면, 페스티나 렌테는 고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허리춤에 늘 지니고 다니던 사냥칼에 쓰인 문구이다. 빨리 하되 천천히. 이 말을 ‘빨리 한 후에 천천히, 천천히 한 후에 빨리’라는 시간의 순차성에 따른 인과적 연차 행위로 이해하기보다, 거의 측정 불가능한 극미한 최소 시간 단위 속에 벌어지는 전이, 이동으로 이해할 때 그 의미는 더욱 감미롭고 알싸하다. 다시 말해, 그것은 ‘거의 동시에’이다. 같은 길이로, 같은...

[218호 문화비평: 문화전쟁] 문화전쟁의 시대?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은 전 세계인을 깜짝 놀라게 했다. 거침없는 언행과 대중주의적 수사로 유권자들을 현혹하는 난세의 기인 정도로 평가받는 인물이 아니던가. 그가 공화당의 보수주의자들에게 얼마간의 인기를 끌지언정, 미국의 대통령직에 오를 수 있으리라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더욱이 선거 막판 트럼프는 인종차별적 발언에 더해 성추행 논란에 휘말리기까지 했다. 그러니 지난 대선에서 흑인 대통령 오바마를 당선시켰던 미국인들이 어째서 이번엔 함량미달의 극우 정치인을 선택했는지 많은 이들이 혼란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아가 트럼프의 미국이 예고하는 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혐오의 정치에 대해 벌써부터 공포감을 표출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트럼프의 당선 요인을 두고 많은 논평자들이 그가 내세운 미국우선주의와 이민자 배제정책이 경제적 곤궁에 빠진 백인 노동자계급을 효과적으로 공략했다는 진단을 내놓고 있다. 소위‘러스트 벨트’라 불리는...

[218호 영화비평: <4등>(2015)] 경쟁구조에 갇힌 이들에게 던지는 작은 물음표

  정지우 감독의 <4등>(2015)은 1998년 박세리 선수가 LPGA에서 우승한 소식을 전하는 흑백의 뉴스 장면으로 시작한다. 거기서 박세리 선수는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쥔 수많은 선수 중의 한 명이 아니라 IMF 시대를 관통하는 국민에게 희망을 전한 스포츠 영웅으로 호명된다. <4등>은 그런 박세리 선수의 모습 위에 전도유망한 국가대표 수영선수인 어린 광수(정가람)를 포개놓는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있던 그는 연습 때마다 한국 신기록을 갈아 치우더니 급기야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 아시아 신기록으로 우승까지 하게 된다. 이제 광수에게 남은 것은 아시안 게임에서 우승해 박세리 선수처럼 유명한 스포츠 스타가 되는 길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실력을 과신한 채 고향에서 선배들과 노름을 하느라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 소집에 무단으로 불응하게 된다. 뒤늦게 태릉선수촌으로 향한 광수를 맞이한 것은 “이게 다 너를 위한 거다....

[218호 특강취재: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 <아시아학교-인도의 과거, 인도의 오늘>] ‘인도’는 ‘인도’다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는 11월 9일부터 12월 7일까지 매주 수요일마다 서울시 통인동에 위치한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에서 2016 가을 인문학교 ‘아시아학교-인도의 과거, 인도의 오늘’이란 제목으로 특강을 개최한다. 본 강연은 1강 ‘인도는 가난한 오리엔트인가’, 2강 ‘역사와 강을 따라 인더스 문명에서 21세기까지’, 3강 ‘힌두와 카스트는 불변인가’, 4강 ‘간디를 통해 본 인도의 저항운동’, 5강 ‘인도의 민주주의는 왜 역동적인가’로 구성됐다. 이옥순(인도문화연구원장, 연세대학교 연구교수) 강연자는 지난 11월 9일 첫 강의에서 식민지 인도와 사회, 문화, 정치 등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도에 대한 인식을 재조명했다. 인도에 대한 편견 문학이론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adie Said)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을 “동양과 서양 간의 인식론적 구분을 창조하고 확인하는 데 기여한, 서양의 동양에 대한 연구와 서양에 의해 재현되고 지지된 어떤 이념적 관점”이라고 말한다. 즉,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217호 특강취재: 수유너머N, 토요인문학 <장소성의 정치철학>] 블랑쇼와 장소성, 나의 바깥에 선다는 것

수유너머N은 9월 3일부터 11월 12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 3시부터 5시 30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위치한 수유너머N 건물 대강당에서 <장소성의 정치철학> 강의를 진행한다. 총 열 차례에 걸쳐 진행되는 이번 특강은 ‘장소성’을 화두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랑시에르까지 여러 정치 철학자들의 사유를 우리 삶의 구체적인 사례들과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자리다. 심아정(수유너머N 연구원) 강연자는 지난 9월 24일에 열린 세 번째 강의에서 ‘바깥/외부’를 주제로 ‘블랑쇼, 나의 바깥에 선다는 것’을 통해 블랑쇼의 사상과 철학을 조명했다. 40여 석의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높은 참여율을 보이며 시작된 강의는 예정된 강의 시간을 넘어서까지 이어졌다. 강의 내내 심아정 강연자와 수강자는 질의응답을 통해 블랑쇼의 생애와 ‘장소성’의 의미를 되짚으며 진정성 있는 담론을 나눴다.     장소와 장소성의 의미 ‘장소(place)’는 누군가가 속해 있는...

[217호 책지성: 모옌, 『인생은 고달파(生死疲勞』] 죽어도, 다시 살아도 고달픈 여섯 번의 生

  1955년 중국 산둥성 까오미 현에서 태어난 관모예(管謨業)는 “말 대신 글로 표현 하겠다”는 의지로 ‘모옌(莫言)’이라는 필명을 사용한다. 1978년 군 복무 도중에 첫 소설을 쓰기 시작한 그는 1981년 단편 「봄밤에 내리는 소나기」를 통해 중국 문단에 등단했다. 1987년 발표한 장편 『홍까오량 가족 』은 장이모우(張藝謀) 감독의 각색을 통해 「붉은 수수밭」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제작되어 1988년 베를린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이는 모옌의 소설이 전 세계 20여 개국으로 번역 출간되는 계기가 된다. 중국어권 작가 중 가장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던 모옌은 201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묵언(默言)하고, 막언(幕言)하다 2006년 발표, 2008년 국내에 번역되어 상·하 권으로 나뉘어 출간된 장편 인생은 고달파는 2012년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에서 “환상적인 리얼리즘을 민간의 구전문학과 역사, 그리고 동시대에 잘...

[217호 테마서평: 황순원, 소설 속 공간] 6·25 전후(戰後) 공간의 의미 -황순원의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곡예사」 (『황순원 전집 2』, 문학과 지성사, 1992) 「참외」 (『황순원 전집 3』, 문학과 지성사, 1992) 「모든 영광은」 (『황순원 전집 4』, 문학과 지성사, 1992) 작가 황순원은 1915년 평양 대동군에서 출생하여 104편 가량의 시와 단편 104편, 중편 1편, 장편 7편을 창작하고 2000년 작고하셨다. 1946년 5월, 황순원 일가는 토지개혁이 시행되던 평양을 떠나 38선을 넘어 남한에 정착하게 된다. 고향을 등지고 자유를 찾아 내려온 월남민의 고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치러야만 했던 6·25전쟁체험은 작가로 하여금 역사와 현실,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감당해야만 했던 정신적 갈등과 절망감을 그의 문학 속으로 끌어들이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황순원에게 있어서 6·25의 전쟁체험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커다란 억압관념으로 자리 잡게 되고, 그의 문학세계에서 뚜렷한 분기점을 이루게 된다. 6·25 전후 공간의...

[217호 리뷰: 북티크 심야서점] 금요일을 보내는 아주 평범한 방법

    버거웠던 한 주가 가면 금요일 밤이 남는다. 내일이 토요일이라는 기쁨과 그 다음날은 일요일이라는 안도감 때문인지 그 어떤 밤보다 길게 남겨두고 싶다. 금요일 밤을 보내는 방법은 많다. 친구들을 만나거나 집에서 밀린 예능을 보거나 무엇이든 ‘불금’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가끔씩 그 무엇도 내키지 않는 날이 있다. 소음도 고독도 내 것이 아닌 날, 그런 날이면 마음먹고 집을 나서도 정작 발길 닿을 곳이 없다. 그날도 꼭 그런 기분이었다. 몰아치는 일정을 꾸역꾸역 끝내고서 찾아온 유쾌하지 않은 금요일, 그냥 쉴 수도 없는 기분에 ‘심야서점’으로 향했다. 서교동 부근 번화한 거리를 지나면 한적한 혹은 적막한 거리가 나온다. 그 거리에는 새벽 2시에도 홀로 환한 심야서점이 있다. 새벽이 되면 문을 연다는 일본 만화 속 심야식당처럼 금요일...

[217호 영화비평: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2016)] 진정한 보수주의의 가치를 생각하다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Sully)>(이하 <설리>)의 초반부에서 체슬리 ‘설리’ 설렌버거(톰 행크스)는 자신이 조종하는 여객기가 뉴욕 도심의 숲을 가로질러 빌딩과 충돌하는 악몽을 꾼다. 이 이미지는 즉각적으로 우리의 기억을 15년 전 뉴욕으로 이끈다. 9·11은 자신의 영토에서 외부로부터 공격 당해본 적 없는 미국인들에게 심대한 트라우마를 야기했으며, 부시 정권은 상처받은 미국인들의 자존심을 복수심으로 치환시켜 악무한의 폭력으로 치달은 ‘테러와의 전쟁’을 벌였다. 우리는 그 참담함의 끝을 기억한다. 거기에는 ‘나의 국민이 이런 일을 당했으니 내가 책임진다’는 국가적 리더의 어떤 결연함이 있다. 물론 그 결연함이 그릇된 사고방식과 잘못된 방향으로 치달을 때 어마어마한 비극도 있다는 것 또한 우리는 안다. 그것은 책임 있는 자가 자신의 책임을 광적으로 완수하고자 할 때, 역설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무책임의 극치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리고...

[217호 문화비평: 반지성주의] 반지성주의와 타자 혐오

  멀게는 미국에서 부는 트럼프 열풍과 유럽 각국에서 극우정당들의 득세, 가깝게는 여성혐오와 지역혐오를 거리낌 없이 표출하는 ‘일베’ 유저들을 보며 ‘반(反)지성주의’의 폐해를 경고하는 목소리들이 거세다. 그뿐이랴. 하루가 멀다하고 반복되는 정치인들의 폭언과 망언,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천명하는 종교단체들, 21세기에 되살아난 ‘빨갱이’ 사냥과 극우 민족주의까지, 자유민주주의의 역사적 승리를 통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줄 알았던 광폭한 열정이 미디어를 타고 전 세계에 흘러넘치고 있다. 오늘날 시민들은 동료 구성원들에게서 응당 기대하는 책임감과 덕성을 발견하지 못해 좌절감에 휩싸여 있으며, 지식인들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새로이 부상한 대중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탐색하고 있다. 극우 근본주의, 배타적인 민족주의,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 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각각 상이한 맥락을 갖는 이데올로기이지만, 그 근저에 공통적으로 ‘반지성주의’적열정이 깔려 있다는 데에 많은 지식인들이 합의를 이루고...

[216호 문화비평: 올림픽] 올림픽의 정치학

  기록적인 무더위와 함께 여름밤을 수놓았던 전 세계인의 스포츠 축제, 리우 하계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이번 올림픽은남미에서 최초로 개최된 올림픽이자, 최초로 난민 팀이 출전함으로써 지구촌 화합의 뜻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은 종합 8위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나, 예년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졌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4년여를 준비한 선수들의 땀과 열정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닐 터이다. 어쨌거나 지구 반대편에서 펼쳐진 한여름 밤의 축제는 기나긴 열대야를 그나마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리우 하계올림픽을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올림픽이 더 이상 맹렬한 민족주의적 감정이 동원되는 국가대항전이 아니라, 문화적 축제로서의 성격이 강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미디어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올림픽 경기와 관련 뉴스로 도배되었지만, 시민들이 느끼는 올림픽의 무게감은 예전 같지 않은 듯하다. 대체로 종합순위나...

[216호 테마서평: 한여름 밤의 스티븐 킹] 스티븐 킹과 은유로서의 호러

『캐리』(스티븐 킹 저·한기찬 역, 황금가지, 2003) 『샤이닝』상, 하 (스티븐 킹 저·이나경 역, 황금가지, 2003) 『스탠 바이 미(사계)』(스티븐 킹 저·임영선 역, 영언문화사, 1993) 인간 내부의 얼룩 나는 인간의 내부에는 누구나 얼룩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얼룩은 크고 어떤 얼룩은 작다. 어떤 얼룩은 발목 정도 차오르는 얕은 곳에 있고 어떤 얼룩은 마리아나 해구처럼 영혼의 심해에 침잠해 있다. 어떤 얼룩은 성능 좋은 세정제로 닦일 수 있지만 어떤 얼룩은 지워지기는커녕 건드릴수록 더 심하게 영혼을 더럽히는 것도 있다. 광기와 악의, 혐오와 타자화는 이러한 얼룩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다. 인간이 자기 내부에 있는 얼룩에 개성적인 이름을 붙여주기 시작한 것은 근세기 이후의 일이다. 이를테면 프리드리히 니체나 지그문트 프로이트 같은 이가 얼룩을 재발견하고 라벨을 붙이기 시작했다. 이제야 비로소 인간의 얼룩은 고유한 이름을...

[215호 리뷰: 서울시립미술관 덕수궁관, <이중섭, 백년의 신화>展] 끝없는 사랑의 표현

  “나만의 소중하고 또 소중하고 고귀하고 끝없이 상냥하며 우주에서 유일한 사람 나의 빛, 나의 태양, 나의 사랑 모든 것의 주인, 나만의 천사, 사랑하는 현처 남덕씨, 건강하신가요” -제3전시실, 5부 ‘편지화’ 中에서 말이 참 곱다. 무척 아름답다고 느끼면서도, 요즘 세상에 이렇게 편지를 쓰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 어른’이 아닌, 감수성 풍부한 사춘기 문학소년 같다. 저렇게 솔직하면서 애틋한 표현은 오랜만이라서 낯이 뜨거워진다. 만약 저런 내용의 편지를 받는다면 간지러워서 다 읽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 앞으로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토록 순수한 편지를 써 볼 수나 있을까. 일본에 있는 아내에게 이중섭이 보낸 편지다. 이번 전시에서 실제 편지와 그 내용을 번역한 글들이 한 파트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7월경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내고 홀로 남았다....

[216호 특강취재: 철학아카데미, <정치철학 고전강좌2: 근대 이후>] 정의(正義)의 철학자,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

서울 통의동에 위치한 철학아카데미는 7월 14일부터 9월 29일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7시에 <정치철학 고전강좌 2: 근대 이후>를 진행한다. 본 특강은 칼 슈미트부터 에티엔 발리바르까지 총 10명의 20세기 주요 정치 철학가들의 사상을 살펴보고, 오늘날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짚어본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지난 8월 11일 김은희(건국대 교양대학 교수) 강연자가 ‘존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주제로 네 번째 강의를 진행했다. 이날 강연은 존 롤스(John Rawls, 1921~2002)의 가장 유명한 저서 『정의론』(1971)에서 시작됐다. 롤스가 정의론 이후 받은 비판을 토대로 새로이 고민해 만든 결과물이 『정치적 자유주의』(1993)이기 때문이다. 김은희 강연자는 『정의론』과 『정치적 자유주의』, 두 권의 책을 동시 상영하듯 풀어내며 롤스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다. 롤스의 정의론은 많은 이들을 감화시키며 20세기 미국 철학계의 주류를 이루었다. 서구 민주주의 가치를 바탕으로...

[216호 영화비평: <부산행>(2016)] 부산행 열차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영화 <부산행>(연상호, 2016)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동시대 한국 사회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반영했다는 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우리 사회가 점점 계층화되고 경쟁이 심화하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슬픔을 표현한 영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과연 그것을 제대로 구현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많은 이들이 언급한 것처럼 <부산행>이 가지고 있는 재난의 풍경은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 이후의 현실을 반영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사실 그런 식의 해석을 가능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영화 곳곳에 배치되어 있긴 하다. 그런데 이 요소들은 영화 내러티브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요소라기보다 표층적인 차원에서 움직이고 있어 사회적인 조건과 쉽게 결합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부산행>을 대사회적 의미가 있는 영화라고 말하는 작업은 영화 그 자체의 내적 완결구조보다 영화가 풍기는 분위기에 편승한 것처럼 보인다. <부산행>은...

[216호 책지성: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언제까지나 아름다운 봄이기를

  지난 8월, 우리는 유난히 더운 여름을 보냈다. 연일 열대야가 지속되었고 남부지방의 체감온도는 40도를 웃돌았다. 지금까지 알던 여름과는 달랐다. 이렇게 더운 여름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다음 해 그리고 그 다음 해에 올해와 같은 여름이 반복된다면, 우리는 ‘여름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원래의 여름에 대한 기억은 곧 희미해질 것이다. ‘봄’ 역시 마찬가지다. 본디 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과수원은 푸르고, 철새 무리들이 떼를 지어 날아간다. 울새, 산비둘기 등 새들의 합창이 울려 퍼지고, 꿀벌이 윙윙거리며 꽃 사이를 옮겨 다닌다” 그러나 실제 우리가 보내는 봄은 그렇지 않다. 추운 겨울과 더운 여름의 사이에서 짧게 스치고 지나갈 뿐이다. 이제는 희미해져 버린 봄을 위해 쓰인 글이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 1907~1964)의 『침묵의 봄(Silent Spring)』이다. 침묵의 봄은 생태학...

[215호 영화비평: <곡성 哭聲>(2016)] 미끼, 그 의도된 뻔뻔스러움

*다량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곡성 哭聲>이 개봉한 지 20여 일이 지났지만 이 영화에 대한 인터넷상의 논쟁(?)은 식을 줄 모른다. 대체로 기자나 평론가들은 걸작이 나왔다고 극찬하는 쪽이다. 아니 적어도 시종일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몰입하게 만드는 극적 흡인력에 찬사를 보낸다. 여기에 나도 동의한다. 적어도 긴장감 있는 리듬으로 서사를 전개시키는 나홍진 감독의 재능은 칭찬해 줘 마땅하다. 관객들의 반응은 명확하게 호불호가 나뉜다. 어떤 이들은 풀리지 않는 퍼즐을 맞추는 데 열광하고, 어떤 이들은 서사의 허점을 비난한다. 사실, 기자, 평론가들도 역작이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찜찜한 구석을 무시하지 못한다. 나는 그런 찜찜한 구석을 일거에 날려버릴 어떤 명쾌한 해석을 할 생각도, 의도도, 능력도 없다. 애초부터 그런 건 존재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글은...

[215호 문화비평: 여성혐오] 여성혐오의 범죄화와 감정의 정치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혐오’라는 기표를 사회적으로 안착시키면서 다양한 사회적 반응을 낳고 있다. 이미 지난해부터 ‘나는 페미니스트다’선언이나 ‘메갈리아’등을 통해 터져 나오던 반-여성혐오 운동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질적인 단절을 겪은 듯 보인다. 여성을 비하하는 남성들에게 혐오표현을 고스란히 되돌려주고, 마음껏 ‘설치고 말하고 떠들자’던 자부심과 발랄함은 일순간 공포와 두려움으로 전환되었다. 여성혐오에 대한 투쟁이 여성을 차별하고 멸시하는 사회구조에 맞선 ‘문화전쟁’이 아니라, 실질적인 살해 위협에 맞선 ‘생존투쟁’으로 전환된 것이다. 잔혹한 사건 현장이 이내 거대한 추모 현장으로 변모한 현실은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던 공포와 두려움이 얼마나 심원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일상생활에서 24시간 내내 폭력과 추행, 멸시와 관음증적 시선의 위협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여성들의 응어리진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강남역 추모게시판에 붙은 ‘살女주세요’라는 다섯 글자는 여성들의 절박함 심경과 그들이...

[215호 책지성: 아서 단토, 『예술의 종말 이후』] 예술의 종말, 현대미술의 부활

‘모방의 시대’→‘이데올로기의 시대’→‘탈역사적시대’, 이렇게 예술의 역사를 요약할 수 있을까? 다원주의자로써 아서 단토(Arthur C. Danto, 1924~2013)는 위대한 예술은 매우 다양한 형식으로 언제나 가능하다고 믿었다. 미국 뉴욕의 미술평론가로서 그는 미술이론이 아니라 미술에 대한 (주로 뉴욕의) 직접적 체험으로서 자신의 비평을 형성한다. (이러한 사실은 미학과 미술비평 그리고 미술 실천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되는 칸트, 헤겔, 그리고 하이데거 등과는 경우가 매우 다르다. 그들은 실제 작품과 대면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고 더욱이 예술계와 직접적인 교류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의 철학적 체계와는 전혀 다른 비평적 판단을 하는 것이다. (반면에 예술철학은 일반적이어야 한다.) 그의 미술비평은 그가 이룩한 예술철학으로부터 권위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철학과 미술비평은 본질적으로 다른 계열이다. 미술비평은 평론가가 관람객이 보는 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작업하는 수사학의 형식이다. 현대 철학은 다르다. 실재하는 것으로서 세계를 묘사하는 심화된...

[215호 리뷰: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기증 작품 특별전: 시대의 선각자, 나혜석을 만나다] 현실에서 괴리된 삶을 살아내기

  “사남매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신생활에 들면서>, 『삼천리』, 1935.2   어느 수업 중 한 교수님이 우리에게 물었다. 만약 다시 태어나 살아갈 시대를 선택할 수 있다면 언제가 좋겠느냐고. 대부분의 원생들이 이대로 다시 태어나 현재를 살고 싶다고 답했다. 리셋, 인생을 초기로 되돌려 다시 시작하기를 바라고들 있었다. 하지만 나는 1920년대, 혼돈의 시대에 태어나서 무언가를 하고 그로써 역사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수업이 끝난 나른한 어느 금요일 오후, 나는 나혜석을 만나러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으로 향했다. 전통과 혁신, 신구의 갈등과 분열이 휘몰아치던 시대에 태어나 저항하며 살다간 나혜석을 만나러가는 발걸음이 왠지 모르게 무거웠다. 시대의 선각자, 신여성이라 불린 ‘센 언니’의 정체를 알고 싶기도,...

[215호 테마서평: 밀란 쿤데라] 밀란 쿤데라와 키치

『소설의 기술』(밀란 쿤데라 저 · 권오룡 역, 민음사, 2008)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 저 · 이재룡 역, 민음사, 2009) 『불멸』(밀란 쿤데라 저 · 김병욱 역, 민음사, 2010) 소설은 인식의 도구 체코의 브루노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망명한 소설가 밀란 쿤데라의 창작 여정은 흔히 세 사이클로 나뉜다. 첫 번째는 『농담』(1967)에서『삶은 다른 곳에』(1973)로 이어지는 ‘체코 사이클’이다. 작품 소재를 주로 체코라는 ‘국가적’ 틀 안에서 찾은 시기다. 두 번째는『웃음과 망각의 책』(1978),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 『소설의 기술』(1896), 『불멸』 (1990)로 이어지는 ‘중간 사이클’이다. 망명 작가 쿤데라가 국가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신의 소설적 탐구의 정체성을 유럽이라는 대(大)맥락에서 찾는 시기다. 이 시기까지 그의 작품들은 모두 체코어로 씌어져 불역되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느림』(1995), 『정체성』(1997), 『향수』(2000)로 이어지는 ‘프랑스 사이클’이다. 우리가 살펴볼...